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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신대철 申大澈
1945년 충남 홍성 출생. 196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무인도를 위하여』 『개마고원에서 온 친구에게』 등이 있음.
북극일기
백야가 계속되는 동안
걸어서 꿈속으로 들어가고
날짜 바꾸어 며칠씩
꿈속을 걸어나왔다.
황야에서 불어온 바람이 마을에 들어서자 잔잔해진다.
누가 창을 연다. 나지막한 단층 도서관. 시집도 사전도 없는 텅 빈 서가. 백인 사서는 졸고 있고 빙하 흐르는 창가에 앳된 여자가 수를 놓는다. 바라볼수록 가물거리는 수평선에서 색실 뽑아 야생화 피우고 엉키고 뒤엉킨 살 한올씩 풀어 야생화 주위에 노란집, 그 위에 흰 구름 띄워보다 갑자기 수틀 놓고 배를 잡는다.
희뿌연 얼음 안개, 나는 다시 극야로 돌아간다. 영하 50도, 이른 아침 누가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여는 순간 앳된 여자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문가에 비켜서자 구엔아빡이라 했다. 생큐 하지 않고 구엔아빡이라 했다. 열병에 걸리지 않으려고 하루에 한번 Sam & Lee에 오던 앳된 여자들, 백인으로 브룩산맥을 넘었다가 에스키모로 돌아와 어느 피로도 살 수 없다고 울부짖던 앳된 여자들, 춘천 의정부 송탄에서 아프게 스쳤던 앳된 여자들, 어딜 가나 외지의 외지인들
미소짓는 눈빛에
어루만지는 불룩한 배에
동토대의 얼음이 박혀 있다.
✽구엔아빡: 이누피아트 에스키모 말로 고맙다는 뜻.
✽브룩산맥: 북극권으로 들어설 때 이 산맥을 넘게 되는데 수목한계선을 이루고 있다.
오로라
떨고 있던 별들은 제자릴 찾아 반짝인다, 지상엔 언 눈 위에 떠도는 메마른 눈, 개마고원 친구가 사라진 뒤 발걸음 흩어지고 개 짖는 소리 판자촌을 울린다, 오, 난데없이 날 몰아치는 오로라
핏속을 어지럽게 흔들던 형상들
흔들린다, 발광한다, 후려친다
나에게서 얼음사막으로 내몰리는
저 사람, 내 몸 입고 내 말 흉내내던
저 사람, 내 길 가고 내 꿈 꾸던
악몽 속의 얼굴들 멀어지고 그리워지고 아주 지워진다
별 사이에 어둠이 총총 빛나고 있다
패랭이꽃
지평선 마을 1
불탄 산자락
풀빛에도 불내가 나네요
집터만 남은 합대나뭇골에
아직도 조롱박 차고 토방에 선 할머니
그만 내려오세요
콩새들 장독대로 내려오고
볕 드는 미루나무 밑에
패랭이 주저앉네요
살려면 봄도 사람도 잊어야 한다고
불기 감추고 나무나 한짐 해오라고
이승저승 가리면 죽은 이와 함께 못 산다고
등 토닥이며 타이르시던 할머니
물소리 잦아드는 골짜길 보세요
덤불에 가시 피고
타다 남은 개복숭아나무에
패랭이꽃 만발하네요
그만 내려오세요 할머니
길 묻히고 아주 지워지기 전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