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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이세기 李世起
1963년 인천 출생. 1998년 『실천문학』 신인상으로 등단. halmibburi@hanmail.net
백령도에서
저 숭숭하게 파헤쳐진 산허리
분계선 가까운 곳에 눈보라는 와서
산 정상의 군막사를 덮고
얼어붙은 길을 지우고
출동 대기중인 군용트럭과 초병의 판초 위에 눈보라는 친다
그 어떤 비애가 날아와 초병의 눈빛처럼
저 스스로 빛나는 것인가
그 어떤 침묵이 날아와 분계선을 지우고
저 스스로 길을 지우는가
아시아의 근대성엔 자비가 없다는 것을
나는 백령도 숭숭하게 파헤쳐진 산허리를 보며
바닷가 완강하게 쳐진 철조망을 보며
낮게 웅크린 슬레이트 지붕의 오랜 침묵을 보며
보이지 않는 북방한계선의 이데올로기를
이데올로기를 본다
다시 눈보라는 몰아치고
해안가 철책선 너머 장산곶이 멀지 않은 곳에서
눈보라는 날아와
출동 대기중인 군용트럭마냥
나는 길을 잃었다
모든 길엔 사위가 없구나
또 눈 덮인 길들은 어디로 향하는가
꽝꽝 얼어붙은 길가 모감주나무 가지엔
검은 비닐만 나부끼고
내 애비의 이 가는 소리와 코곪과 술주정을
보고 보아왔던 바다 위에
눈보라가
눈보라가
북방한계선에 눈보라가 몰아친다
동막에서
동막 조개고갯길 뒤울가
돼지우릿간이 오랜 비바람을 맞고
머위의 꽃대궁이 흔들리던
동막으로 가는 길은 이젠 없다
낮은 구릉의 애기진달래와 개울가 갈대 살부비던
동막 옛길과
소금기 어린 어촌계와 염창
갯가에 모여 머리에 수건을 동여매고
햇동죽을 캐며
갯것을 해먹던 겨울 시린 입김들
조갯더미 조갯길을 따라
바다로 난 고갯길을 넘으면
동막인데
저런, 동막이 사라졌다
바람만이 여전히 동막이라는 이름의 마을과
갯벌을 기억하며
지금은 동막 전철역 표지판으로 남아
아파트촌의 불빛을 바라볼 뿐
비오리떼 날아오던,
동막이 사라졌다
港口 2
부둣가
연백아즈마이 복아지집
대낮부터 술에 절은 사람 하나이
고향이 연평도라 했던가
열여섯 화장이 바다라고
이맛살만은
어진 물살 같은
뱃놈
애비야
✽ 화장(火匠): 배에서 밥 짓는 일을 맡은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