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평
영혼의 울림으로 그려낸 민주화 역정 30년
김정남 『진실, 광장에 서다』, 창비 2005
손호철 孫浩哲
서강대 교수, 정치외교학 sonn@sogang.ac.kr
얼마전 한국전쟁 55주년이 지났다. 한국전쟁 당시 미국이 38선을 넘어 진격할 경우 중국도 참전할 것이라는 경고를 무시하고 미국이 북진을 했다가 중국이 참전하자 생겨난 말이 있다. “잘못된 시간에, 잘못된 장소에서, 잘못된 적과의 전쟁”이라는 유명한 표현이다. 이번에 나온 김정남(金正南)의 『진실, 광장에 서다』는 이 표현과는 정반대로, “딱 필요할 때에, 딱 필요한 저자가 쓴, 딱 필요한 책”이다.
국민들의 오랜 민주화투쟁의 결과 김영삼·김대중·노무현이라는 민주화운동 출신 정치인들을 대통령으로 하는 민주정부들이 연이어 탄생했다. 그러나 이들이 국민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 그리 성공하지 못한데다가 도덕적으로도 타락함으로써 민주화운동에 대한 많은 국민들의 평가가 존경에서 조소와 비판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 불행하지만 현재의 정세이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어두웠던 군사독재시절과 모든 것을 희생하며 이에 대항해 싸웠던 민주화운동의 지난한 역정을 되돌아보는 것은 그 어느 때보다도 필요하다. 이 점에서 유신 이후 민주화운동의 역정을 생생하게 기술하고 있는 이 책은 딱 필요할 때에 나온 딱 필요한 책이다. 게다가 저자가 지난 30여년간 민주화운동을 막후에서 움직여온 ‘민주화운동의 대부’ 김정남이라는 점에서 금상첨화이다. 다시 말해, 딱 필요한 저자가 쓴 딱 필요한 책인 것이다. 특히 저자는 자신의 생생한 참여의 경험을 토대로 하여 그간의 민주화운동을 1970년대 초부터 시기를 따라 짚어내려오며 주요 사건별로 간단하고 명쾌하게 설명하는 형식을 택함으로써 한국정치와 현대사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독자들도 민주화운동사를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이 점에서 이 책은 민주시민으로서 모든 국민들이 의무적으로 읽어야 하는 국민교과서라고 할 수 있다.
이밖에도 이 책이 가진 매력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그중 최소한 세 가지는 꼭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우선, 건전한 상식에 기초한 객관적이고 실증적인 서술이다. 물론 이 책이 학술적인 저작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자신의 생생한 체험과 온갖 자료, 그리고 건전한 상식을 통해 주요 사건들을 객관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10·26과 김재규(金載圭)에 대한 분석이다. 저자는 김재규가 유신 이후 박정희(朴正熙)를 여러차례 암살하려 했다고 서술하고 있다(312면). 개인적으로 이러한 주장을 읽는 순간, 저자가 객관성을 잃고 검증되지 않은 김재규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사실인 양 서술하는 게 아니냐는 생각이 들어 고개가 갸우뚱해졌다. 그러나 한 변호사가 녹음한 김재규의 육성을 들어보고 그것이 거짓인지 아닌지 알 수 있었다는 말(323면)에 상당부분 의구심이 풀렸다. 때로는 엄격한 학문적 검증방법보다 건전한 상식과 영혼의 울림에 기초한 판단이 더 설득력이 있는 것이다.
둘째, 민주화운동의 ‘주류’에 서 있으면서도 ‘비주류’의 운동에 대한 냉철한 비판의식과 따뜻한 애정을 함께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1979년 여름에 터진 지하당조직 남민전사건이다. 무고한 혁신계 인사들의 목숨을 앗아간 유신정권의 인혁당사건 조작에 대한 반작용으로 비밀결사된 남민전은 자금 마련을 위해 재벌집을 강도질하려고 한 것으로 밝혀져 충격을 주었는데, 이에 대해 저자는 남민전 같은 조직이 생길 수밖에 없었던 정황을 이해하면서도 이 조직운동을 모험주의와 소영웅주의라고 냉혹하게 비판한다(272면). 그러나 이러한 비판과는 별개로 남민전도 크게 보면 “민주화운동의 한 형태 내지 민주화운동의 범주 안에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271면)는 애정어린, 그리고 올바른 주장을 하고 있다. 또 그 돌출성과 이후 전개된 정치적 격변(10·26, 12·12, 5·18) 때문에 민주화운동이 이들에 대해 체계적으로 구조작업에 나서지 못해 이 사건 관련자들이 소리없이 엄청난 희생을 당하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린 것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셋째, 아래로는 따뜻하면서도 위로는 냉철한 비판의식이다. 즉 이런저런 방식으로 민주화운동에 동참하고 도움을 준 민초들에 대해서는 무한한 애정을 보여주면서도 양김으로 대표되는 민주화운동의 상층지도부에 대해서는 비판의 칼날을 세우고 있다. 특히 저자는 80년 ‘서울의 봄’에 이어 87년 6월에 ‘대통령병 환자’들이 다시 한번 보여준 국민 배신의 분열에 대해 분노를 감추지 않는다. 나아가 3당통합으로 탄생한 김영삼정부는 말할 것도 없고, 김대중정부에 대해서도 “50년 만의 수평적 정권교체라고 하지만, 실상은 유신본당을 자처하는 김종필과의 야합에 의한, 그리고 망국적인 지역구도를 이용한 집권이었을 뿐이었다”(9면)라고 정확히 지적하고 있다. 특히 이런저런 민주화운동 관련 보상법을 만들어놓고는 민주화운동으로 생계가 어려운 사람들을 제치고, 운동을 팔아 각종 명예와 정치적 입지를 누려온 사람들이 제일 먼저 유공자 지정과 보상신청을 하고 나서는 한심한 작태에 대해 일침을 가할 때는 십년 묵은 체증이 다 내려가는 기분이다.
다만 아쉬운 것 두 가지가 있다. 물론 경실련과 같은 시민운동의 성장 등을 다루고는 있지만 이 책이 포괄하는 시기가 기본적으로 1987년 민주화까지로 한정되어 있다는 점이다. 사실 1987년까지 한국의 민주화운동은 군사독재의 폭압에 의해 짓밟히며 고통을 받아왔지만 어느 의미에서는 그렇기에 도덕성·정당성이 쉽게 주어졌고 또 공통의 적에 맞서 단결해 함께 싸웠던 ‘운동의 황금기’였다. 그러나 이후 민주화운동은 분열되어 서로 증오하고 또 도덕적 정당성도 쉽게 확보하기 어려운 싸움을 해왔다. 예컨대, 노벨평화상에 빛나는 소위 인권대통령의 반민주적 정책에 저항하는 민주화운동도 광주의 학살자를 상대로 한 민주화운동에 못지않은 지난한 투쟁이었다. 오히려 이후의 민주화운동에 대한 증언이 훨씬 고통스럽고, 때로는 추악한 이야기가 될 가능성이 크다. 이런 점 때문에 이 시기를 다루지 않은 것이 아쉽고 이에 대해서는 저자의 속편을 기대해본다. 그리고 두번째 문제도 이와 관련이 있다. 남민전사건이 시사하듯이 87년 이전에도 민주화운동 내부에 다양한 흐름이 존재했고 이들간의 긴장이 존재했는데, 이같은 측면이 지나치게 무시되고 너무 ‘해피 스토리’로만 이야기를 끌고 간 느낌이 드는 것이 흠이라면 흠이라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