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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계선림 『우붕잡억』, 미다스북스 2004

문혁의 비극과 기억의 정치학

 

 

이욱연 李旭淵

서강대 중국문화전공 교수 gomexico@sogang.ac.kr

 

 

우붕작업

문화대혁명(이하 문혁)이 끝난 지 30여년이 되지만, 문혁에 대한 해석과 기억은 여전히 중국공산당과 정부의 강력한 통제를 받고 있다. 그 시대의 모든 것은 중국의 발전에 의미가 없다고 규정하고, 그 규정에 어긋나는 문혁 연구는 인정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문혁 관련 학술토론회도 공식적으로 일절 금지되어 있다. 마오 쩌뚱 시대를 청산하고 현대화와 사회주의 시장경제 노선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방향에서 문혁 기억이 통제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지식인들, 특히 문혁 시기에 수난을 당한 지식인들의 기억은 민간의 기억으로서는 유일하게 폭넓게 유통되고 있다. 마오 쩌뚱 사회주의 시기에 중국 지식인들은 가장 고초를 겪으면서 자기정체성을 부정당한 계층이어서 다른 어느 계층보다도 마오 쩌뚱 사회주의를 부정적으로 평가할 수밖에 없다. 문혁이 끝나고 쏟아져나온 지식인들의 문혁 기억은 대개 마오 쩌뚱 사회주의를 절대부정하는 가운데 현대화와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절대긍정하는 이분법이 기본구도를 이루고 있고, 이는 지식인들의 문혁 기억이 민간의 기억으로서는 유일하게 유통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계선림(季羨林, 지 셴린)의 『우붕잡억(牛棚雜憶)』은 지식인으로서 몸소 체험한 문혁에 대한 기억의 전형이다. 지 셴린은 “개혁개방 정책이 실현된 지 10년 만에 놀라운 성공을 거두”고,“경제는 번영하고 인민들이 즐거워”한다고(362면) 보는 개혁개방정책에 대한 절대지지 속에서 문혁의 경험을 반추한다. 그 지평에서 문혁은 문화도 없고 혁명도 없던 10년 재앙이고(303면), ‘세계 어느 국가의 지식인들도 따라올 수 없는 오랜 애국주의 전통을 지니고 있는 중국 지식인들이 정말 어처구니없게도 학대받던 시기’이자 ‘노동자들이 지식인을 학대한 시기’다. ‘문혁 가해자〓악인·도덕적 파탄자·기회주의자, 문혁 수난자〓선인·도덕적 인격자·애국적 지식인·진정한 맑스주의자’로 보는 이분법은 문혁 기억을 구성하는 가장 보편적인 형식인데, 이 책은 그런 전형적인 기억을 생생하게 다시금 확인해주는 데 의미가 있다. 저자 말대로 선비는 죽일 수는 있어도 모욕을 줄 수는 없는 법인데, 자기 제자들이 들이닥쳐 집을 털고 책을 불태우고 스승의 얼굴에 침을 뱉고 손찌검을 한, ‘삼겁을 지나 삼생한 뒤라도 잊을 수 없는’ 굴욕과 모멸의 경험이 산문가이기도 한 저자의 문장력에 힘입어 매우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문혁의 광기와 공포를 간접체험하기에는 다른 어떤 문혁 기억보다 효과적이다.

그런데 이 책은 그런 전형적인 문혁 비극에 대한 체험 못지않게 문혁의 비극을 좀더 다른 각도에서 음미해볼 여지도 제공하고 있다. 원래 지 셴린은 산스끄리뜨어에 능한 인도철학, 불교철학의 세계적 권위자로서 중국 학계의 국보급 학자이고, 오랫동안 뻬이징대학 동방학부 주임을 지냈으며 칭화대학 부총장도 역임했다. 지 셴린은 사실 전형적인 학자이고 정치에는 문외한이다. 그런 사람이 문혁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정치적 당파성을 지녀야 하고 정치적 격랑에 휘말리면서 학문과 인격, 삶 등 모든 것을 상실하게 된다. 저자가 겪은 그러한 재앙과 인생의 손실은 그 혼자만 겪은 것도 아니고 문혁 시기에 국한된 것만도 아니다. 그것은 넓게 보면,인간 삶과 인간관계가 오직 정치적 당파성만으로 재단되고, 하루하루 살아간다는 것이 정치투쟁의 연속이던 사회가 지불해야 하는 손실이자 재앙으로, 이는 현대 중국의 비극을 그대로 상징한다.

지 셴린은 이 책을 쓰게 된 동기가 두려움과 슬픔, 외로움 때문이라고 했다. 두려움은 ‘문화대혁명이라는 연옥’을 증언하고 그것을 반면교사로 삼아 이제는 한층 더 위대한 국가를 건설해야 하는데(303면), 사람들이 문혁의 비극을 잊어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슬픔과 외로움은 자신이 문혁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는데도 한점 이해나 동정조차 얻지 못하는 것이다(33면). 그런데 결과로 보면 문혁의 비극을 상기시키려는 목적은 충분히 달성되었다고 볼 수 있지만 저자가 느끼는 외로움과 슬픔이 이 회고록으로 위로받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왜 그런가 하면, 저자가 문혁을 회고하는 것이, 기본적으로 자기합리화에 토대를 두고 있고, 홍위병들에게 수난을 당한 체험은 넘치지만 자신도 한때나마 문혁 세력의 일원으로 참여한 데 대한 자성은 상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이다.

책에 따르면 저자가 비판을 당한 것은 1967년 11월 이후이다. 문혁이 시작된 1966년 6월부터 그때까지 저자는 “비교적 수월하게 부르주아 반동학술권위 단계를 넘어”(77면)간다. 일반적으로 우리 인상 속에 남아 있는 잔혹한 폭력은 대부분은 문혁 초기인 이른바 ‘붉은 여름’으로 불리는 1966년 여름에 집중적으로 일어났다. 그리고 그런 행위의 주역은 ‘노홍위병(老紅衛兵)’들이었다. 이들은 대개 혈통이 좋은 혁명가정 출신들로 이른바 ‘반동적인 부르주아 학술권위자’로 지목된 사람들에게 가공할 폭력과 린치를 가했다. 문인과 지식인들의 자살이 집중적으로 일어난 것도 이때다. 저자가 ‘수월하게’ 이 단계를 넘어간 것은 홍위병 조직의 하나인 ‘정강산파(井崗山派)’에 가입하여,“모(毛)주석의 혁명노선을 보위하기 위해 뼈가 부서져도 물러나지 않겠다”(104면)고 맹세한 때문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마오 쩌뚱의 지지를 받은 이른바 ‘조반파 홍위병(造反派紅衛兵)’이 세력을 확장하고 그 조반파 홍위병 조직이자 정강산파와 대립했던 ‘신북대공사(新北大公社)’가 뻬이징대의 헤게모니를 쥐게 되면서 저자는 위기를 맞게 된다. 투쟁의 방향이 ‘자본주의 노선파’ 즉 주자파(走資派) 타도투쟁으로 모아진 가운데 정강산파의 일원으로 “대자보도 붙이고 연설하며 신북대공사를 공격”(105면)하였던 저자가 주자파로 몰려 고초를 겪은 것이다. 저자의 언급을 토대로 전후 정황을 종합해보면 그렇다. 물론 저자가 정강산파에 가담했다고 하여 극단적인 파괴활동에 참여한 것은 아니지만, 그가 어쨌든 정강산파의 고위인사였다는 점에서 문혁 시기에 두 조반파가 대립한 데 따른 일방적 희생양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저자의 체험이 유명작가 빠 진(巴金)이 쓴 문혁 수난 체험기와 사정이 다른 것도 이와 연관되며, 저자의 문혁 기억이 아쉬움을 남기는 것도 바로 이 점 때문이다. 문혁 시기 홍위병, 특히 자신의 반대편에 있던 조반파 홍위병에 대한 단죄는 추상같지만, 한때나마 그 비극의 시대와 공생한 자기 삶의 어두운 그림자를 고통스럽게 드러내는 자기해부가 부족한 것이다. 저자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는데도 남들로부터 동정이나 이해를 받지 못해서 슬픔과 외로움을 느끼는 것도 크게 보면 여기에서 기인한다고 할 것이고, 이 때문에 저자가 문혁을 비판할 자격이 있는지에 대해 중국에서 여전히 논란이 있으며, 저자의 기억이 갖는 정치성을 두고 시비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최근 중국의 주목할 만한 사회현상 중의 하나는 문혁에 대한 기억이 분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문혁에 대한 기억이 연령별로, 계층별로 다양하게 분화하면서 국가와 지식인들이 공동으로 주조한 단일한 문혁의 기억을 균열내고 있다. 문혁 기억을 둘러싼 정치적 투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흐름을 감안하면 『우붕잡억』은 문혁의 비극을 재확인시켜줄 뿐만 아니라 문혁 기억이 개혁개방 이후 중국에서 어떻게 주조되고 어떤 역할을 하는지, 그 기억의 정치학이 갖는 의미도 돌아보게 하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