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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동아시아의 변화, 한국사회의 대응

 

동북아시아 공동의 집과 역사문제

 

 

와다 하루끼 和田春樹

일본 토오꾜오대학 명예교수. 많은 저서 중 『한국전쟁』 『역사로서의 사회주의』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 『동북아시아 공동의 집: 신지역주의 선언』 등이 국내에 소개된 바 있음. 원제 「東北アジア共同の家と歷史問題」. fwjg0575@nifty.com

ⓒ 和田春樹 2005 / 한국어판 ⓒ (주)창비 2005

 

 

1

 

2005년을 맞이해 동북아시아에서는 돌연 지역주의 구상이 중요한 논의대상으로 떠오르고 있다. 일본에서는 ‘동아시아 공동체’에 관한 논의가 한창 진행중이다.

졸저 『동북아시아 공동의 집: 신지역주의 선언(東北アジア共同の家:新地域主義宣言)』(平凡社)이 토오꾜오(東京)에서 출판된 것은 2003년 8월이지만, 일본에서의 반응은 극히 미약했다. 신문사나 통신사 가운데서 서평으로 소개한 것은 쿄오도오(共同)통신사뿐이었다. 한국어 번역이 나온 2004년 6월, 서울의 각 신문사가 경쟁하며 서평을 실어준 것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작년 11월에는 전 외무성 과장으로 OECD 사무차관을 역임한 타니구찌 마꼬또(谷口誠) 씨가 이와나미(岩波) 신서로 『동아시아 공동체: 경제통합의 향방과 일본(東アジア共同體:經濟統合のゆくえと日本)』이라는 책을 냈다. 좀 시야가 좁은 책이라는 아쉬움은 있지만, 이 책의 출판은 시대의 변화를 알리는 것이었다. 2005년 연두에는 신문지상에서 ‘동아시아 공동체’라는 말이 자주 등장했다. 아사히(朝日)신문 새해 벽두의 사설은 ‘동아시아 정상회담’이 열리는 올해를 ‘동아시아 공동체 원년’이라 부르는 목소리가 있다고 소개했다.

‘동아시아 공동체’라고 일컫는 것이 주장된 것은 2001년 11월 ASEAN+3, 즉 동남아시아 국가연합, 중국·일본·한국의 정상회담에서 위임받은 연구그룹이 「동아시아 공동체를 향하여: 평화·번영·진보의 지역」이라는 보고서를 제출한 것이 최초였다.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시작하고 있다. “우리들 동아시아의 민중(the people of East Asia)은 지역 안 모든 국민의 전면적인 발전에 기초를 두고 평화·번영·진보의 동아시아 공동체(East Asian community)를 창조할 것을 희구한다.”

꿈같이 여겨졌던 이 제안이 급속히 동남아시아 국가 정상들에게 받아들여져갔다. 일본의 코이즈미(小泉) 수상은 2002년 1월 싱가포르에서 일본과 아세안의 협력을 기초로 ‘함께 걸으며 함께 나아가는 커뮤니티’를 구축할 것을 주장하고, ASEAN+3에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를 포함하는 진일보한 제안을 했으나, 그다지 지지받을 것으로 여겨지지는 않는다. 한편, 이제까지 지역협력에 소극적이던 중국이 적극적으로 변하면서 ‘동아시아 공동체’를 지지했고, 이에 위기감을 느낀 일본 외무성은 2003년 12월 토오꾜오에서 일본·아세안 정상회담을 개최하고, ‘새천년에 있어서 약동적이고 영속적인 일본과 아세안의 파트너십을 위한 토오꾜오 선언’을 내놓았다. 일본은 아세안 국가들과 더불어 ‘동아시아 지역의 창조’에 공헌하고, ‘동아시아 공동체를 위한 동아시아 협력의 심화’를 도모할 것이라고 정식으로 약속했다. 구체적으로는 ASEAN+3의 프로쎄스(process)가 ‘중요한 경로라는 인식’을 전제로, 이 프로쎄스 위에 “보편적인 규칙과 원칙을 존중하면서 외향적으로 풍부한 창조성과 활력이 넘치고, 상호이해와 아시아의 전통과 가치를 이해하는 공통의 정신을 지닌 동아시아 공동체 구축을 추구한다”고 하였다. ASEAN+3의 중요성과 ‘아시아의 전통과 가치’를 강조한 점에서 아세안 국가들이 지향하는 바에 부합한 ‘동아시아 공동체’를 표명했던 것이다. ‘동아시아 공동체’를 지향한다는 국가의 중대사를 국민에게 단 한마디 상의도 없이 결정한다는 것은 놀라운 이야기지만, 일본정부는 중국을 주시하며 아세안 국가들의 움직임을 뒤쫓기 위해서 그만큼 필사적인 듯하다.

이보다 앞서 2003년 9월 중국에서 ‘동아시아 싱크탱크 네트워크’(NEAT) 창설을 위한 회의가 개최되어, 그 사무국이 중국사회과학원에 설치되었다. 이 움직임에 크게 당황한 것은 일본 싱크탱크의 대표로 뻬이징(北京)회의에 참석했던 국제포럼 이사장 이또오 켄이찌(伊藤憲一)씨였다. 이또오씨의 주도로 정부의 외무성과 협의하여 2004년 5월 18일에 민관합동의 일본 동아시아공동체평의회가 출범했다. 회장에는 나까소네(仲曾根)전 수상이 취임했고 의장은 이또오씨가 맡았다. 일본국제포럼, 일본국제문제연구소, 평화안전보장연구소, 종합연구개발기구(NIRA), 환(環)일본해경제연구소 등의 싱크탱크 대표, 토오꾜오대학 교수 타나까 아끼히꼬(田中明彦), 정책연구대학원 교수 아오끼 타모쯔(靑木保), 경제산업연구소장 요시또미 마사루(吉富勝)씨 등 식자층과 기업 대표 70여명 정도가 모였다. 2005년 봄에는 타나까 아끼히꼬와 아오끼 타모쯔를 각각 주사(主査)와 부주사로 한 태스크포스(task-force)가 ‘동아시아 공동체 구상의 현황·배경과 일본의 국가전략’이라는 보고서를 제작한다는 목표를 내세웠다. 이상한 점은 아사히신문이 이에 관해 전혀 보도하지 않았고, 요미우리(讀賣)신문은 겨우 11줄의 작은 기사로 처리했으며, 산께이(産經)신문만이 아쉬우나마 그런대로 보도를 했다는 것이다.

외무성에선 타나까 히또시(田中均) 심의관이 이끄는 아시아지역정책과가 평의회에 참가했다. 이 평의회의 제1회 정책본회의가 6월 24일에 외무성에서 개최되어 타나까씨가 보고했다. 그는 동아시아 공동체의 필요성을 세 가지로 나누어 지적했다. 첫번째는 ‘일본의 중장기적인 국익이 기대된다’는 것, 두번째는 ‘중국과 협력해갈 씨스템을 만들 필요성이 있다’는 것, 세번째는 ‘표적이 없는 내셔널리즘’ ‘대단히 불건전한 내셔널리즘’의 횡행을 억제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으로, ‘동아시아 공동체라는 것은 그런 내셔널리즘을 더욱 건설적인 방향에서 흡수해나갈 하나의 운동이 아닐까’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구체적으로는 ‘위협의 삭감’과 ‘상호의존관계의 확대’가 필요하며, 기능주의적인 접근방법, 제도적인 접근방법, 일체감을 양성해가는 접근방법을 제안하고, 마지막에는 콘쎕(concept) 만들기와 멤버 문제에 관해서 고민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전망했다.

타나까씨는 북일국교교섭을 담당한 외무성에서 가장 탁월한 전략가로, 이 보고서에서도 진지한 의욕을 드러내고는 있지만, 이상하게도 ‘동아시아’와 ‘동북아시아’의 결합에 대해서는 명확한 사고가 나타나 있지 않다. 또한 중국과의 대화·협력을 어떻게 해갈 것인가에 대해서도 명확한 방침이 제시되어 있지 않았다. 이 점은 이 평의회 이후의 토의에서도 해결되지 않은 것 같다.

‘동아시아 공동체’가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한·중·일에 의해서 이뤄지는 것이라면, 그 지리적 범위는 그야말로 ‘대동아공영권’과 다름없다. 그렇다면, 과거의 그 꺼림칙한 이미지를 완전히 불식한 새로운 지역의식에 입각해 새로운 ‘동아시아’ 지역, ‘동아시아 공동체’(일본), ‘동아협동체’(중국·한국)를 만들어내지 않으면 안된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한국·중국과 일본의 화해, 상호이해, 협력이 근본이 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그러나 코이즈미 수상은 야스꾸니신사(靖國神社) 참배에 집착하고 있어, 중국 방문이 아직도 거절당한 상태이다. 그리고 최근에는 중국과 일본 사이의 심리적인 소외가 진행되어, 우익적인 세력은 중국에 대한 ODA(정부개발원조)를 축소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그런 상태이기 때문에 ‘동아시아 공동체’를 당당히 국민 앞에서 논의할 수 없는 것이리라.

지난날의 일본은 조선을 합병하여 조선인의 황국신민화를 추진했고, 만주국을 건설한 후 ‘일본·만주·지나’의 제휴, ‘동아협동체’ 건설을 중국에 촉구했다. 당연히 중국인에게 거부당하자 일본은 ‘동아신질서’를 언급하기 시작했고, 동남아시아에서 전쟁을 확대하고 ‘대동아공영권’ 건설을 제기하기에 이르렀다. 그 부정되어야 할 역사를 상기한다면, 남북한과 더불어 중국과 진실로 협력하여, 아니 오히려 중국을 중심으로 ‘동아시아’를 건설한다는 태세가 아니면 안될 것이다. 한국·중국과 마음을 연 협력관계를 확립하지 않으면, ‘동아시아 공동체’는 얻어질 수 없을 것이다.

두번째 문제는 ‘동아시아’와 ‘동북아시아’의 관계이다. 동아시아공동체평의회 회장 나까소네씨는 지난 1월 9일자 요미우리신문의 기고문에서 2005년 일본의 국가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현대에는, 다음에 성립할 ‘헤이세이(平成)헌법’과 현재 동아시아에서 자유무역협정 망(網)이 전면적으로 성립됨에 따라서 수반될 ‘동아시아경제협력기구’와 ‘미일안보조약’에 의한 21세기 새로운 일본이 출현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헌법개정, 미일안보, 그리고 동아시아 공동체를 나열하여 언급하였다. 이것은 실로 진솔한 희망을 설명한 것이지만, 이것으로는 ‘동아시아 공동체’가 매력있는 것이 되지 않을뿐더러, 이 정도의 자세로는 ‘동아시아 공동체’가 애당초 성립될 리도 만무하다.

‘동아시아 공동체’를 고민하는 아세안 국가들은 미국을 포함시킬 생각은 없다. 일본측에서도 동아시아공동체평의회의 토론에서 하따께야마 노보루(磠山襄) 전 통산성(通産省) 심의관은 미국을 “동아시아 공동체에 포함시킬 필요는 물론 없다”고 발언하고 있으며, 케이오오(慶應)대학의 소에야 요시히데(添谷芳秀) 교수도 “미국을 멤버로 넣지 않는다는 것은 거의 합의된 점이라 생각한다”고 밝히고 있다. 즉, ‘동아시아 공동체’에 미국을 포함시키지 않는 방향이 우선의 출발점이 되어 있다. 이것은 동아시아 국가들과 미국의 관계에 미묘하면서 의미있는 변화를 초래할 것이 틀림없고, 그 변화가 좋은 일이라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 안전보장도 경제도 미국이 있고 나서의 동아시아, 미국에 전적으로 의지해온 동아시아에서 탈피하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까소네씨의 비전은 ‘동아시아 공동체’까지는 나아가지 않은 채 ‘동아시아 경제협력기구’라는 정도에 한정되어 있으며, 헌법을 개정한 일본이 미국과 더욱 일체화하는 것을 통해 동아시아의 안전보장을 담당하려는 것인 듯하다. 이는 중국과 대항하는 길, ‘동아시아 공동체’에 대립하는 길이 아닌가.

물론 미국과의 관계가 지극히 중요하다는 것을 일본에서는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며, 전혀 다른 의미에서 북한(원문에는 ‘北朝鮮’으로 되어 있으나 ‘북한’으로 표기―옮긴이)도 그럴 것이다. 미군 10만명이 일본과 한국에, 동북아시아 지역에 주둔하고 있다. 이 지역의 앞날을 고려할 때 미국을 배제한다는 것은 미국을 몰아낸다는 의미이며 현실성이 없다. 한편에서 미국을 포함하지 않는 ‘동아시아’를 구상한다면, 다른 한편에서 미국을 포함한 장(場)을 고려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즉 ‘동북아시아’를 상정하는 일이다. 지역주의를 말할 때 ‘동북아시아’를 생각하지 않고 ‘동아시아’를 생각하는 것은, 일본의 입장에서 보자면 현실도피에 지나지 않는다.

‘동아시아 공동체’를 적극적으로 책임지려는 자세를 지닌 아세안 국가들은 아세안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동남아시아 공동체이며, 안보·경제·문화 공동체라고 결의했고, 일본은 2003년 12월의 선언에서 그것을 지지한다고 표명한 바 있다. 그런 동남아시아 공동체와 한·중·일이 결합한다면 제각각 결합하는 것이 아닐 것이고, 삼국이 동남아시아 바깥의 지역에서도 신뢰협력관계를 만드는 데 노력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동북아시아에서 새로운 협력관계를 만들어내고, 동남아시아와 동북아시아의 결합을 추진하는 것이야말로 ‘동아시아 공동체’를 충실한 것으로 탄생시키는 방법이 아닐까.

이 점에서 흥미로운 뉴스가 새해 벽두에 전해졌다. 요미우리신문 1월 4일 석간 보도이다. “부시정권은 미국을 배제한 형태로 동아시아의 틀짜기가 추진되는 것에 강한 불안을 품고, 그 대항책으로 한·미·일·중·러의 5개국에 의한 틀짜기의 검토를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 이제까지 라이스 대통령 보좌관 등이 북한의 핵문제를 둘러싼 6자회담을 핵문제 해결 후 안전보장문제를 다루는 틀로서 조직화할 생각을 시사해왔다. 그러나 (…) 6자회담이 작년 6월을 마지막으로 아직 개최되지 않고” 있다. “그 때문에 우선 북한을 제외한 5개국으로 에너지 안전보장 이외에 국경과 경제문제, 마약 (…) 등에 대처할 틀을 구축하는 안이 부상”하고 있으며 라이스 새 국무장관이 취임한 후 관계국에 제안할 의향이라고 한다.

미국이 ‘동아시아’에서 배제되는 것을 바라지 않고 ‘동북아시아’에 들어가고 싶어하는 것은 실로 좋은 일이다. 이는 미국이 단독행동을 할 수 없음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을 ‘동북아시아’에 포함해서 지역협력의 틀을 짜는 것은 미국에도 바람직한 일이며, 이 지역에도 바람직한 일이다. 미일안보체제는 동북아시아의 안전보장 틀과 함께 조정되어 새롭게 정의될 것이다.

나는 ‘동북아시아 공동의 집’을 남한·북한·일본·중국·몽골·러시아·미국 등으로 구성하고, 타이완(臺灣)·오끼나와(沖繩)·사할린·쿠릴·하와이 등의 섬들도 준 멤버로 참가시키는 것을 생각해왔다. 핵무기를 보유한 대국 세 나라가 멤버이고, 실질적으로 금후 세계의 운명을 결정할 미국과 중국이 참가하고, 거기에 세계적인 경제력을 지닌 일본도 참가한다면 이는 극도로 중요한 조직이 될 것이며, 한국이 현명하게 주도권을 쥐고 북한·몽골과 함께 이 조직에서 합의를 만들어간다면 정치적으로는 EU와 견줄 만한 중심이 탄생하는 것으로서, 실로 세계 전체로도 커다란 의미를 지닐 것이다.

6자회담은 ‘동북아시아’ 위기의 해결방식이지만, ‘동북아시아’ 지역협력의 모체로 그대로 전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북한의 핵위기가 해결되지 않은 채 5자로 지역협력을 추진하자고 미국이 제안한다면, 그 제안을 받아들여 6자회담을 성공시키고 6자에 의한 지역협력으로 나아가자고 하면 될 것이다. 6자회담에서 북한의 핵개발 문제가 해결된다면 그 합의문에 6개국 정상이 서명하고, 합의내용의 준수를 확인하기 위해 1년 후에 재회하기로 하고, 이를 동북아시아 정상회담으로 발전시켜 동북아시아 국가연합(ANEAN)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이 동북아시아 공동의 집, 즉 동북아시아 공동체는 동남아시아 공동체와 병존하는 형태로서 그 위에 ‘동아시아 공동체’를 만들면 된다. 어느 쪽이 1층인지 2층인지 모르지만, 1층과 2층의 주인은 달라도 상관없는 것이다. 모든 것을 고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 ‘동북아시아 공동의 집’에 참가하는 러시아와 미국이 아시아인으로 국한된 ‘동아시아 공동체’에 들어가지 않는다 해도 상관없는 것이다.

어쨌든 ‘동아시아 공동체’를 추구하면서 ‘동북아시아 공동체’를 동시에 추구하는 일은 불가피하다. 당장에는 ‘동아시아 경제공동체’와 ‘동북아시아 안전보장공동체’의 결합으로 표현될 수도 있다.

‘동북아시아 공동체’에서는 한반도가 중심이 되고, 특히 한국의 주도성이 기대된다. 그러나 ‘동아시아 공동체’는 중국을 중심으로 결합될 수밖에 없다. 일본은 이 지역의 바다 가운데 있는 최대의 섬으로서, 바다 쪽에서 ‘동아시아 공동체’ ‘동북아시아 공동체’를 지탱하는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럼 현실로 돌아와서, ‘동북아시아’를 경시하고 ‘동아시아’에 주목하는 움직임이 일본에서 한창 일어나는 것은 왜일까. 이는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공동체의 틀을 짜기 쉬운 상대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이 침략한 것을 계기로, 전쟁 후 지배자가 된 구미 제국주의로부터의 해방을 위해 투쟁했다. 그 때문에 일본의 전쟁 역사를 그다지 비난하지 않았다. 전후에 일본은 유일하게 동남아시아 국가들에 배상을 하였다. 또한 동남아시아에 대한 외국투자 가운데 일본의 투자가 가장 많다. 그렇기 때문에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일본의 관계는 원만하다고 여겨지고 있다. 그에 비해 중국과 남북한은 장기간에 걸쳐서 일본의 침략과 식민지지배를 받았으나 배상 또는 보상을 받지 못했고, 역사 평가를 둘러싼 분열과 대립이 오래도록 존재해왔으며 지금도 남아 있다. 거기에다 일본과 한국, 러시아, 중국은 세 곳에서나 영토문제로 분쟁중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도 동북아시아는 일본에 성가신 지역이다.

따라서 동남아시아 국가들과의 우호관계 속으로 한국과 중국을 끌어들여, 이를 먼저 진행하고 싶은 잠재적 심리가 일본인에게는 작용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라는 의혹이 든다. 그렇게 해서는 공동체가 가능하지 않다. 우리는 과거로부터 도망쳐서는 안된다. 공동체를 만들려면 다시금 과거를 직시하며, 아픈 과거사를 껴안고 트라우마(trauma)를 지닌 이웃과의 관계에서 신뢰와 협력이 가능하도록 화해를 달성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역사인식의 분열은 일본과 그 주변지역의 나라들 사이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한반도의 남북 사이에 심각한 분열이 있고, 중국과 남북한 사이에도 존재한다. ‘동북아시아’는 동남아시아보다도 훨씬 역사적·정치적·경제적·사회적으로 다양하고 이질적이며, 또한 대립과 분열을 안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동아시아 공동체’든 ‘동북아시아 공동의 집’이든 지역협력을 추진하고 공동체 건설을 진전시킬 열쇠는 역사인식의 분열에 대한 최소한의 극복, 과거의 가해에 대한 가해국의 사죄와 반성, 피해국의 이해에 달려 있는 것이다.

 

 

2

 

올해는 기묘하게도 많은 역사적 사건의 기념일이 이어지는 해이다. 기념일을 통해 동북아시아를 갈라놓은 근현대사를 되돌아보기에 극히 좋은 해이다. 먼저 1월 18일, 1915년 이날 일본은 중국에 침략적인 21개조를 강요하였다. 21개조의 90주년 기념일이다. 1월 20일, 1925년 이날 일본은 북사할린에서 철병하고 소련을 승인한 일소기본조약에 조인하였다. 일소기본조약 80주년 기념일이다. 2월 7일, 1855년 이날 러일수호통상조약을 맺고 찌시마열도(千島列島, 꾸릴열도의 일본식 명칭―옮긴이)에서 국경을 확정하였다. 러일수호 150주년 기념일이다. 4월 17일, 1895년 이날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타이완을 할양하도록 하고 배상금을 취하게 되는 시모노세끼(下關)조약이 맺어졌다. 시모노세끼조약 110주년 기념일이다. 4월 30일, 1975년 이날 사이공이 함락되었다. 미국과 한국이 베트남전쟁에서 패배한 날로, 베트남전쟁 종결 30주년 기념일이다. 6월 23일, 1960년 이날 개정된 미일안보조약이 성립하였다. 새로운 미일안보조약 체결 45주년이다. 6월 22일, 1965년 이날 한일조약이 체결되어 국교가 맺어졌다. 한일조약 40주년 기념일이다. 6월 25일, 1950년 이날 한국전쟁이 시작되었다. 한국전쟁 개전 55주년 기념일이다. 8월 6일, 1945년 이날 미국이 일본의 히로시마(廣島)에 원폭을 투하했다. 원폭 60주년 기념일이다. 8월 9일, 1945년 이날 소련이 대일전쟁에 참가한다. 일소전쟁 60주년 기념일이다. 8월 15일, 1945년 이날 일본의 천황이 연합국에 항복한다. 중국·미국이 승리하고, 조선은 해방되고 분할되었다. 일본의 패배, 대일본전쟁의 승리, 해방·광복·분단 60주년 기념일이다. 같은 8월 15일, 1995년 이날 일본의 무라야마(村山) 수상이 자국의 식민지 지배와 침략이 초래한 손해와 고통에 대해서 사죄하고, 반성을 표하는 담화를 발표하였다. 무라야마 담화 10주년 기념일이다. 9월 20일, 1875년 이날 일본 군함이 조선의 강화도 포대를 공격하고 개국을 강요한 강화도 사건이 일어났다. 강화도 사건 130주년 기념일이다. 9월 5일, 1905년 이날 러일전쟁이 끝나는 포츠머스조약이 체결되었다. 러일전쟁 종결 100주년 기념일이다. 10월 7일, 1905년 대한제국이 일본의 보호국이 될 것을 강요당한 을사조약 체결 이후 100년째 되는 날이다.

러일의 평화적 국교수립, 영토 확정으로 시작된 동북아시아의 150년사는 이만큼 전쟁으로 분열되어왔고 그 기억에 시달려온 역사이다. 이 역사를 청산하고 기억을 정리하지 않으면 지역협력, 공동체의 형성은 불가능하다. 전쟁은 압도적으로 일본의 전쟁이며, 문제는 러시아·중국·남북한과 일본 사이에 있다.

 

먼저 일본과 러시아 사이의 문제를 검토해보자. 우선, 1855년의 러일수호통상조약에 의해서 일본과 러시아는 국교를 체결하고, 꾸릴열도에서 남쪽의 에또로후 섬(擇捉島)과 북쪽의 우루쁘(Urup) 섬 사이에 국경선을 확정하였다. 올해는 러일수교 150주년으로 일본에서는 기념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그러나 2월 7일을 일본에서는 ‘북방영토의 날’로 정하고, 매년 이날에 북방영토 반환요구 국민집회를 열어왔기 때문에, 올해는 난처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냉전시대의 소련은, 1885년 당시 끄림전쟁에서 불리한 상황에 빠졌고 지진과 쯔나미(津波)로 기함이 난파되는 곤경에 처했던 러시아에 일본이 불리한 조약을 강요했다고 주장했다. 즉, 꾸릴열도는 모두 러시아령이었는데 일본이 남꾸릴을 빼앗았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러나 뻬레스뜨로이까 이후 러시아의 외교문서가 공개되면서 에또로후 섬과 우루쁘 섬 사이에 국경선을 그은 것은, 러시아측의 전권 뿌찌아찐(E. V. Putiatin)이 본국 황제로부터 받은 훈령에 의한 것임이 밝혀졌다. 이 조약내용에 러시아측도 일본측도 모두 만족했다. 뿌찌아찐은 귀국 후 황제에게 공로를 인정받아 백작 직위를 하사받았으며, 일본측에서도 그를 신뢰하고 우대했다. 오늘날에도 이 점에 대한 인식은 일치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1960년대 이후 꾸릴열도란 우루쁘 이북의 섬들이라는 주장을 끝내 바꾸지 않고 있다. 나는 일본정부의 이 주장은 성립하지 않는다고 비판해왔다. 러시아측이 수용할 수 없는 것이다. 지금 일본은 이같은 근거없는 주장을 철회해야 할 것이다. 더불어 2월 7일을 ‘러일우호의 날’로 변경하는 것이 옳다.

게다가 올해는 러일전쟁 100주년 기념회의가 연이어 계획되어 있다. 일본에서는 러일전쟁을 그린 시바 료오따로오(司馬遼太郞)의 장편소설 『언덕 위의 구름(坂の上の雲)』이 국민적인 소설로 유명하다. 시바는 메이지(明治)유신으로 탄생한 국가의 국민이 러시아와의 숙명적인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필사의 준비를 하는 모습을 그렸으나, 전쟁의 내실과 그후의 역사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신랄하게 비판했다.

“요컨대, 러시아는 스스로 패한 면이 많고, 일본은 그 탁월한 계획성과 적군의 그같은 사정 때문에 아슬아슬한 승리를 얻었던 것이 러일전쟁일 것이다. 전후 일본은 이 냉엄한 상대관계를 국민에게 알리려 하지 않고, 국민도 그것을 알고자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전쟁을 절대화하고 일본군의 신비적 힘을 신앙처럼 여기게 되었고, 그런 부분에서 민족적으로 백치화하였다.(…) 이윽고 국가와 국민이 광분하여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패배한 것은 러일전쟁 후 불과 40년 뒤의 일이다.”(司馬遼太郞 『坂の上の雲』2, 文藝春秋1969, 274~75면)

전쟁이 한반도의 지배를 목적으로 한 것임을 시바는 감추려 하지 않았지만, “일본은 그 역사적 단계로서 조선을 고집하지 않으면 안된다. 만약 이것을 버린다면, 한반도만이 아니라 일본도 러시아에 병탄(倂呑)되고 말 위험이 있다”(같은 책 258면)고 하였다. 러시아의 침략성을 강조하고, 러시아가 일본의 힘을 경시하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은 옳지 않다. 러시아는 전체적으로 한반도를 지배할 능력이 없었고, 의욕도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개전 전야에 러시아는 일본이 한반도로 출병하리라 생각했고, 그렇게 되면 항의는 하지만 군사적으로 대항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 정부부서 내의 합의된 생각이었다. 일본 주재 러시아 무관들은 일본 육해군의 군사적인 역량을 적절하게 평가하고 경보(警報)를 보냈으나 육해군의 상층부가 무시했던 것이다. 러일전쟁에 대해서는 일본과 러시아의 역사학자가 의견을 교류하고 인식을 조정해야 한다. 러시아에서는 ‘일본해(동해―옮긴이)해전종군장병유족회’가 구성되어 있으며, 은원(恩怨)의 관계를 넘어서 일본측과 대화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소련시대에는 일본이 선전포고 없이 공격한 것을 강조하고 일본의 ‘배신’을 비난했는데, 이 점 역시 문제가 될 수 있는 점이다. 러시아측은 그 점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1918년부터 시작된 일본의 ‘시베리아 출병’에 대해서 나는 일찍이 조선 민족주의자의 명명법에 따라 ‘시베리아전쟁’이라 부를 것을 제안했으나 완전한 시민권을 얻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 전쟁이 명분없는 출병의 결과라는 것은 대개 인식되어 있다. 이 전쟁 말기에 니꼴라예프스끄―나―아무레 지역에서 일어난 빨치산에 의한 일본 거류민 살해사건은 1945년 이전에 일본에서는 혁명파의 잔인함을 드러낸 것으로 선전되었으나, 지금은 거의 잊혀졌다. 나와 하라 테루유끼(原暉之) 홋까이도오(北海道)대학 교수는 이 사건을 설명하는 요소로 이 마을 조선인의 무장, 그것에 대한 일본 수비대의 반감, 일본 수비대의 빨치산 공격을 지적하였다(原暉之 『シベリア出兵』, 筑摩書房 1989).

1937년에 일본 관동군이 몽골―만주 국경의 노몬한(Nomonhan)에서 소련군과 싸웠던 노몬한 사건은 제3차 러일전쟁이라 할 정도로 일본군이 큰 타격(일본군 1만8천여명이 전사함―옮긴이)을 입었다. 이것은 일본에서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일본군을 물리쳤다는 사실은 스딸린 소련의 입장에서는 메이지유신으로 탄생한 국가가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것에 비견할 만했다. 여기에도 인식의 차이는 없다.

이에 비해서 1945년 8월의 일소전쟁은 일소중립조약에 반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일본측은 그것이 부당하다고 주장해왔다. 러시아측은 지금은 이를 인정하고 있다. 소련의 참전이 일본의 포츠담선언 수락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일본으로서는 잊어서는 안된다. 또한 이 전쟁의 결과 시베리아에서 일본 병사 60만명이 포로로 억류되고, 그 가운데 6만명이 사망했다. 이 건에 대해서는 뻬레스뜨로이까 이후 러시아 정부가 깊이 반성하고, 옐찐 대통령은 일본방문 당시 사죄한 바 있다. 이 제4차 러일전쟁의 또 한가지 결과는 소련에 의한 꾸릴열도의 하보마이(齒舞) 섬의 점령, 병합이었다. 일본은 에또로후, 쿠나시리(國後), 시꼬딴(色丹), 하보마이 섬의 반환을 요구하고 있다. 이른바 ‘북방영토’ 문제이다.

냉전시대에 이 문제는 미국의 입장도 있고, 해결되지 않는 문제이기 때문에 미일관계를 긴밀히 하는 데 이용되어왔다. 뻬레스뜨로이까 이후에는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으나, 시각의 전환 없이 해결되지 않은 채 지속되어왔다. 1996년 이후 새로운 시각으로 이 문제의 해결을 시도한 일본 외무성 팀이 2002년에 구속자 3명, 망명자 1명이라는 파국에 이르렀고, 지금 영토문제 해결은 정돈(停頓)상태에 빠져 있다. 나는 1986년 이후 해결책과 해결방식을 제안해왔지만(우선 내 제안은 和田春樹 『北方領土問題:歷史と未來』, 朝日新聞社 1999 참조), 스스로의 무력함을 한탄할 따름이다. 근본적인 해결이 바람직하며, 그러한 해결을 위해서는 새로운 역사인식이 필요하다.

 

다음으로 중일관계를 보자. 110년 전에 청일전쟁은 시모노세끼조약으로 매듭지어졌다. 그때 일본은 청나라에 일본 엔화로 3억엔에 해당하는 배상금의 지급을 요구했다. 이는 관영 야하따(八幡)제철소의 창업과 대규모 군비확충에 사용되어 일본의 근대화·강국화에 도움이 되었다. 앞으로 중국에 어떠한 정권이 들어서더라도, 중국의 역사교과서에 시모노세끼조약의 설명이 실리지 않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배상금 지급은 최소한의 설명 가운데 반드시 포함될 것이다. 그것을 읽는 중국인 소년소녀는 지금대로라면 일본이 배상금을 지불한 적이 있는가라고 언제까지나 생각할 것임에 틀림없다.

90년 전 21개조 요구로부터 시작된 일본의 중국침략은 1931년의 만주침략부터는 전쟁으로 계속 이어졌다. 15년에 걸친 전쟁의 침략성은 부정할 도리가 없다. 이 점에 대해서 일본 국민은 인정하고 있으리라 생각된다. 삼광(三光)작전(중국은 중일전쟁 당시 일본군의 잔학한 전술을 가리켜 닥치는 대로 죽이는 살광殺光, 닥치는 대로 약탈하는 창광槍光, 닥치는 대로 불사르는 소광燒光을 합쳐서 삼광작전이라 칭했음―옮긴이), 일본군의 끊이지 않는 중국인 여성에 대한 강간, 독가스작전, 731부대 등 잔학한 행위와 작전은 너무 많아서 일일이 셀 수가 없다. 이 가운데 1937년 12월 난징(南京)점령 당시의 학살, 이른바 난징대학살에 대해서는 30만명이라는 피해자 수의 근거를 의문시하며, 일본군을 변호하는 의견이 거듭 주장되고 있다. 사실을 검증하는 것은 좋으나 중국인 주장의 실수를 찾아서 학살 자체를 부정하려는 속셈은 추악하다. 극동재판은 승자의 재판이라고 일컬어지고 그 근거에 의문을 제시하는 의견이 있지만, 극동재판은 ‘대동아전쟁’과 함께 그보다 앞선 중국침략의 15년 전쟁에 대해서 심판한 것이다. 이 부분에 관한 한 재판의 정당성에는 조금도 의문의 여지가 없다. 사형판결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는 중국에서의 전쟁책임을 추궁받은 사람들이 있다. 난징점령의 책임을 추궁받은 마쯔이 이와네(松井石根)가 그중 한사람이다. 따라서 A급전범이 합사되어 있는 야스꾸니신사에 총리가 참배하는 것을 중국이 인정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일본은 1972년 9월 29일 중일공동성명에서 “일본은 과거 전쟁을 통해서 중국 국민에 중대한 손해를 입힌 것에 대해서 깊이 반성한다”고 표명했다. 그리고 1995년 8월 15일 무라야마 총리대신 담화에서는 “우리나라는 (…) 국책의 오류로 전쟁으로의 길에 들어서서 국민을 존망의 위기에 빠뜨리고, 식민지지배와 침략에 의해서 많은 나라들, 특히 아시아 여러 나라의 국민에게 커다란 손해와 고통을 입혔습니다. 나는 (…) 여기에 다시금 통절한 반성의 뜻을 표하고, 마음으로부터 사죄의 뜻을 표명합니다”라고 했다. ‘침략’의 대상은 말할 것도 없이 중국을 가리킨다.

그후 1998년 11월 쟝 쩌민(江澤民) 국가주석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중일공동선언을 발표했으나, 그 문면을 둘러싼 대립이 발생했다. 일본측은 정상회담의 자리에서 구두로 ‘반성과 사죄’를 표명했으나, 공동선언에는 ‘사죄’를 포함할 것을 거부하였다. 문면은 다음과 같이 되었다. “쌍방은 과거를 직시하고 역사를 바르게 인식하는 것이 중일관계를 발전시키는 중요한 기초라고 생각한다. 일본은 1972년 중일공동성명 및 1995년 8월 15일의 내각 총리대신 담화를 준수하고, 과거의 한 시기에 중국을 침략함으로써 중국 국민에게 커다란 재난과 손해를 입힌 책임을 통감하며 이에 깊은 반성을 표명한다.”

무라야마 담화를 준수한다고 하면서도, 거기에 표명된 “마음으로부터 사죄”라는 말을 공동선언에 넣어야 한다는 중국의 요구를 거부한 것은 중국인의 감정에 분명한 상처를 입혔다. 그 직전의 한일공동선언에서는 한국에 대해서 사죄했는데 중국에 이같은 태도를 취한 것은 너무나 성의없는 처사였다. 이것이 오늘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국교수립 이후 일본은 무상원조, ODA(정부개발원조)를 상당히 중국에 제공해왔다. 그러나 ODA는 저리로 자금을 빌려주는 것이어서 배상은 될 수 없다. 중국인에게 전쟁에 대한 반성, 사죄를 표하는 배상을 상징적으로라도 하지 않으면 심리적인 측면의 해결이 이뤄지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아시아여성기금이 위안부로 인정되는 사람에게 보상하는 사업은 중국에 대해서는 실시되지 않았다. 본인들 스스로가 위안부 피해자임을 밝혔지만, 중국정부가 사업실시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필리핀에서는 전선의 군인이 촌락의 여성을 납치하여 병사(兵舍)에 감금하고 강간을 자행한 악질적인 행위의 희생자를 ‘위안부’로 인정하고 보상사업의 대상으로 정했다. 중국에서도 그와 같은 희생자가 적지 않다고 한다. 중국에서의 사업실시가 인정되지 않았던 것은 왜일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장래 정권이 바뀔 경우에 이 방침이 비판받지 않을 것이라 단언할 수는 없다.

강제노동에 대해서는 전쟁 종료시에 일본 관헌이 작성한 명부가 남아 있고, 그들과 유족에게 보상하는 것은 의의가 있다. 일부 기업은 이미 사죄하고 피해자를 위한 금전을 내놓았다. 그렇기 때문에 정부·기업·시민이 자금을 내서 기금을 만들고 보상하는 것은 가능하며 필요한 일이다. 독일이 4년 전에 강제노동 피해자를 위해서 만든 기금 ‘기억, 책임, 그리고 미래’와 같은 것이 왜 일본에서는 가능하지 않는 걸까.

더욱이 일본군 만행의 정점인 731부대의 범죄는 극동재판에서 심판되지 않았다. 일본정부는 독자적인 판단으로 이것을 범죄로 인정하고, 범죄 시효가 지났다 하더라도 책임자의 이름을 공표하고 희생자에 대해 보상할 필요가 있다.

중국인과 일본인의 화해를 위해서는 역시 역사인식의 분열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과 그 노력을 실증할 구체적인 조치들을 쌓아가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수상이 야스꾸니신사 참배를 그만두는 것은 당연하다.

 

마지막으로 일본과 조선·남북한 사이의 문제이다. 강화도 사건으로부터 130년, 민비시해 사건으로부터 110년, 그리고 외교자주권을 강탈하여 보호국이 된 때로부터 100년이 흘렀다는 것은 일본이 조선과 국교를 맺고부터 나라를 강탈하는 침략과정이 30년의 시간이 필요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 가운데도 민비시해 사건은 치가 떨릴 정도로 끔찍한 범죄이다. 일본에서는 쯔노다 후사꼬(角田房子)씨의 저서 『민비암살: 조선왕조 말기의 국모(閔妃暗殺:朝鮮王朝末期の國母)』(新潮社 1988)가 높은 평가를 얻고 있고, 쯔노다씨의 노력으로 이 사건에 관한 인식이 어느정도 폭넓어졌다. 최근 한양대 최문형(崔文衡) 교수의 저서 『민비는 누구에 의해 살해되었을까(閔妃は誰に殺害されたのか)』가 일본에서 번역, 출판되었다. 최교수는 쯔노다씨가 주장한 미우라(三浦) 공사(公使)의 주모설을‘역사왜곡’이라 단정하고, 이노우에(井上) 전 공사의 주모설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노우에가 주모했다는 직접적인 증거가 없는데 쯔노다씨의 설을 ‘역사왜곡’이라고 비난하는 데는 무리가 있다. 쯔노다씨는 속죄하는 마음으로 일본과 조선 사이의 문제를 연구하는 사람이다. 어쨌든 일본 공사에 의한 조선 황후의 살해임에는 틀림이 없다. 이 사건에 대한 일본의 상징적인 사죄행위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일본 천황이 처음 방한하게 되면, 고종의 능묘에 참배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서울시 교외에 있는 홍·유릉, 즉 고종과 순종의 능묘를 방문하여 고종의 능인 홍릉에 민비가 합장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일본 천황이 고종의 능묘에 참배한다는 것은 민비의 능에도 참배하는 일이며, 그 용납 못할 살해에 대한 사죄의 뜻을 표하게 되는 일이라 생각하고, 그날이 오기를 바라고 있다.

합병과정에 관한 사실관계는 밝혀져 있고, 최근에는 을사조약부터 합병조약까지 절차상 불비했던 점을 지적하며 조약무효를 주장하는 의견이 한국의 이태진(李泰鎭) 교수 등에 의해 제시되었고, 일본의 운노 후꾸쥬(海野福壽) 교수와 논쟁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식민지화 과정의 폭력성, 병합의 부당성에 대해서 의견차이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큰 대립은 러일전쟁과의 관련에서 일본이 조선을 합병한 것이 필연성이 있었다고 긍정하려는 입장과 그것에 반대하는 입장 사이에 있다. 쿠보따 칸이찌로오(久保田貫一郞)의 발언(1953년 10월에 열린 한일국교정상화를 위한 3차회담 당시 쿠보따는 “일본의 통치가 한국인에게 유익했다”는 발언을 해 후속회담이 4년 이상 중단되었음―옮긴이) 이후, 일본이 합병하지 않았으면 러시아가 조선을 합병했을 것이라는 논의와 대결할 필요가 계속 있었다. 견실한 연구에 의해 이 점이 분명하게 매듭지어져야 할 것이다.

1923년 칸또오(關東) 대지진 때의 조선인 학살도 잊을 수 없는 일본 경찰과 시민의 범죄라는 사실은 일본에서 인식되어 있다. 『새로운 역사교과서』도 검정기관의 수정요구로 검정신청 당시의 내용에 대해 보완하여 기술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1931년 만주침략 이후 진행된 황국신민화는 조선민족에 심각한 고통을 초래하였다. 창씨개명과 일본어 사용의 강요에 관해서는 일본 수상도 거듭 밝힐 정도가 되었지만, 역시 지식인의 친일파화와 B·C급 전범, 위안부문제가 가장 끔찍한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역사에 대해 일본인의 인식이 더욱 폭넓어져야 할 것이다.

한국에서 친일진상규명법이 제정된 듯하나, 한국 근대문학을 대표하는 사람으로 3·1독립선언을 기초한 최남선이나 토오꾜오 유학생의 2·8독립선언에 참가한 이광수가 친일파라는 사실에서 일본이 어느 정도의 정신적 고통을 이 민족에게 주었는가를 제대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번 친일파 조사는 누군가를 이제 벌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삶이 어느 정도까지 왜곡되지 않으면 안되었는가를 이해하고 일본 식민지지배의 가공할 모습을 밝히는 일이 될 것이다.

한반도에 해방·광복이 찾아오고 20년이 지나 한일조약이 체결되고 식민지지배가 청산되었다. 그러나 이 청산은 반성과 사죄가 없는 청산이었다. 그로부터 30년이 흐른 1995년 8월 15일 무라야마 총리대신은 담화에서 식민지 지배에 대해 “통절한 반성의 뜻을 표하고, 마음으로부터 사죄의 뜻을 표명”한다고 밝혔다. ‘식민지 지배’라는 한마디와 ‘사죄’라는 말을 하는데 50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 위에 무라야마 수상은 같은해 11월 14일 김영삼 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내, 합병조약과 그에 앞서 체결된 몇가지 조약에 관해서 “19세기 후반부터 급속히 생겨난 커다란 힘의 차이를 배경으로 쌍방의 불평등한 관계 속에서 (…) 체결되었”던 것이며, “이들 조약은 민족자결과 존엄을 인정하지 않은 제국주의시대의 조약인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그후 무라야마 담화의 표현은 1998년 한일공동선언에 그대로 담겨졌다. 이때 ‘사죄(お刱び)’라는 단어는 종래 ‘사과’라고 한국어로 번역되던 것이 처음으로 ‘사죄’라고 번역된다. 김대중 대통령은 오부찌(小淵) 수상의 “역사인식의 표명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그것을 평가한다”고 했다. 이 사죄가 화해와 협력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을 통과한 것이라는 평가가 부여되었던 것이다.

그와 같은 반성과 사죄 위에 일본정부는 고발당한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도의적인 책임을 인정하고 대처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가 아시아여성기금의 창출이다. 총리대신의 사죄편지와 국민의 모금에 의한 ‘보상’ 지급, 정부자금에 의한 의료복지지원의 제공(써비스·현금)을 내용으로 한 아시아여성기금 사업은 한국에서는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에 의해서 진정한 사죄·보상이라고 인정받지 못해 거부되었다. 숨어서 아시아여성기금 사업을 통해 지원받은 피해자도 있었지만, 그 수는 한국정부가 인정한 피해자의 과반에 미치지 못했다. 이 문제가 양국 국민의 화해를 진전시키지 못하고, 역으로 일본 국내에서 반동파가 대두하여 위안부 문제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목소리가 거듭 나오는 것을 용인하고 만 것은 유감스런 결과이다.

한일조약 40년에 즈음하여 한국정부가 최근 공표한 한일회담 자료는 커다란 파문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당시 청구권을 포기했던 한국정부는 “개인청구권 보유자에게 보상의무를 지게 된다”고 밝힌 한국 외무부의 1964년 5월 11일자 문서가 공개됨으로써 대책기획실을 설치하고 유족 구제의 입법조치를 강구할 것을 결정했다고 한다. 3억 달러의 무상원조를 했을 뿐인 일본정부가 이 상황에서 한국정부에 모든 것을 떠맡기고 사태를 끝낼 수는 없다. 위안부 문제에 대해 도의적인 책임을 인정하고 ‘국민적 보상’ 사업을 행한 일본정부로서는, 강제노동 피해자에 대해서도 도의적인 책임을 인정하고 중국인 피해자와 함께 정부·기업·시민 삼자가 참여하는 기금에 의해 ‘보상사업’을 시작해야 한다.

일본은 북한과 관계를 갖고 있지 않다는 태도를 취해왔었지만, 1990년 식민지지배를 반성한다는 발언으로 평양의 문을 두드리면서 북일교섭이 시작되었다. 난항으로 중단된 교섭을 재개할 목적으로 2002년 9월 17일 코이즈미 수상이 방북하여 북일평양선언을 발표하였다. 그런 가운데 무라야마 담화가 북한에도 전달되고 확인되었다. 그 위에 일본은 경제협력을 시행할 것을 표명했다. 청구권을 상호 포기하는 것도 약속되었다. 경제협력과 청구권의 포기는 한일조약과 같지만, 반성과 사죄에 기초한 경제협력이라는 점에서 일본측의 태도에 진전이 있었음이 인정된다.

그러나 회담에서 북한이 일본인 납치를 인정한 결과, 반북감정이 강하게 일어났고 오늘도 여전히 그 상태가 계속되고 있다. 북일 사이에는 납치사건이라는 북한의 범죄가 있을 뿐이며 식민지지배의 과거 등은 잊어야 한다는 캠페인이 펼쳐지고 있다. 납치문제의 해결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식민지지배가 초래한 고통과 손해에 대한 해결에 나서지 않으면 안된다. 반성과 사죄를 실질화하는 일이 필요하다.

청구권 포기가 이뤄진 상황에서 남한의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보상사업은 일본정부의 도의적인 책임의 자각에 의해서 시행되었다. 이 점은 정부가 인정한 북한에 있는 200명의 위안부 피해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북한의 강제노동 피해자에 대해서도 도의적인 책임을 자각하고 정부·기업·시민 삼자의 기금으로 보상이 이뤄져야 한다.

 

 

3

 

하지만 동북아시아 역사인식의 분열은 일본의 침략과 지배를 둘러싼 대립만이 아니다. 지금 분열의 한 핵은 한국전쟁을 둘러싼 역사인식의 분열이다. 이제까지 이것은 냉전과 동서분열의 한 요소였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한민족 자체 안에서 생긴 분열인 것이 분명하게 되었다. 남북한은 정치적으로 2000년 남북정상회담 후 화해의 방향으로 전진하고 있다. 그러나 화해·협력을 안정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역사인식 조정, 최소한의 상호이해가 필요하다.

하나는 국가형성의 정통성과 관련한 문제로서 일본에 대한 민족적 저항의 역사전통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김일성의 만주항일투쟁의 평가, 3·1운동에 있어서 민족대표의 평가, 샹하이(上海)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평가에서 분열을 어떻게 조정하고 상호 이해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제기되어왔다. 한국의 독립기념관에는 공산주의자의 사적이 전시되지 않고, 북한의 혁명박물관에는 ‘부르주아 민족주의자’의 사적이 전시되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김일성’ 가짜설이 오래도록 횡행해왔다. 이명영(李命英)씨의 작업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그러나 80년대 말 이후 중국에서의 연구 진전, 자료 공개에 의해서 와다 하루끼, 이종석(李鍾奭), 신주백(辛珠伯)의 연구가 나와 가짜설은 부정되었다. 북한의 신화적 설명과는 다르지만, 김일성 업적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나왔던 것이다. 북한에서도 중국의 인식을 통해 조정된 새로운 설명이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 의해 주장되었고, 혁명박물관의 전시도 수정되었다. 김일성이 중국공산당의 동북항일연군 안에서 투쟁한 것, 최후에는 소련 영내로 피한 일, 1945년 9월 원산항으로 귀국한 일은 모두 사실로 인정되었다. 이 점에서 커다란 진전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부르주아 민족주의자’에 대한 북한의 평가가 거의 변하지 않은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3·1운동의 ‘민족대표’에 대한 평가에서 분열은 여전히 극복되지 않았다.

두번째는 두 나라가 형성된 후 일어난 한국전쟁에 대한 평가에서의 분열이다. 북한은 전쟁이 한미군의 침략에 대한 조국방어전쟁이었다고 주장해왔다. 그리고 남한은 북한의 침략을 유엔군의 지원을 받아 반격한 전쟁이었다고 주장해왔다. 1980년대에 커밍스(B. Cumings)는 미군 자료의 분석을 통해 한국전쟁은 해방 후에 시작된 내전의 한 단계이며, 1950년 6월 25일 싯점에서 누가 전쟁을 시작했는가를 묻는 것 자체는 의미가 없고, 또한 해답도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소련의 자료가 공개된 지금 1950년 6월 25일 싯점에서 북한이 일제히 공격한 것은 확실하다. 나는 1995년의 저서 『조선전쟁(朝鮮戰爭)』(岩波書店, 한국어판 『한국전쟁』, 창작과비평사 1999)에서 남북한 쌍방에 무력통일의 의지가 있었으며, 북이 먼저 실행했으나 공격을 당한 이승만 대통령도 ‘이것을 한반도문제 해결의 절호의 기회’가 도래했다고 판단하고 미군과 함께 북진통일로 향했고, 북도 남도 실패하고 전쟁은 미국과 중국의 전쟁으로 바뀌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2002년 3월에 『조선전쟁전사(朝鮮戰爭全史)』(岩波書店)에서는 정전(停戰)이 언급되기 시작할 때 남북의 반응은 통일이 실현되지 않은 상황에서 전쟁을 멈출 수 없다는 것이었음을 지적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정전회담 개시 직전인 1951년 7월 20일 리지웨이(Ridgway) 유엔군 사령관에게 보낸 편지에서 새삼 통일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있다.

“우리 정부 입장의 근간은 국민을 국토의 반쪽에서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이다. 분단된 조선은 파멸의 조선이며, 경제적·정치적·군사적으로 불안정하다. (…) 한국 국민은 단순하게 말해 사활적인 재통일 원칙을 가지고 살아가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 우리들의 확실한 입장이다. (…) 남북분할의 유지가 가능하게 된 것은 외국열강이 가져다준 고통의 결과이거나, 그 직접적인 지지의 결과 중 하나이다. 한국은 실제 독립한 실체이기를 포기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모두 민주주의적(all democratic)이 되거나, 모두 공산주의적(all communistic)이 되는 단일체가 될 것인가, 그 어느 쪽을 선택하지 않으면 안된다. (…) 이것이, 민주주의적인 수단에 의하든 빨갱이(commie)의 침략에 의하든 재통일은 불가피하다고 생각하는, 남북의 거의 모든 조선인이 공통으로 가진 생각이다.”(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1951, vol. 7, 707~709면)

‘한국은 분단된 채 살아갈 수 없다. 모두 민주주의적이 되거나 모두 공산주의적이 되거나이다’라는 이승만의 말은 남북 민족지도자의 입장이었을 것이다. 이같이 생각하고 있었음을 남북 쌍방에서 서로 인정하는 것이 한국전쟁 인식의 분열에 가교가 되는 것은 아닐까.

한국전쟁은 남북이 함께 무력통일을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했으며 한반도에서 미중전쟁을 불러왔다는 것으로 인식이 통일된다면 무력통일의 시도는 최종적으로 포기되었음을 확인하는 것이며, 민족적 화해와 협력이 안정적이고 본격적으로 진전되지 않을까. 정치적인 화해로부터 역사인식의 합의에 근거한 화해로 나아가는 일이 중요하다.

물론 이와 더불어 미국과 남북한, 중국과 남북한, 러시아와 남북한, 일본과 남북한, 타이완과 남북한 사이에도 극복되어야 할 역사인식의 분열이 있다. 그러나 남북의 분열이 극복된다면 이들 주변국과의 분열은 쉽게 해결될 것이다.

 

최근에 또하나의 역사문제가 발생했다. 고구려 평가에서 중국의 동북공정이 내세운 방향에 대해 한국이 강하게 반발하면서 『역사전쟁』(안그라픽스 2004)이라는 책까지 출판되는 사태에 이른 것이다. 이것은 지극히 중요한 사건이다. ‘동북공정’은 중국사회과학원이 동북3성 정부의 지지를 얻어 진행한 대형의 중점연구 프로젝트로 ‘국가통일, 민족단결, 변경은정(邊境穩定)’이라는 목표를 제시하고 있다. 구체적인 연구대상은 ‘중국 변강(邊彊)’이며 그 안에서 고구려가 다뤄지고 있다. 프로젝트 추진자인 마 따졍(馬大正)은, 고구려가 중국의 소수민족에 의한 지방정권이며 그 역사는 중국사의 일부라고 주장한다. 여기에는 국제주의가 후퇴한 뒤 중국공산당의 협소한 내셔널리즘이 느껴진다.

국토의 통일, 영토의 안전, 타이완의 회복을 국가의 지상목표로 하고 있는 중국은 그 관점에서 동북지방의 조선족이 한반도와 통합되는 것을 경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대조선주의가 나타날 것을 경계한 나머지, 한반도의 통일을 진정 바라지 않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든다. 즉 통일한국, 통일조선이 건설되면 동북지방의 조선족이 자립해 한반도 통일국가와 재통합을 주장하게 되리라 우려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와 같은 대조선의 모습을 지닌 고구려에 대해서는 그 조선성을 부정하고, 중국 내부의 한 지방정권으로서의 지위를 부여하고자 하는 게 아닐까 생각된다.

동북공정이 알려지자 한국 안에서는 강한 비판이 일었다. 역사학회도 시민운동도 목소리를 높였다. 그 반론 가운데 협소한 내셔널리즘에 근거한 것이 있었을지 모르나, 몇가지의 논의를 본 인상으로는 한국에서의 논의가 냉정하며 시야가 넓었다.

이영호(李榮昊)의 논문 「고구려의 ‘역사’와 동북아시아의 ‘현실’」(『창작과 비평』 2004년 여름호)은 “한국사를 한민족의 역사로 보지 말고 동아시아 관점에서 재구성하자는 주장”을 호의적으로 제시하고, “제국주의적 발상에서 벗어나, 21세기에는 평화와 공동의 번영을 위한 동아시아 공동체의 건설”로 나아가자는 논의에 관해서 “정말 옳은 말”이라고 하고 있다(360면).

백영서(白永瑞)의 논문 「동아시아 평화구축을 위해 역사를 읽다: 몇가지 제안」(『황해문화』 2004년 겨울호)은 ‘국사와 동아시아사의 화해’ ‘동아시아역사위원회와 같은 기구’ 구성을 제안하고, “시민사회의 역량이 비교적 강한 한국이 (…) 추동하는 역할을 해낼 수 있을 것이다”(214면)라고 진술하고, “과거를 돌아보고 역사 속에서 동아시아를 하나의 지역으로 성립시키는 자원을 발견하는 작업이 소중한 것이다. 이 과제와 관련해 한국에 사는 우리는 이미 동아시아 담론을 여러 차례 발신한 바 있다. 이제는 중국으로부터의 활발한 답신을 고대하고 있는 중이다”(217면)라고 쓰고 있다.

『역사전쟁』의 저자 윤명철(尹明喆)도 동북공정을 철저히 비판하면서, “강소국인 한국이 중국과 일본이라는 강대국 사이에서 중핵조정 역할을 수행해야만 궁극적으로 동아시아 공동체 구성에 따르는 갈등과 지나친 경쟁이 희석될 수 있다”(17면)고 밝히고 있다.

나는 통일한국, 통일조선이 중국의 조선족 자치주와 통합하여 대조선국을 만드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과 같은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디아스포라(diaspora)의 결과, 한민족은 중국에 204만명, 구소련에 48만명, 일본에 87만명, 미국에 205만명이 존재한다(1999년 통계에 의함). 이 사람들은 제각각 현재 거주하는 나라 안에서 한국을 하나로 만들 뿐만 아니라 동북아시아를 하나의 공동의 집으로 만들어가기 위해 힘쓰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한국인이 동북아시아 공동체의 의미를 설명하여 중국인의 경계심을 해소해줄 수 있을 것이다. 협소한 내셔널리즘을 초월하는 일은 일국만의 노력으로는 불가능하며, 지역의 모든 국민의 상호협력과 상호원조에 의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 이 ‘역사전쟁’을 통해서 다시금 분명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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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이즈미 수상은 2005년 1월 20일 통상국회의 개회 소신연설에서 마침내 처음으로 “다양성을 수용하면서 경제적 번영을 공유하는 열린 ‘동아시아 공동체’의 구축에 적극적인 역할을 다해가겠다”고 표명했다. 일본 신문들은 이 점에 주목하지 않았고, 어떤 논평도 하지 않았다. 여하튼 ‘동아시아 공동체’를 지향한다면 ‘동북아시아 공동의 집’을 생각해야 하며, 중국·한국·북한과의 화해협력을 위해서 역사문제에 대한 좀더 깊은 고민이 필요할 것이다. 코이즈미 수상은 야스꾸니신사 참배를 해서는 안되며, 강제노동 피해자를 위한 보상기금을 만드는 등의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朴光賢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