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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엄원태 嚴源泰
1955년 대구 출생. 1990년 『문학과사회』로 등단. 시집 『침엽수림에서』 『소읍에 대한 보고』 등이 있음. candooo@hanmail.net
갯우렁
갯우렁은 연체동물
백합조개를 잡아먹을 때,
갯우렁은 조개에 달라붙어 가만히 있다
하지만 그건 얼핏 보았을 때
갯우렁은 빨판으로 조개껍질에
가만히 달라붙어 있는 듯하지만,
나중에 보면 백합조개의 볼록한 이마쯤에
드릴로 뚫어놓은 듯한 정확한 원형의 조그만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을 보게 될 거다
가만히 기다리고 있는 듯한 몸짓에
그러한 집요한 추궁,
뜨거운 궁구가 있었던 것
갯우렁의 먹이사냥에는
가차없는 집중력이 숨겨져 있다
너에 대한 나의 이 물컹한
연체동물 같은 그리움에도,
어디엔가 숨겨진 송곳,
숨겨진 드릴이 있을 게다
내 속에 너무 깊어 꺼내볼 수 없는 그대여,
내 슬픔의 빨판, 어딘가에
이 앙다문 견고함이 숨어 있음을 기억하라!
전도섭
하루에 오천번 절하는 사람 있다. 전도섭(46)은 길 위의 참회자이자 김밥장수. 밀리는 차들은 물론 쌩쌩 달리는 차들에까지, 그는 안타깝게도 여지없이 구십도 꺾은 공손하기 짝이 없는 허리 절을 한다. 하루에 칠천번 절한 적도 있다. 하루 오십개 파는 김밥은, 그의 절 공덕에 비하면 덤 같은 보시!
그의 집은 컨테이너 한칸. 따뜻하지만, 연탄보일러 때문만은 아니다. 김밥 잘 마는 아내 김선미(39)와 파스 잘 붙이는 아들 민주(14), 재롱둥이 딸 민영(2)과 단란하게 산다. 비록 하루 세 시간 수면, 장좌불와에 가까운 수행자의 길에 그의 생활이 바쳐진 셈이지만.
지은 죄업에 비하면, 오천배 절 보속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도섭씨. 민주와 민영의 나이차 십이년. 모르긴 해도 그 짧지 않은 터울 사이에 도섭씨의 죄업(?), 그 단초가 숨어 있을 듯하다. 어쨌거나, 그는 최근에 도익철(25)이라는 ‘절하는 김밥장수’계의 도반이자 제자까지 두었다 한다.
폭설이 몰아치는 바람 센 새벽 네시, 전라도 어딘가의 산업도로변 눈보라로 하얗게 지워진 박명의 풍경 속, 전봇대들뿐인 텅 빈 들녘 한점 가뭇한 윤곽으로 서서, 그는 이따금 승냥이처럼 외롭게 질주하며 오가는 화물차에 지극정성, 절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