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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튤립, 자본주의 광기의 꽃

M. 대시 『튤립, 그 아름다움과 투기의 역사』, 지호 2002

 

 

주경철 朱京哲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joukc@snu.ac.kr

 

 

네덜란드는 최근에 히딩크 감독과 월드컵 축구 때문에 온 국민의 열화와 같은 사랑을 받고 있지만 사실 이미 오래 전에 우리의 주목을 받았어야 마땅한 나라이다. 우리가 서양을 공부할 때 으레 마음에 두는 나라는 미국·영국·프랑스·러시아 같은 ‘큰 나라들’뿐이었다. 우리도 언젠가 그 나라들처럼 초강대국의 반열에 오르고 ‘세계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그렇지만 사실 우리가 진지하게 탐구해보아야 할 나라는 네덜란드와 같이 작지만 강하고 행복한 나라, 강대국들 사이에서도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나라일지도 모른다.

네덜란드는 근대 서구세계의 선두주자였다. 종교적 관용과 시민적 자유에 가장 먼저 눈뜬 나라였고, 일찍이 농업·공업·국제무역·금융 등 거의 모든 면에서 다른 나라들을 압도한 선진 자본주의 국가였다. 그렇지만 가장 앞선 국가였기 때문에 또한 가장 먼저 근대사의 병폐를 겪었던 나라이기도 하다. 마이크 대시(Mike Dash)의 『튤립, 그 아름다움과 투기의 역사』(정주연 옮김)가 다루는 것이 바로 최초의 자본주의적 투기 열풍이라 할 수 있는 네덜란드의 ‘튤립 광기’(Tulipomania, 이 책의 원제)이다.

117-464톈샨(天山)산맥의 구릉지대가 원산지인 튤립이 오스만투르크 제국을 거쳐 16세기 후반 유럽에 전해졌을 때 이 꽃은 우선 식물학자의 실험용 정원 같은 곳에서나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었을 따름이다. 그러나 다른 꽃과는 다른 독특한 모양과 강렬한 색깔이 왕실 사람들과 고위 귀족의 눈에 띄면서 이 꽃은 귀족취미의 대상이 되었고 곧 이를 모방하려는 부유한 부르주아들에게 고상한 취향의 상징이 되었다. 몇가지 생물학적인 특징으로 인하여 강렬한 색깔을 가진 희귀 품종들이 생겨났지만(역설적이게도 그 화려한 색깔은 바이러스 감염의 결과로 생겨난 것이다) 그런 고급품에 대한 수요를 충족시키기 어려웠으므로 가격이 급등하게 되었다. 꽃의 아름다움을 즐기기보다는 그것을 이용해서 큰돈을 벌려는 사람들이 시장에 뛰어들자 몇년 안에 꽃값은 천정부지로 치솟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엄청난 튤립 가격에 대한 재미있는 사례들이 많지만 가장 구체성 있는 한가지만 인용하도록 하자. 튤립 광기가 최고조에 도달하기 직전인 1636년 12월경에 나온 한 팜플렛에 의하면 튤립 구근 하나의 가격이 3천 길더에 이르렀는데, 이 액수의 돈으로는 돼지 8마리, 황소 4마리, 양 12마리, 밀 24톤, 호밀 48톤, 와인 2통, 맥주 600리터, 버터 2톤, 치즈 450킬로그램, 은 술잔, 옷감 1팩(108킬로그램), 침대 하나 거기에다 배 1척을 살 수 있었다. 꽃 한송이 값으로 이 모든 것을 한번에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하루 12시간씩 일하면서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던 소상인과 장인들이 전재산을 처분하여 꽃을 재배해보겠다고 달려든 것도 무리가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달려들수록 값은 계속 올랐다. 아직 손안에 돈을 직접 만지지는 못했지만 누구나 장부상으로는 엄청난 액수를 벌었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바람장사’(windhandel)라는 별명을 가진 자본주의적 투기의 특징이다. 바람이 한없이 계속 불어준다면 누구나 행복하게 돈을 벌겠지만, 모든 것에는 끝이 있는 법이다. 꽃값이 올라도 너무 올랐다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할 무렵인 1637년 2월 첫째 화요일, 며칠 전만 해도 여러 사람들이 사지 못해 안달하던 고품종 튤립을 이제 누구도 사려하지 않고 오히려 모든 사람들이 빨리 처분하려고만 하였다. 곧장 투매가 시작되었다. 단 며칠 새에 가격이 백분의 일로 떨어졌다. 택시 잡히고 빌린 돈으로 마권을 샀다가 차만 날린 기사 아저씨, 남편 몰래 집 팔아서 주식시장에 뛰어들었으나 불행하게도 막차를 탄 아줌마처럼 우리에게 낯익은 풍경이 도처에서 벌어졌다.

아름다운 꽃, 튤립의 그림자 속에서 우리는 근대 서구의 중요한 현상들을 차례로 읽어낼 수 있다. 16세기부터 각국에서 유행하던 식물원 건설은 자연에 대한 과학적인 관찰과 분석을 시도하고 더 나아가서 전세계 자연자원에 대한 체계적인 분류와 이용 가능성을 타진하는 ‘생태제국주의’의 전조였다. 신흥 부르주아들의 청교도적인 심성 이면에는 그들의 부를 과시함으로써 위쪽으로는 귀족들, 아래쪽으로는 하층민들과 자신을 구분하려는 계급적 열망이 감추어져 있었다. 반면 근대 자본주의사회의 불안정한 번영 아래에는 극심한 빈곤에 시달리는 대다수 서민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엄청난 규모의 연쇄 파산의 뒤처리 과정에서 사법당국이 판결을 회피함으로써 결국 힘있는 사람들의 책임을 덜어주는 장면을 보면 근대국가에서 법이 어떤 기능을 하는지 알게 된다. 그리고 근대 서구사회는 표면적으로 매우 이성적인 모습을 보이지만 어느 순간 그 속에 내재해 있던 광기가 소용돌이치며 폭발해 나올 수 있다는 점도 다시 공감하게 된다.

근대 자본주의사회의 핵심 사항은 투기라는 브로델(F. Braudel)의 설명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이 사회에서 큰돈을 버는 사람은 하루하루 성실하게 일하며 저축하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개미들이 노력한 결과가 쌓이는 지점에 소수의 사람들이 모여들어 투기판이 벌어지고 이 싸움판에서 승리한 극소수의 사람들이 부를 따 가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일종의 도박이다. 그것은 결코 합리적이지 않다. 17세기의 튤립 광풍, 1929년의 대공황, 20세기 말 세계를 강타한 외환위기 같은 것들이 모두 카지노 자본주의의 계보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나름대로 그런 식의 의미부여를 해가면서 이 책을 재미있게 잘 읽어나갔는데, 제일 마지막 부분에 가서 그만 화가 치밀고 말았다. 튤립 이후에도 히아신스, 달리아 같은 꽃들---그리고 물론 토지와 석유, 각종 상품들까지---에 대한 투기가 벌어졌다는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런데 저자가 마지막에 든 사례와 그 설명이 영 맘에 들지 않는다. 1980년대 중국에서 일어났던 석산(石蒜)이라는 꽃에 대한 투기를 이야기하면서 튤립 광기라는 바이러스가 드디어 고향으로 되돌아갔다는 것이다. 꽃이 무슨 죄가 있겠는가, 그것을 가지고 온갖 장난을 친 사람들이 문제지. 중국에서 유럽으로 건너간 것은 아름다운 꽃일 뿐, 거기에 투기를 벌이는 광기는 문명사회 보편적인 현상이든지, 굳이 고향을 찾는다면 차라리 유럽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