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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학벌주의, ‘서울대 문제’인가

김상봉 『학벌사회』, 한길사 2004

 

 

조순경 趙順慶

이화여대 여성학과 교수 skcho7@ewha.ac.kr

 

 

 

개인들 사이에는 무수히 많은 차이가 존재한다. 그 가운데 특정한 차이만이 서열화되고 위계화된다. 녹차를 즐기는 사람과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 사이의 차이는 차별로 이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이러한 차이들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우월한지 알 수 없다. 우열을 판단하는 기준도 없으며 기준을 만들려고 노력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출신학교라는 차이에 대해서는 주목한다. 그리고 학교들을 서열에 따라 범주화시킨다. 그 과정을 통해 특정 학벌에 대한 편견과 고정관념은 강화되고 재생산된다.

서울대·연대·고대 20점, 포항공대·카이스트·한양대·성대·중앙대 15점, 지방국립대 및 서울소재 대학 10점, 지방 4년제 사립대 5점(『대한매일』 2003년 3월 14일자). 국내 유명 결혼정보업체의 남성 특별회원 내부 심사기준 가운데 학벌관련 점수표이다. 학벌은 취업에서 결혼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일상의 전과정에서 한 개인을 평가하는 중요한 잣대로 작용하고 있다. 개인의 능력과 무관하게 그가 속한 학벌집단에 대한 고정관념에 의해 그를 바라본다.

학력문제와 구별하여 학벌에 의한 차별과 불평등을 처음으로 공론화한 강준만의 『서울대의 나라』가 출간된 이후 우리 사회에서 학벌주의의 문제는 ‘서울대 문제’와 동일시되어왔다. 사회적 병리현상으로서의 학벌주의에 대한 체계적인 분석을 시도한 김상봉(金相奉)의 『학벌사회』 또한 이러한 시선에서 멀리 있지 않다. 우리 사회에서 학벌주의 문제의 핵심은 서울대 학벌에 의한 권력독점이며 따라서 서울대 학부의 잠정적 폐지와 지역 인재할당제가 일차적 대안으로 제시된다.

저자는 권력을 향한 욕망과 감정에 기초한 학벌의 폐해를 우리 사회의 수많은 악의 근원으로 보고 있다. 공교육의 파탄에서 전인교육의 붕괴, 도덕성과 공정성의 결여, 공동체에 대한 무관심과 사교육의 폐해에 이르기까지 학벌주의가 어떻게 우리 사회 구성원을 무비판적이고 맹목적으로 만들며 사사로운 욕망과 맹목적 감정을 부추기는가, 그리하여 우리 사회 전체의 몸과 정신을 어떻게 황폐화시키는가에 대해 설득력있는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The Quarterly Changbi이러한 사회악의 근원으로서 학벌주의의 한가운데에 ‘서울대 문제’가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 저자의 일관된 주장이다. 그리고 이러한 눈으로 ‘사실’들을 보고, 선별하고, 해석한다. ‘아버지가 일하는 시간보다 자신이 공부하는 시간이 왜 더 많아야 하느냐’며 자살을 한 초등학교 5학년생의 죽음도, 언니보다 공부 못한다 하여 부모에게 꾸지람을 들은 뒤 자살한 어느 여고생의 죽음도, 그리고 수능시험을 앞두고 저조한 성적을 비관해 자살한 여고생의 죽음도 서울대 중심의 학벌주의에서 찾는다.

그의 논리를 뒷받침하기 위한 자료에서, 서울대 학벌이 차지하는 권력과 사회적 자본의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 상세히 드러낸다. 해방 이후 역대 장관의 43%, 노무현정부 출범 당시 청와대 수석비서관의 92.3%, 검사장급 이상의 75.6%, 1급 이상 공무원의 48.2%, 10대 기업 대표의 43.6%, 87년 이후 공기업 임원의 61.5%, 2003년 100대 기업 대표이사의 43.7%, 2002년 국내 대학교수의 27.2% 등이 서울대 출신으로, 서울대 학벌은 우리 사회의 정치·경제·교육 등의 영역에서 막강한 권력을 점하고 있다는 점을 반복적으로 강조한다. 이러한 자료에 기초하여 저자는 ‘학벌문제는 서울대의 권력독점 문제’라고 결론짓는다.

그러나 학벌주의의 문제를 서울대 학벌의 권력독점 문제로 환원할 수 있을 것인가. 그렇다면 서울대 법대 교수의 91%가 서울대 출신이기도 하지만 고대 법대 교수의 93%가 고대 출신이라는 사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의 93%가 서울대 출신이지만 고대 사회학과의 100%가 고대 출신이라는 사실을, 서울대 의대 교수의 대부분이 서울대 출신이기도 하지만 연세대 의대 교수의 경우도 그와 다르지 않게 95% 정도가 연세대 출신이라는 사실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학벌주의의 문제를 서울대 학벌에 의한 권력독점의 문제로만 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의문은 책을 읽어나가면서 해소되지 않는다. 대학교육, 사교육의 폐해 등 우리 교육문제의 근원이 서울대 중심의 학벌주의에 있다는 분석은 한편으로는 매우 명쾌해 보인다. 대안 또한 분명해 보인다. 서울대 학부를 폐지하고 공직자 지역할당제를 실시하면 우리 사회의 학벌문제는 대부분 해결될 것이라 전망한다. 공직자 지역할당제 정도의 요법으로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내기에 충분하지 않으니 서울대 학부 폐지라는 충격요법으로 관심과 대립을 끌어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제안한다.

그러나 학벌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정작 필요한 논의, 즉 핵심권력층에 서울대 출신이 집중되어 있는 원인에 대해서는 정교한 분석이 없다. ‘통계적 불균형’ 자체만으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차별 혐의’가 있다는 사실뿐이다. 특정 학벌에 대한 편견과 고정관념에 의해 비서울대 출신들이 어떻게 부당하게 배제되었는지 알 수 없다. 이러한 논리만으로는 저자가 비판하는 “학벌차별은 없다. 오직 능력차이가 있을 뿐이다”라는 학벌 유명론(唯名論)은 힘을 잃지 않는다.

학벌 유명론이 그 실체가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구체적이고도 미시적인 차원의 현장조사가 필요하다. 저자가 의존하고 있는 2차자료만으로는 이러한 것들을 밝혀내기에는 역부족이다. 공직자 선발과정에서, 장관 임명과정에서, 혹은 공무원 승진과정에서 학벌에 대한 편견과 고정관념, 그리고 비합리적인 기준과 평가 잣대가 개입했는지의 여부를 밝힘으로써만이 차별이 있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 없이 단순히 통계적인 불균등 현상만으로 차별과 불평등이 있었다는 주장은 설득력을 얻기 어렵다.

저자는 이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 대신, 학벌이 한국사회에서 사회적 실체가 있음을 밝힌다. 즉 “계급이 계급의식에 의해 현실적으로 존재하듯, 학벌 역시 오직 공유된 학벌의식에 의해 현실적으로 존재한다”(146면)고 주장한다. 그러나 학벌이 사회적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과 학벌에 의한 차별이 존재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성별이나 인종이라는 사회적 실체의 존재 자체가 성차별이나 인종차별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저자는 학벌이 우리 사회에 존재한다는 것에 대해서 논할 뿐, 그러한 학벌을 기준으로 한 차별이 어떠한 기제에 의해 이루어지는지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 않다.

권력에 대한 욕망과 자기 집단에 대한 맹목적 친밀감에 기초한 학벌의식이 학벌주의의 핵심이라면, 학벌주의의 극복은 그러한 학벌의식을 제도적으로 차단하는 것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서울대 법대 교수진이 100% 서울대 출신 남성으로 이루어졌던 현실은 타교 출신 비율과 여성 비율을 높이도록 한 정책의 도입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에리히 프롬이 “이성의 힘을 죽이는 치명적인 독약”이라고까지 한 집단적 나르시시즘이 학벌의식의 자양분이라면, 서울대인·연대인·고대인의 집단적 나르시시즘은 단순히 서울대 학부를 폐지하고 대학서열을 없애는 것만으로 변화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속한 집단에 대한 맹목적 친밀감, 그리고 다른 집단에 대한 맹목적 배타주의가 서울대 학부 폐지나 공직자 지역할당제로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는 진단은 천진난만하게까지 느껴진다.

학벌차별 문제를 학문적으로 체계화하고자 하는 저자의 노고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 공기처럼 만연한 학력차별을 간과한 것은 책 전체의 설득력을 떨어뜨린다. 학벌에 ‘올인’하면서 저자는 학력문제를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한국에서 사회적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장치가 학력이 아니라 학벌”(124~25면)이며, “계급적 서열에서 보자면, 학벌서열이 학력서열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125면)이라는 입장이다. 나아가 “한국사회에서 사람들 사이의 불평등한 구별짓기가 대졸이냐, 고졸이냐, 중졸이냐 하는 기준에 따라 이루어진다고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현실을 심각하게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같은 곳)라고 주장한다.

2003년 현재 우리나라 고교 졸업자의 대학진학률은 79.7%로 세계 최고 수준이다. 일본이 45%, 미국 63% 정도다. 이러한 높은 대학진학률은 ‘대학을 나오지 못하면 사람구실도 하기 어려울 정도’로 우리 사회가 학력차별이 심하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말해준다. 단순 사무직뿐 아니라 엘리베이터 안내원도 대졸 학력을 요구하고, 대학 졸업장이 없으면 웬만한 기업의 입사지원 자격도 없다. 학벌에 의한 차별을 문제삼으면서 학력차별에 눈감는 태도는 저자가 차별에 대한 이해를 어떻게 하고 있는가에 대해 의문이 들게 한다.

학벌에 의한 차별을 근원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차별에 대한 감수성을 키우는 것이다. 인간에 대한 차별은 강한 전염성을 지닌다. 외국인 혐오증이나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은 성차별을 허용하고, 장애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에도 무감각하게 만든다. 대학을 나오지 못한 사람에 대한 차별에 둔감한 사람은 특정대학 출신자에 대한 차별에도 무감각할 수밖에 없다. 학벌차별 문제를 부각하기 위해서 학력차별, 성차별 등 다양한 유형의 차별에 눈감아버리는 한 우리 사회에서 학벌주의는 강하게 살아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