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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평

 

거장 앙리 까르띠에-브레쏭의 사진

 

 

김승곤 金升坤

사진평론가 dragon@fotato.com

 

 

빛과 그림자의 절묘한 균형, 화면을 디자인하는 완벽한 감각, 사람의 움직임과 위치 관계가 정점에 달하는 순간을 포착하는 ‘결정적 순간’의 신화의 중심에 서 있는 이 전설적인 사진가의 전모를 보여주는 사진집 『앙리 카르티에―브레송 그는 누구인가?』(까치 2004)가 출간되었다. 그리고 그의 죽음을 전후해서 열린 전시회 ‘앙리 카르티에―브레송: 결정적 순간’(2004.6.25~10.10, 갤러리 뤼미에르)에는 갤러리가 소장하고 있던 작품 13점이 공개되었으며, 전시기간 중 까르띠에―브레쏭에 관한 다큐멘터리 단편영화가 상영되었고, 추모 쎄미나도 열렸다.

이 사진집은 그의 95세 생일에 맞추어 기획되어 작년 4월 말부터 3개월간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열린 까르띠에―브레쏭의 대 회고전 ‘앙리 까르띠에―브레쏭, 그는 누구인가?’(De qui s’agit-il? Henri Cartier-Bresson)의 전시 카탈로그다.430면에 달하는 이 대형 사진집에는 이미 아이콘이 되어버린 그의 대표작들과 함께 아직 한번도 발표되지 않은 사진, 이십대 초에 그린 드로잉, 그의 유소년과 청년시절의 사진, ‘매그넘’(Magnum) 창립 당시의 사진, 그가 감독, 주연한 기록영화 자료,1970년대 말에 사진을 떠난 이후 몰두했던 데쌩과 회화작품 등 475점에 이르는 작품사진을 비롯해서 모두 600여점의 방대한 자료사진이 실려 있다. 지금까지 발행된 사진집과 전시도록, 포트폴리오, 신문과 잡지의 르뽀르따주, 까르띠에―브레쏭에 관한 논문, 전시회 자료 등 24면에 달하는 문헌목록이 책 뒤쪽에 붙어 있는 것도 연구자들에게는 더없이 반가운 일이다.

「죠지 6세의 대관식 날 트라팔가 광장」, 런던 1937

「죠지 6세의 대관식 날 트라팔가 광장」, 런던 1937

뉴욕 근대미술관 사진부장 피터 갤러씨를 비롯한 각 분야의 6명의 필자들이 까르띠에―브레쏭의 생애를 입체적으로 조명한 문장에서, 삐까쏘미술관장인 장 끌레르는 어떤 현상의 연속적이고 논리적인 전개를 끊어버리는 기회와 시간과 중요한 공간을 의미하는 ‘카이로스’(kairos)라는 개념을 통해서 까르띠에―브레쏭의 시공간을 분석하고 있으며, 프랑스 아카데미 수석연구원인 장 레이마리는 회화작품을, 영화평론가 쎄르주 뚜비아나는 기록영화에 관해서 적고 있다. 또 프랑스 국립도서관장 필리쁘 아르베자르는 지금까지 세계 각국의 주요 미술관에서 치러진 까르띠에―브레쏭의 전시에 관한 글을 통해서 20세기 사진사에 뚜렷한 업적을 남긴 이 예술가의 전모를 다양한 각도에서 밝혀내고 있다.

1937년에 치러진 죠지 6세의 대관식과 15년 후의 장례식을 함께 찍은 사진가는 그밖에 없다. 암살 직전의 간디와 그의 장례행렬, 내전 발발 직전의 스페인, 러시아의 해방, 중국 국민당 최후의 날 등 세계 여러 지역에서 일어나는 중요한 역사의 현장에는 어김없이 소형 카메라를 든 그가 있었다. 자신이 거기에 있을 수 있었던 것을 그는 그곳에서 ‘냄새가 나기 때문’이라고 표현했다. 그가 활동했던 1940년대에서 60년대라는 시대에는 지구상의 어떤 지역이나 그곳만의 독특한 ‘냄새’ 같은 것이 있었고, 그는 본능적으로 그것을 맡을 수 있는 날카로운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남긴 것은 시대의 증언으로서의 단순한 기록 이상이다. 그는 스딸린의 사후, 소련에서 사진취재가 허용된 최초의 서방측 사진가였다. 그러나 그의 보여준 사진은 이 폐쇄적인 국가에 대한 사람들의 궁금증을 풀어줄 만한 것이 아니라, 어느 나라에서나 볼 수 있는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적인 모습이었다.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그는 특별히 볼만한 대상이나 ‘결정적’인 의미를 가진 장면도, 또는 무엇을 찍은 것인지 이해하기 위해서 온갖 머리를 짜내야 하는 그런 어려운 사진도 찍지 않았다. 그가 잡아낸 장면은 보통 다른 사람들이라면 흘려버릴 ‘대수롭지 않은’ 장면들이다. 대관식 때 화려한 의식행렬 대신 술에 취해서 관중석 뒤쪽 바닥에 널린 신문지 위에서 쓰러져 있는 부랑자를 찍은 것만 봐도 그렇다.

현장에서의 재빠른 대응이 요구되는 조작속도와 편리한 휴대성, 많은 촬영매수, 쉽게 눈에 띄지 않는 외관(실제로 그는 번쩍거리는 은색 외관을 가리기 위해서 카메라 몸체를 검은 테이프로 쌌다)과 작은 크기 등 어느 점에서나 라이카M3는 그의 요구를 충족시켜주었다. 그는 마치 오랜 숙련을 통해서 카레이써가 본능적으로 기어를 다루듯 민첩하고 정확하게 카메라를 조작했고, 그의 표현처럼 카메라는 자신의 ‘시선의 연장’이 되었다. 그는 평생 라이카를 사용했고 일부의 풍경사진을 찍을 때를 제외하곤 50mm 표준렌즈 하나만을 고집했다.

지금은 보도사진이나 스냅사진에서 금과옥조처럼 쓰이는 ‘결정적 순간’(the decisive moment)이라는 용어는 실은 1952년에 프랑스에서 최초로 나온 그의 사진집 『재빠르게 잡은, 또는 빠져 달아나는 이미지』(Images à la sauvette)의 미국판 사진집 제목이다. 원래 이 ‘결정적 순간’은 사진집 서문에서는 단 한차례밖에 나오지 않고, 그것도 까르띠에―브레쏭 자신의 말이 아니라 레스 추기경의 말을 인용한 것이었다. 그것이 미국판에서는 번역과정에서 두 차례 그 용어가 등장하게 되었고, 서문도 프랑스판에 비해서 전체적으로 ‘순간성’이 훨씬 강조된다. 이 ‘빠져 달아나는 이미지’라는 타이틀은 그의 작품에 나타나는 상의 흐림이나 흔들림 같은 불확실한 이미지에 대한 인상에서 붙여진 것으로, 화면 구성상의 완벽함보다 오히려 불확실한 세계 가운데에서 현재 진행중인 현실의 한 장면을 포착하는 그의 방법론의 특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고 보는 사람도 많다.

「무프따르 거리」, 빠리 1952

「무프따르 거리」, 빠리 1952

그가 말하는 이른바 ‘결정적 순간’은 빠르게 변화하는 현상 가운데에서 사진가의 시선과 지성과 감성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는 기적과도 같은 순간을 의미한다. 그는 그것을 “어떤 사건을 가장 바람직한 형태로 나타내는 정밀한 형태의 조직인 동시에 즉각적인 인식이고 중요한 의미를 가진 순간의 파편”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의 사진들을 바라보며 우리는, 그가 조우하는 어떤 장면에 날카로운 일격(snap)을 가해서(shot) 대상의 움직임을 영원히 동결시키고, 어느 쪽으로 한 치만 움직여도 균형이 깨져버릴 듯한 완벽한 구성능력을 천부적으로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느낀다. 그러나 ‘결정적 순간’이 바로 다음 순간에 닥쳐올 아주 가까운 미래의 사태에 대한 예지능력의 소산이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은 순간의 시공간을 영원히 고정시키는 사진의 특성과 미국의 출판사가 만들어낸 ‘결정적 순간’의 신화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까르띠에―브레쏭에게 사진은 예술적 재능을 표현하기 위한 유일한 도구도 최종적인 목표도 아님은 분명하다. 오랜 시간이 걸리는 그림과는 달리 카메라는 즉석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스케치북과 같은 것이었다고 그는 말해왔다.1975년 은퇴한 이후 그는 실제로 더이상 라이카를 손에 들지 않았다. 그의 천재성과 위대한 업적을 기리는 사람들에게는 아쉬운 일이지만, 그가 죽을 때까지 살았던 루브르미술관 근처의 리보리 가의 아파트 3층 벽에는 자신이 그린 몇장의 드로잉과 커다란 마띠스의 그림이 걸려 있을 뿐, 사진은 단 한장도 붙어 있지 않았다. 이전에 쎄잔느와 마네가 같은 아파트의 3층과 4층에 살았다는 것도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의 명성을 확고하게 만든 작품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그 가운데에서 포도주 병을 안고 자랑스럽게 걸어오는 소년을 찍은 사진(「무프따르 거리」)이 특히 강한 인상으로 나의 뇌리에 남아 있다. 평생 남에게 사진 찍히는 일을 극도로 싫어할 정도로 붙임성이 없었던 그였지만, 그 소년의 쉰살을 맞는 생일날에는 그의 집으로 찾아가서 축하해주었다는 일화가 가슴을 쓸어내리게 만든다.

까르띠에―브레쏭의 죽음을 접한 자끄 시라끄 대통령은 “그의 시대에 가장 존경받았던 천재적인 사진가의 죽음을 애석해했다”고 한다. 한 예술가의 죽음에 대통령이 애도를 표하고, 그것이 주요사건으로 신문에 다뤄지는 것이 프랑스의 문화를 움직이는 동력이 되고 있다.

1996년 11월의 어느 흐리고 차가운 날 저녁 무렵, 빠리에 머물던 나는 우연히 30년 전에 세상을 떠난 앙드레 말로의 유해를 빵떼옹으로 이장하는 의식에 입회하게 되었다. 놀라운 일로, 추위 속에서 시라끄 대통령이 선 채로 한 시간도 넘게 말로에 대한 애도의 말을 잇고 있었다. 말을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주위에 모여 있던 사람들의 엄숙한 표정과 경건한 분위기 때문에 자리를 뜰 수 없었던 기억이 새롭다. 이 빵떼옹의 지하묘지에는 에밀 졸라, 빅또르 위고,장―자끄 루쏘, 볼떼르, 뀌리 부부 등 위대한 인물들의 관이 안치되어 있다. 당대에 아무리 위대했던 사람일지라도 적어도 30년이 지나야 이곳에 들어올 수 있고, 알렉상드르 뒤마도 탄생 200주년이 되는 2002년에야 겨우 이곳에 안장되었다고 한다.30년이 지난 미래의 어느 해 9월, 사진가로서의 까르띠에―브레쏭이 최초로 이 빵떼옹에 안장되는 날이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