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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정세기 鄭世基
1961년 전남 광양 출생. 1989년 『민중시』로 등단. 시집 『어린 민중』 『그곳을 노래하지 못하리』 『겨울산은 푸른 상처를 지니고 산다』 등이 있음. ccc701@chol.com
放生
베란다에 심은 호박순이
네모진 플라스틱 통을 넘어
겁도 없이 창턱을 기어넘어
허공 속으로 저를 들이민다
애호박은 점점 둥글넓적해지고
표지판 없는 삶의 경계선을 넘어
없는 길을 내는 한 각자처럼
벼랑 끝의 저 끈질긴
사랑은 길 밖에서 완성된다는 듯
제 안의 날짐승을 풀어놓은 듯
안에서 서성이는 나를 비웃으며
길에서 길 잃고 헤매는 내게 보라고
영근 호박 속은 비어서
목어소리처럼 가뿐한 울림을 날리고
말라비틀어진 호박순을 거두며
너를 내 맘속에서 놓아 보낸다
방골재
기억은 때로 심부름 가는
아이의 심기처럼 불편하다
도깨비가 난다는
무서운 밤길이었다
초 하나 간장 한병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두려움을 쫓으려고
소리지르며 넘던 고갯길
아버지는 상여로 넘었고
형은 밤도와 도망친 길
희미하게 더듬는
소싯적 기억 속에
말라죽은 대나무 한그루가
뿌리를 드러내고 누워 있다
대나무 마른 뿌리는
제일 아픈 매, 태질로 단련한
생의 길에 촛불이 태워 녹아내린
촛농같이 굳은 형제들 얼굴이 어린다
산곡리에서
어둠이 일찍 찾아오는
산마을 지붕들마다 박꽃이
흰 등을 내어걸고 있었다
풋과일을 달고 있는 나무들 위에
점등한 밤하늘의 별들이 빛나고
개 짖는 소리에 흔들리는 마을
순한 바람이 품에 안아 잠재우고 있었다
꿈속에서 옛 정인을 만나
머루주를 마시고 일어난 새벽
계곡 물소리가 어둠을 씻는다
안개 속 능선이 밀어올리는
둥글게 빚은 하늘 아래
눈으로 보는 고요를
나뭇잎들이 파르르 떨어낸다
은빛 반짝이는 거미줄 걸린 나뭇가지에
노닥거리는 청설모 무구한 눈망울
거기 수수꽃 같은 유년이 보인다
까치가 물고 가는 기억 한올
갈참나무 숲으로 날아간다
상춧잎을 소쿠리에 따담은 아낙 앞세우고
아침이 안개를 헤치고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