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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한국사회의 발전전략을 찾아서(21세기의 한반도 구상 3)

 

소국주의와 대국주의를 넘어서

 

 

박명규 朴明圭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저서로 『한국 근대국가 형성과 농민』 등이 있음. parkmk@snu.ac.kr

 

 

1. 파병론 속의 자의식

 

이라크 추가파병을 둘러싼 우리 사회의 논란이 명분과 국익의 대립은 아니라는 사실이 점차 분명해지고 있다. 국익이란 게 과연 무엇인가라는 원론적 물음을 제쳐두더라도 실제 파병이 어떤 이익을 가져다줄 수 있는지 뚜렷지 않고 오히려 파병으로 잃을 것이 더 많으리라는 예상에 힘이 더해진다. 최근에는 오히려 파병론자들이 이라크의 치안유지를 명분으로 내세우고, 파병반대론자들이 국익에 해롭다는 주장을 펴는 경우조차 있을 정도로 애초의 명분/국익 이분법은 근거를 잃고 있다. 하지만 이런 논란 자체를 무의미한 것이라고 무시하기보다는 이 속에서 우리 사회의 주요한 쟁점을 찾아내고 이를 21세기 한반도 공동체 전체의 발전과 관련하여 검토하는 작업이 절실하다.

파병을 둘러싼 대립은 기본적으로 미국과의 관계에 대한 생각의 차이에 기인하는데 그 바탕에는 오랜 역사 속에서 형성되어온 우리의 자의식이 작용하고 있다. 파병론자들은 한미동맹이 흔들리면 한반도의 평화나 지속적 경제발전에 심각한 위협이 올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의식은 한국이 힘이 약한 소국이라는 자의식에 근거하고 있다. 한국경제의 위상을 꽤 높게 평가하면서도 미국과의 관계악화에 노심초사하는 경제인들의 사고에서도 이런 자의식은 확인된다. 현실주의자들은 이것을 실용적인 대응전략으로 설명하기도 하지만 OECD 국가군에 편입되고 세계 11위의 교역량을 자랑하며 세계에서 손꼽히는 군사력을 보유한 오늘의 한국사회를 소국이라 지칭하는 것도 무리가 있을뿐더러 특히 젊은 세대들에게 소국의식은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부당함으로 이해된다. “왜 미국의 요구에 따라야 하는가”라는 파병반대론의 배후에는 나약한 소국의식에 대한 정서적 거부감이 깔려 있다. “스스로를 약소국가로 규정한 현실주의는 부당한 결정과 행위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는 도덕적 방기이며 타인이 강요하는 현실의 제약으로부터 자신이 벗어날 수 없도록 만드는 자기검열이다”1라는 비판도 같은 맥락이라 하겠다.

세계화와 민주화가 진전될수록 우리의 자의식을 둘러싼 갈등은 더욱 심해질 것이 분명하다. 이 글은 한국사회에서 이런 특이한 자의식의 결합이 어떤 역사적 맥락에서 형성되고 변형되어 오늘에 이르렀는지, 그것의 한계와 극복방안은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지 등을 생각함으로써 새로운 발전전략을 모색하는 한 단서를 찾아보려는 것이다.

 

 

2. 민족주의, 소국주의 그리고 대국주의

 

자신이 속한 정치공동체가 ‘약하다’는 소국의식이 언제나 부정적인 것으로만 해석될 수는 없다. 현실세계에서 자신의 위상과 능력을 객관적으로 인식하게 해줄 뿐 아니라 허장성세의 유혹을 통제할 수 있는 내면적 힘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약육강식의 논리가 압도하는 상황에서 소국으로서의 자의식은 “열등감과 우월감의, 그리고 현상용인 심리와 현상변경 심리의 복합관계의 어딘가에 위치”2하게 된다. 따라서 소국의식으로부터 두 가지 상이한 정치적 태도가 나타날 수 있는데 소국으로서의 자의식을 수용하면서 대응전략을 모색하는 경우와 소국으로서의 지위를 거부하고 강대국으로 변신하려는 지향이다. 전자를 소국주의, 후자를 대국주의라 부를 수 있을 것인데 물론 그 구체적인 모습은 시대와 사회에 따라 다를 수 있다.3

이런 소국의식이 정치화하는 계기는 민족주의가 부상할 때이다.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정치적 세력확대를 꾀하려는 운동으로서 민족주의는 불가피하게 스스로의 자의식에 바탕을 두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의 경우 “동쪽바다의 아주 작은 땅”이라는 영토의 왜소함과 “물산이 적고 농경과 어획이 얻는 바는 겨우 자급할 정도”라는 결핍의식은 오랫동안 자의식의 일부를 이루었다. 물론 유교적 조공체제 내에서는 이 소국의식이 반드시 문화적 종속이나 정치적 예속성을 동반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조선왕조는 스스로를 소중화(小中華)로 자임하는 문화적 자부심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힘의 강약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율적이었던 문명론적 소국의식은 19세기 후반 근대국가체제와 만나면서 다양한 정치적 대응논리로 분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말 위정척사파의 대표라 할 최익현(崔益鉉)은 “저들의 강함”과 “우리의 약함” 사이에 강화란 있을 수 없고 “손에서 생산되어 한(限)이 없는” 서구의 물산과 “토지에서 나는 것으로 한이 있는” 조선의 물화가 교역되어서는 조선이 멸망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에서 전통적인 사대교린책의 고수를 강조했다.4 하지만 개화파의 비조(鼻祖)인 박규수(朴珪壽)는 조선이 마치 “진(晋)과 초(楚)사이에 위치하던 정(鄭)과 같은 소국”임을 강조하면서도 “동양의 지리적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는 점을 적극 활용하는 전략적 대응을 강조했다.5 이런 관점에서 그는 일본과의 수호조약체결을 주도하였고 이후 근대적 개혁을 주도할 제자들을 키워냈다. 한편 신채호(申采浩)는 당시 조선의 상황이 “도덕이 부패하며 경제가 곤궁하고 궁핍하며 교육이 부진하며 모든 권리가 타인의 손에 돌아가며 인민의 기상의 타락이 극도에 이르”6렀다고 탄식하면서도 부강했던 과거 영웅적 기상과 정신을 되살림으로써 강한 국가의식·민족의식을 회복하려고 노력했다. 각기 사대론·균세론·자강론으로 불러도 좋을 이들의 지향은 모두 근대국가체제와의 조우과정에서 소국의식이 취할 수 있는 정치적 변용을 보여준다.

아마도 그 잠재적인 지향성만으로 본다면 자강의 구상은 대국주의적 성격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재일조선인 사학자 조경달(趙景達)은 김옥균(金玉均)등의 급진개화파들을 대국주의적 성향을 가진 세력으로 규정한 바 있다. 하지만 외세의 간섭과 압력 앞에서 독립조차 유지하기 어려웠던 상황에서 대국주의는 관념적인 구호나 먼 미래의 목표일 수는 있으나 실질적인 전략이나 운동으로 등장하기 어려웠다. 김윤식(金允植)이 “만약 중국의 길을 모방하고자 하거나 군대나 그것을 지탱하기 위한 기계의 설치에 힘을 기울인다면 백성은 궁해지고 나라재정은 바닥을 드러내 결국 체제는 일거에 붕괴되고 말 것”임을 우려하고 “조약을 지키고 우방간에 무용한 문제가 일어나지 않도록”하는 것을 유일한 방책으로 주장했던 것7은 당당한 소국주의조차 세를 얻기 어려운 상황에서 현상유지를 최선으로 생각하는 소극적 태도의 전형이라 할 만하다.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한 후 ‘민족개조론’을 썼던 이광수(李光洙)의 자기비하적 태도는 소국의식이 민족에 대한 열등감으로 연결된 경우이다.

하지만 민족주의자들은 소국의식을 오히려 약소민족의 정치적 자주권과 독립을 정당화하는 원리로 수용했다. 동양평화론에 입각하여 일본의 대국주의적 팽창정책을 비판하였던 안중근(安重根)은 스스로의 약함을 부정하지 않되 열등감으로 빠지지 않고 오히려 새로운 공존의 논리, 평화의 질서를 구성하려는 적극적 사유양식을 보여준다. 이후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세력들도 일반적으로는 전세계 약소민족들의 처지에 대한 연대의식을 가질 수 있었고 강대국의 패권주의에 대한 비판의식을 소유함으로써 피억압민족으로서의 자의식이 자주독립을 지향하는 정치의식과 단절되지 않았던 것이다. 신채호가 역사를 ‘아(我)와 피아(彼我)의 투쟁’으로 규정하였을 때, 이는 강대국에 대한 약소민족의 독자성과 고유성을 옹호하려는 의지와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는 것이었다. 그가 20년대 중반 무정부주의를 수용하게 된 배경에는 민족독립운동은 강대국의 논리, 국가주의적 사고를 벗어나지 않으면 안된다는 자기성찰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3. 소국의식의 국가적 전유와 종속적 발전

 

프란츠 파농(Frantz Fanon)은 민족의식이 성공의 순간에 사회의식으로 바뀌지 않으면 오히려 해방을 지탱하지 못한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8 독립과 더불어 저항적 민족주의가 권력의 논리로 쉽게 변형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경우도 민족해방운동에서 보이던 건강한 소국의식은 분단국가의 출현과 함께 일종의 국가이데올로기로 변모하게 된다. 미·소의 분할점령, 좌우의 헤게모니 대립의 와중에서 강대국에 주체적으로 대응하려는 중도파들의 입지가 약화되었고 소국의식은 대외종속적 사대의식으로 변질되기 시작했다. 한국전쟁은 이런 경향을 한껏 심화시켰는데 전쟁의 참화 속에서 북한의 군사적 위협을 대외적 종속보다 더욱 심각한 것으로 간주하는 분단의식이 내면화되었다. 전쟁중 미군에 작전권이 이양되고 전쟁종료와 더불어 체결된 한미군사동맹이 민족적 자존심과 모순된다고 여겨지지 않았던 데에는 남북한의 대립과 증오의 심리가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이승만정권은 이런 상황을 이데올로기적으로 활용하였는데 강력한 반공·반북의 논리를 민족주의적인 정서와 연결함으로써 대미 종속과 내부의 권위주의를 결합하는 효과를 낳았다. 최근의 한 연구는 이승만시대를 ‘소국형 내셔널리즘’이라고 명명하였는데 그 본질은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대외의존형 태도를 정당화하는 것이었다고 보았다.9

박정희정권은 소국의식을 근대화기획과 결합했다. 이 근대화기획은 경제성장과 자주국방을 핵심목표로 내세운 전형적인 부국강병론이라 할 수 있는데 강대국에 대한 선망이 근대화라는 목표와 뗄 수 없게 결부되어 있었다. 하지만 대내적으로 박정희정부는 소국의식을 매우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국력이 없어 한국의 역사가 가난과 외침(外侵)에 시달렸다고 주장하면서 내걸었던 “우리도 한번 잘살아보세”라는 구호는 약소국의 자의식을 자극하여 개발주의에 동원해내려는 의도의 표현이었다. 대국지향의 체제이데올로기를 민중의 소국의식과 편의적으로 결합함으로써 권위주의적인 통제와 동원을 가능케 하려는 정책이었다. 오늘날 이것을 ‘종속적 발전전략’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강대국으로의 성장을 바라는 ‘발전’과 소국의식의 부정적 특징인 ‘종속’이 똑같이 중시되던 시기의 특징을 잘 드러낸다. 이 종속적 발전기에 미국과의 불평등한 군사동맹체제는 더욱 강화되었고 미국 및 일본의 자본이나 기술에 대한 의존도는 급격하게 심화되었다. 최근의 연구는 종속적 발전을 기획한 구상과 개념들조차 상당부분 미국의 제3세계 근대화기획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음을 보여준다.10 이를 다른 차원에서 보면 냉전체제에의 적극적 가담을 통해 종속적 안보와 종속적 성장을 달성하려는 전략이기도 했는데, 냉전체제라는 것이 단순한 정치군사적인 체제대립만이 아닌 20세기 후반 세계자본주의체제의 존립방식의 하나이기도 했다는 점을 여기서도 확인하게 된다.

하지만 소국의식의 국가적 전유가 완전하고 철저하게 이루어질 수는 없었다. 정부와 권력에 의해 전유된 소국의식을 거부하고 종속적인 대외관계나 경제정책에 저항하는 움직임이 끊이지 않았다. 60년대 중반 진행되었던 중산층 논쟁은 대자본을 중심으로 하는 공업화전략에 대하여 중소기업을 주축으로 하는 내포적인 정책을 강조한 것이었다. 박현채(朴玄埰)의 민족경제론은 대외의존적인 ‘종속형 경제’를 비판하고 “국민경제의 자립적 구조”의 창출을 강조하였는데 이는 소국의식의 국가적 전유에 대하여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한 것이라 할 수 있다.11 권위주의에 대항한 민주화투쟁은 민중과 민주의 이름으로 국가권력의 일방적인 근대화 지향성에 도전했다. 6,70년대 민주화투쟁에는 약자의 존엄성을 옹호하려는 심성이 강하게 존재했는데, 예컨대 비폭력정신을 앞세워 저항했던 함석헌(咸錫憲)의 운동이나 사상은 부국강병적 발전주의를 거부하는 노자(老子)의 평화사상에 근거한 것으로 소국의식을 건강한 자의식으로 삼으려는 노력의 하나라 할 만하다. 박정희정권은 소국의식을 국가권력에 대한 순종을 강조하는 데 활용하기 위하여 민주주의에 대한 불신을 끊임없이 드러냈다. 민중의 의식에 대한 거부감과 엘리뜨적인 지시행정은 자신의 문화에 대한 소극적 평가와 무관하지 않았다. 강력한 힘에 대한 선망, 부국강병을 목표로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소국의식을 활용하는 이 구조는 매우 자의적인 권력적 결합구조였다고 할 수 있다.

 

 

4. 한국형 대국주의

 

90년대에는 한국역사상 대국의식이라 할 만한 것이 처음으로 사회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낸 시기였다. 헝그리 정신을 강조하고 근검과 절약을 앞세우며 강대국에의 종속도 불사했던 개발독재시대의 소국의식 대신 고도성장의 과실(果實)과 물질주의적 성취를 노래하는 분위기가 급속하게 확대되었다. 한국의 경제성장과 민주화에 대한 바깥으로부터의 찬사와 함께 한국인의 오만함, 자국중심주의가 비판의 대상이 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90년대에 대국의식이 나타나게 되는 요인으로는 크게 세 가지를 들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는 한국인들이 처음으로 맛본 대외확장의 경험이다. 88년의 올림픽과 노태우정권의 북방정책으로 사회주의권과의 교류가 가능해짐으로써 한국인의 세계에 대한 공간감각이 크게 확장되었다. 이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한국자본의 해외진출이었는데 한국기업의 해외투자 건수는 1986년에 52건에 불과했으나 1995년 1291건에 달했고 투자금액도 같은 기간에 2억2천만 달러에서 16억4천만 달러로 급증했던 데서 알 수 있듯이 이 기간에 한국자본은 말 그대로 세계화하기 시작하였다.12 한 재벌총수가 저술한 책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제목에 담긴 자신감은 이 시기 한국자본의 해외진출과 짝을 이루는 것이었다. 해외여행자유화는 오랫동안 한반도라는 공간에 제한되어 있던 한국인들로 하여금 스스로 강화된 경제력을 체험할 수 있게 해준 정부의 조처였다. 잊혀져 있던 해외 한인과의 만남을 통해 ‘세계 속의 한민족’이라는 자부심이 강화되는 한편으로 상대적으로 우월한 경제력을 과시하려는 천박한 모국중심적 태도도 분출하였다. 또 김영삼정부 시기 학술정책은 세계화를 배경으로 한국학과 지역연구라는 두 주제를 강조하였는데 “한국의 눈을 통하여 예컨대 동남아시아와 같은 저개발국에 대한 타자상을 창출해내고자 하는 동기”13를 가진 것이었다. 전통적으로 주체적인 타자상을 형성해본 적이 없었던 한국으로서 지역연구는 타자상의 창출에서 능동적 주체가 되고자 했던 것인데, 세계화 추세 속에서 경제적 이해관계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정책적인 구상과 밀접하게 맞물려 있었다.

두번째 변화는 한국경제의 고도성장으로 인한 자신감과 물량적 성취이다. 1985년 플라자합의 이후 3저호황 국면을 지나면서 한국경제의 자립화에 대한 전망이 커졌고 종속이론이나 식민지반자본주의론과 같은 견해들은 힘을 잃었다. 특히 국제수지가 흑자로 돌아서게 된 후 더이상 종속/자립의 문제는 의미없는 것처럼 되었고 대신 국가/시장의 문제가 논의의 전면에 등장했다. 따라서 외채도 이제 대외종속성의 지표가 아니라 해외자본의 국내유입 정도를 표시하는 것으로 바뀌게 되었는데 민족경제 무용론이 제기되고 시장개방을 통한 세계화전략이 강조된 것도 이 맥락에서였다. 김영삼정부는 1994년 세계화 및 자유화정책으로 급격히 선회하면서 OECD 가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는데 이는 그때까지 지켜온 보호무역정책 기조, 국가주도의 개입발전전략을 포기하고 시장주의 원리의 적극 수용을 천명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를 위해 정부는 국내시장을 과감하게 개방하였고 금융자유화와 개방화를 추진하였는데, 그 결과 해외자본의 국내유입 및 투자도 함께 증가하여 1986년에 3억5천4백만 달러에 불과했던 외국인의 직접투자액이 1995년에는 19억4100만 달러에 달할 정도로 확대되었다.14 대중소비문화가 확산되고 여가가 중시되면서 3D업종에서의 노동력 부족현상이 나타나 이 자리를 해외 이주노동자들이 채우기 시작한 것도 90년대에 나타난 새로운 현상이었다. 1987년 불과 6천여명에 불과하던 이주노동자는 1990년에 2만1235명으로 늘었고 1996년에는 무려 21만494명에 달하게 되었다.15 1991년 ‘외국인 산업기술연수제도’의 형태로 합법적인 이주노동자 고용제도가 시작된 이래 ‘산업체 인력난 해소’라는 경제적 이해 속에서 가난한 나라의 노동자들에 대한 차별 및 무시가 우리 사회 내부에서 동시에 진행되었다. 힘든 육체노동임에도 한국행을 위해 줄을 서는 이주노동자들은 한국경제의 높아진 위상을 가시적으로 경험하게 해주는 것이었다. IMF금융위기가 있기 직전까지도 한국은 이 고도성장의 과실에 취해 있었다.

세번째로 들 수 있는 것은 북한에 대한 자신감이 급기야 흡수통일론을 주장하는 분위기로까지 진전되었다는 점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이전의 통일론도 상대방과의 공존가능성을 전혀 용인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흡수통일론이라 할 수 있었지만 90년대 흡수통일론의 특징은 군사적인 제압을 통한 통일이 아니라 경제적인 우위에 의해, 돈으로 북한을 편입시킬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있었다. 이런 논의가 등장한 이유로는 서독의 막대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동독을 흡수통합했던 독일의 사례가 미친 영향을 들 수 있겠지만 그보다는 90년대에 접어들면서 북한의 경제위기가 심화되었던 것이 더 큰 이유였다고 하겠다. 북한은 소련의 붕괴와 동구사회주의권의 몰락 이후 극심한 경제적 위기를 경험하였는데 특히 1993년에서 94년에 걸친 기간에는 모든 경제영역에서 극심한 마이너스 성장을 보였다. 1990년을 기점으로 북한의 경제는 단지 생산의 위축에 그치지 않고 경제씨스템 자체가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는데 계획부문과 비공식부문의 경계가 급속히 허물어지고 배급체계가 약화되었다. 남북한 경제력 차이의 비교, 흡수통일이 될 경우 통일비용이 얼마나 들 것인가 등의 논의가 90년대 중반 이곳저곳에서 나타났다. 정부는 북한을 흡수통일하려는 의지도 경제력도 없음을 계속 천명하였지만 그때까지의 대북한 경계심리나 경쟁의식이 상당부분 약화된 것은 분명하다.

해외로의 진출, 종속론의 소멸, 북한 콤플렉스로부터의 해방 등은 이 시기 대국의식의 출현을 설명해주는 중요한 요인들이다. 이 대국의식은 경제력에 대한 자신감에 기반한 것이고, 그런 점에서 90년대의 대국주의는 국가권력의 강화보다는 팽창하는 자본의 이익추구 논리와 더욱 친화력을 갖는 것이었으며 강병을 추구하는 정치군사적 측면보다는 오히려 부국을 추구하는 경제적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60년대 이래의 종속적 발전론의 연장선상에 있다고도 하겠으나 국가의 권위주의적 통제로부터 시장의 자율적 통제로 이행하는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던 점에서 새로운 전환이었음은 분명하다. 자유경쟁과 개인책임론에 기초한 세계화를 국가목표로까지 내세웠던 김영삼정부의 정책은 이런 한국형 대국주의의 전형적인 모습이라 할 수 있다. 노사관계에 있어서도 권위주의적이고 억압적인 방식이 강화되면서 소위 ‘한국형 노사관계’가 가부장적 권위주의를 특징으로 한다는 지적을 받았다.16 90년대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인권유린이 사회문제로 부각되고 해외진출한 한국기업들이 국내에서보다 훨씬 심한 노동억압이나 반인권적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지적이 속출하게 되었는데 이는 이주노동자를 단지 ‘산업체 인력수급’ 차원에서만 접근했던 대국주의의 논리 탓이라 할 수 있다. 한국형 대국주의는 주변국으로의 군사적 팽창정책을 핵심으로 삼았던 일본형 대국주의보다는 무력팽창 없는 자유무역구조하에서의 경제적 패권을 원했던 ‘소영국주의’에 더욱 가까운 특성을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그렇다고 한국의 대국주의가 군사적 강병주의와 무관한 것은 아니었다. 자주국방의 이름으로 진행된 군사력 강화는 민주화가 진전된 후 지금까지도 가장 중요한 전략적 목표의 하나로 자리잡고 있다. 북한의 경제가 위기에 처하고 객관적인 군사력에서도 상당한 방어력을 갖추게 되면서 한반도의 안보도 전통적인 남북대결구도에서 벗어나 점차 지역안보·다자안보·협력안보·인간안보 등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지적들이 나오고 있음에도 여전히 강병의 필요성은 부인되지 않는다. 실제로 북한지역을 미수복지역으로 간주하고 영토적 확장대상이나 편입대상으로 간주하는 시각이 존속하는 한 적어도 한반도 내에서는 정치군사적 팽창주의와 강병론이 연결되지 않을 수 없다. 한국형 대국주의가 미국과의 군사동맹에 대하여 불투명한 태도를 갖고 있는 이유도 이 점에서 설명가능하다. 즉 군사적 대치상황에서 사회경제적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미군의 군사적 개입과 보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편의적으로 공존하는 상황에서는 부국과 강병, 경제성장과 안보주권을 어떻게 연계시켜야 할 것인가에 대한 성찰과 논의가 충분하게 이루어지기 어려웠던 것이라 하겠다.

 

 

5. 소국주의에의 기대와 한계

 

대국의식이 확산되고 대국주의라 할 만한 정책이 강화되면서 그를 비판하는 논의들도 다양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여기에는 소국주의에 대한 기대가 일정하게 내포되어 있었다고 생각된다. 소국주의의 구체적인 모습은 복합적이며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다르다. 일본의 경우 소국주의는 대외팽창적 패권주의에 반대하고 식민지 해방 등을 주장하는 노선으로 ‘복류(伏流)’해 오다가, 패전후 소위 평화헌법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던 반전평화세력에서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한국의 경우 소국주의는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이었는가?

처음으로 소국주의의 의미를 부각시켰던 조경달은 “신의를 묻는 유교적 이상주의에 입각하면서 부국책을 앞세우고 강병책을 뒤로”하는 것, “유교의 전통적 사상에 기반해 왕도론을 높이 부르짖고 그로써 패도에 도전하는 것”이야말로 현실적으로 유일한 길이자 가치있는 사상이었다고 주장하였다.17 그는 19세기말 근대민족주의의 출현과정에서 등장했던 온건개화파가 이런 소국주의를 표방했던 세력으로 보았는데 90년대의 아시아적 가치론에서 유사한 문제의식을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유교자본주의론은 자본주의적 발전론을 우선시함으로써, 아시아적 가치론은 권위주의적인 체제원리와의 차별화를 이루어내지 못함으로써 대국주의를 극복할 새로운 문명적 대안원리를 제시하는 데까지 이르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90년대의 발전주의나 대국주의를 비판하는 사상과 실천운동으로 생태주의를 들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의 생태주의는 90년대 이전에도 존재했지만 특히 대국주의적 지향이 강화되던 90년대 이후에는 그 영향력이 더욱 강해졌다. 권혁범(權赫範)은 90년대의 변화를 대국주의라는 개념 대신 신부국강병론·신민족주의론 등으로 규정하는데 이 신민족주의 열풍은 “한국 대자본의 성장과 해외진출에 관련되어 있으며 대자본의 이해를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한국이 현 세계체제의 반주변부 혹은 반중심부의 단계를 넘어서고 있는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고 파악한다.18 권혁범에 의하면 바로 이 ‘세계체제에서의 위상 상승과 함께 일어나는 민족주의’는 자본의 국제적 진출과 주변부에 대한 수탈을 조장하고 합리화하는 요소를 갖게 마련이며 이것들이 모두 민족과 국가의 이익으로 간주된다고 한다. 그는 IMF 위기극복론에 작용하는 경제적 민족주의는 한국의 수구적 부국강병론을 재강화할 우려가 있다고 보았다. 그는 여기서 세계화나 민족주의 모두 경제숭배의 이데올로기로서 “동전의 양면”임을 지적하고 “서구적 근대화·산업문명에 대한 근본적 반성을 통하여 사회적 약자와 생태계, 지역공동체를 축으로 하는 새로운 모델을 모색”19할 것을 강조하였다.

또 작은 것, 약한 것, 억눌린 것을 강조한 탈근대론도 소수자·약자에 대한 배려와 부각을 통해 90년대의 소국주의라 할 만한 새로운 변화를 주도한 한 흐름이다. 여성, 동성애자, 소수종족, 이주노동자, 장애인 등에 대한 강조는 지금까지 이긴 자, 강한 자 중심으로 해석되고 규정되어온 현실과 문화를 근본적으로 재조정하는 것이었다. 이들의 일차적인 공격대상은 따라서 국민국가로 향한다. 국민국가의 억압성·통제성·균일성이야말로 소수자나 약자의 권익이 침해되어온 제도적 근간이라는 것이다. 임지현(林志弦)은 남의 국가경쟁력 강화론이나 북의 강성대국론이 모두 국가권력이 민족의 이름으로 민중을 전유하겠다는 의사의 표현이라고 보고, “권력에 일방적으로 종속되었던 민중적 주체를 되찾는 길”을 강조하는데 구체적으로는 자율적 주체들, 다원적 주체들의 자유의사를 존중하는 수평적이고 다층적인 연대를 강조하였다.20 혼성적 주체에 대한 기대는 곧 다양한 소수자 및 약자가 자신의 권리를 찾아나서는 민주화의 차원을 넘어서 근대성의 한계를 뛰어넘는 새로운 문명적 기획의 핵심원리로까지 강조되고 있다. 하지만 소수자나 다중적 주체를 강조하는 탈근대론은 현실적으로 작동하는 국가권력이나 국제적인 역학관계에 대한 충실한 검토가 있다 하기 어렵고, 수많은 다중성이 구체적으로 어떤 원리에 입각하여 조율하고 공존할 수 있으며 갈등과 긴장은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대한 책임있는 구상이 드러나지 않고 있다. 생태주의적 사고 역시 그 소중한 문제제기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어떤 적합한 사회적 원리와 체제구상을 대안으로 내놓을 수 있을지는 아직도 불확실하다.

이처럼 소국주의 자체만으로는 대안으로서 불충분해 보인다. 소국주의의 내용을 구성한다고 볼 수 있는 아시아적 가치론, 생태주의적 반발전론, 탈민족주의, 탈근대론 등은 중요한 논점들을 지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90년대 대국주의를 비판하는 논리를 체계적으로 구축하지는 못하였다고 보기 때문이다. 오히려 한국형 대국주의는 IMF 원조를 받게 된 경제위기에 의해 근본적인 비판대상이 되었는데 구조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지금까지의 ‘한국적’ 관행들을 철저히 바꾸어야 했던 것이다. 금모으기 운동이나 일부 외국자본음모론처럼 원초적 민족감정에 호소한 대응이 일시 힘을 얻기도 했지만 IMF위기가 자의식에 상당히 깊은 상실감을 준 것은 사실이다. ‘제2의 국치’라고도 묘사되었던 이 위기의 극복과정은 사회적·정치적·경제적 영역 전반에 걸친 복합적인 사회변동을 동반하는 것이었으나 ‘국난극복’ ‘경제위기로부터의 탈출’이라는 단순논리가 늘 앞섰던 것은 이러한 심리적 충격의 강도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안팎의 위기가 대국주의의 한계를 현저히 깨닫게 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상 그 충격은 경제위기에 한정되었고 대국주의에 대한 발본적 성찰, 문화적 혁신으로 이어지는 작업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것은 경제회복만을 앞세운 정부의 정책실패 못지않게, 문제의 성격을 발전전략 자체에서 찾지 못하고 대국주의와 소국주의 사이를 오갔던 사고의 한계에도 큰 원인이 있다고 할 것이다.

 

 

6. 소국주의와 대국주의를 넘는 길

 

결국 소국주의나 대국주의 가운데 어느 하나를 택일하는 방식은 해결책이 못된다. 양자를 넘어서는 작업이 필요한데 이 점과 관련하여 최원식(崔元植)은 대국주의적 부국강병론은 물론이고 소국주의도 “아름답지만 공상적”이라고 비판하면서 “대국주의와 소국주의의 긴장”을 강조했다.21 최원식은 이런 긴장을 통해 “작지만 단단한 나라, 민족의 존엄과 민중의 권익이 민주적으로 지켜지는 나라”를 만들 것을 강조했는데 해방 직후 김구(金九)가 바랐던 국가의 상, 즉 “우리의 경제력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힘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고 했던 생각과도 통한다.22 하지만 이 ‘긴장’이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상태를 의미하는 것인지는 좀더 명확해질 필요가 있다. 긴장이란 상이한 두 입장의 문제점들을 파악해내는 주체의 비판적이고도 균형잡힌 사고능력을 의미할 수도 있고, 사회 내에 공존하는 두 지향이 상호 대립·갈등하면서 나아가는 변증법적 과정을 의미할 수도 있다. 전자의 경우라면 우리의 의식과 태도에 대한 성찰을 강조하게 될 것이고, 후자라면 사회 내에 다양한 견해들이 조율되고 합의되는 담론적·실천적 조정기능을 주목하게 될 것이다. 이 두 가지 모두 우리 사회에 요긴한 것이기는 하지만 자칫 이런 입장은 현실적으로 명확한 실천적 지향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무원칙한 절충주의로 빠질 우려도 없지 않다. 이런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양자의 긴장을 강조하는 것 못지않게 두 입장을 각기 비판할 수 있는 공통의 기준, 근거를 찾을 필요가 있다. 과연 어떤 원칙에 입각하여 대국주의와 소국주의를 함께 비판하는 것이 가능할 것인가?

백낙청(白樂晴)은 ‘중간수준의 국가’가 가질 수 있는 역량이라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한가지 대안을 찾아보려 했다. 소국주의와 대국주의의 긴장이라는 문제의식을 중형국가론이라 할 만한 제3의 범주를 설정함으로써 구체화한 셈인데 “한국처럼 너무 잘살지도 너무 가난하지도 않은 나라의 잇점”을 살려나가는 일이 된다.23 이런 시각은 ‘긴장’이라고 표현된 태도적 차원의 논의를 특정한 실질적 역할을 중심으로 논의할 수 있게 하는 장점이 있고 강대국과 약소국 사이에서 적절한 개입을 할 가능성을 열어준다. 더구나 그 개입이 한반도의 유의미한 변혁을 통해 세계체제의 변혁에까지 나아갈 것을 구상하는 것임을 생각할 때 그 실천적 함의는 훨씬 클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중간수준의 국가가 가진 ‘잇점’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지, 그것이 발현될 수 있는 대내외적 조건은 무엇일지 더욱 구체화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데 세계적 차원에서 잇점이라 할 수 있는 것을 전혀 잇점으로 여기지 않는 상황이 국내에서 전개될 수도 있고 때로는 아류제국주의와 같은 선진국화의 논리로 변질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중간수준의 국가가 제대로 소국주의와 대국주의의 한계를 뛰어넘고 세계체제의 작동방식에 의미있는 영향을 미치려면 국가의 성격 자체가 기존의 국민국가와는 상당히 다른 새로운 정치공동체를 창출하는 데에까지 나아가야 할 것이다. 백영서(白永瑞)는 이 문제를 국민국가의 극복이란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는데 그는 역사적으로 대국주의와 소국주의의 문제가 국민국가의 형성이라는 과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면서 양자의 한계를 넘어선다는 것은 곧 국민국가 중심의 체제를 극복하는 작업과 연결된다고 보았다. 그는 “부국강병을 추구하는 패권주의 즉 대국주의를 해체하는 작업”이 “기본적으로 소국주의와 친화력이 있음”을 지적하면서도, 이런 소국주의가 “국민을 대신할 새로운 공공적 공간을 형성하지 못하고 방법론적 개인주의에 안주하고 만다면 일반인에 대한 설득은 약할 수밖에 없”음을 지적함으로써 새로운 정치공동체의 구상이 필수적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초국가주의’적 움직임이라 할 만한 여러가지 실천구상들을 주목하는데 중국의 미래와 관련하여 논의되는 다양한 연방제 제안들과 함께 화교들의 ‘대중화권’ 등을 검토하고 한민족공동체론의 잠재적 가능성을 점검하였다.24

이와 같은 여러 차원의 작업들과 함께 또하나 절실하게 필요한 일은 발전개념을 국가중심적인 사고로부터 사회중심적인 차원으로 바꾸어내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발전을 국가차원 즉 국가의 경제력이나 정치군사력으로 이해하게 되면 불가피하게 부국강병론적 발전주의로 치달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렇다고 발전이란 개념을 폐기하는 것도 해결책은 못되는데 인류가 부딪치는 다양한 문제들을 풀어가는 능력을 증대시키는 일은 결코 포기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발전이란 기왕의 종속적 안보와 경제의 틀 속에 고착되어 있던 가치체계 재구성작업을 포함해야 한다. 경제성장을 발전의 핵심으로, 세계 몇위에 해당하는 국가의 위세강화를 발전의 시금석으로 삼는 것 대신에 평화를 만드는 능력, 분쟁을 해결하는 능력, 이질적인 것들과 공존해가는 능력, 환경을 보존하고 유지시킬 수 있는 능력 등을 발전의 핵심적 내용으로 재구성해야 한다.

이런 발전개념은 약육강식의 생활문화와 세계체제를 변혁해내는 실력을 키우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강대국의 패권주의와 강권주의를 윤리적으로 비판하는 데 머물거나 배타적 저항주의로만 치닫는 것이 아니라 체제 자체의 변혁을 통해 새로운 관계와 질서를 만들어내는 능력을 배양해가는 것이야말로 21세기 발전의 주된 목표가 되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사회적 발전은 더이상 단일국가 차원에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국가수준을 넘어서 전지구적 차원에서 개입할 역량을 구축하는 일과 더불어 일상적 생활세계가 더욱 인간적이고 균형있는 상태로 변화할 수 있도록 하는 실천역량을 기르는 것이 과제가 될 것이다.

여기서 최근 논의되는 동북아 관련 논의들을 이 쟁점과 관련해 검토해보자. 최근 『창작과비평』은 연속적으로 ‘21세기의 한반도 구상’이라는 큰 틀 속에 동아시아 평화문제와 동북아경제중심 전략을 검토하였다. 경제와 평화는 현실적으로 한반도 및 동북아의 최대과제이지만 어떤 의미에서 소국주의와 대국주의의 긴장을 위해서도 반드시 함께 있어야 할 두 가치이기도 하다. 평화를 만들어내는 능력의 증대는 경제적인 부를 창출하는 차원 못지않은 중요한 발전이다. 평화를 무시하는 경제성장주의는 평화에 큰 해를 미칠 수 있지만 경제를 무시해서는 평화가 정착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최근의 남북한 경제교류, 경제특구지정, 자유무역지대 창설 논의 등 여러 경제차원의 일들이 평화체제의 구축과 연계되도록 하는 전략이 절실하다. 강상중(姜尙中)은 자유무역지대를 위한 노력과 별도로 “금융영역에서 안정을 유지할 수 있는 국제적 메커니즘을 형성하는 것”25이 반드시 필요함을 역설하였다.

현정부의 동북아경제중심론은 ‘세계경제 중심지로서 동북아시대를 열고 경제적 대응으로 물류, 비지니스 중심지화를 추진한다는 것’을 목표로 설정하고 있는데 최근 인천의 경제특구법이 시행되면서 이미 이 변화는 시작된 셈이다. 하지만 인천특구의 성패가 외자유치 여부에 달려 있다고 이야기되는 상황에서 자칫하면 자본과 기술의 격차에 따른 국가간 종속을 심화시킬 수 있다. 경제특구 구상이 지방의 활력을 강화하고 지역간 연계구조를 창출함으로써 무분별한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완화시키는 모델로 발전할 수 있으려면 언제나 한반도 안팎의 평화문제와 함께 생각하고 조율하는 창의적 대응이 필요하다. 북한과의 경제교류 역시 단순한 시장확대로서가 아니라 남북한간의 경제적 선순환(善循環)구조를 창출하고 나아가 동북아의 평화와 공존의 인프라 구축을 지향하는 책임성이 동반되는 것이어야 한다. 이런 구체적인 작업 속에서 대국주의의 위험과 소국주의의 한계를 넘어서는 길이 찾아질 수 있을 것이다.

 

 

7. 마무리

 

발전지상주의, 강자중심주의, 승자독식주의가 점차 강해지는 오늘날의 문화는 분명 21세기의 대안이 될 수 없다. 인간의 삶은 다양한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대·소의 관계나 강·약의 관계는 결코 지배/종속의 시각에서 볼 일이 아니다. 스스로의 약함을 당당하게 받아들이고 약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평화로운 공생을 지향하는 소국주의는 21세기형 약육강식의 문화를 성찰하고 비판하는 길을 보여준다. 하지만 작은 것, 패배자, 소수자에 대한 배려와 강조만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소국의식에서 보이던 소극성과 자기부정, 강대국에 대한 의존심리나 개혁무용론은 극복되어야 할 부정적 유산이다. 자신들이 성취한 정당한 결과를 떳떳하게 받아들이고 그에 걸맞은 책임을 지려는 자세도 필요하다.

한국의 근대화과정은 부국강병을 목표로 내세우고 강한 민족주의를 표방하면서도 대외적 종속을 도구적으로 수용하는 이중성을 특징으로 하였는데 이것은 대국주의와 소국주의의 편의적 결합구조에 다름아니었다.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여러가지 긴장과 갈등은 이 편의적 결합구조의 균열과 해체과정에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를 19세기적인 국민국가 중심론으로 대응할 수 없음은 분명하며 그렇다고 신자유주의에의 투항이 해결책이 못됨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대국주의와 소국주의의 긴장감을 견지하면서 양자택일의 논리가 아닌, 양자의 한계를 모두 넘어설 대안적 패러다임, 전략을 모색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 신자유주의의 한계에 함몰되지 않으면서도 세계체제 내에서의 적절한 대응력을 갖추기 위한 준비를 게을리하지 않는 것, 대미종속성을 극복하기 위한 주체적인 자세와 함께 그것이 단순한 반미로 귀결되지는 않는 총체적 시야를 확보하는 일이 긴요하다. 이런 여러 노력의 궁극적인 목표는 사회적 발전이라 할 수 있겠는데, 이는 북한과의 경제협력과 관계증대에 기술과 자본이 수행하는 중요한 역할을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이 한반도의 생태적 위기를 가속화하거나 신자유주의의 확대심화를 가져오지 않도록 하는, 오히려 생태적인 복원과 신자유주의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새로운 체제를 구축하는 기회가 되도록 만드는 능력을 의미한다. 소국주의와 대국주의의 긴장을 수용하면서 이를 넘어서려는 자세는 궁극적으로 근대가 우리에게 지워놓은 과제들에 대한 ‘감당과 극복의 이중과제’를 해결하는 중요한 디딤돌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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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박순성 「현실주의는 도덕적 방기다」, 『교수신문』 2003년 4월 7일자.
  2. 장인성 『장소의 국제정치사상』, 서울대출판부 2002, 91면.
  3. 19세기 중반 영국에서는 소영국주의와 대영국주의의 대립이 있었고 19세기말 일본에서도 대국주의와 소국주의의 대립이 있었다. 중국도 20세기초 소민족주의와 대민족주의의 대립이 있었다. 영국이나 일본의 경우는 군사적 대외팽창정책이 대국주의의 핵심이었다면 중국의 경우는 국민국가 형성과정에서 누가 주도할 것인가를 둘러싼 갈등이었다. 백영서 『동아시아의 귀환』, 28면 및 田中彰 『小國主義』, 東京:岩波書店 1999 참조.
  4. 최익현 「丙子持斧伏闕斥和議疏」, 신용하 『한국근대사회사상사연구』, 일지사 1987, 307~309면에서 재인용.
  5. 한국학문헌연구소 엮음 『박규수전집』 상권, 아세아문화사 1978, 466~69면.
  6. 신채호 「20세기 신국민」, 정해렴 편역 『신채호 역사논설집』, 현대실학사 1995, 310면.
  7. 김윤식 『續陰晴史』 상, 234~35면; 木村幹 『朝鮮/韓國ナショナリズムと小國意識』, ミネルバ書房 2000, 221~22면에서 재인용.
  8. 에드워드 싸이드, 김성곤·정정곤 옮김 『문화와 제국주의』, 창 1995, 461면 참조.
  9. 木村幹, 앞의 책 346~48면.
  10. 정일준 「미제국의 제3세계 통치와 근대화이론」, 『경제와사회』 2003년 봄호.
  11. 이병천은 이런 박현채의 “자립적 경제구조”의 강조가 지닌 의의를 높이 평가하면서도 “일정한 종속을 감수하는 위에서 자생력을 배양하고 자립을 도모”하는 길 이외에 왕도가 없음을 주장한 바 있다. 「다시 민족경제론을 생각한다(1)」, 한국사회과학연구소 학술대회발표논문집 『민족경제론과 세계화 속의 한국경제』, 2000, 84~99면.
  12. 신광영 『동아시아 산업화와 민주화』, 문학과지성사 1999, 103~104면.
  13. 김경일 편저 『지역연구의 역사와 이론』, 문화과학사 1998, 8면.
  14. 신광영, 앞의 책 96면.
  15. 설동훈 『노동력의 국제이동』, 서울대출판부 2000, 190면.
  16. 이혜경 외 「국내외 한국기업의 외국인력 관리에 관한 비교연구」, 『한국사회학』 36권 3호(2002).
  17. 趙景達 「朝鮮における大國主義と小國主義の相剋:初期開化派の思想」, 『朝鮮史硏究會論文集』 22(1985), 63~64면. 물론 이런 조경달의 김윤식에 대한 해석에는 여러가지 비판이 있다. 예컨대 장인성은 김윤식의 구상의 일관성 여부, 소국주의=세계평화주의 등식화의 타당성 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장인성, 앞의 책 25~29면 참조.
  18. 권혁범 『민족주의와 발전의 환상』, 솔출판사 2000, 28~29면.
  19. 같은 책 28~29면.
  20. 임지현 「한반도 민족주의와 권력담론」, 『당대비평』 2000년 봄호 204~205면.
  21. 최원식 「세계체제의 바깥은 없다」, 『창작과비평』 1998년 여름호 31면.
  22. 부국강병론을 주장했을 법한 민족주의자 김구에게 이런 소국주의적 사고가 함께 존재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김구 「나의 소원」,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회 편, 『백범김구전집』 8, 대한매일신보사 1999, 622~23면.
  23. 백낙청 『흔들리는 분단체제』, 창작과비평사 1998, 78~80면.
  24. 백영서 『동아시아의 귀환』, 창작과비평사 2000, 32~47면.
  25. 강상중 「동북아시아 공동의 집과 북일관계」,『창작과비평』 2003년 가을호 6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