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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엔지니어로서의 이야기꾼, 또는 문학시장의 공룡
댄 브라운 소설 『다 빈치 코드』 1·2, 베텔스만 2004
유희석 柳熙錫
경원대 영문과 강사 yoohuisok@yahoo.com
예술가와 엔지니어를 가르는 경계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경우가 그러하듯이, 언제나 자명한 것 같지는 않다. 한자인 ‘藝術’과 마찬가지로 ‘art’라는 영어도 기술이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지 않은가. 물론 인류학자인 레비스트로스도 엔지니어와 브리꼴뢰르(bricoleur)를 구분하고 후자의 노동을 도구적 목적을 넘어선 창발성으로 규정한 바 있지만, 가령 약 2만5천개의 부품들로 구성되는 동력장치의 작동원리를 속속들이 파악하고 다루는 자동차 정비공이 엔지니어 대접을 받으려면 치밀하고 훈련된 감각과 나름의 응용력은 필수적이다. 세상에 꼭 필요한 존재들이라서 누가 더 우월하냐를 따지는 것은 부질없기 십상인데, 그럼에도 우리는 예술가와 엔지니어를 같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필자의 실감으로 『다 빈치 코드』(양선아 옮김)의 저자인 댄 브라운(Dan Brown)의 감수성은 작가나 소설가보다는 엔지니어에 더 가깝다. 무엇보다 점층적 반전의 구도에 철자바꾸기(anagram) 같은 ‘말장난’의 연쇄로 이루어진 수많은 부품들이 작품 전편에 교묘하게 배치되어 독자의 흥미를 유발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 작품은 양성평등(〓자유주의)을 지향하는 시온수도회(The Priory of Sion)와 남성우월(〓보수주의)을 고수하는 오푸스 데이(Opus Dei)라는 종교결사를 대립구도로 설정하면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명화 「최후의 만찬」에 숨겨져 있다는 성배(聖杯)전설의 비밀을 살인과 음모의 추리극으로 버무린 (시쳇말로는) 팩션(faction)이다. 인간으로서의 예수가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하여 아이까지 낳았다는–마틴 스코씨즈 감독이 「예수의 마지막 유혹」에서 이미 우려먹은–선정적인 주제를 역사·미술사·인류학·종교비사·상징기호학 등 각 방면의 해박한 지식을 재주껏 푼 추리물이다.
국내외의 여러 서평자들도 지적한 바이지만, 그렇게 제작된 『다 빈치 코드』는 소설이라기보다는 ‘글로 씌어진 할리우드의 블록버스터’이다. 그러므로 이에 대한 세간의 평가, 즉 지구상의 가장 강력한 종교인 기독교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인 ‘모나리자’, 거기에다가 탈근대의 가장 큰 화두인 페미니즘을 절묘하게 엮어 지적 스릴러의 묘미를 한껏 고양시켰다는 식의 광고가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 빈치의 전기적 사료나 미술품에 관한 다양한 정보들을 주무르는 작가의 실력도 세계적인 베스트쎌러의 이름에 값한다. 추리기법을 활용한 이야기꾼답게 소설적 허구와 역사적 사실을 뒤섞어 내러티브를 만드는 솜씨도 보통이 아니고, 계몽의 효과마저 때때로 동반한 논리와 추론이 작품 전편을 장악하고 있다는 점에도 필자는 동의한다.
그렇다고 『다 빈치 코드』의 재미가 곧바로 작가의 탁월함에 대한 방증이라든가, 천재적인 작품이라는 식의 평가로 이어지는, 기자·소설가·비평가·미술사가 등 나름의 전문가들이 동원된 시장의 ‘문학적 평가’에까지 공감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일독하고 난 다음 곱씹어본 것은 『다 빈치 코드』 자체의 대중적 미덕이나 그 문학성의 성격, 작품을 둘러싼 (역사를 왜곡했다는 식의) 논란보다는 근래 모 일간지에 실린 교수직에 종사하는 국내 소설가의 발언–앞으로 소설이나 작가도 사라지고 이야기만 남았으면 좋겠고, 자신도 소설가가 아니라 이야기꾼으로 불리고 싶다는–이었다. 문학의 위기네, 소설의 죽음이네 하는 언설이 언필칭 문학지식인들의 입에 오르내린 지는 오래되었다. 하지만 사실과 상상의 경계를 의도적으로 흐리는 정보들을 할리우드의 도식에 맞춰 조립한 『다 빈치 코드』 같은 물건이 ‘일원 다중활용’(one source, multi use)으로 시장을 독식하는 판이니, 이는 영화나 관광상품 등 문화산업에 대한 소설의 여전한 무시 못할 파급력을 증명하는 현상이랄 수도 있을 것이다.
문제는 『다 빈치 코드』가 문학시장의 선순환(善循環)적 생태계를 파괴하는 공룡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서구 문학시장에서도 그런 공룡의 존재는 유구하며, 생계가 막막한–절대 다수가 그렇게 막막하다는 통계가 이미 나와 있지만–우리나라의 소설가라면, 엔지니어가 아니라 ‘공돌이’라는 소리를 듣는 한이 있어도 팔리고 읽히는 쪽을 선택할지도 모른다. 아니, 생활이 안되는 작가에게 그보다 더 인간적인 욕구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독자여, 작가들의 세속적인 소망을 비웃지는 마시라. 하지만 가난한 작가들의 절박한 바람을 짓밟기도 하는 것이 『다 빈치 코드』 같은 문학시장의 공룡들이라면 어쩔 것인가. 소설과 작가가 모두 사라지고 이야기만 남은 『다 빈치 코드』류의 밀리언쎌러야말로 문학의 죽음에 대한 실질적인 증언이라면 어쩔 셈인가.
소설과 작가가 모두 사라지고 남은 것은 단연코 재미(fun)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짜릿한 재미(kick)이다. 이 재미는 시각적 효과에서 나온다. 일정 분량의 과거 이력과 인간적 감정이 주입된 자끄 쏘니에르, 로버트 랭든, 쏘피, 빠슈, 싸일러스, 아링가로사, 티빙 등 주요인물들은 영화의 한 장면 속에서 걸어나온 것같이 느껴진다. 하지만, 이들은 작가가 미리 설정한 길을 따라갈 뿐인 체스판의 말이나 졸 같은 이야기의 기능적 단위들이다. 비평용어로 말하자면 ‘평평한 인물’(flat character)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독자의 시선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럼 다음 수(move)는?’에 묶이게 된다. 체스판의 전모는 야금야금 드러나기 때문에 독자는 게임의 포로가 되든가 판을 엎을 수밖에 없다. 또한 이야기의 흐름 자체가 고도의 극적 긴장감을 유발하는 데 맞춰져 있지만, 그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동력은 작가의, 또는 등장인물의 사유나 성찰이 아니라 교묘하게 수학적으로 조합된 무수한 백과사전적 지식이다.
예컨대 28장에서 인상적으로 선보인–선과 악, 왼쪽과 오른쪽, 여성과 남성을 편가르고 한쪽을 억압한–기독교의 반종교적 역사에 대한 성찰은 정보와 암호풀이로 대체된다. 그에 따라 소비로서의 텍스트 읽기는 숨 돌릴 겨를 없어지고 독자는 시간 가는 줄 모른다. 그러니 몇 페이지 안되는 프롤로그만 펼쳐도 튀어나오는 어처구니없는 수많은 오역들도 ‘문제’될 것이 없다. 그같은 오역이 문제가 안되는 것도 엔지니어로서의 이야기꾼이 가진 장기임을 말해주는 증좌인지는 몰라도 “그는(쏘니에르는–인용자) 대화랑에 갇혔고, (진리의–인용자) 횃불을 건네줄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한명밖에 없었다”(He was trapped inside the Grand Gallery, and there existed only one person on earth to whom he could pass the torch)가 “박물관 대화랑에 갇힌 소니에르는 횃불을 건네줄 수 있는 지상의 유일한 사람이다”(1권 14면)로 옮겨지거나(그 단 한사람은 쏘니에르의 손녀인 니뵈, 일명 쏘피를 가리킨다–인용자), 담력으로 풀이해야 할 ‘gut’을 내장으로 오역하는 등(1권 13면), 행간의 상황과 느낌을 전혀 다르게 전달해도 시간을 죽이는 독자의 짜릿한 재미에는 큰 타격을 가하지 못한다.
그러나 정보를 교양으로 가공하는 엔지니어의 문화상품을 그처럼 엉터리로 번역한 공룡 같은 물건이 우리 현실의 진지한 고뇌를 담은 문학작품을, 인문학의 공들인 저서들을 쓸어내다시피 해도 괜찮은 것일까? 문학시장의 실정도 알고 보면 원래 그런 것이니 소설이니 작품이니 하지 말고 우리도 하루빨리 ‘세계적인 이야기꾼’이 되어야 한다고 말해도 정말 좋은 것일까? 시간 죽이기로서의 여가(餘暇), 바로 이것이 좀비(zombie)의 ‘삶’이 아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