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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박판식 시집 『밤의 피치카토』, 천년의시작 2004

가라앉는 부력

 

 

장석남 張錫南

시인, 한양여대 문창과 교수 sssnnnjjj@hanmail.net

 

 

밤의-피치카토

‘피치카토’(pizzicato)라는 이국의 말을 사전에서 찾았다. 현을 손가락으로 튕기는 연주법. 활로 타야 하는 바이올린에서 사용하는 기법이다. 알겠다. 아주 가끔 사용하여 특별한 효과를 내기 위함이다. 시에서는 말의 사용이 금욕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인 내게 시집의 제목에서부터 이국어이며 이렇듯 화려한 발음으로써 사전을 요구하는 것은 거북살스럽지 않을 수 없다. 피치 못할 까닭이 있어야 하겠다.

 

세상의 모든 물들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부력, 상인은

새끼를 밴 줄도 모르고 어미 당나귀를 재촉하였다 달빛은 파랗게 빛나고

아직 새도 깨어나지 않은 어두운 길을

온몸으로 채찍 받으며 어미는 타박타박 걸어가고 있었다

세상으로 가는 길

새끼는 눈도 뜨지 못한 채 거꾸로 누워 구름처럼 둥둥 떠가고

―「화남풍경」 전문

 

이 시를 읽고 나는 재빨리 샤갈 그림의 어떤 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이국 풍경이 시집 제목에 ‘피치카토’를 사용하게끔 한 모양이다. 특별한 효과를 내기 위한 연주법 말이다.

이제 막 미명의 새파란 빛이 번지기 시작하는 때 상인은 당나귀를 재촉한다. 나귀의 등에는 무거운 짐이 실렸을 것이다. 달빛 아래서 아직 어두운 길을 새끼를 밴 어미 당나귀는 타박이며 걷는다. ‘세상으로 가는 길’이다. 여기서 ‘세상으로 가는 길’은 겹을 이룬다. ‘상인’이 ‘재촉하며’ 가는 길이 그 하나요, 당나귀 뱃속의 새끼 당나귀의 길이 또 하나다. 그 생명도 곧 세상으로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시간은 공간을 안고 간다. 상인의 길이 공간의 길이라면 뱃속 당나귀의 길은 시간의 길이다. 눈도 뜨지 못한 뱃속의 당나귀가 ‘거꾸로 누워서’ 구름처럼 둥둥 떠가는 이미지는 바로 시간이 공간을 덮고 간다는 해석 영역을 함축하고 있다. 반대로 공간은 시간을 끌어안고 간다고 봐야 한다. 물론 이러한 해석엔 시를 읽는 데에 어느정도의 몽상은 필수적이라고 생각하는, 다분히 ‘자의적 해석’을 즐기는 독자의 몫이다.

상인이란 떠돌이다. 그런 의미에서 근대인의 원형이기도 하다.(작가 김남천이 「유다적인 것과의 싸움」에서 유다를 최초의 근대인으로 파악한 대목이 떠오르는데 유다가 상인이었다는 점을 첫번째로 들고 있다.) 상인은 문물을 교류하는 사람이고 같은 맥락에서 새로운 시간들을 전파하는 매개자인 셈이다. 그 상인의 세상으로의 길이니 그 의미의 무게는 결코 심상한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그런데 그 세상으로의 길이, 맨 첫행이 제시하는 ‘세상의 모든 물들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부력’으로서의 길인가 하는 점은 이 시만으로는 판단할 수 없다. 다만 ‘상인’, 상인의 짐을 싣고 채찍을 맞으면서 가는 ‘어미 당나귀’, 뱃속에서 눈도 뜨지 못한 양수(羊水)의 부력 위의 ‘새끼 당나귀’ 등 세 ‘생명’의 주체들은 하나의 끈으로 연결되고 그 연결은 시간의, 또는 삶의 국면의 세 층위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부가해서 이 여섯 행에 불과한 시의 다섯 행의 도입부에 나타나는 시옷들(세상의, 새끼를, 새도, 세상으로, 새끼는)의 발견 또한 흥미로운데 또다시 몽상을 동원해 해석해보자면 그 시옷들의 형상이 첩첩한 산과 산들 사이를 걸어나오는 어느 희미한 새벽길을 떠오르게 한다는 점이다. 시의 제목이 ‘풍경’일진대 의미만을 좇는 것이 시가 아님을 명심한다면 이 또한 결코 그냥 지나칠 수 있는 대목은 아닐 듯하다.

단순한 한폭의 이국 풍경에 불과할 수 있는 이 시를 이렇듯 근대인의 원형질 운운으로 자의적 해석의 최대치를 발휘할 수 있는 데에는 다음과 같은 시의 뒷받침이 있기 때문이다.

 

성긴 옷감과 빠진 머리카락들과 뭉쳐서 나는 잠을 잔다

비통한 안개에 둘러싸여 어둠침침한 저녁과 싸우면서

별들은 낮에도 무섭도록 환하고

빛나는 여름은 구름 위에서 쾌청한데

나는 수초를 쓰다듬는 낡은 목선의 밑창

입가에 웃음을 머금은 채 모래 속에 머리를 처박고 죽은 돌고래

나는 잠 속에서도 발가벗은 채

내 손에 닿으면 부끄러워 오므라드는 능금 하나를 꼭 쥐고 있다

실용성이라곤 조금도 없는 감정

잠의 코뜨개바늘은 감정과 육체를 꿰매어 나를 보잘것없는 몸뚱이로 만들고

파도가 빈 술병과 버려진 가정용품들과 사투를 벌이는 동안

능금은 아궁이에 지핀 붉은 불로 바뀐다

나는 짚덤불 위에 웅크리고 누워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잠든 사나이

―「장마 속의 백일몽」 전문

 

역시 몽환적이고 ‘샤갈스러운’ 이 시에 더욱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바는 ‘현실’에서 ‘원형(原型)’으로 떠밀려가려고 하는 존재의 무기력 내지 아픔이다. 떠밀려 가려고 하는 것인지 떠밀리는 것인지, 즉 능동인지 수동인지 알 수 없으나 ‘나’는 ‘성긴 옷감’과 ‘빠진 머리카락’들과 잠자는 존재다. ‘나’는 일상적 기준으로는 전혀 쓸모없는 최하급의 사물들일 뿐이고 다시 그것은 일상과 좀더 먼 차원으로 간격이 멀어져서 ‘수초를 쓰다듬는’ 목선의 밑창이 되고 또 웃음을 머금은 채 모래에 머리를 처박고 죽은 돌고래가 된다. 이 사물들은 일상의 이면이라고 말할 수 없는 일상 ‘저편’의 사물들인데 박판식(朴判植) 시의 특징은 바로 이러한 점에 가장 잘 드러난다. 보통은 현실이나 일상을 들여다보고 나서는 그 시선이 그 이면으로 향하는 것이 통상적인 시적 인식의 방향인 데 비해 그의 시선은 곧장 ‘저편’으로 이월해간다. 그 이월은 다시 한번 몽환적 이미지로 변주된다. ‘내 손에 닿으면 부끄러워 오므라드는 능금 하나를 꼭 쥐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그것이다. 인간의 손이 아닌 시간의 손이라고 봐야 성립될 수 있는 이 몽환은 정상적인 인식이라고 할 수는 없다. 바로 이 비정상적인 인식이야말로 이 화자가 가려고 하는 ‘원형적 세계’의 손이 아닌가 싶다. 그 점은 그전에 ‘벌거벗은 채’라고 하는 정황을 전제로 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모든 헛것들을 벗겨내고 난 후 순정한 세계의 손이 능금을 만지면 능금은 제 사물의 속성처럼 붉게 물들며 부끄러워하고 또 시간의 침식을 받아 오므라들게 마련인 것이다. 바로 그러한 ‘벌거벗음’ 때문에 그 손은 ‘실용성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감정’의 편린들이라고 고백한다. 실용성이란 무엇인가? 바로 저 앞에 인용된 시에서 ‘세상으로 오는 길’을 이끌던 ‘상인’의 핵심적 사항에 해당되는 덕목이 아니던가? 그러나 그러한, 실용성이 탈각된 감정의 자각 이후에도 그 감정은 버려지는 것이 아니고 되레 더 진전해나간다. 손에 쥔 능금이 ‘아궁이에 지핀 붉은 불로 바뀌’는 것이다. 그렇게 진전하게 하는 과정엔 다음과 같은 구절이 가로놓여 있다. ‘파도가 빈 술병과 버려진 가정용품들과 사투를 벌이’는 과정이 바로 그것이다. 이 이미지야말로 가장 사실적이고도 극적으로 박판식 시의 몽상을 떠받드는 의미층의 직접적인 토로라고 봐야 될 것 같다. 술병과 가정용품들이 떠밀리는 바닷가에서 그것들과 사투를 벌이는 것이 다름아닌 시간 또는 순리로 표상되는 ‘파도’라고 하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문명과 원형, 일상과 자연, 현실과 몽상 등등의 대립적 존재들의 싸움의 층위를 숨기면서 보여준다. 더구나 ‘사투’라니! 이 ‘사투’는 수사가 아니라 실제다! 그럼에도 그 드러냄은 감쪽같이 몽환적이어서 이 이미지 위로 그냥 미끄러지는 독법으로는 박판식의 시는 그저 허황한 병적 낭만의 세계로 침몰해버리는 것이 되기 쉽다.

바다는 모든 생명들의 근원이다. 그 근원이 바로 생명을 부력으로써 들어올리는 것이다. 앞서 인용된 시의 ‘모든 물의 아름다운 부력’이라는 구절은 이 시와는 이렇게 만나고 있다. 손에 쥔 능금이 아궁이의 불로 바뀐다는 것은 확대하면 자신의 손이 아궁이로 들어가 불타는 것이다. 이어진 ‘나는 짚덤불 위에 웅크리고 누워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잠든 사나이’가 되어 있다. 곧 이 사나이는 불에 탈 것이다. ‘장마 속의 불’(제목이 ‘장마속의 백일몽’이다)이라는 사실은 그 원형질의 본능이 어느만큼 깊게 닿아 있는지를 보여주지 않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판식의 시는 아슬아슬하다. 그 아슬함이 가장 큰 매혹이지만 현실이든 몽환이든 어느 한쪽으로 치우칠 때 그것은 허망해지기 쉽다. 그 아슬아슬한 백일몽이 병이 아니길, 세상의 모든 병은 고통과 마비와 파멸을 낳는다는 사실 앞에 우리 문학의 독특한 이 감성이 지속되길 바라 마지않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