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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동아시아의 지식인과 동아시아론
김경일 金炅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 사회학 전공. 주요 저서로 『일제하 노동운동사』 『이재유 연구』 『지역연구의 역사와 이론』(편저) 『한국의 근대와 근대성』 『동아시아의 민족이산과 도시』(공저) 『근대의 여성, 여성의 근대』 등이 있음. keongil@aks.ac.kr
긴 20세기를 보내고 21세기의 문턱에서 동아시아 지식인들 사이의 대화를 위한 시도는, 19세기 후반 이래 전쟁과 냉전체제로 인해 상호교류가 단절되어온 사실에 비추어볼 때 새삼스런 감회에 젖게 하는 바가 있다. 제국주의 열강의 위협 앞에서 지식인의 상호소통을 통해 제국주의 질서를 극복하고 지역의 평화공존을 모색하고자 했던 시도가 참담한 실패로 끝나버린 역사적 경험을 되새기면서 지구화와 신식민주의의 21세기 초입에서 동아시아 지식인들의 상호교류가 어떠한 의미와 한계를 갖는지를 분석하는 것은 자못 의의깊은 일이 될 것이다.
기획물 ‘동아시아의 비판적 지성’(창비 2003)의 각권1에 포함된 6인의 지식인은 1946년부터 1963년에 걸쳐 태어난 전후 세대로서, 앞시기의 제국주의적 침략과 식민주의 그리고 전쟁이라는 참화를 직접 경험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모두는 동아시아의 역사적 경험에 대한 책임의식을 공유하면서, 당면한 자본의 전지구화와 신식민주의가 야기한 여러 문제들에 맞서고자 한다. 이러한 점에서 이들은 동아시아의 ‘비판적 지식인’(사까이 나오끼酒井直樹, 쳔 꽝싱陳光興)이거나 ‘신좌파’(추이 즈위안崔之元, 왕 후이汪暉)이고, 혹은 국가권력에 비판적이라는 의미에서의 ‘자유로운 개인’(쑨 꺼孫歌)으로 일컬을 수 있다.
공간적으로 볼 때 이들은 중국과 일본, 타이완(臺灣), 그리고 그 바깥의 미국에 거주하면서 동아시아의 문제에 개입하고자 한다. 19세기 후반 동아시아의 무대에서 발언하고자 했던 지식인들이 일정한 학문분과나 대학제도에 속하지 않고 비교적 자유로운 환경에서 활동했던 것과 대조적으로, 이들은 사회참여로부터 단절되어 지식인의 경험을 학교 안에 가두거나 ‘학문분과의 가로지르기가 대단히 어려운’ 정형화된 대학제도와 전문가와 학자, 경영인, 기술관료 등의 전문분과체제로의 분화가 갈수록 확대되고 있는 상황에서 현실에 개입하고자 한다.
19세기 후반의 지식인들이 어떠한 형태로든지 서구의 제국주의와 관련해 자신을 드러낸 것과 비슷하게 이들이 현실에 개입하는 이론적 자원이 서구로부터 기원한 것이라는 점은 흥미롭다. 사상사와 사회사, 문화연구, 정치경제학, 정치이론, 커뮤니케이션 등 여러 분과영역에서 이들은 포스트모더니즘과 탈식민주의론, 해석학과 현상학, 비판이론, 분석적 맑스주의, 아날학파, 세계체제론 등 다양한 이론적 자원들을 기반으로 동아시아의 여러 현상들을 분석하고 해명하고자 한다. 이론보다는 사료를 통해 개념을 만들어내야 한다고 주장하며 국내 이론의 권위 인정을 촉구하는 야마무로 신이찌(山室信一)의 경우에도 어느 정도는 그러하다.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왕 후이나 추이 즈위안의 비판에서 보듯 이들이 서구의 이론을 그대로 동아시아에 적용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더라도,“서양이론으로 중국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경향이 강화”(『아시아라는 사유공간』 194면)되고 있다는 쑨 꺼의 지적이 비단 중국에만 한정된 현상은 아닐 것이다. 그녀의 말대로 동아시아 지식인사회에서 서구이론을 기점으로 하는 시각이 흔들렸던 적은 결코 없었으며, 이러한 점에서 아시아 여러 나라의 지식인들이 순 아시아적 대화를 전개하는 것이 애초부터 불가능하다는 언급은 동아시아 지식인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민족주의와 민족국가2
이들 6인의 지식인들 중에서 미국의 사까이 나오끼와 타이완의 쳔 꽝싱은, 비판적 성찰까지를 포함한 서구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을 뚜렷이 보이고 있다. 이들 지식인의 대부분이 민족주의에 대하여 비판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지만 이 두 사람에게서 그러한 경향이 두드러진 것은 그 영향과 관련해 보면 흥미롭다. 나머지 지식인들과 비교할 때 사까이 나오끼와 쳔 꽝싱은 민족주의에 대한 반대와 함께 미국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이는 MIT 교수인 추이 즈위안이 미국에 대해 우호적 입장을 보이는 것과는 좋은 대조를 이룬다.
이들 두 사람에게서 보이는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은 최근 한국의 학계에서 제기되는 민족주의에 대한 회의와도 궤를 함께한다. 사까이 나오끼의 민족주의 비판은 국민과 민족 및 인종주의에 대한 비판을 포함한다. 민족주의란 어떠한 경우에도 비판받아야 한다는 원리주의적 입장과는 거리를 두면서 그는 자신의 민족주의 비판이 일정한 역사적 판단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국민이나 민족 혹은 인종의 어느 것이든 자기완결적이고 균질적인 공동성은 타자를 배제하는 폭력성에 의해 관철되고 완성된다. 국민이나 민족은 근대 역사의 폭력과 차별, 잔혹함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 것으로 근대세계의 식민주의와 성차별, 인종차별 제도는 그것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아가 그는 다양한 차원에서 민족주의들 사이의 공모관계에 주목한다. 일본의 민족주의를 특수주의로 간주하는 경향은 미국 민족주의의 보편주의를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전자에 대한 비판은 후자를 옹호하는 것이다. 또한 전전의 일본은 국민적 단결이라는 이름으로 조선의 민족주의나 타이완 소수민족의 저항운동을 탄압하였던바, 다수자(majority) 국민주의의 통합적 폭력은 소수자(minority) 국민주의 가운데 재생산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점에서도 다수자와 소수자의 국민주의는 공범관계에 있으며, 후자가 전자의 인정을 기대하는 한 다수자의 권위는 보증된다고 서술하고 있다.
원주민과 본성인(本省人), 그리고 외성인(外省人) 사이의 심각한 내부갈등에 직면하고 있는 타이완의 쳔 꽝싱 역시 사까이 나오끼와 비슷하게 민족주의(그의 표현으로는 국족주의)에 대하여 비판적이다. 그에 따르면 타이완 사회가 경험한 역사적 상처와 고통은 외래 식민제국주의에 의한 것 못지않게 국족주의와 국가주의에 의해 초래된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그는 타이완을 동남아시아로 회귀시키고자 하는 서진 이데올로기로서의 중화민족주의나, 타이완을 근거로 새로운 제국을 수립하고자 하는 남진 이데올로기로서의 타이완 민족주의 모두를 비판한다. 그는 원주민인 소수 종족집단이 해방되고 타이완의 노동자·농민·동성애자 그리고 여성이 주체가 될 때 비로소 국족주의가 극복될 수 있다고 본다. 국족주의와 국족의 경계를 넘나드는 이러한 역사실천을 그는 “국족 허물기(破國族, post-nation)의 주변문화상상”(『제국의 눈』 107면)으로 일컬으면서 자본주의 계급구조와 가부장제, 이성애체제, 종족 쇼비니즘은 그 과정을 통해 철저하게 전복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국족 허물기가 국가기구를 탈환하기 위한 준비작업이나 무정부주의 운동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사까이 나오끼와 비슷하게 그 역시 민족주의의 실체는 인정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민족국가를 넘어서자고 하지만 그것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으며, 이러한 점에서 그는 민족주의에 대한 자신의 비판이 국가의 존재와 아울러 사회형성에 미치는 구조적 영향력을 인정한 바탕 위에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따라서 자신의 민족주의 비판은 민중민주운동 전략의 연장으로, 체제에 의존하지 말고 체제 바깥에서 자아를 재생산해야 한다는 사실을 자각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민족주의에 대하여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는 추이 즈위안이나 적어도 이 기획에서는 거의 의견이 드러나지 않은 쑨 꺼를 논외로 한다면 왕 후이와 야마무로 신이찌의 민족주의 인식은 앞의 두 사람과는 대조적이다. 예컨대 왕 후이는 1993년 이후 중국 사상계에서 민족주의라는 주제가 탈식민주의와 세계화와 관련해서 지속적으로 논의되어온 사실과 아울러 그것의 한계를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1980년대부터 중국 지식인의 토론공간은 여전히 민족국가의 근대화라는 구도 속에 갇혀 있으며, 이는 최소한의 국제적 시각조차도 결여된 것이었다. 현재의 민족주의는 전지구화(globalization)의 대립물이라기보다는 그것의 부산물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이러한 점에서 중국 근대사의 병폐 중 하나인 민족주의에 대해 비판이 제기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국가문제가 여전히 아시아 문제의 중심을 차지하는 현실을 직시하고자 한다. 이와 같이 왕 후이의 민족주의 비판은 다분히 중국의 현실에 한정된 것이며, 앞의 사까이 나오끼나 쳔 꽝싱과 같이 민족주의 이론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 차원은 아니다.
이에 반해서 일본의 야마무로 신이찌는 민족주의나 민족국가에 대한 비판적 인식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듯이 보인다. 1980년대 초반 이래 일본에서 국민국가론을 선도하고 있는 그는 국가의 형성과 국민의 형성을 엄격하게 구분함으로써, 새로운 차원에서 민족국가를 이해하고자 한다. 그는 국민국가가 좋은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부정적으로 파악할 필요는 없다고 주장하면서 ‘법제관료(法制官僚)’ ‘대중연예(大衆演藝)’와 같은 새로운 개념을 통해 아래로부터의 국가형성과정에 주목하여 개인의 차원에서 국민이 국가를 만들어나가는 계기를 볼 것을 촉구한다. 동아시아 국가들을 함께 언급하는 경우에 ‘국민국가’라는 표현보다는 ‘정치사회’라는 표현을 선호하는 것에서 보듯이 유보적인 태도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그의 인식에서 국민국가 자체의 실체는 자명한 것으로 상정되고 있다.
아시아 인식과 동아시아의 비전
기획물의 주제가 ‘동아시아의 비판적 지성’인 만큼 여기에 망라된 6인의 지식인 모두는 아시아와 관련한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3 동아시아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둘러싸고 한국에서도 그것을 단순히 지리적 고정물이나 문화적 구성물로 파악할 수 없다는 견해에는 어느정도 동의가 이루어진 듯이 보이나 여전히 개념 자체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는 것과 비슷하게, ‘아시아’에 대한 다양한 개념정의와 연구방법, 문제의식에도 불구하고 이들 모두는 아시아라는 개념에 내포된 모호성에 우선 주목한다.
다양성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공통성을 갖지 못한다는 점에서 아시아의 특성은 혼돈과 다양성이라고 야마무로는 단언한다. 쑨 꺼는 아시아라는 주제는 근대성 담론과 마찬가지로 명확한 해석을 제시하기 힘들다고 하면서, 명확한 지리개념으로 귀속시킬 수 없다는 점에서 아시아를 실체화하기가 곤란하다고 지적한다. 즉 아시아 문제의 난점은 그것이 확정된 의미를 내포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으며, 따라서 역사적으로 변할 수 있는 사상(思想)의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왕 후이 역시 아시아에는 결코 유럽 같은 상대적으로 통일된 정치문화와 상대적으로 평등한 경제수준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아시아를 상상하는 것’의 원천적 어려움을 지적하고, 아시아 개념의 역사 속에 포함된 파생성·애매성·모호성을 직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왜 아시아에 대한 개념정의가 어려운가? 가장 큰 이유로는 무엇보다도 19세기 후반 서구 제국주의세력에 의해 비로소 이 지역이 발견되고 정의되었다는 역사적 경험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아시아는 정체되고 낙후된 존재로 서양문명이 구제해야 할 대상이었다거나(야마무로 신이찌), 아시아의 대다수 지역은 서양이 대상화하고 종속시킨 지역과 사람들의 집합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공통성을 가지지 않는다거나(사까이 나오끼), 혹은 20세기까지 아시아인으로 불리는 객체는 존재했지만 스스로 아시아인으로 부르는 주체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언급(사까이 나오끼)과 비슷하게 아시아는 서구를 향한 피동적 실체였다는 지적(쑨 꺼)이 나왔다.
그러나 아시아가 반드시 이와 같이 수동적이고 정체된 이미지로만 정의되어온 것은 아니다. 왕 후이가 중국 사회주의혁명 전통에서 식민주의시대 이래 중국과 세계가 경험한 잔혹한 역사경험과 아울러 중국 사회주의 혁명운동이 지녔던 해방적 역할을 이해하고 사회주의 경험과 교훈을 단순히 냉전이데올로기로 간주하지 말 것을 촉구한 것은 이와 관련하여 주목할 만하다. 그는 19세기와 20세기 아시아의 개념은 상이한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였다고 주장한다. 즉 일본제국의 식민계획을 대표로 하는 아시아주의와 아울러 약소민족의 민족해방운동으로 표현된 피압박민족의 민족자결 요구가 그것이다. 주목할 것은 피압박민족의 시각에서의 인식이 단지 중국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야마무로 신이찌가 지적한 바와 같이 20세기에 아시아사회 정체론의 가장 강력한 신봉자였던 일본에서도 1980년대 이래 아시아에 대한 정체성 규정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접근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전제와 정체의 아시아’는 이제 ‘독립과 혁명 주체의 아시아’로 전환된다. 비슷한 맥락에서 사까이 나오끼 역시 포스트모더니즘적 시각에서 정체적 아시아상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우선 그는 아시아의 고유성에 대한 집착이 서양의 독자적 차별성을 강화한다는 점에서 유럽중심주의적 보편주의와 아시아적 특수주의 사이의 상호의존성(공범성)이 성립될 여지가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이러한 점에서 타자에 대한 인정과 연민보다는 다수자의 세계전략이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이해하고 그를 바탕으로 현실을 바꾸기 위해 싸우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객체로부터 주체로 아시아 개념이 변화함에도 불구하고 왕 후이가 적절히 지적한 바와 같이 오늘날에도 ‘아시아’는 여전히 국가나 엘리뜨의 영역으로 남아 있으며, 이 지역의 기층 사회운동에서는 사실상 별다른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것은 유감스럽게도 사실이다. 아마도 이러한 사정이 오늘날 이 지역 지식인들이 공동으로 당면하고 있는 상호이해와 연대의 어려움을 설명하는 또다른 배경이 될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하나의 총체적인 지역’이자 자율적이고 자기완결적인 아시아 개념 대신 잠정적이고 전략적인 접근방법이 제안되었다. 예를 들면 한국의 동아시아론에서 제기된 ‘지적 실험으로서의 동아시아’4와 비슷하게, 쳔 꽝싱은 공동으로 생각하고 반성할 수 있는 거점으로서의 아시아를 ‘방법’으로 삼자고 주장한다. 쑨 꺼는 아시아를 근대의 문제에 대면하여 대안을 찾도록 하는 ‘기능’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그런가 하면 야마무로 신이찌는 동아시아 개념이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며 동아시아란 만들어져가는 것이라는 점에서 ‘시론(試論)’으로서의 동아시아 개념을 제안한다. 사까이 나오끼는 서양과 아시아의 구별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유동적이라고 주장하면서 문화적·문명적·인종적 정체성이 지닌 배타성을 타파하자고 제안한다. 아시아인이라는 범주를 자연화하지 않고, 또 있지도 않은 개인이나 집단의 불변적 특성에다 아시아인이라는 정체성의 기초를 두어서는 안되며, 끊임없이 변화해가는 사회경제적 조건의 한 결과로 생각하자는 것이다.
아시아 인식의 한계와 소수자의 위상
동아시아 지식인들의 아시아 개념이 과도적인 것은 이 개념이 지니는 현실적합성의 한계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중국의 경우에 특히 그러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와 관련해 쑨 꺼는 중국 지식인에게 아시아 의식이 없다는 한국 지식인의 비판에 공감을 표명하면서, 설령 아시아 담론이 중국에서 점점 유행할지라도 중국 지식계에는 여전히 아시아 의식이 결여되어 있다고 자인한다. 중심으로 자처하는 대국에서 아시아 문제는 오랫동안 문제로 부각된 적이 거의 없었으며, 중국 지식계는 아시아에 별로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그녀는 아시아 문제는 문화대국의 주변부, 즉 주변국가에 해당하는 곳에 진정한 의의가 있다고 하면서, 중국은 한국이나 일본과 달리 방대한 지역을 망라하고 있다는 점에서 동아시아라는 지역적 개념이 널리 수용되기 힘들다는 사실을 지적한다.5
중국의 지리적 조건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쑨 꺼의 언급에서 얼핏 내비친 아시아 인식은 왕 후이의 경우에 더욱 뚜렷한 형태로 제시된다. 쑨 꺼와 비슷하게 왕 후이는 중국은 지역이 광활하고 다민족으로 구성되어 있고 문화가 다양하다는 의미에서 동아시아 같은 협소한 개념보다는 아시아라는 포괄적 개념이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나아가 그는 중국의 자기인식은 아시아보다는 오히려 서구와의 대비를 통해서 생겨난 것이며, 중국과 다른 아시아 국가들 사이의 교류나 상호추동으로 이루어진 경우는 아주 적다고 지적한다.
동아시아 지식인사회에서 보이는 이러한 경향은 “횡향사고(橫向思考)의 부족”(백영서, 앞의 책 49면)으로 이미 지적된 바 있거니와, 이러한 한계는 예컨대 하마시따 타께시(濱下武志)의 조공체제론이나 미조구찌 유우조오(溝口雄三)의 동아시아론에 대한 평가에서도 잘 나타난다. 왕 후이는 하마시따의 이론이 지니는 일정한 의의를 높이 평가하면서도 조공체제 속에서 장기간 지배적 위치를 점한 대륙관계(중원과 중앙아시아, 서아시아, 남아시아 및 러시아와의 관계)에 대한 깊이있는 설명을 하지 못했고, 해양무역권의 형성과 대륙 내부동력 사이의 관계를 거의 다루지 않았다고 비판하고 있다. 그는 미조구찌의 동아시아론에 대해서도 일본과 중국의 관계에만 주목함으로써 중국이 중앙아시아와 서·북 아시아의 교역과 문화교류를 포함하는 더 넓은 맥락에서의 역사작용의 산물이라는 점을 보아넘겼다고 비판한다. 즉 하마시따에 대한 비판과 비슷하게 대륙관계가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 않으며, 따라서 아시아 복합체를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동아시아에서 다수자 중국의 관점에 서 있을 때는 예컨대 하마시따의 조공체제론에서 조선이나 류우꾸우(琉球) 혹은 베트남과 같은 소국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제시되고 있는지에 대한 논의가 들어설 자리가 거의 없다.6 아울러 왕 후이는 하마시따의 조공체제론이 ‘동지나해’와 타이완을 거쳐 ‘남지나해’로 이어지는 해양무역권의 역할을 강조함으로써 결국은 일본과 동남아시아의 연계를 부각시키는 이론적 효과를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듯하다.그는 중국을 중심에 설정한 하마시따의 조공체제론에는 공감을 표명했지만, 일본과 관계되는 ‘좁은’ 범위에서 중국이 이해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마시따는 조공체제론을 통해 자기 이론의 설득력을 중국으로부터 인정받음과 동시에 결과론적으로 동남아시아에 대한 일본의 개입을 정당화할 수도 있는 이론적 토대를 마련하였다. 이러한 주고받음을 통하여 두 나라 지식인의 암묵적인 공모관계가 성립될 여지가 있는 것이다.
동아시아에서 소수자로서의 조선이나 타이완에 대한 인식의 한계는 대동아공영권(그의 표현으로는 대동아식민권)에 대한 왕 후이의 평가를 통해 잘 드러난다. 그는 대동아공영권이 ‘문화’적 자결을 보호하고 정치적 자결에 반대한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는데, 이러한 평가는 다분히 중국 중심이라는 비판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대동아공영권이 유교주의의 범주 내에서 기획되었다는 점에서 문화적 자결을 보호한 것이라고 평가하지만, 이러한 인식에서는 예컨대 조선을 식민지라기보다는 일본의 일부로 간주하였던 일제 식민주의의 조선에서 자행한 고유문화 말살은 무시되고 만다.
널리 알려진 쑨 원(孫文)의 이른바 대아시아주의에 대한 이들의 평가 또한 아시아 인식의 한계를 단적으로 보이는 좋은 사례이다. 왕 후이는 1924년 쑨 원이 대아시아주의에 대한 강연에서 네팔의 조공을 언급한 것은 대중화(大中華)의 옛 꿈을 되새기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양국간에 상호인정과 상호존중의 평등관계가 거기에 포함되어 있음을 확신하였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쑨 꺼 또한 비록 그것이 백인종 때문에 형성된 연대라고는 하더라도 쑨 원의 아시아관에는 일본의 아시아관에서 찾기 어려운 약소민족에 대한 관심이 있었다고 주장한다.7
그러나 약소민족의 당사자라고 할 수 있는 한국과 타이완 지식인들의 평가는 매우 대조적이다. 타이완의 쳔 꽝싱은 쑨 원의 아시아주의는 아시아 각지역을 등한시하고 서방이라는 큰 쪽만을 중요한 대상으로 다루었으며, 중국과 서구의 대립이라는 거대담론 속에서 아시아와 제3세계는 안중에도 없었다고 비판하고 있다.8 쳔 꽝싱과 같은 비판은 한국에서도 있었다. 백영서는 쑨 원의 아시아주의에 대해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들이 강하게 반발하였던 사실을 소개하고 있다(백영서, 앞의 책 150~51면). 설령 쑨 원의 주장이 약소민족을 중시하였다고 하더라도 중국내 정치세력판도에서 열세에 처한 그가 일본의 지지를 얻기 위한 정략적 의도에서 대아시아주의를 내세웠다는 것이다(같은 책 57~58면).
국제무대에서 소수자의 시각을 반영하지 못한 다수자 중심의 아시아 인식의 한계는 이들 지식인들이 자주 언급하는 오까꾸라 텐신(岡倉天心)이나 타께우찌 요시미(竹內好)에 대한 평가에서도 잘 드러난다. 타께우찌의 아시아 인식과 관련한 사까이 나오끼의 긍정적 평가는 그만두고라도, 일본에서 공부한 쑨 꺼 역시 “아주 힘겹게 그와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타께우찌의 아시아 인식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오까꾸라에 대해서 쑨 꺼는 그의 논리가 후대에 대동아공영권을 여론화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자신이 관심을 기울인 문제가 아니었다고 하면서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오까꾸라에 대한 비슷한 평가는 야마무로 신이찌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쑨 꺼 등은 오까꾸라에 대한 비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오까꾸라가 조선이나 타이완 같은 식민지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에 대하여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 타케우찌의 식민지 인식에 대한 한계는 흔히 지적되어왔거니와, 오까꾸라에 대한 비판은 쑨 꺼 등의 아시아 인식의 지평에는 들어와 있지 않은 것이다.9
자국중심주의와 과거청산 문제
동아시아 비판적 지식인들의 아시아 인식에서의 한계는 자신이 살고 있는 국가나 사회의 존재구속성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새삼 일깨우고 있다. 추이 즈위안을 논외로 한다면 5인의 지식인 중에서 미국에 거주하는 사까이 나오끼와 타이완의 쳔 꽝싱이 상대적으로 자국중심주의 혐의로부터 자유롭다고 할 수 있지만, 이는 다분히 미국이나 타이완이라는 상황적 여건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일본과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야마무로 신이찌나 쑨 꺼, 왕 후이의 아시아 인식은 이해당사국으로서의 중국이나 일본의 존재구속성을 반영하는 일종의 리트머스 시험지였다.10
서구중심주의에 대한 사까이 나오끼의 비판은 이러한 맥락에서 시사적이다. 그는 일본문화의 특수성이나 고유성을 강조하는 학문적 시도는 궁극적으로 일본인의 뿌리찾기라는 동기에 의해 추동되어왔다고 주장한다.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미국의 일본학은 은밀히 서양인의 뿌리찾기라는 욕망에 의해 규정된 것이다. 1980년대 이후 서구 학계에서 서구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이 상식으로 자리잡았지만 이러한 비판은 서구중심주의와 마찬가지로 서구중심주의를 가능하게 한 조건인 서양과 비서양의 구별 자체를 결코 의문시한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점에서 그는 서구중심주의와 이에 대한 비판 모두가 비슷한 함정에 빠져 있다고 경고한다. 서양과 비서양이라는 문명론적·인종론적 동일성 자체가 온존된 상태에서의 서구중심주의 비판은 서양인의 자기긍정을 위한 몸부림으로, 9·11 이후 미국의 백인남성층에서 보듯이 상황에 따라서는 맹목적인 서구중심주의 긍정으로 역전되어버린다는 것이다. 그의 문제제기에 비추어본다면 자국중심주의는 단순히 그것을 비판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두 가지 방향에서 극복될 수 있다. 하나는 자아/타자의 구별을 만들어내는 차별제도 자체를 문제시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속한 집단에 대한 소속을 포기하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쳔 꽝싱은 후자의 입장과 통할 수 있고, 야마무로 신이찌나 사까이 나오끼는 전자의 방향에서 접근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점에서 보자면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의 상흔으로 점철된 동아시아의 과거청산 문제에 가장 적극적으로 의견을 표출하는 경우가 뒤의 두 사람이라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는 중국 지식인들의 이에 대한 의외의 침묵이나 무관심과는 대조를 이루는 것이다.11
사까이 나오끼는 일본인이 국민적 통합을 중요시한 나머지 그보다 훨씬 중요한 정의를 수행하는 일에 태만했다고 지적한다. 그에게 종군위안부 문제는 국민적 책임과 관련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일본의 조선 강점이나 중국 침략,난징학살에서 자행한 역사적 범죄의 유죄가능성과 응답책무의 상호성 문제를 집중적으로 논의하면서 그는 전쟁중의 침범행위에 관여하지 않은 사람들과 전후에 태어난 세대에게도 전쟁책임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국민적 책임의 문제는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짐이라기보다는 국민·민족·인종 같은 동일성을 횡단하고 미래를 향해 새로운 사회관계를 만들어내기 위한 좋은 기회이고, 식민지 지배의 문제를 정면으로 거론하는 것은 국민이 아닌 다른 입장에서 개인이 새로운 사회성을 살려나갈 가능성을 추구하는 것이며, 과거에 직면하는 일은 새로운 미래를 만들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야마무로 신이찌는 과거사 문제를 일본 역사에서 윤리적 책임과 역사인식의 문제라는 형태로 제기한다. 패전 이후 일본은 미국에만 눈을 돌려 군사에서 경제로 변신하는 데 노력을 집중한 나머지 아시아와 식민지에서의 기억이 의식에서 점차 사라져버렸다고 그는 주장한다. 근대화과정에서 일본인은 윤리의식을 상실하였으며, 이러한 망각의 문화 속에서 책임회피의 정치씨스템과 무책임한 정치문화만이 남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까이 나오끼와 비슷하게 그 역시 전쟁책임과 전후처리의 문제는 과거의 계승 책임에서 도피할 수도 미래로 떠넘길 수도 없으며, 따라서 현재의 성원들이 짊어져야 한다고 본다. 그는 자신의 망각이 상대방의 망각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식민지 지배라는 행위의 기억은, 지배를 한 것이 아니라 근대화를 시킨 것이라는 긍지에 양보해버렸고, 그러한 긍지의 표명이야말로 자신의 힘으로 독립을 성취한 사람들의 자존심을 짓밟는 작용을 했으며, 그것이 서로의 역사에 대한 이해와 화해를 가로막고 있다고 그는 진단한다. 1980년대 이후 역사적 공백을 메우고 기억을 되찾는 작업이 진행되기 시작했지만, 그것은 아시아 국가들과의 관계개선 의도를 지닌 다분히 편의주의적 발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비판한다.
과제와 전망: 동아시아의 상호소통과 연대를 위하여
‘동아시아의 비판적 지성’의 각권에 포함된 전후세대의 지식인들은 제국주의와 식민주의, 그리고 인종주의와 국가주의를 통해 발현된 근대의 전쟁·폭력·학살·차별 등과 아울러 전후 우리 시대가 당면해왔던 여러 문제들–냉전체제의 성립, 발전만능주의와 근대화 이데올로기의 지배, 사회주의혁명의 실패, 자본주의의 불평등구조 심화, 신식민주의의 도래, 미국의 세계지배전략, 지구적 자본주의와 국제자본의 세계화, 미국적 생활양식의 균질화, 생태문제와 반전문제, 가부장제와 성차별주의의 지속, 소수자에 대한 억압과 차별 등–에 대한 비판과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비록 자신이 속한 국가와 지역, 학문적 배경과 이론적 지향에 따라 우선순위와 강조점이 다르다고는 하더라도 동아시아의 차원에서 이들은 전전의 역사적 경험과 전후 동아시아의 현실을 망라하는 광범위한 문제들을 제기한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들에 적절하게 대처하며 동아시아 공동의 연대와 평화를 모색하기 위해서는 헤쳐나가야 할 길이 여전히 험난한 것으로 보인다. 유럽이 스스로를 표상하고 다른 지역과 구별하기 위해 아시아라는 용어를 만들었다는 사까이 나오끼의 언급이 시사하듯 아시아는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지배전략에 의해 대립과 분열과 반목을 거듭해왔다. 아시아 각국의 협력에 걸림돌이 되는 것은 물질적인 면이 아니라 정신적인 면에 있다는 추이 즈위안의 지적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되며, 쳔 꽝싱이 말하듯이 동아시아에서 냉전이 끝났다는 주류 인식과는 달리 포스트 냉전시대는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 동아시아에서 탈냉전은 여전히 매우 절박한 과제로 남아 있는 것이다.
냉전의 지속과 미국 헤게모니의 영향을 배경으로 동아시아 국가들은 미국의 구심력이 작용하는 권력의 장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쑨 꺼를 비롯한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동아시아 국가들 사이의 상호교류와 이해를 위한 횡적 연계의 필요성을 공통적으로 제기한다. 동아시아 내부의 문화패권과 상호경시 문제는 이들의 욕망이 미국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쳔 꽝싱의 지적에서 보듯이, 횡적 연계의 부족은 동아시아 국가들 내부에서 무관심과 몰이해, 그리고 상호 반목을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 중국과 일본 지식인들의 논의에 한국과 타이완의 입장에 대한 고려가 반영되지 않았던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시아 국가들은 유감스럽게도 상호교류와 연대를 위한 어떠한 형태의 시도도 본격적으로 해보지 못했다.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19세기 후반 이래 아시아주의를 기치로 내건 운동이 대동아공영권으로 귀결되면서 많은 지식인들이 환멸과 좌절을 맛보았고, 전후 지역통합구상은 아시아인 스스로보다는 미국을 비롯한 서구 국가들에 의해 주도되어왔다. 1990년대 이래 지구화시대의 전개로 동아시아에서 인적·물적 자원의 교류가 활발하게 되면서 백영서가 말하는 동아시아 민간인 네트워크의 활력, 혹은 쳔 꽝싱이 지적한 민간역량의 상호교류에 대한 강조에도 불구하고, 지역 차원의 통합구상이 실체화될 수 있을 만큼의 역사적 경험과 자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점은 지역통합의 성격이 추이 즈위안이 말하는 ‘아시아 협력’에서부터, 대부분의 지식인에게 화두처럼 따라다니는 ‘아시아 연대’, 혹은 쳔 꽝싱이 언급한 ‘아시아 연합’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통해 제시되는 것을 보아도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비단 동아시아 국가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국가에 대한 물신성과 국가중심주의는 오랜 동안 동아시아적 특성의 하나로 이해되어왔다. 이러한 점에서 국가나 정부 차원이 아닌 민간 차원의 상호교류와 연대를 위한 시도는 특히 동아시아에서는 어려운 과제였다.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1920~30년대 태평양문제연구회(Institute of Pacific Relations, IPR)에 참가한 지식인들이 국가로부터의 독립적인 가치를 주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지식인들조차 국가권력에 실질적으로 의존하는 경향을 보였던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당시의 싯점에서 동아시아 3국 중 유일하게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조차 비국가적 가치를 강조하는 자유주의의 기반이 얼마나 취약하고 한정적인가를 보여주었다. 이러한 점에서 “반성능력이 있는 동아시아의 비판적 지성인들이 상호교류를 시작하고 공동으로 살아 있는 역사와 인민의 기억 그리고 정감구조의 문제를 다시금 사고해야 할 때이다”(『제국의 눈』 258면)라는 쳔 꽝싱의 지적은 원칙적으로는 옳음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지식인 중심의 접근이 지니는 한계와 취약성에 대해서도 충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중국의 현실에서 지식인이 사회분업의 전문화와 사회계층의 재분화과정을 겪으면서, 개혁시대의 수혜계층으로 국가나 고용기구, 과학연구기구, 하이테크 부문, 언론 등과 결합되어, 지식층과 노동자·농민계급의 역사적 연계가 완전히 단절되었다는 왕 후이의 지적은 경청할 만하다. 중국의 사상계가 자본의 운동과정에 대한 분석과, 시장과 사회 및 국가의 상호침투와 충돌에 대한 분석을 방기한 채 자신의 시야를 도덕적 차원이나 현대화 의식틀에 묶어두는 현상을 보이는 것은 결코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쳔 꽝싱이 말하듯 아시아 각지역의 진보적 비판진영을 중심으로 민간의 역량과 자주성을 확대해 다양한 목소리가 나오게 해야겠지만, 이와 동시에 지식인들의 ‘비판’은 맥락의존적이고 존재구속적인 한계를 갖는다는 사실을 충분히 음미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점에서 그것을 상대적이고 역사적인 맥락에 위치시키면서, 시민적 차원에서의 다양한 연대의 실험과 네트워크에 대한 관심과 참여가 절실하게 요구된다. 이러한 인식이야말로 19세기 말부터 1920년대에 걸쳐 동아시아 차원에서 상호이해와 공동번영을 공공연히 천명했던 지식인들의 시도가 전쟁과 침략 그리고 대량학살의 와중에서 좌절되었던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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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아시아의 비판적 지성’ 각권은 다음과 같다. 쳔 꽝싱 『제국의 눈』(백지운 외 옮김); 쑨 꺼 『아시아라는 사유공간』(류준필 외 옮김); 추이 즈위안 『중국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장영석 옮김); 왕 후이 『새로운 아시아를 상상한다』(이욱연 외 옮김); 사까이 나오끼 『국민주의의 포이에시스』(이규수 옮김); 야마무로 신이찌 『여럿이며 하나인 아시아』(임성모 옮김).↩
- 동아시아 국가들의 다양성은 nationalism과 nation-state라는 개념을 둘러싼 다양한 번역어의 용례를 통해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한국에서 흔히 ‘민족주의’로 번역되는 이 용어를 중국의 지식인들은 국가주의, 일본에서는 국민주의, 그리고 타이완의 쳔 꽝싱은 국족주의(國族主義)로 표현한다. 국족주의라는 표현은 중국의 쑨 꺼도 종종 사용한다. 이밖에도 지구화와 전지구화, 근대성과 현대성이라는 표현도 한국·일본과 중국에서 각각 달리 쓰이고 있다. 혹은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왕 후이의 서술에서 보듯이, 동일한 용어가 각각의 사회에서 상이한 의미 내용을 가지고 유통되는 경우도 있다. 19세기 후반 이래 동아시아 국가들이 서구문명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성립된 번역어들에 대한 개념사적 연구는 동아시아 지성사의 흥미있는 탐구주제이지만, 이러한 용례의 차이는 개념사적 접근에 현재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 이 6인 중에서 추이 즈위안은 아시아 문제에 대하여 가장 소극적인 입장을 보인다. 장 모네(Jean Monnet)의 유럽통합구상을 빌려 아시아 국가들의 협력 강화에 일정한 시사를 주는 정도의 논의에 그치고 있는데, 그가 언급하는 동아시아의 협력모델은 다분히 중국의 근대화라는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아시아 자체에 대한 관심의 표출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여기에서는 그를 제외한 5인을 중심으로 논의를 진행할 것이다.↩
- 백영서(白永瑞)의 이 제안과 비슷한 맥락에서 아리프 딜릭(Arif Dirlik)은 ‘프로젝트로서의 아시아’를 말한 바 있다(백영서 『동아시아의 귀환–중국의 근대성을 묻는다』, 창작과비평사 2000, 50면의주5 참조).↩
-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 쑨 꺼는 한국인이 문제삼는 동아시아와 중국의 동아시아는 다르다고 말한다. 이런 모습에 대해 한국인과 일본인은 중국인이 자기중심적이고 중화주의적이라고 비난하곤 하는데, 이는 일면적인 비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동아시아의 개념에 대한 그녀의 입장은 모호하고 이중적이며 자기모순적이다.↩
- 예컨대 Giovanni Arrighi, “The Rise of East Asia and the Withering Away of the Interstate System,” paper prepared for the Session on Global Praxis and the Future of the World System, 90th Annual Meeting of the American Sociological Association, Washington DC, August 19~23, 1995 참조.↩
- 『아시아라는 사유공간』 83면 참조. 이 문제에 대한 그녀의 평가는 일관된 경향을 보이지 않는다. 같은 책 55면에서 그녀는 “쑨원의 「대아시아주의」를 읽어보면 예컨대 왕도(王道)에 대한 서술에서는 여전히 주변에 대한 감각적 의식이 결여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 이러한 인식의 연장에서 그는 “한국은 우리의 시야에 있지 않았다”고 하면서, 한국의 지식인들 역시 비교연구의 소수 학자를 제외하고는 타이완을 상호교류 대상에서 제외해왔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이와 같이 서로를 경시하는 풍조는 역사과정에서 식민주의가 낳은 후유증이자 냉전체제의 장벽에 부딪혀 식민주의에 대해 다시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박탈당한 채 강자의 논리만을 추구한 결과라는 것이다.↩
- 예컨대 이또오 테루오(伊東昭雄)는 오까꾸라 텐신이 “일본이 이미 구미열강의 아시아 침략에 가담하고 있는 사실에 대하여 전혀 의식하지 못하였다”고 비판한다. 자신의 사상이 서구와의 전면적인 대결은 말할 것도 없고, 같은 아시아 국가들에 대하여 지배의 논리로 전환·귀결될 수 있는 함의에 대해서도 지나치게 부주의했다고 할 수 있다(김경일·강창일 「동아시아에서 아시아주의」, 『역사연구』 제8호, 2000년 12월, 296면 참조).↩
- 19세기 후반 유럽에서 일본, 일본에서 아시아로의 서양사상의 전파를 사상연쇄의 개념을 통해서 파악하고자 하는 야마무로 신이찌에 대하여 임성모(任城模)는 서양의 충격 대신 그 매개고리로 일본의 충격을 강조함으로써 서양중심주의 비판의 의상을 걸친 일본중심주의적 견해라는 혐의를 받을 것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여럿이며 하나인 아시아』 198면).↩
- 다소의 예외로 쑨 꺼는 중국과 일본의 지식인들이 혁명과 전쟁이라는 주제로 말려들어가면 스스로도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에 자국의 민족적 입장에 동일화되고 만다고 비판한다. 비록 과거사를 본격적인 논의주제로 다루는 것은 아니지만 과거사의 피해자로서 그녀는 난징(南京)대학살이나 교과서 문제, 그리고 일본 각료의 야스꾸니신사 참배 등을 언급한다. 타이완의 쳔 꽝싱은 한국 학계에서 제기되고 있는 이른바 식민지근대화론의 타이완판이라고 할 수 있는 ‘일제 식민지배 재긍정운동’을 “실증주의 논증방식에 입각한 황당하기 짝이 없는 시도”로 비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