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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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정 金兌貞

1963년 서울 출생. 1991년 『사상문예운동』으로 등단.

 

 

 

물푸레나무

 

 

물푸레나무는

물에 담근 가지가

그 물, 파르스름하게 물들인다고 해서

물푸레나무라지요

가지가 물을 파르스름 물들이는 건지

물이 가지를 파르스름 물올리는 건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어스름

어쩌면 물푸레나무는 저 푸른 어스름을

닮았을지 몰라 나이 마흔이 다 되도록

부끄럽게도 아직 한번도 본 적 없는

물푸레나무, 그 파르스름한 빛은 어디서 오는 건지

물속에서 물이 오른 물푸레나무

그 파르스름한 빛깔이 보고 싶습니다

물푸레나무빛이 스며든 물

그 파르스름한 빛깔이 보고 싶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빛깔일 것만 같고

또 어쩌면

이 세상에서 내가 갖지 못할 빛깔일 것만 같아

어쩌면 나에겐

아주 슬픈 빛깔일지도 모르겠지만

가지가 물을 파르스름 물들이며 잔잔히

물이 가지를 파르스름 물올리며 찬찬히

가난한 연인들이

서로에게 밥을 덜어주듯 다정히

체하지 않게 등도 다독거려주면서

묵언정진하듯 물빛에 스며든 물푸레나무

그들의 사랑이 부럽습니다

 

 

 

울어라 기타줄

 

 

가진 것이라곤 달랑 깡통밖에 없던 그가, 무전취식에 문전걸식에 다리 밑 인생인 그가, 공중변소 안에 웅크려 앉아 빵을 뜯어먹던 그가 사회정화 차원에서 밑바닥을 일망타진하던 짭새들에게 끌려갔다는 이야기 한 대목.

 

---저거이 사람이냐 저거이 사내냐 니는 워디서 왔다 워디로 가는 인생이간디 뭐 묵고 헐 지랄이 읎어서 노다지 동냥질이냐 동냥질이. 도대체 저 인생은 뭣으로 산다냐 왜 산다냐.

 

하며 짭새들이 밟아댔다는데 갑자기 그가 웃통을 훌떡 벗어젖혀 순간, 어리둥절하며 할말을 잃은 광주의 어느 뒷골목. 팽팽한 기타줄처럼 쟁쟁한 긴장감이 감돌았다는데, 포획당한 짐승의 눈빛은 솟구치는 쇳물꽃만 같았다는데…… 기타 치는 폼으로 기타줄 고르듯 그가 제 갈비뼈를 뜯으며 멋들어지게 뽑아댄 눈물의 십팔번이라는 것이

 

––나앛서어얼으은 타햐아앙에에에서어 그으나알 바암 그으 처어녀어어가아 웨엔이이일이이인지이 나아르을 나아아르을 모옷이이이잊게에 하아아아네에 기타아아아주우울에에 시일으은 사아라앙 뜨으내애애기이 사아라아앙 우울어어어라아 추우어어억의 나아의 기이이타아아여어

 

구절양장 산길을 타듯 솟구쳤다 사라지고 사라졌다 솟구치는, 굽이굽이 강물이 흐르듯 무심한 듯 유정하고 유정한 듯 무심한, 유장한 목청 하나로 세상과 맞장을 떴다는데, 그의 기타줄도 그렇게 울었다는데

 

---뭐 땀시 뭔 낙으로 사느냐고?

 

누더기 속에 감춰진 앙상한 갈비뼈…… 구절양장 그의 오장육부와 사라졌다 솟구치고 솟구치다 사라지는 그의 생애와 무심한 듯 유정하고 유정한 듯 무심한 그의 사랑을 지탱해주는, 가래침 같은 모멸과 치욕과 증오를 다스리게 해주는, 아무도 모를 그의 직립의 비밀은 거기 있었다는, 흘러간 팔십년대 신파극 한 대목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는 이야기.

 

 

 

슬픈 싼타

 

 

바람 부는 성탄 전야

쏟아지는 잠을 쫓으며

그림동화 원고를 메운다

삼십여년 전의 아비가 되어……

 

옛날 옛적 갓날 갓적 호랑이 담배 먹고 여우가 시집 가던 시절에 인당수보다 깊고 보릿고개보다 높고 배고픔보다 서러운 산골에 참배같이 늡늡하고 댕돌같이 단단하고 비단처럼 마음씨 고운 나무꾼이 살았더란다…… 어느 추운 겨울날 배고픈 호랑이가 산속에서 어슬렁어슬렁 내려와…… 어쩌면 외로워서 동무가 그리워서 혼자 겨울 날 것을 생각하니 까마아득해져서 그래서 호랑이는 산골마을로 내려온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파랑병을 던지니 물바다가 되고 빨강병을 던지니 불바다가 되고…… 그래서 호랑이는 꽁지가 빠져라 도망을 가고 나무꾼은 참배 같은 댕돌 같은 아들딸 낳고 알콩달콩 행복하게 살았더란다.

 

최저생계비도 되지 못하는 원고지만

그래도 이런 해피엔딩이 있어서 좋다

삼십여년 전 아비도 그랬을까

 

삼십여년 전 아비의 그림동화 속에서

심청이는 심봉사와 해후하고

홍길동은 혁명을 시도하고

춘향이는 사랑을 꽃피우고

아비는 원고지에 무엇을 완성했을까

호랑이처럼 입 벌리고 있는 가난에

희망의 파랑병 빨강병을 던져

아비는 무엇을 구했을까

 

시인도 되지 못하고 소설가도 되지 못한 아비

아침이면 식구들의 양식이 되고

아이들의 양말이며 운동화가 될 원고지에

아비는 좌절된 해피엔딩을 꿈꾸었을까

 

어린 남매와 만삭의 아내

그리고 눈 내리는 성탄 전야

사랑도 혁명도 희망도

아비에게는 한끼의 봉지쌀도 되어주지 못하던

1960년대 그 미완의 성탄 전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