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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공임순 『식민지의 적자들』, 푸른역사 2005
‘우리 안의 식민지’를 청산하기 위하여
염복규 廉馥圭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 pkyum1@empal.com
“일제 식민지배는 오히려 축복”이었다고 한 한승조(韓昇助)씨의 발언은 당연하게도 큰 충격을 주었다. 게다가 그의 발언에 대한 찬성의 목소리가 그치지 않고 있음은 더욱 놀랍다. 발언의 내용보다 주목되는 것은 발언의 싯점이다. 오랜 독재권력의 시대에 친일청산문제는 억압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공개적인 식민지배 미화 역시 금단의 영역이었음이 틀림없다. 구구한 과정을 거치기는 했지만, 최근 ‘일제강점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었다. ‘자발적인’ 식민지배 미화담론의 ‘커밍아웃’이 바로 이 싯점, 즉 친일청산문제에 대한 ‘민주/민족’국가의 공식적인 개입이 시작되는 싯점에 터져나온 것은 ‘우리 안의 식민지’의 뿌리가 짐작보다 훨씬 깊다는 사실을 의미하지는 않을까?
근대한국의 “‘무치’와 ‘위선’의 감춰진 역사를 밑바닥까지 들여다봄으로써 그것과 치열한 대결을 통해 당대 모순을 짚어내고자”(9면) 한 공임순(孔任順)의 『식민지의 적자들』을 읽는 동안 머릿속을 맴돌았던 질문이다. 저자의 관심사는 역사인물들이다. 아니 인물 그 자체가 아니라, 그들이 소설이나 드라마 등 근대 대중서사에서 언제 어떻게 형상화되었으며, 그 배후에서 식민담론이 어떻게 작동하고 있었는지이다.
김옥균(金玉均)의 경우는 그 전형적인 예이다. ‘일본과 협조한 근대화 운동가’ 김옥균은 1930~40년대 일제의 대륙침략과 팽창의 야욕이 대아시아주의의 이름으로 모습을 드러내면서부터 소설·희곡·음반 등 다양한 형태로 조선의 선각자인 동시에 ‘동양의 선각자’로 되살아나기 시작한다. 동시에 김옥균을 암살한 홍종우(洪鍾宇)는 스스로 정체성을 배신한 못난 조선민족의 상징이 된다. 결국 김옥균의 재생은 그간의 못난 역사를 반성하고 동양의 일원으로 다시 일어서는 ‘면죄부’가 되는 셈이다. 면죄부의 내용은 두말할 나위 없이 일제 침략전쟁에 대한 협력이다.
일제말기의 김옥균 붐에 대한 저자의 분석에서는 결론도 결론이지만, 여러 김옥균 이야기들에 대한 치밀한 비교 검토의 과정이 흥미롭다. 사실 김옥균을 비롯해 황진이, 이순신, 대원군, 명성황후 등 저자가 다루는 이들은 대개 어느정도 알려진 인물들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식상한 인물들이기도 하다. 그러나 흔히 무시되곤 하는 다양한 텍스트를 탐색하는 저자의 성실함을 통해 그 인물들을 둘러싼 의미망은 새롭게 조명된다. 물론 저자가 단지 부지런한 것만은 아니다. 인물이야기들의 배후에서 작동하는 원리를 캐기 위해 저자는 다양한 이론의 바다를 유영하는데, 특히 인상적인 것은 젠더정치학의 방법론이다.
김동인(金東仁)의 역사소설들을 통해 “대원군의 쇄국정책이 (조선을 넘어선) 동양을 지켜낸 역사적 사건으로 재조명되면서 상대적으로 개국을 대변하는 명성황후가 악녀로 표상되는 과정”(144면)을 추적한 대목에서 적절하게 구사되는 젠더정치학의 방법론은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와 이태준(李泰俊)을 연결시키는 대목에서도 빛을 발한다. 조선인보다 조선문화를 더 사랑한 민예학자 야나기가 정한(情恨)을 조선미의 특징으로 규정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야나기에게 조선은 사랑을 받지 못하는, 그래서 더욱 사랑을 갈구하는 여성이다. 야나기 미학은 이태준의 『황진이』에서 고스란히 반복된다. 이는 우연이 아니다. 야나기가 “만들어놓은 표상공간이 황진이를 조선적인 것의 전형으로 불러왔기 때문”(45면)이다. ‘식민지의 여성화’라는 점에서 이태준은 야나기의 적자인 것이다.
젠더정치학에서 이야기하는, 근대적으로 구성된 남성성과 여성성의 할당과 투사를 통한 식민지에 대한 제국주의의 타자화전략은 식민지 조선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일제강점기 관광엽서 속에서 조선 기생이 단지 화류계 여성이 아니라 종종 조선 그 자체로 표상된 것은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최근 조금씩 연구되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 이러한 부분은 거의 미답(未踏)의 영역이다. 저자의 분석이 더욱 주목을 요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편 야나기와 이태준의 관계가 상징하듯이 저자가 특히 강조하는 것은 식민담론의 생산과 더불어 그것이 식민지인들에게 내면화되는 과정이다. 매우 공들여 분석한 이순신(李舜臣)의 경우는 이를 잘 보여준다. 당파싸움만 일삼다가 왜란을 자초한 무능한 집권층, 순박하되 어리석은 그래서 더욱 불쌍한 백성, 그리고 단 한명의 고독한 영웅 이순신. 흔히 알고 있는 이 이야기의 구도는 이광수(李光洙)의 『이순신』에 뿌리가 닿아 있다. 「민족개조론」 등을 통해 조선의 필연적인 몰락(망국)과 재생(친일)을 역설한 이광수는 이렇게 “조선의 역사 전체를 오욕과 부정의 역사로 경계짓고 단 하나의 민족영웅으로 이순신을 치켜”(85면)세움으로써 민족의 대행자를 자임하며 친일의 문턱을 넘어선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해방후에도 청산되지 못한 식민담론의 연속이다. 이광수가 만들어낸 구도는 무능한 국론분열의 주범인 반정부세력과 국난극복의 유일한 담당자인 자신을 대비시킨 박정희에 의해 반복되며, 최근에는 “고독한 언론의 충절과 야만스런 정부의 대결로 몰아가는 현재의 보수언론의 움직임”(139면)으로도 연결된다는 저자의 분석은 친일에서 반공으로 옷을 바꿔입은 지배층이 만들어온 이순신 이야기들이 본질적으로 같은 것임을 명료하게 보여준다.
식민담론의 연속을 추적하는 저자의 행보는 시사적인 내용이 많은 책의 후반부로 가면 더욱 예리하고 단호하다. 저자에 따르면 신용불량자들을 이라크에 파병하자고 한 어느 국회의원의 주장은 “식민지 조선의 여성‘지도자’들이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식민지 조선인들을 군대와 군위안부로 내보낸 것과 하등 다를 바 없”(459면 각주)으며, 문부식(文富軾)류의 ‘모두가 시대의 희생자’ 담론은 “죄없는 자가 나에게 돌을 던지라”고 하며 자신의 친일을 정당화한 이광수식 논리의 재판(再版)에 불과하다.
이쯤에서 우리는 결국 저자가 주장하는 바가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다. “죄있는 자가 죄있는 자에게 돌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5면)는 말에 집약된 저자의 주장은 결론적으로 ‘단죄의 윤리학’인 셈이다. 저자의 결론이 정당함은 누구도 부인하기 어렵다. 책임의 경중을 있는 그대로 따지는 것은 문제해결의 당연한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또 화해와 용서를 앞세우는 주장들이 실은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음험한 시도일 가능성에 대한 저자의 경계에도 충분히 공감한다. 특별법 제정을 둘러싼 논란만 보아도 저자의 주장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결론이 어쩔 수 없이 가해자/피해자의 이분법으로 기울어진다는 점이다. 이는 인적 청산으로 식민담론의 청산을 대신할 수 없다는 저자의 주장과도 모순되는 듯 보인다.
또한 그러다보니, 다소 무리한 개념 구사나 단정적인 규정이 눈에 띈다. 대표적으로 사익을 공익으로 포장한 사례로 지목한 윤치호(尹致昊)의 경우, 저자의 논리 전개를 위해 지나치게 단순화되어 ‘동원’된 느낌이 강하다. 윤치호가 일제말기 적극적인 친일의 길로 들어선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저자도 참조했으리라 짐작되는 그의 일기의 발췌국역본(『윤치호 일기』, 김상태 엮음, 역사비평사 2001)만 보더라도, 1880년대부터 해방 직후에 이르기까지 윤치호라는 인물이 걸어간 길은 그리 간단하지 않으며, 윤치호 개인에게 책임을 돌릴 수 없는 측면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한편 윤치호처럼 동족을 전장으로 내몬 지도자들이 먼저 돌을 맞아야 한다고 했을 때, 여기에는 돌을 던지는 자 역시 언제든지 돌을 맞을 수 있다는 점이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즉 윤치호류의 이면에는 자발적으로 전장에 나간 무명 ‘황국청년’들의 일그러진 열광이 존재했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이것은 그냥 덮어두고 화해하자는 식의 논리와는 오히려 정반대이다. 이 책의 묵직한 성과가 보여주듯이, 저자도 이 점을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더 깊되, 무뎌지지 않을 저자의 다음 작업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