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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정박하지 않는 사상가의 삶과 언어
리영희·임헌영 『대화: 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 한길사 2005
정희진 鄭喜鎭
서강대 강사, 여성학 out67@chol.com
『대화』를 읽고 리영희(李泳禧)를 한국 최초의 평화학자(平和學者)라고 생각했다. 그의 삶은 인생의 매순간을 새롭게 살고 싶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몰두해보고 싶을 만큼 매력적이다. 이것은 그가 뛰어난 비판적 지식인인 까닭도 있지만 그보다는, 유치환의 ‘바람’처럼 평생을 “쉼없이 뉘우치고 탄식하고 회의하고 헤맸기” 때문이다. 그의 사상에는 정박의 흔적이 없다. 평화는 변화이다. 폭력의 반대말은 평화라기보다는 ‘대화’인데, 여기서 대화는 비폭력이 아니라 오히려 기존 관계의 격렬한(violent) 변화를 뜻한다. ‘주례사 비평’을 피하기 위한 비판을 위한 비판, 경의의 헌사 모두 대화 단절의 언어이며 텍스트를 외롭게 만든다.
마흔을 채 살지 않았으며 페미니즘을 공부하는 내가, 아홉번의 연행, 다섯번의 기소(유예), 세번의 징역으로 한국현대사를 대표하는 남성 지식인의 75년의 생애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더구나 이 책은 자신에게 절대 관대하지 않은 ‘완벽주의자’ 리영희가 “나의 지금 조건과 형편을 생각하면, 이것으로도 대견한 것이 솔직한 심정”(11면)이라고 말할 정도로, 뇌출혈의 고통 속에서 탁월한 조타수 대담자 임헌영(任軒永)을 비롯한 수많은 이들의 도움으로 2년여의 구술과 고쳐쓰기를 통해 완성되었다. 746면에 이르는 분량도 분량이지만, 나는 행간마다 빼곡한 리영희의 삶의 밀도 그리고 나와 저자의 위치(position)의 차이(세대·성별 등)가 만들어내는 경계의 긴장을 감당하지 못했다. 존경과 질시, 동지애와 착잡한 심정이 자석의 같은 극처럼 길항하는 것이다. 그와 동시대를 산 여성들―신여성, 기지촌 여성, 군위안부, ‘여성’과 ‘지식인’을 양립할 수 없었던 여성지식인 등―의 삶, 그리고 ‘피해자’인 그녀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나, 하지만 아직도 리영희 같은 ‘아버지의 언어’를 욕망하는 나…… 결국 나는 이 분열에 대해 쓴다. 모든 의미는 차이의 산물이며, 앎은 경계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가능하다는 ‘진리’가 내게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만용을 주었다. 텍스트와의 대화는 독자와 저자의 갈등의 의미를 정치화함으로써 텍스트를 소통 가능한 역사 속에 위치시키는 것(mapping)이다.
이 책의 한면 한면이 한국현대사와 세계사의 ‘결정적 장면’이기 때문에, 이 지면에서 책 내용을 요약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셰익스피어에 의하면, 세상에는 세 가지 종류의 위대한 사람이 있다. 위대하게 태어나는 사람, 노력해서 위대해진 사람, 역사적으로 위대해지도록 조건지어진 사람. 리영희는 두번째와 세번째를 합쳐놓은 유형으로, 개인과 역사의 관계에 대한 어떤 전형이다. 『대화』는 그의 삶을 세 가지로 ‘요약’한다. 첫째, 그는 근대성에 대한 수많은 회의와 성찰에도 불구하고, 실사구시·이성·상식의 힘을 신뢰한, 그리고 그것의 가치를 가장 바람직한 방식으로 실현한 행복한 근대인이다. 둘째, 그의 지성과 인식은 지난 40여년 동안 한국사회에서 쉽게 수용될 수 없는 것이었지만, 동시에 사회적 산물이기도 하다. 인간에 대한 신뢰, 사람만이 갖는 의지의 아름다움. 나는 사람이란 오만하고 무서운 생물이며 기존 언어의 결과일 뿐이라고 생각해왔기 때문에, 이런 말을 촌스러워했고, 믿지 않았고, 사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서, 여성학자 허라금(許羅今)의 표현대로, 어떠한 전제권력 아래서도 인간의 경험은 그 권력의 주조방식을 넘어선다는 것을 알았다. 그가 증거이다. 셋째, 개인이 역사를 바꿀 수 있는 시대는 불행하지만, 그는 한 개인이 특정한 시대에 어느 정도까지 많은 일을 할 수 있는지 그 최대치를 보여준다.
또한 이 책은 지식의 생산과 유통을 둘러싼 권력과 언어의 도상학(圖像學, iconology)을 보여주는 지식사회학서이기도 하다. 리영희는 이미 60년대부터 지구/지역화(glo/calization)의 관점에서 한국사회를 분석했다. 그가 탄압과 절망의 시절에도 신념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5개 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재능에 힘입어 세계사적 관점에서 한국사회의 억압을 상대화하면서 새로운 미래를 예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한국은 유신이지만 서구는 68혁명이라는 것을 알았던 그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또한 그가 시대를 이끈 사상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주류 학문 밖에서 스스로 훈련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그의 ‘짧은 학력’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과거보다 모든 것이 ‘안정된’, 바꿔 말하면 ‘썩어 있는’ 현재의 제도화된 학문환경―지식생산의 미국중심성, 학벌문화, 과도한 교수권력, 지식인사회의 폐쇄성과 패거리정치, 분과학문 이기주의―의 변화가 없다면, 당분간 리영희 같은 독창적이고 진정성 넘치는 탈식민주의 지식인은 탄생하기 어려울 것이다.
리영희는 보편과 초월을 욕망하는 여느 남성 지식인들과는 다르게, ‘목소리’(text)는 ‘관계’(con/text) 안에서만 들린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는 자신을 역사 ‘너머’가 아니라 철저히 역사 안에 위치시킨다. 중국학의 선구자이지만, 자신의 전공은 중국혁명이지 개혁·개방 이후의 중국은 아니라고 선을 긋는다. 그의 사상이 시대의 소명을 다했다는 말이 아니라, 소명은 역사적 맥락에서만 의미있다는 주장이 그의 사상이다. 역사적 맥락이란 독자와 저자의 차이이며, 그것이 바로 역사임을 『대화』만큼 잘 보여주는 책도 없을 것이다. 리영희가 글을 쓰는 유일한 목적은 ‘진실’에 대한 추구였고, 진실은 한 사람의 소유물일 수 없기에 그는 나누고 알리기 위한 사명에 평생을 바쳤다. 그는 지금의 젊은이들을 ‘전세대가 가꾼 열매를 권리처럼 맛보는 행복한 세대’(11면)라고 했지만, 나는 그런 세대에 속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행복한 세대’의 삶의 상황은 동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나 자신을 한번도 지식인으로 정체화해본 적이 없으며,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계몽적’이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나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평화학자 이대훈(李大勳)의 언급대로, ‘지식인의 사명’은 동시에 욕망이기도 하다. 지식인의 자의식은 대개는 중산층 계급의식이며, 부정적인 의미의 정체성의 정치로서, 매우 위험하다고 본다. 어떤 의미에서 그동안 한국사회의 문제는 지식인의 역할 부재 때문이 아니라 지식인에게 부여된, 기대하는 지나친 권력 때문이다. 나는 현재 서울대 해체운동을 지지하는데, 그런 관점에서 보면 이 책에 묘사된 해방후 서울대생들의 국대안(국립서울대학교설립안) 철폐운동은 좌파 엘리뜨의 기득권 수호운동이었다. 이 운동의 실패로 좌익계 학생들이 제적당하고 서북청년단과 ‘자격 미달’의 지방청년들이 서울대에 대거 입학한다. 바람직한 일 아닌가?
이 책에 드리운 ‘보편자 남성’의 그림자 두 가지. 『대화』는 자서전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에 저자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다른 목소리들이 경합하지 않은 한 ‘객관적 역사’로 읽힐 우려가 있다. 이 책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실(事實)은 누군가의 사실(史實)이라는 의미다. 저자가 기억과 망각의 임계와 관점을 드러냈다면, 즉 자신의 주관성을 객관화했다면 이 책은 더욱 ‘객관적’인 사료가 되었을 것이다. 나는 모든 텍스트에서 ‘역사의 주인’보다는 뒤에서 주인을 주인이게끔 하는 보이지 않는 이들, 그리고 이들과 주인의 관계에 주목하는 편이다. 그는 30대 후반 약 2년간 원고지 4천매가 넘는, 논문 30여편을 집필한다. 게다가 모두 매우 빼어난 글들이다. 놀랍고 존경스럽지만, 지금 우리도 이렇게 생산성있는 인간을 따라 배워야 할까? 물론 그는 충분히 성찰적인 남성이지만, 그의 위대함은 성별화된 공/사 영역 분리로 인해 보살핌 노동에서 면제된 남성 특권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여성이라면 결혼하지 않았어야 가능한 업적이, 남성은 결혼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그가 ‘차이의 정치학’을 체화한 보기 드문 남성 지식인이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1988년 리영희는 당시 주한 미대사 제임스 릴리와 공개논쟁을 벌인다. 릴리가 반미데모를 하는 한국학생들이 폭력적이고 ‘히트 앤드 런’(치고 빠지기)의 비겁한 수법을 쓰고 있다고 비난하자, 그는 이렇게 논박한다. 약자는 상대방을 ‘히트’하고 ‘런’할 수밖에 없지만, 강자(미국)는 전세계 어디서나 ‘히트’하고 ‘스테이’(stay, 주둔)한다(650~51면). 당시 진보진영의 전형적인 논리대로라면, 한미갈등을 국가간 대립, 보편주체간의 문제로, ‘민족의 아픔’이나 ‘정당한 저항’이라고 했을 것이다. 멋지지 않은가? 구체성, 움직임, 위치의 정치성에 기반한 그의 언어에는 당위적이거나 선언적인 논리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