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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북핵문제와 한국의 주도적 역할

 

 

정욱식 鄭旭湜

‘평화네트워크’(www.peacekorea.org) 대표, 인터넷신문 오마이뉴스 평화·통일 문제 담당기자, 파병반대 국민행동 정책위원. 저서로 『2003년 한반도의 전쟁과 평화: 부시의 예방전쟁과 노무현의 예방외교』 『미군 없는 한국을 준비하자』(공저) 『한반도의 선택: 부시의 MD구상, 무엇을 노리나』(공저) 『전쟁과 평화, 21세기를 어떻게 시작할 것인가』(공저) 등이 있음. peace@peacekorea.org

 

 

1. 들어가며

 

2002년 10월 고농축 우라늄(HEU) 문제를 둘러싸고 북한과 미국이 충돌하면서 불거진 2차 핵위기가 3년째를 맞이하고 있다. 이 기간 동안 남북한,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가 참여한 6자회담이 세 차례 열렸지만, 문제해결의 실마리조차 찾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사이 북한은 6~8개의 핵무기를 제조할 수 있는 플루토늄을 확보한 것으로 추측되고 있고, 이 가운데 일부는 이미 무기화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실정이다. 또한 북·미 갈등이 장기화되면서 북미관계는 물론이고, 남북관계, 북일관계 전반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쳐 한반도의 평화정착과 동북아의 협력안보 실현을 어렵게 하고 있다. 더구나 핵위기의 장기화가 한반도는 물론이고 국제사회 전반에 치명적인 재앙을 가져올 수 있는 사태로 이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실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해결의 열쇠를 쥐고 있는 북한과 미국은 기존의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미국은 북한의 선(先) 핵폐기 입장을 고수하면서 “하지 말았어야 할 행동에 보상은 없다”며, 북한이 요구하는 ‘동결 대 보상’을 거부하고 있다. 반면에 북한은 미국의 적대정책이 해소되지 않는 한 ‘핵억제력’을 강화할 수밖에 없다고 맞서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와중에 지난 2년 동안 ‘북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이라는 엄중한 과제 앞에서 갈팡질팡했던 노무현정부가 ‘한국의 주도적 역할’을 역설하면서 적극적인 문제해결 의지를 보이고 있어 주목을 끈다.

그러나 냉정하게 판단할 때, 한국이 북핵문제 해결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쉽지 않다. 북한의 전략적 결단을 이끌어낼 만큼 남북한의 신뢰가 구축된 것도 아니고, 남한이 북한에 행사할 수 있는 지렛대도 제한되어 있다. 또한 지난 4년이 보여주듯 부시행정부의 대북정책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더이상 방관자나 소극적 중재자로 머물 수도 없다. 냉철하고 정확한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창조적이고 치밀한 전략을 마련해야 할 때인 것이다. 지금까지 노무현정부는 부시행정부를 설득하기 위해 한미공조에 ‘올인’해왔다. 대선공약이었던 한미행정협정(SOFA) 협상을 뒤로 미뤘고, 세계 3위 규모의 이라크 파병을 단행했으며, 미국의 필요에 따라 이뤄지고 있는 주한미군 재배치 비용을 거의 전적으로 부담하기로 했다. 미국의 요구를 들어주면 미국도 우리의 입장과 요구를 이해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심리의 반영이기도 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부시행정부의 대북정책은 변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과제는 무엇일까? ‘운명의 해 2005년’을 ‘대전환의 원년’으로 삼아 한반도의 위기를 해소하고 공고한 평화를 구축하기 위한 최선의 전략은 무엇일까? 노무현정부는 지금까지 한·미·일 삼각공조와 6자회담의 틀 내에 머물러왔다. 그러나 북핵문제를 비롯한 한반도의 불안요소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6자회담과 더불어 ‘플러스 알파’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플러스 알파’는 미국을 유연화하는 데 한미공조의 중심을 잡고, 갈등과 협력이 교차하고 있는 동북아 국제관계에서 기회를 포착해 이를 극대화하며, 1차회담 이후 5년이 지나도록 열리지 않고 있는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해 ‘한반도 평화선언’을 하는 것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핵심쟁점과 관련해 북미간의 입장과 제안을 조절·중재하는 수준을 넘어 한국의 제안을 만들어 이를 관철시킬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네 가지 접근, 즉 핵심쟁점들에 대한 해법 마련, 미국의 유연화, 동북아 국제관계의 활용, 남북정상회담 추진이 상호 보완적이고 선순환(善循環)의 효과를 낼 수 있는 전략 마련이 필요하다. 필자는 이것을 ‘입체전략’이라고 명명하고자 한다.

 

 

2. 핵심쟁점에 대한 해법 마련

 

향후 6자회담에서 한국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북핵 해법기조를 분명히 하면서 문제해결의 걸림돌이 되고 있는 핵심쟁점과 관련해 정교하고 설득력있는 해법을 내놓을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북한과 미국을 동시에 만족시킬 수는 없더라도 정치적 체면을 살려주어 불만을 최소화하고, 중국·러시아·일본의 지지도 이끌어낼 수 있는 방안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핵심적인 쟁점을 중심으로 한국이 고려할 수 있는 해법은 아래와 같다.

첫째, 최대쟁점인 우라늄 농축문제는 ‘남핵 문제’와 흡사하게 R&D(연구개발) 차원에서 해결하는 것을 목표로 삼을 필요가 있다. 잘 알려진 것처럼 북한의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 의혹은 북·미 대결의 해소를 가장 어렵게 하는 난제 중 난제다. 미국은 북한의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에 대해 “분명히 있고, 북한도 이를 시인했다”고 주장하고 있고, 북한은 “미국이 날조했다”고 맞서고 있는 실정이다. 어느 한쪽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셈이며, 이에 따라 이 문제를 풀기는 대단히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북미 양측 모두 체면을 살려주면서 북한의 우라늄 농축 의혹을 해소할 수 있는 ‘묘책’을 찾아야 한다. 그 묘책이란 남한의 우라늄 농축실험과 비슷한 맥락으로 북한 역시 R&D 수준에서 우라늄 농축을 시도했다는 가정을 세우는 것에서 출발할 수 있다. 북한의 ‘우라늄 농축 의혹’을 R&D의 맥락에서 접근하게 되면 북한은 ‘평화적 핵활동’의 일환으로 우라늄 농축기술 확보를 시도한 것이기 때문에 핵무기 제조와는 무관하다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생긴다. 반면에 미국으로서는 어쨌든 북한이 우라늄 농축기술 보유를 시도했다는 점에서 자신의 주장이 틀린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또 우라늄 농축기술은 근본적으로 ‘이중용도’로 사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위의 제안은 더욱 현실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우라늄 235를 90% 이상으로 농축하면 핵무기 제조에 사용할 수 있고, 저농축 우라늄은 경수로의 원료로 사용된다. 따라서 북한이 향후 경수로에 사용될 핵연료를 마련하기 위해 우라늄 농축기술 확보를 시도했다고 정리하면 북핵문제는 의외의 돌파구가 열릴 수 있다. 이러한 접근법을 바탕으로 북한은 우라늄 농축 관련 의혹을 해소하기 위해 국제원자력기구(IAEA)와 대화를 개시하고 이와 동시에 미국은 자신이 갖고 있다는 정보와 자료를 IAEA에 제출하는 방식으로 문제해결을 시도해야 할 것이다.

둘째, 북한이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고, 미국은 허용할 수 없다는 ‘평화적 핵활동’에 대한 합의점을 도출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북한에 허용할 수 있는 평화적 핵활동의 내용과 조건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즉, 핵무기 제조에 이용될 수 있는 흑연감속로와 재처리 시설, 그리고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은 ‘평화적 핵활동’에 포함될 수 없다는 점을 명확히 하면서 핵무기 프로그램으로의 전환이 사실상 불가능한 경수로 사업을 보장하는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특히 미국의 우려 사항, 즉 북한이 경수로를 핵무기 제조용으로 전용할 수 있다는 우려를 불식시킬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경수로에서 나온 폐연료봉을 재처리하는 것이 기술적으로 어려울 뿐만 아니라 북한의 핵 프로그램 폐기대상에는 재처리시설도 포함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경수로 사업의 보장 조건으로 핵확산금지조약(NPT) 복귀 및 IAEA 추가의정서 서명을 북한에 제안할 필요가 있다.

셋째, 북한의 핵 동결 및 폐기에 맞추어 북한에 대한 안전보장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이는 두 단계로 나누어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첫번째 단계는 북한의 핵동결에 맞추어 다자간 안전보장을 제공하는 것이고, 두번째 단계는 평화협정 체결을 통해 확고한 안전보장을 해주는 것이다. 다자간 안전보장과 관련해 미국은 “모든 핵 프로그램에 대한 북한의 신고가 접수되면 잠정적인 다자간 안전보장을 제공하겠다”고 밝히고 있고, 북한은 ‘말(공약, commitment) 대 말’ 차원에서 북한이 핵무기 프로그램 폐기를 공약하면 미국도 적대정책 철회를 공약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입장 차이를 좁히기 위해서는 북한이 핵폐기를 공약하고 동결을 선언하는 것과 동시에 문서화된 형태의 다자간 안전보장을 공약하는 방안을 강구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다자간 안전보장의 조건을 어떻게 할 것인가이다. 미국이 북한을 공격하고 싶어도 핵시설과 핵물질이 어디에 있는지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점을 고려할 때, 북한이 모든 핵 프로그램을 신고하고 이에 대한 접근을 허용하게 되면 결과적으로 북한은 적대국가인 미국에 공격목표 정보를 공개하는 셈이 된다. 이라크가 유엔 무기사찰단에 전적으로 협력했다가 미국의 폭격을 당한 사례를 볼 때 북한 핵 프로그램의 사찰 및 검증 단계에서 얼마든지 갈등이 불거질 수 있으며, 이에 북한은 확고한 안전보장을 받기 전까지 자신의 핵 프로그램을 투명하게 공개하는 것을 극도로 꺼릴 것이다. 반면에 부시행정부가 말하는 “잠정적이고 일시적인 안전보장”은 북한이 완벽하게 협력·순응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안전보장의 구체적인 내용과 조건을 둘러싼 논란은 불가피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다자간 안전보장의 ‘신뢰성’과 ‘불가역성’을 확보해야 한다. 구체적인 방안으로는 안전보장의 철회조건을 명시하고, 철회가 고려되는 상황이 조성될 경우 미국이 일방적으로 철회하는 일이 없도록 “한·미·중·러·일이 협의해서 결정한다”는 것을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다. 그 다음 단계로 평화협정 체결을 의제화할 필요가 있다. 정전체제인 한반도에서 평화협정 체결만큼이나 확실한 안전보장 방안은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평화협정 체결 당사자는 최소한 남북한과 미국이 포함되어야 하고, 중국의 서명 역시 타진해볼 수 있다. 6자회담에서 한반도의 안전과 평화 그리고 비핵화를 위해 정전협정의 평화협정으로의 조속한 대체 필요성에 동의하면 협상은 북한의 핵 프로그램이 폐기단계에 접어들었을 때 개시하고, 폐기가 완료되기 전에 협정을 체결할 수도 있을 것이다.

넷째, 북한의 경제회생과 남북경협의 활성화를 위해 미국의 대북한 테러지원국 및 경제제재 해제가 반드시 필요한데, 이 문제에 대한 북미 양측의 입장차이는 대단히 크다. 북한은 핵 프로그램의 동결과 함께 이뤄질 것을 요구하고 있고, 미국은 북한이 모든 핵 프로그램의 폐기를 공약하고 폐기 준비단계를 ‘검증가능한 방식’으로 완료했을 때 협의를 개시한다는 입장이다. 이에 대해 한국은 북한이 핵폐기를 공약하고 동결을 선언했을 때 협의를 개시하고 핵폐기에 돌입하기 전까지 테러지원국과 경제제재를 해제한다는 새로운 제안을 할 필요가 있다.

끝으로, 북미·북일 수교를 통한 한반도 교차승인 구도의 완성도 추진해야 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여러차례 강조한 것처럼, 북한은 미국과의 관계정상화가 이뤄지면 핵무기를 포함한 대량살상무기를 포기할 의사를 밝혀왔다. 그러나 미국의 조건은 갈수록 까다로워져 핵문제가 해결된 이후에도 다른 조건들이 충족되어야 한다는 초강경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북일수교에 대해서도 납치자 문제와 함께 핵문제가 해결되기 전까지 미국은 반대입장을 갖고 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는 납치자 문제와 핵문제 해결에 진전이 이뤄지는 맥락에서 북일수교가 이뤄지고, 핵무기 프로그램이 폐기되는 즉시 북미수교를 체결하는 방안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3. 미국을 어떻게 유연화할 것인가?

 

차기 6자회담이 실효를 거두기 위해서는 미국이 3차회담에서 내놓은 제안을 유연화·현실화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이뤄지지 않으면 북미간의 접점을 찾기란 대단히 어려워지고 이에 따라 북미 양측에서 ‘6자회담 무용론’이 강하게 제기될 수 있다. 이를 우려한 듯 노무현 대통령은 부시 재선 직후 LA에서 가진 연설에서 ‘한국의 주도적 역할’을 천명했다.

일단 노무현정부가 그리고 있는 로드맵은 제3차 6자회담에서 나온 한국안, 미국안, 북한안을 비교·평가해 새로운 제안을 만들고(1단계), 이 안을 미국·일본과 조율해 한·미·일 공동의 안으로 만들며(2단계), 이를 북한에 전달해 북한의 전략적 결단을 유도한다(3단계)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노대통령의 ‘LA 발언’과 뒤이은 한미정상회담 및 유럽 순방을 통해 넓어진 외교적 지평을 최대한 활용해 절묘한 안을 만들어낸다면 한국 주도로 극적인 돌파구를 만들 수도 있다. 반면에 한국의 새로운 제안을 북한과 미국 모두 거부하거나 어느 한쪽이 거부하게 되면, 한국의 입지는 오히려 줄어드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특히 미국과 조율된 안을 북한이 거부할 경우 사태는 심각해질 수 있다. 북핵 해법이 한국 주도에서 미국 주도로 넘어가고, 이에 따라 한국이 제재와 봉쇄, 그리고 무력사용 고려 등 미국의 강경책을 거부할 근거가 약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주도적 역할’이 자칫 자충수가 될 수 있다는 우려도 이러한 맥락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는 한미간 정책조율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과 이를 위해 한국이 치밀하고 정교한 해법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미간 정책조율을 위한 새로운 제안의 내용은 위에서 필자가 제안한 핵심쟁점에 대한 해법을 바탕으로 짤 수 있을 것이다.

향후 한미공조와 관련해 또 한가지 중요한 문제는 ‘미국을 어떻게 유연화할 것인가’이다. 지난 2년 동안 노무현정부는 이라크 파병, 주한미군 재배치 비용 전담, 대북정책과 북핵문제의 연계 등 미국의 요구를 대부분 수용하면서 미국이 바뀌기를 기대했다. 약소국인 한국이 강대국인 미국에 먼저 카드를 보여주면서 협상하려고 했던 것이다.당연히 이러한 협상은 참담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같은 어설픈 한미공조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외교의 자세 변화가 요구된다. 첫째는 한국의 목표를 분명히 밝혀두는 것이다. 여기서 목표란 북핵문제는 철저하게 대화를 통한 평화적 해결이어야 한다는 것이고, 한반도의 안전과 평화를 저해할 수 있는 어떠한 제재나 봉쇄도 반대한다는 점을 미리 밝히는 것이다. 이를 통해 부시행정부로 하여금 대화를 통한 평화적 해결 이외의 대안은 없다는 인식을 갖게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러한 점에서 노대통령의 ‘LA 발언’을 시발로 APEC(11월 중순)→ASEAN+3(11월 말)→유럽순방(12월 초)으로 이어진 2004년 11~12월의 외교활동은 한국 외교의 목표와 기조를 분명히 한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둘째, 미국에 사정하는 듯한 ‘저자세 외교’에서 벗어나 조속한 문제해결이 미국의 이익에 구체적으로 어떤 도움이 되는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 문제는 정부가 직접 이를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과 ‘미국의 국익’과 ‘부시정권의 이익’이 다를 수 있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 정부는 물론이고 정부보다 더 친미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는 국회, 언론,연구자의 자세 변화도 필요하다. 또한 대미 로비상대 역시 의회, 언론, 싱크탱크, NGO 등으로 확대해 미국 여론이 부시행정부를 설득·압박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진보적인 연구자와 국회의원, 그리고 NGO의 대미활동도 강화되어야 할 것이다.

셋째, ‘이라크 파병과 북핵 연계론’과 같은 어설픈 연계전략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정공법’을 통해 미국을 설득해야 한다. 북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은 미국이 한국에 시혜를 베푸는 문제가 결코 아니다. 미국 세계전략의 핵심 가운데 하나인 적성 국가들의 핵무장 방지는 미국의 국익에 부합한다는 판단 때문에 나온 것이다.

넷째, 미국이 협력하지 않으면 한국은 다른 대안을 강구할 수 있다는 점을 암시할 필요가 있다. 다른 대안이란 이란과 유럽연합의 합의와 같이 미국이 참여하지 않은 상태에서 북한과의 대타협을 추진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위해서는 일본, 중국, 러시아와의 협조체제를 강화하고, 남북관계의 질적 발전을 꾀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통해 미국이 협조하지 않으면, 북한이 아니라 미국이 배제·고립될 수 있다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

 

 

4. 동북아 국제관계의 활용

 

‘북핵문제’가 국제적인 사안이고 6자회담에 남북한과 미국은 물론 중국, 러시아, 일본 등 동북아 주요국가들이 참여하고 있는만큼, 우리가 국제사회의 역학관계를 잘 활용하는 지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다수 국가들이 미국의 일방주의에 불만과 경계심을 갖고 있는 현상은 한국 외교가 특히 주목해야 할 점이다. 특히 ‘부시의 미국’을 유연화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점에서 재앙을 막는다는 차원의 ‘그럭저럭 버티기’(muddling through)라도 하기 위해서는 남북관계의 안정적인 관리, 주변국가와의 이해관계 공유와 이를 통한 협력 강화는 대단히 중요한 과제이다. 이러한 점에서 유럽연합의 트로이카인 영국·프랑스·독일이 미국을 우회해 중국과 러시아의 지원하에 이란과의 핵합의를 이끌어낸 것은 중요한 참고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동북아 주요국가들 사이의 ‘갈등과 협력 구조’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주변국가와 공유할 수 있는 이해관계의 지점들을 발견해 이를 한반도의 안전과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안전판으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 국제관계의 갈등과 협력 구조의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일까? 먼저 21세기 세계질서의 최대 변수이자 한반도 문제에도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는 미중관계를 보자. 미국은 21세기 자신의 패권에 도전할 수 있는 유력한 국가로 중국을 뽑고 중국이 미국과 대등해지는 것을 사전에 억제할 군사력 보유를 공식적인 국가안보전략으로 채택했다. 부시행정부가 중국을 ‘전략적 경쟁자’로 명명한 것은 이를 의미한다. 반면에 중국은 미국의 의도에 경계심을 가지면서도 이를 표출하는 것을 기피하고 원만한 대미관계 유지를 목표로 삼고 있다. 미국에 맞설 수 있는 힘을 보유하기 전까지는 미국과의 마찰을 가급적 피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미중관계의 복잡성이 한국을 곤혹스럽게도 하지만 동시에 ‘유리한 측면’이 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적어도 중국 지도부가 미국 강경파의 한반도 구상에 동의할 가능성은 낮기 때문이다. 북한의 붕괴나 한반도 전쟁 발발은 중국에 엄청난 경제적·안보적 부담을 야기하겠지만, 무엇보다도 미국 강경파의 궁극적인 의도가 중국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중국 지도부도 잘 알고 있고, 이에 따라 계속 북한을 ‘완충지대’로 삼고자 할 것이다. 이는 미중간에 ‘제2의 카쯔라―태프트(桂太郞―Taft) 밀약’이 어려운 전략적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중국이 북한의 버팀목이 되는 것에 부담을 느끼고 미국이 커다란 유인책을 제시한다면 중국의 판단이 흔들릴 수도 있다. 따라서 한국 외교의 중요한 목표 가운데 하나는 미국과 중국이 한반도를 놓고 흥정을 벌이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고, 이를 위해서는 미국 강경파의 구상에 대한 한중간의 ‘암묵적’ 위기의식을 공유할 필요가 있다.

한편, 미국은 북핵문제의 장기화가 중국의 영향력 확대를 가져오리라는 우려를 가질 수 있다. 중국이 미국 주도의 북한정권 교체전략에 동의하기는커녕, 오히려 미국의 대북강경책이 북중동맹을 강화하고, 동북아에서 중국의 외교력 확대를 낳으리라는 점을 미국은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2기 부시행정부가 대북강경책으로 중국의 영향력을 키워주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고, 또 강압적인 방식으로는 북한을 굴복시키거나 붕괴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할 경우, 대북정책의 극적인 변화를 꾀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닉슨행정부가 1970년대 초에 소련을 견제·봉쇄하기 위해 중국과의 관계정상화에 나선 것처럼, 부시행정부도 21세기의 전략적 경쟁자로 규정한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북한과의 관계정상화에 나설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한국은 이 가능성을 유념하면서 미국으로 하여금 대북강경책보다 포용정책이 자신의 전략적 이해관계에 부합한다는 점을 설득해야 할 것이다.

미러관계, 러시아의 한반도에서의 이해관계 역시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볼 수 있다. 냉전 해체 이후 라이벌 관계에서 탈피해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꾸준히 구축해온 미국과 러시아는 21세기 들어서도 ‘테러와의 전쟁’과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 그리고 전략무기 감축협상 분야에 있어서 협력해오고 있다. 그러나 미국과 러시아는 MD 및 우주 공간의 군사화, 중동문제, NATO의 동진, 우크라이나 등 중앙아시아 문제 등에서 갈등을 빚어왔다. 한반도에 대해 러시아는 한반도의 비핵화 못지않게 북한의 붕괴 및 한반도 전쟁 방지를 중요한 목표로 설정하고 있고, 특히 철도 연결과 에너지 분야에서 남북한과의 협력을 원하고 있다. 중국과 함께 러시아가 미국 강경파의 구상이 한반도에서 관철되는 것을 견제할 수 있는 토대라 할 수 있으며, 이를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지혜가 우리에게 요구된다.

다음으로 부시행정부 출범 이후 ‘찰떡궁합’을 보여온 미일관계와 일본의 전략적 선택을 보자. 미국과 일본은 ‘북한 위협론’은 물론이고 ‘중국 경계론’을 공유하면서 동맹 강화 및 일본의 재무장을 추진해왔다. 그러나 일본의 코이즈미 총리는 임기 내에 북일수교를 마무리짓겠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일본의 경제발전 및 아시아에서의 역할확대를 위해서는 북한과의 관계 정상화가 필요하다는 판단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이 북일관계를 중재해 관계를 정상화하는 데 일조하는 것은 여러가지 의미를 갖는다. 한국과 일본이 ‘함께’ 북한과의 관계개선을 추진할 때, 미국이 이를 저지·통제하기란 어려워지고 미국을 한반도 평화프로쎄스에 견인할 수 있는 현실적인 힘이 나올 수 있다. 동시에 독자적인 대북 접근시 나타나는 미국과의 긴장과 갈등을 줄일 수 있다는 점도 중요하다.

동북아의 갈등과 협력 구조를 잘 활용하면 북한의 핵포기에 따른 보상 환경을 한국이 주도해 만들 수 있다. 즉, 핵포기에 따른 보상 제공에서 미국이 부담하기를 꺼려하는 것들을 중·일·러와의 협력을 통해 보충함으로써 북한의 전략적 결단을 유도할 수 있는 기반을 강화할 수 있는 것이다. 이를 통해 북한의 핵포기에 따른 ‘경제적 보상’은 한·중·일·러에서 주로 맡고, 미국은 정치적 상응조치를 취하는 역할분담이 가능해질 것이다.

 

 

5. 남북정상회담의 중요성

 

노무현정부가 남북정상회담을 비롯한 남북관계 발전에도 더욱 적극적으로 임할 필요가 있다. 남북관계의 발전은 다음의 네 가지 의의가 있다. 첫째는 1기 부시행정부 4년 동안 사실상 중단된 남북한 평화프로쎄스를 복원한다는 의의이다. 미국 내의 정치적 역학관계의 변화와 한반도에서의 이해관계에 따라 남북관계가 냉온탕을 왔다갔다 했던 경험을 되풀이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둘째는 북미관계가 계속 악화될 경우 남북관계의 발전은 최악의 상황을 방지할 수 있는 유일한 지렛대로서의 의의를 갖는다. 셋째는 6자회담의 성공적인 진행을 위해서도 남북관계의 발전이 중요하다. 끝으로 최악의 상황이 도래할 경우 북한의 전략적 결단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도 남북관계의 발전이 필요하다. 핵문제 해결을 포함한 평화정착 논의를 남북한이 할 수 있어야 ‘남북관계의 질적 발전’을 꾀할 수 있다. 특사회담을 통한 ‘간접적인’ 정상회담과 5년이 지나도록 열리지 않고 있는 남북정상회담의 개최를 준비해야 하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무현정부는 지금까지 남북정상회담에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크게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로 부시행정부가 탐탁해하지 않을 것이라는 일종의 ‘자기검열’이다. 둘째로 정상회담이 6자회담 구도에서 이탈하는 것으로 비춰질 수 있다는 우려이다. 셋째로 핵문제는 기본적으로 북미간의 사안이기 때문에 정상회담을 통해 핵 문제를 푸는 데는 한계가 있으리라는 것이다. 쉽게 말해 북한의 전략적 결단, 즉 핵포기를 유도할 수 있는 지렛대가 남한에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부의 인식에서 적지 않은 문제점들이 발견되는 것 또한 사실이다. 부시행정부 관리들도 여러차례 강조한 것처럼, 남북정상회담의 추진 여부는 한국정부에 달려 있는 것이다. 미국의 입장이 현실적으로 중요하다는 점이 한국의 외교적 주권을 미국에 종속시키는 것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더구나 남북정상회담의 취지는 미국도 원하는 한반도 비핵화를 달성하고 지구상에 마지막으로 남은 냉전구조를 해체하는 것에 기여하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에 미국이 반대할 명분도 없다. 미국이 냉전시대에 중국, 소련 등 적대국가와의 관계를 개선하는 데 사용한 카드가 특사회담과 정상회담이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노무현정부가 6자회담과 남북정상회담을 일종의 ‘제로썸 게임’으로 이해하는 것도 큰 문제이다. 정상회담의 필요성이 제기되는 근본적인 이유는 수차례의 6자회담이 열렸음에도 불구하고 문제해결의 실마리조차 찾지 못했고, 앞으로도 6자회담의 결과를 낙관하기 어렵다는 판단 때문이다. 정상회담이 6자회담의 ‘보완재’ 역할을 할 수 있다면 6자회담의 성공을 위해서도 중요하다. 중국과 러시아는 물론이고 일본조차도 6자회담이 진행되는 중에 북한과의 정상회담을 가졌던 것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남한이 북한의 핵포기를 유도할 수 있는 지렛대가 없기 때문에 정상회담은 핵문제 해결의 유용한 방식이 아니라는 생각은 6자회담과 남북정상회담을 ‘제로썸 게임’으로 보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다. 정상회담을 통해 핵문제 해결의 돌파구를 찾자는 것은 이를 통해 북한의 전략적 결단을 이끌낼 수 있다는 뜻이라기보다는, 북한이 전략적 결단을 할 경우 보상받을 수 있는 내역을 다양화·구체화·명시화함으로써 북한이 좀더 안심하고 핵포기를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자는 것이다. 6자회담을 통해 북한에 제시되고 있는 인쎈티브는 ‘그림의 떡’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노무현정부가 말한 ‘포괄적 대북지원’ 역시 북한의 전적인 신뢰를 얻기 힘들다. 미국은 근본적으로 북한과의 관계개선을 꺼리고 있고 남한은 한미동맹을 금과옥조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북한은 도박에 가까운 전략적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남북정상회담은 바로 이러한 점에서 커다란 의의를 갖는다. 정상회담을 통해 노무현 대통령이 핵 포기시 6자회담 구조에서 얻게 될 북한의 경제적·안보적 인쎈티브를 상세히 설명하고 남북관계 차원에서는 ‘포괄적 대북지원’을 확약하면, 북한의 전략적 결단을 이끌어낼 가능성은 훨씬 높아질 것이다.

물론 남북정상회담이 말처럼 쉬운 것도 아니고, 남한이 원한다고 해서 쉽게 될 일도 아니다. 남북한 상호간의 필요와 이익이 맞아떨어져야 비로소 가능하다. 그러나 정치외교는 ‘가능성의 예술’이라고 했다. 안팎의 조건이 어렵다고 해서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이다. 정체된 남북관계에 돌파구를 열고, 핵문제를 포함한 한반도 문제의 포괄적인 해결을 위해서는 어떤 형태로든 남북한 정상이 서로의 의중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첫번째 단계로 노무현정부는 북한과의 특사회담을 추진해야 할 것이다. 특사회담을 통해 민족공동체의 엄중한 현실을 공유하고 미래의 비전을 함께 설계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 오늘날 핵문제와 관련된 의사소통 구조를 보면 6자회담 이외에도 관련국 사이의 모든 대화채널이 가동되고 있는데, 유독 남북만 막혀 있다는 것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를 시사해준다.

 

 

6. 결론을 대신해서

 

‘입체전략’이라고 명명한 한국 외교의 새로운 접근법의 요체는 각각의 정책이 선순환적으로 발전해 전반적이고 총체적인 문제해결을 위한 환경과 구조를 만드는 데 있다. 치밀하고 설득력있는 제안을 만드는 것, 미국의 기존 제안을 유연화하는 것, 동북아의 갈등과 협력 구조를 활용해 기회를 극대화하는 것, 핵문제를 포함한 평화문제가 남북한 사이에도 논의될 수 있도록 남북관계의 질적 발전을 꾀하는 것은 각각 상호보완적일 때 최선의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접근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핵문제는 기본적으로 북미간 적대관계의 산물이기 때문에 한국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기가 쉽지 않다. 또한 미국을 유연화하는 것도, 동북아 국제관계를 주도적으로 활용하는 것도, 남북한 사이에 핵문제를 논의하는 것도 쉽지 않은 과제이다. 한국이 단선적인 접근을 넘어 복합적이고 병행적인 접근이 필요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 한국의 새로운 제안이 설득력을 가질 때 6자회담의 다른 참가국들을 움직일 수 있고, 한국이 북미·북일 관계개선의 촉매제 역할을 할 때 북한도 남한의 제안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 남북관계의 질적 발전이 이뤄지면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발언권도 높아질 수 있다. 한국의 주도적 역할은 이처럼 복합적 사고를 바탕으로 치밀한 입체전략을 마련할 때, 비로소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