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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김수이 金壽伊

문학평론가. 평론집 『환각의 칼날』, 『풍경 속의 빈 곳』이 있음. whitesnow1@hanmail.net

 

 

자연의 매트릭스와 현실의 사막

자연의 매트릭스에 갇힌 서정시 2

 

 

시, 자본주의의 ‘무가치한 잉여’

 

역설적이게도, 자본주의사회에서 시는 ‘무가치한 잉여’로 전락함으로써 자신을 보존한다. 시는 오늘날 인공물과 자연물을 통틀어 자본주의에 복속되지 않은 거의 유일한 것이 되었다. 시가 위대한 거절과 강력한 저항을 계속해왔기 때문은 아니다. 답은 극히 일차원적이다. 시는 상품성이 없거나 매우 적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시는 자본화하지 않는다(/못한다). 자본주의의 입장에서 볼 때는 자본화하지 않는(/못하는) 것보다 더 곤혹스러운 대상은 없다. 자본에 대한 무관심과 절연은 자본에 대한 저항보다 훨씬 치명적인데, 거기에는 달리 대응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시는 자본주의사회의 이 ‘순정한 잉여〓바깥’의 자리에 무심하고 적요하게 존재한다.

그러나 이 진술은 참이면서 참이 아니다. 경쾌하게 팔리는, 자본화에 유연하게 성공한 대중시들 때문만은 아니다. 문제는 근본적인 데 있다. 자본주의사회에서 시는 출판시장의 상품으로 유통되며(팔리든 안 팔리든), 출판시장에서의 1차적 상품성의 결여는 교육시장(각종 문화쎈터, 학교, 특히 대학의 국문과와 문창과 등. 교육시장은 시 교육자들의 취업시장이기도 하다)에서 2차적 상품성에 의해 보완된다. 여기에 각종 문학상과 지원금이 ‘명예’와 ‘보상’의 명분으로 시의 상품성을 측면에서 한번 더 보완한다.

‘무가치한 잉여’와 상품성 사이에서, 자본에 대한 무관심/절연과 예속 사이에서 오늘날 시의 입지는 굳건하면서도 모호하다. 그 중심에 거대담론의 몰락과 미시담론의 번성이 맞물려 있음을 말하는 것은 이제 사족에 가깝다. 변화된 현실은 시의 외적 조건에 머물지 않고, 시의 내용과 형질에도 깊은 영향을 끼친다. “이제 한국에서도 근대문학은 끝났다”는 카라따니 코오진(柄谷行人)의 말은 우리 문학의 전면적인 형질변화를 단적으로 증언한다.1 이런 상황에서 『창작과비평』 2005년 여름호 특집 ‘갈림길에 선 한국 시와 시비평’은 우리 시의 현실에 대한 반성과 창비의 자기점검을 아우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반성과 점검은 크게 세 차원에 걸쳐 있다. 첫째, 최원식(崔元植)이 ‘시의 대중화 현상’2과 시비평의 직무유기가 원인이라고 진단한, 시와 시비평이 위축된 현실에 대한 각성. 둘째, 시와 시비평의 새로운 활로에 대한 대안 모색의 필요성 절감. 셋째, 창비가 출판사이자 문학생산의 기지 혹은 복수적 주체로서 근래에 제출한 시(인)들이 ‘갈림길에 선 한국 시’의 현실에 명쾌한 이정표의 역할을 하지 못하며, 창비가 생산해온 시비평 역시 부진한 데 따른 자성.3

이 특집이 작년 여름의 소설론 특집과 짝을 이루는 점을 감안할 때, 창비 필진이 총동원된 소설론 특집이 화제의 작가·작품론을 꼼꼼히 작성함으로써 텍스트 중심의 ‘해석학적 충돌’을 예비한 것이었다면, 비평가와 시인이 동석한 이번 시론 특집은 ‘시와 시비평의 위기론’을 필두로 최근 시와 비평에 대한 이견을 다소 산발적으로 개진하면서 ‘공동의 토론과 모색’을 제안한 (데 그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발언’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제안’에 머문 특집의 고민은 총론에서부터 드러난다. “낡은 시학은 사라지고 새로운 시학은 도래하지 않은 이 회색의 때에 누군들 자신있게 자력을 말할 수 있을까만, 촉수(觸手)를 예민히하여 자력의 빛을 강잉(强仍)히라도 밝힐 수밖에 없을 터”(최원식 24면)라는 요지의 「자력갱생의 시학」은 의고체의 비장함 속에 정작 ‘자력갱생의 시학’의 실체를 제시해야 할 임무를 미래의 논객들에게 이월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최원식의 글을 위시한 창비 특집이 오늘의 시현실에 대한 ‘생산적인 대화’를 위한 것이며, 이것이 창비가 홀로 떠맡아야 할 사안이 아닌 것 또한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 대화의 장에 초대받은 자의 몫으로서, 이 글에서는 두 개의 의제를 구체화하는 것으로써 대화의 진전에 조금이나마 일조해보고자 한다. 두 개의 의제는 ‘자연의 매트릭스의 분화’와 ‘현실의 사막―‘현재의 시’들’이다.

 

 

자연의 매트릭스의 분화

 

‘자연의 매트릭스’는 자본에 대한 자율성과 예속 사이에서, 동종이형에 불과한 거대 이데올로기와 미시 이데올로기의 교체 속에서 많은 시들이 무반성적으로 함몰된 ‘아름답고 온유한 자연에 대한 가상(假想/假象)’을 의미한다.4 이 가상체제는 현실과 유리되었거나 현실을 왜곡한 결과로서의 자연, 시인의 갖가지 욕망의 투영체인 자연을 영토로 한다. ‘자본’과 ‘현실’의 반대편에 ‘내면’과 ‘미학’의 이름으로 축조된 ‘자연의 매트릭스’는 근래 우리 시의 폐쇄적 자족성과 현실인식의 결핍을 반증하는 부정적인 사건이다.

자연의 매트릭스에는 ‘생태’를 표방하는 시들의 획일적인 인식과 상상 체계도 포함된다. 혼동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생태’와 ‘자연’은 동일한 범주를 갖지 않는다. ‘생태(주의)’는 자연에 대한 ‘근대’의 특수한 경험과 인식의 산물로, 생태시는 근대시가 ‘자연’을 형상화하는 하나의 유형에 속하는 시이다. 또한 생태시의 대상은 자연에 한정되지도 않는다. 도시의 물화된 공간은 파괴된 자연의 대립쌍으로서의 생태시의 제2의 탐구영역이 된다(이문재에 의해 전면적으로, 최승호와 김기택에 의해 부분적으로 수행되고 있는). 생태시는 ‘자연을 노래한 시’의 부분집합이거나 외부집합인 것이다. 따라서 ‘자연의 매트릭스’라는 개념적 도구가 부각하고 해체하고자 하는 것은 ‘생태에 대한 가상’을 포함한 ‘자연에 대한 가상’이지, 생태시나 생태적인 것 자체가 아니다. “생태적인 것은 무조건 해체의 대상이 아니라는”(최원식 30면) 지적은 생태시의 현실과 관련해서도 적절치 않은데, 오늘의 시에서 ‘생태적인 것’은 아직 충분히 조형되지 않은, 본격적으로 구성해나가야 할 미완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자연이 시의 주제가 되는 현상은 초역사적이지만, 자연이 시에 등록되는 방식과 관점은 역사적이다. ‘자연의 매트릭스’는 후기자본주의 사회에서 시적 주체와 미학이 처한 역사적 균열의 부정적 반사체이다. 세계를 전유하는, 혹은 세계와 투쟁하는 시적 주체와 미학이 현실의 파행성을 장악하지 못한 결과가 무갈등의 자연풍경의 양산으로 귀착된 것이다. 오늘날 서정시(인)의 운명은 이 균열을 다루는 태도와 직결되는바, “자연과 인공, 전통과 현대, 본질적인 세계와 조각난 현실 사이의 모호한 지점”에서 “독립적인 단독자로서 세계 속에 최대한 존재하고자 하는 시인들”은 “내적 지향에 있어서는 동일성의 미학을, 현실을 포착하는 데는 타자성의 미학을 취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여준다.”5 이 이중적인 태도의 견지에는 두 가지 단서가 붙어 있다. 독립적인 단독자로서 세계 속에 최대한 존재하려는 ‘현실의지’와, 동일성과 타자성의 미학의 동시적 실천의 불가피성을 자각하는 ‘미학적 자의식’이 그것이다. 이 요건들을 충족하지 못했을 때, 시와 시인은 현실적·미학적 무중력 상태에 진입하게 된다. 현실성을 잃은 탓에 미학적으로도 불구가 되는 상태, 현실적·미학적 생산성이 결핍된 상태에 처하는 것이다. 자연의 매트릭스에 갇힌 서정시들이 노출하는 최대 문제점은 이것이다.

다른 각도에서 볼 수도 있다. “매트릭스적 자연이 실제의 현실을 은폐하거나 왜곡할 위험도 있지만, 그 가상성을 적극적으로 의식하면서 활용하는 길도 현실을 드러내거나 넘어서는 한 방법이 될 수 있다”6는 것이다.이 제안의 타당성과는 별개로, 자연의 매트릭스에 갇힌 서정시들의 적지 않은 수는 그 가상성을 의식하면서 하나의 시적 기획으로 활용한 결과들이다. 반복하건대, 그것은 ‘현실을 드러내거나 넘어서는 한 방법’으로서 그다지 유용하지 못했다. 근대적 생활공간을 뒤로하고, ‘오래된 자연과 삶’에 의탁하는 젊은 시인들 중, 특히 김선우(金宣佑)와 문태준(文泰俊)에게 기억의 행위는 “생래적인 감각”(나희덕 48면) 이상의 자명한 시적 기획에 의한다. 김선우는 억압당한 여성의 역사의 심층에서 건져올린 ‘자궁의 서사’를 피, 오줌, 생리혈 등의 ‘몸의 생즙’으로 기록하면서 근대가상실한 ‘자연(/여성)’의 생명력을 발굴하고 전승하는 일에 매진하며,7 문태준은 옛 농촌의 삶을 자아의 서사로 전유하면서 토속적 가치와 정서를 근대인의 내면의 한 기원으로 명명하는 작업에 몰두한다. 최근 시의 흐름과 연관해볼 때도, 김선우의 시적 기획은 90년대 이후 시를 강타한 여성과 몸의 담론에 젖줄을 대고 있고, 문태준의 시적 기획은 분열된 근대세계에서 더이상 고정점을 발견할 수 없는 시적 주체의 근대 이탈의 열망에 힘입고 있다(이 기획들은 이들의 시의 완성도와 미학을 높이는 최대의 요인이기도 하다. 이러한 기획의 바탕이 없다면, 이들의 시는 말 그대로 과거의 단순한 재생의 차원을 벗어나기 힘들게 된다).

문제의 핵심은 시가 지닌 기획의 속성 자체보다는, 기획이 산출하는 생산성과 효과에 있다. 김선우의 시는 기획의 내용이 작품에 명시적으로 관철된 경우인데, 도드라지는 예가 시 「민둥산」이다.

 

민둥한 산 정상에 수직은 없고

구릉으로 구릉으로만 번져 있는 억새밭

육탈한 혼처럼 천지사방 나부껴오는 바람 속에

오래도록 알몸의 유목을 꿈꾸던 빗장뼈가 열렸다

(…)

바람의 혀가 아찔한 허리 아래를 지나

깊은 계곡을 핥으며 억새풀 홀씨를 물어 올린다 몸속에서

바람과 관계할 수 있다니!

(…)

민둥한 등뼈를 따라 알몸의 그대가 나부껴 온다

그대를 맞는 내 몸이 오늘 신전이다

―「민둥산」(『도화 아래 잠들다』, 창비 2003) 부분

 

이 시는 ‘알몸의 그대(자연)’와 ‘알몸’으로 관계하는 희열(jouissance)을 김선우 특유의 농밀한 수사로 드라마틱하게 형상화한다. 희열은 “그대를 맞는 내 몸이 오늘 신전”이라는 마지막 행에서 신성(神性)을 탑재하며 절정에 이른다. ‘알몸의 유목’이 이루어지는, ‘알몸’의 공간적 환유인 “민둥한 산 정상”은 “천지사방 나부껴오는 바람”의 주술적 매개에 의해 생명의 관능에 전율하는 만물의 혼교(混交)의 장소로 거듭난다. 그러므로 이 장려한 생명의 카니발은 “남성이 없이도 ‘관계’와 ‘생산’이 가능하다는 걸 (…) 보여주”(나희덕 44면)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모든 개체들(무생물까지도)의 총체적인 ‘관계’와 ‘생산’의 현장임을 노래하는 것이다. 육탈상태의 알몸들이 교접하는 현장에서 성의 구분은 무의미하며(굳이 나눈다면, 시적 주체인 여성에 대해 자연물 전체가 남성의 역할을 한다. 이 역할은 얼마든지 역전될 수 있다), ‘알몸의 유목’ 속에서 만나는 타자들은 시적 주체와의 합일을 선험적으로 성취한 상태에 있다. 바꾸어 말하면, 김선우의 다른 시들에서도 등장하는, 고유의 타자성을 결여한 명목상의 타자들은 시적 주체의 내면의 입체성을 지지하는 역할을 하지 못한다. 이들은 시적 주체의 상상적 분신이나 호의적인 배경에 머물 뿐이다.

한마디로, 「민둥산」은 김선우 시의 토대와 지향점을 ‘잘 빚어진’(well-made) 풍경으로 가시화한 작품이다. “알몸의 유목” “바람과 관계할 수 있다니” “내 몸이 신전이다” 등의 담론 지향적 시구는 이 시가 김선우의 시세계에 대한 시론이나 해설의 성격을 지님을 보여준다. 즉 이 시는 김선우가 지향하는 ‘알몸의 유목’의 내용을 충실히 피력할 뿐, 현실과의 연결통로나 풍부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두지는 않는 것이다. 김선우의 시적 기획은 지금까지 두 권의 시집에서 상당히 성공적으로 구현되었지만, 「민둥산」에서처럼 시쓰기의 사전 규율로 작용하면서 시의 반경을 좁히고 일원화하는 요인으로 기능하기도 했다. 김선우의 최근 시들이 자기복제 상태에 있는 것은 그 기획이 답보상태에 있음을 암시한다. 문명/남성의 세계 속에서 자연/여성의 원초적 생명력을 기억하고 살아내는 일이 ‘자동화된 반복’의 상태에 들면서 시의 생산성이 떨어진 것이다. 이제 그 자리에는 여성성을 표면에 둔 평화로운 자연이 몽환적으로 펼쳐지고, 자연에 대한 성찰의 말들이 시적 형상력이 약화된 채 열거된다. 자연은 현실에 대해 생산적인 의미나 항체를 방출하는 공간이 되지 못하고, 아름다운 풍경과 이미지들로 가득한 무균상태의 ‘자연의 매트릭스’로 화한다.

 

해변 풀밭까지 내려온 어미말은 둥그마니 잘 갈라진

바위 틈에 코를 들이민 채 한나절을 푸르릉 조을고

아기말은 흰구름에 홀려 있다가도

어미말의 크낙한 엉덩이 사이로 푸릉푸릉 코를 들이밀고

봄들꽃 환장하게 피었는데 섬은 자기 심장을 쿵쿵 쳐대며

자맥질하는 바다의 둥근 어딘가에 자꾸만 코를 들이밀고

나는 말방울을 까맣게 잊은 채 새로 핀 꽃들의 옴팡하니 깊은

엉덩이에 코를 들이밀고 냄새를 킁킁거리다가

눈부셔 혼음에 겹곤 하는 것이다

(…)

아무렴 뿌리는 저 속에 두었으니 꽃은 뒤쪽에 자리한 사원이지

엎드려 읽는 경전이 중심까지 달뜬 채 깊은 것이다

―「뒤쪽에 있는 것들이 눈부시다」(『동서문학』 2004 가을호) 부분

 

오장육부(五臟六腑)가 고스란히

오대양 육대주(五大洋 六大洲)인,

몸―뚱아리

 

달항아리 별항아리 우주항아리처럼

허공을 몸속에 이토록 우글우글

뚱뚱해지도록 채운다는 말이냐

―「메나리토리―몸―뚱아리」(『문예중앙』 2005년 여름호) 부분

 

말〔馬/言〕, 바다, 봄 들꽃 들과 ‘나’의 ‘눈부신 혼음’을 노래한 「뒤쪽에 있는 것들이 눈부시다」는 시 「민둥산」을 그대로 변주한 것이며, 「메나리토리―몸―뚱아리」는 ‘항아리’와 ‘몸―뚱아리’의 음운과 형상의 유사성에 의해 몸의 상상력을 달, 별, 우주로 평면적으로 연장한(확장이 아닌) 것이다. 애초에 현실과의 접점에서 빚어낸 가상의 자연이 스스로를 반복 재생산할 때, 자신이 탄생했고 겨냥해야 할 현실을 구체적으로 지시하지 못할 때, 시는 역으로 자연의 가상에 지배되기 시작한다. ‘자연의 매트릭스’는 이 지점에서 출현하고 부정적인 방향으로 강화된다. 문태준의 경우도 기본적인 사정은 다르지 않다.

 

어두워지는 순간에는 사람도 있고 돌도 있고 풀도 있고 흙덩이도 있고 꽃도 있어서 다 기록할 수 없네

어두워지는 것은 바람이 불고 불어와서 문에 문구멍을 내는 것보다 더 오래여서 기록할 수 없네

어두워지는 것은 하늘에 누군가 있어 버무린다는 느낌,

(…)

어두워지는 것은 그래서 까무룩하게 잊었던 게 살아나고 구중중하던 게 빛깔을 잊어버리는 아주 황홀한 것,

오늘은 어머니가 서당골로 산미나리를 얻으러 간 사이 어두워지려 하는데

―「어두워지는 순간」(『맨발』, 창비 2004) 부분

 

문태준에게 전통 농촌은 근대의 ‘뒤란’이고, 과거는 현재의 ‘뒤란’이다. 문태준의 시는 ‘수런거리는 뒤란’의 소리를 증폭시켜 재생하는 구형의 진동관과 같다. ‘뒤란’이 ‘앞마당’의 짝패이고 내면이자 무의식이라면, ‘뒤란의 소리’로서의 문태준의 시는 한국적인 근대의 내면이자 무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시는 이 곰삭은 내부를 지문이나 환부처럼 지녀왔는데, 그 전사(前史)에는 멀리 서정주와 백석이 있다. 토속적 생활체험의 끝자락을 쥔 문태준의 시는 이 계보의 마지막 잔광을 불사르는 중에 있다. 모닥불을 중심으로 사람과 자연물과 사물이 평등하게 어우러진 백석의 시 「모닥불」의 발상을 계승한 「어두워지는 순간」은 문태준 시의 자산을 고스란히 펼쳐 보인다. 그 자산들, 수많은 시간과 자연물과 농촌살이의 세목은 ‘어두워지는 순간’의 정점이자 소실점에 무연히 자재하며 혼재한다. ‘있음’이 “또다른 ‘있음’을 억압하지 않”는 “배려와 공존이 문태준의 시를 수많은 타자들이 수런거리는 뒤란으로 만들어준다”(나희덕 48면)고도, “문태준이 즐겨 쓰는 어법은 대상을 자아의 표상으로 환원하는 일반적인 은유와는 다르다”8고도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 시에 존재하는 타자들은 김선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독립적이고 능동적인 타자성을 갖지 않는다. 이들은 단순한 ‘있음’의 상태에서 시적 주체의 시선과 호명을 기다릴 뿐, 아무런 소음이나 분란을 일으키지 않는다. 시간의 묘약과도 같은 ‘어두워지는 순간’은 타자들을 일시적인 정지와 무음의 상태로 만들고, 반대로 시적 주체에게는 무한에 가까운 감각의 권능을 부여한다. ‘어두워지는 것’은 그래서 ‘아주 황홀한 것’이다(아마도 시적 주체에게만이!). 이 마술적인 시간에 타자들은 “한사발에 넣어” “버무려”지는 재료들이거나, 시적 주체의 감정의 유로를 따라 일제히 도열한 도미노와 같아서 그 감흥을 온전히 수락하고 보좌할 뿐이다. 함량미달의, 이 무력한 타자들은 결국 시적 자아의 표상으로 환원되는 운명을 피할 수 없다. 감탄사에 다름아닌, “기록할 수 없네”라는 반복 어구도 ‘불가능’의 수사를 빌려 시적 주체의 서정적 우위와 충일감을 반어적으로 역설한다. ‘기록할 수 없음’의 경지에서(이마저도 모두 기록되고 있지만) 그 불가능과 함께 더욱 완전해진 서정적 충만은 지금까지 씌어진 많은 서정시들이 도달했고 도달하기를 원했던 바로 그 순간이 아닐 수 없다. “하늘에 누군가 있어 버무린다는 느낌”은 서정적 고양의 최대치에 이른 자아의 감흥을 비의(秘意)의 존재에게로까지 외화(外化)하고 있지 않은가.

의도한 바 없이, 이 시는 축복과도 같은 서정적 충만이 ‘어두워지는 순간’에, 그것도 기억 속의 옛 장소에서만 가능한 것이라는 점을 입증하고 있다. 시인 자신에 의하면, “한때 이곳은 꽃의 구중궁궐이었”(「옛 집터에서」)고, “가난의 냄새가 벌벌벌벌 풍기는 움막 같은 집”(「맨발」)이기도 했다. 그러나 문태준은 오롯이 전자의 편에서 유년의 시골마을을 상상적 기억이 거니는 행복한 토포스(topos,장소)로 가공한다. 문태준의 시들은 현대인의 내면에 퇴적되어 있는 이 고고학적인 토포스를 재현하기 위해 섬세한 수공의 노력을 아끼지 않은 결정체들이다. 그 토포스가 ‘자연의 매트릭스’의 다른 이름임은 덧붙일 필요가 없을 것이다.

김선우와 문태준의 시에는 낭만적이고 동화적인 자연보다 한 단계 진전된 자연의 매트릭스가 작동한다. ‘생명력 충일한 자연〓여성’의 담론을 실사(實寫)하는 자연과, 전통의 휘광 속에 ‘서정적 충만의 장소’로 가공된 자연(물론, 이 오래된 자연이 ‘오래된 미래’로서 우리 시에 활력을 공급한 것은 인정되어야 한다). 때문에 이들의 시에서 ‘생태적인 것’은 충일한 자연이 자아내는 ‘효과’로서 생태적 유토피아의 형태로 존재한다. 여기에는 인간을 포함한 자연물들의 갈등과 악전고투가 존재하지 않는다. 갈등과 악전고투는 매트릭스 안에는 없는, 매트릭스의 허구성을 부재 증명하는 그것이다. 여기 경청할 만한 지적이 있다.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심지어는 자연미에 대한 적절한 체험도 무의식적인 것을 보완하는 이데올로기에 편승한다. (…) 그리고 이는 체험이 극히 빈곤해졌다는 사실을 증명해준다. 이로 인해 자연 체험은 가장 근본적인 면에 이르기까지 기형화된다”(아도르노).

다음과 같은 가설이 가능하다. ‘자연의 매트릭스’의 제작자는 현실에 눈감는 시인들이 아니라, 자연파괴의 절정에서 위태롭게 증식하는 후기자본주의 사회의 체계다. 시인들은 단지 “자연미에 대한 적절한 체험”을 기억하고 상상함으로써,‘자연’을 상실한 세계와 자신의 “무의식적인 것을 보완하는 이데올로기에 편승”했을 뿐이다. 실제로, 자본주의는 지배에 필요한 욕망의 대상을 자신이 파괴한 것에서 발견한다. 폭력의 기억과 정당한 비판을 무화시키고, 자연학살의 이익을 열광적으로 소비하게 할 대상으로서의 ‘청정한’ 자연. ‘자연의 매트릭스’의 배후에는 이러한 ‘자연’ 자체의 상실과 함께, 피의 시대인 80년대와 그 반작용인 90년대에 대한 기억의 공백이 있다. 먼 과거에 의탁하면서 김선우와 문태준 등의 젊은 시인들은 자신의 생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시대를 삭제한다.9 이들에게는 마치 생의 두 시기만이 존재하는 듯하다. 화해로운 자연의 일부였던 유년의 과거, 그리고 그것을 기억하는 데 바쳐지는 지금. 우리 시는 이 시간의 증발을, 집단적인 부분기억상실의 증상을 설명해야 할 책임이 있다.

만약 ‘자연의 매트릭스’가 한국 시만의 현상이 아니라면, 자본주의가 급진전되는 과정의 보편적인 현상이라면 어떨게 될까? 따이 진화(戴錦華)가 설명하는 중국문학의 근황은 놀랍도록 우리와 닮아 있다. ‘자연의 매트릭스’에 상응하는 중국문학의 현상은 ‘상상된 노스탤지어’이다. 90년대 중국문학을 휩쓴 노스탤지어는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물결에 휩쓸린 중국인들에게 “현실적 삶의 생존을 위한 ‘합리’적 근거”와 ‘위안거리’로서, “근대화에 대한 완결된 상상의 지도를 확보하”기 위해 기억의 형태로 ‘상상된’ 것이다.10 ‘상상된 노스탤지어’는 실은 자본주의의 상징전략으로, 문학은 거기 충실히 반응했을 뿐인 것이다. 중국과 한국의 차이를 감안한다 해도, 과거의 삶과 자연에 대한 집단 가상이 후기자본주의의 지배전략이라는 증거로는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자연에 있어서 역사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거나 아무런 속박도 받지 않는다고 여겨지는 요인들은 오히려 사회적인 조직망이 극히 긴밀하게 짜여서 생명체들이 질식사할 위험을 느끼게 된 역사적 단계에 속한다.” 다시 아도르노의 말이다.

자연의 매트릭스의 원제작자가 자본주의라면, 자연의 매트릭스에 갇힌 서정시들의 부주의나 미필적 고의는 탕감될까? 답은 ‘그렇지 않다’이다. 고도자본주의 사회에서 시의 자리는, 이를테면 영화 「매트릭스」에서 모니터에 빗줄기처럼 흘러내리는 숫자들에 불과한 매트릭스의 프로그램 속에, 그에 맞춰 피어나는 꽃들과 느끼고 생각하고 욕망하는 사람들 사이에 있지 않다. 프로그램의 오류처럼 시시각각 생겨나는 주인공 ‘네오’의 경미한 의문과 혼란 속에 가까스로, ‘비결정의 상태’로 있다. 매트릭스에서 태어난 네오가 의문과 분열의 선을 따라가 얻은 것은 주체적인 선택의 권한이었다. 선택은 둘 중 하나였다. 현실의 사막에서 투쟁하며 ‘살아갈’ 것인가, 매트릭스의 한 코드로 소모되며 ‘살아질/사라질’ 것인가? 이 ‘현실적인’(realistic) 선택의 권한은 우리 시대의 시인들에게도 똑같이 주어져 있다.

 

 

현실의 사막―‘현재의 시’들

 

매트릭스가 은폐하는 것은 두 가지다. 현실/진실/실재(the real), 그리고 매트릭스 자체. “현재로부터 탈주하는 것이 아닌, 현재에 압도되는 것도 아닌, ‘현재의 시’”(최원식 22면)들은 이 은폐를 저지하면서 현실의 사막에서 자생하는 시들이다. 현실의 사막이 드러날 때는 매트릭스의 허상도 드러나게 되는데, 매트릭스는 정확히 현실의 사막에 위치하는 까닭이다. 그중 자연의 매트릭스는 파괴된 자연과 폭력적인 노동의 현실 위에서 가동된다.11 이를 저지하는 ‘현재의 시’들은 수적으로는 전자의 영역에 집중되어 있다. 파괴된 자연의 실상은 (민중시가 미진하나마 편입된) 생태시에 의해 꾸준히 탐구되었지만, 폭력적인 노동현실은 노동시의 쇠락과 함께 우리 시의 전경(前景)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민중시가 거의 멸종된 현실”에서 “새로운 상황에 즉해 새로운 민중시를 시의 이름으로 발전시키지 못한 책임을 자각할 필요가 절실하다”(최원식 29면)고 할 때, 민중시의 멸종 원인은 노동시의 쇠락에 있으며, ‘새로운 민중시’의 발전 가능성도 ‘노동시’ 쪽에서 찾을 수 있다. ‘민중’은 그 실체성에 대한 믿음이 와해되었지만, ‘노동’은 현재에도 지속되는 구체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체에서 행위로 촛점을 옮겨 ‘노동시’의 함의를 새롭게 구성하는 것이 오늘의 싯점에서 ‘새로운 민중시’의 발전을 도모하는 효율적인 방법이 될 것이다.

‘현재의 시’로서의 노동시에는 이질적인 방향성이 공존한다. 전대의 노동시의 심화 발전과 이전의 노동시에서는 볼 수 없었던 독특한 실험. 김신용과 이기인이 그 대표적인 예다. 노동시의 급격한 퇴조에 의해, “1950~60년대에 씌어진 김수영의 시보다 1970~80년대에 씌어진 김지하, 백무산, 박노해, 김기홍, 김해화 등의 시에 대해 더 큰 시간적·심리적·미학적 거리감을 가지게 된” 최근의 상황에서 김신용(金信龍)은 귀하고도 예외적인 존재이다.12 그가 80년대와 다름없이 생계형 노동자로서 “자신의 삶의 구조에서 떨어져나온 것들”(「풍경」, 『환상통』, 천년의시작 2005, 이하 같은 책)의 운명을 직시하고, 자본주의 “분할구조의 상품화”(「物性을 禪하다」) 실태를 고발하며, “시멘트 침대에서의 달콤한 잠”(「시멘트 침대」)에 빠진 노숙자를 비롯한 밑바닥 사람들의 삶을 치열하게 육화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현재 김신용의 ‘노동’이 인간과 자연, 생계와 생활과 생태가 ‘회통’하는 지점에 이르러 있다는 데 있다. 그의 시의 ‘재봉틀’이 근대세계에서 각기 분리된 것들을 “기운 자국 하나 없이 깁고 있는” 장면은 아름다움과 함께 경건함마저 느끼게 한다.

 

수의를 만들면서도 아내의 재봉틀은

토담 귀퉁이의 조그만 텃밭을 깁는다

죽은 사람이 입는 옷, 수의를 만들면서도

아내의 재봉틀은 푸성귀가 자라고

발갛게 익은 고추들이 널린 햇빛 넓은 마당을 깁는다

아내의 家內공장, 반지하방의 방 한 칸

방 한 가운데, 다른 家具들은 다 밀어내고

그 방의 주인처럼 앉아 있는 아내의 재봉틀,

양철 지붕 위를 뛰어다니는 맨발의 빗소리 같은 경쾌함으로

최소한의 생활을 자급자족할, 地上의 집 한 칸을 꿈꾸고 있다

지금, 토담 안의 마당에서는 하늘의 재봉틀인 구름이

비의 빛나는 바늘로 풀잎을 깁고 숲을 깁고, 그 속에 깃들어 사는 생명들을 깁고 있을 것이다

모든 생명들을 기운 자국 하나 없이 깁는 고요한 구름의 재봉틀,

그 천의무봉의 손이듯, 아내의 구름인 재봉틀은

地上의 마지막 옷, 수의를 지으면서도

완강한 생활의 가위로 시간의 자투리까지 재단해

家計의 끈질긴 성질을 깁는다

―「아내의 재봉틀」(『환상통』, 천년의시작 2005) 부분

 

‘아내의 재봉틀’은 “수의를 만들면서도” “푸성귀가 자라고/발갛게 익은 고추들이 널린 햇빛 넓은 마당을 깁는다”. ‘수의(죽음)’와 ‘마당(삶)’을 동시에 환유적으로 깁는 ‘아내의 재봉틀’은 “모든 생명들을 기운 자국 하나 없이 깁는 고요한 구름의 재봉틀”과 상상적 유비관계를 형성한다. ‘아내의 재봉틀’과 ‘구름의 재봉틀’이 함께 깁는 ‘토담 안의 마당’은 ‘생계’를 위한 인간의 노동과 ‘생명’을 위한 자연의 노동이 화합하는 곳이며, 생활과 생태의 원리가 일체화된 공간이다. 김신용이 꿈꾸는, “최소한의 생활을 자급자족할, 地上의 집 한 칸”은 인간의 노동과 생활이 자연의 생태원리를 내재화하고 실천하는 장소인 것이다. ‘아내’가 일하는 ‘반지하방’의 미래형인 ‘토담 안의 마당’의 풍경이 그것을 증명한다. 김신용은 ‘노동’의 본질을 인위적인 것에서 자연적인 것으로 확장하면서, 생태적 비전을 장착한 미래의 노동시의 ‘최량’의 국면을 열어 보인다. 그와 함께 오늘의 현실에서 ‘자연’에 대한 동일성의 미학을 구축하는 가능하고 바람직한 방법의 하나도 예시한다(현실의 균열에 맞서 동일성의 미학을 폐기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동일성의 미학의 관점과 연결의 선들이 문제다).

이기인(李起仁)은 돌발적인 형태로 ‘현재의 시’로서의 노동시를 실험한다. 이기인은 폭력적인 쎅슈얼리티와 흡착된 노동의 속성, 소위 ‘노동의 쎅슈얼리티’를 드라이하게 묘사하거나, 노동/쎅슈얼리티의 이중적 착취대상인 노동자 소녀의 내면을 순정만화 투의 어조로 가녀리게 노래한다.

 

잔업이 끝나고 처음 만난 기계와 잠을 잤다

기계의 몸은 수천개의 부품들로 이뤄진 성감대를 갖고 있었다

―「알쏭달쏭 소녀백과사전―흰 벽」(『알쏭달쏭 소녀백과사전』, 창비 2005) 부분

 

가끔은 먼 친척처럼

잎사귀를 흔들었던 해바라기를 지나서 온 얼굴

밤늦게 일기 속으로도 들어오고

오늘 공장 가는 길에 새로 깐 보도블록 때문에

해바라기…… 죽었다고 쓰기도 하네

 

길바닥에 누운 해바라기를 주근깨를 오래 잊지 못하네

공장 가는 길목에 이제 누가 손 흔들어주나

―「해바라기 공장」(같은 책) 부분

 

‘알쏭달쏭’은 시의 내용이 아닌, 작법과 독법에 대한 안내 문구다. 화자의 잦은 교체와 서로를 교란하는 이미지들로 얽혀 있어도, 이기인의 시가 결국 재현하는 것은 참혹한 노동현실이다. 그것을 ‘알쏭달쏭’하게 쓰고 읽어야 하는 이유는 ‘노동의 실체와 노동자의 내면’을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고 실감하기 위해서다(이 점에서 ‘알쏭달쏭’은 분열과 해체가 아닌, 복원의 언어다. 이기인의 시 역시 그러하다). 그 내면의 징표삼아 “공장 가는 길목”에 피어 있는 ‘해바라기’는 일하러 가는 소녀들에게 “손 흔들어주”다, 어느날 “새로 깐 보도블록”에 짓눌려 죽는다. 이 ‘해바라기’가 매일 ‘기계’들과의 고단한 쎅스/노동에 압사중인, 그래서 ‘공장 가는 길목’에서나 겨우 피어나고 죽을 수 있는 소녀의 내면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이기인은 ‘소녀’의 미성숙한 육체와 내면에 가해지는 노동의 폭력이 거꾸로 ‘소녀’를 어떻게 성장(?)시키는가를,사회구조와 개혁에 대한 어떠한 계몽적 성찰이나 전망도 없이 무한히 멈춰 있는 ‘현재’로써 그려 보인다. “수천개의 부품들로 이뤄진 성감대를 가”진 ‘기계의 몸’으로 성장해가는 ‘소녀’가 이룩한 성장이 있다면, 그것은 무한히 반복되는 악무한의 ‘노동의 현재’에 도착한 것뿐이다. 이 옴짝달싹할 수 없는 지점에 이기인은 우리 시대의 새로운 노동시의 출발점을 열어놓는다. 한가지, 매트릭스 안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매트릭스(matrix)의 어원은 ‘자궁’이며 ‘모체’다. 매트릭스가 가상세계의 자궁이라면, 매트릭스의 자궁은 현실의 사막이다. 지젝(S. Zizek)의 통찰을 참조한다면, 자본주의체제는 이 두 개의 자궁이 하나의 생산라인으로 연결된 뫼비우스적 씨스템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어쩌면, 김선우와 문태준의 ‘아우라의 자연’이 자연이 멸해가는 현실에서 태어나고, 체제의 구조적 착취를 견뎌온 김신용의 ‘재봉틀’이 ‘노동’의 실로 ‘텃밭’과 ‘구름’에 연접되며, ‘기계의 몸’과 합체중인 이기인의 ‘소녀’가 공장 바깥에 ‘해바라기’로 죽어 있는 것은 모두 이 씨스템의 프로그램들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적어도 우리에게는 세 가지의 길이 열려 있다. 첫째, 매트릭스를 현실의 사막을 개선하는 도구로 활용하는 것(나희덕의 제안과 일치한다). 둘째, 현실의 사막에 생착(生着)해 매트릭스와의 접속선을 최대한 단절하는 것. 셋째, 매트릭스로 들어가 그 안에서 매트릭스를 균열내고 해체하는 것. 우선 현재로서는, 첫째의 길에 환상과 가상의 이미지로 현실을 교정하려는 시들(김혜순, 박상순, 이수명, 권혁웅 등)이, 둘째 길에 새로운 노동시(김신용, 이기인)와 반자본주의적 생태시(이문재, 최승호, 김기택 등)와 자기 앞의 현실과 싸우는 시들(유홍준, 이덕규, 박진성 등)이, 셋째의 길에 최근 번창하는 환상 이상의 환상시(김언, 정재학, 황병승, 이민하, 김민정, 유형진 등)들이 각각의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다.

어느 쪽이든, 이 길들은 개개의 인간을 제압하는 자본주의체제와 단독으로 맞서는 ‘1인투쟁’의 전면전이 된다. 감각과 욕망과 사유와 가치관 등의 모든 면에서 주체적이며 동시다발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전면전. 시가 1차적 상품성은 물론, 2차·3차적 상품성과도 기꺼이 절연하며 ‘무가치한 잉여’로 전락하기를 주저하지 말아야 할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각자의 님으로 귀환하자”는 최원식의 ‘자력갱생의 시학’의 각론 또한 이 지점에서부터 씌어질 수 있을 것이다. 여기, 매트릭스와 현실의 뫼비우스적 경계선이 있다. 친절하게도 두 가지 약이 제공된다. 빨간 약은 현실의 사막, 파란 약은 매트릭스의 유리정원 행이다. 자, 어느 쪽을 선택하겠는가? 겉보기와는 달리, 이 이분법적 질문은 분열하는 ‘현재’의 삶과 시의 영토를 뫼비우스적으로 가로지르며 우리의 내면으로 직핍한다. 그러니,(우리는 이미 선택했고 그것을 잊고 사는지도 모르지만) 시의 미래를 위해 한가지만 기억하자. 역설적이게도, 자본주의사회에서 시는 ‘무가치한 잉여’로 전락함으로써 자신을 보존한다. 아니, 성장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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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카라따니 코오진 「근대문학의 종말」, 『문학동네』 2004년 겨울호 참조.
  2. 최원식 「자력갱생의 시학」,『창작과비평』 2005년 여름호 20면.
  3. 이 가운데 첫째 항목의 ‘시와 시비평의 위기론’은 둘째와 셋째 항목에 대한 창비의 돌파구로서 채택된 측면도 없지 않다. 창비는 내부의 문제의식을 우리 시 전체의 위기감에 투사한 후, 그 위기의 발화주체가 됨으로써 비평(특히, 위기상태라고 강조한 시비평)의 소임을 대행하고 있는 형국이라고 할 수 있다.
  4. 이에 대해서는 졸고 「자연의 매트릭스에 갇힌 서정시: 최근 우리 시에 나타난 ‘자연’의 문제점」, 『파라 21』 2004년 겨울호 참조.
  5. 졸고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 『풍경 속의 빈 곳』 문학동네 2002, 19~20면.
  6. 나희덕 「기억과 자연, 그 지층 속으로」,『창작과비평』 2005년 여름호 45면.
  7. 김선우의 시적 기획의 세부 내용과 담론적·미학적 성과에 대해서는 졸고 「알몸의 유목, 자궁의 서사」(김선우 시집 『도화 아래 잠들다』, 창비 2003, 해설)에서 다룬 바 있다.
  8. 이장욱 「꽃들은 세상을 버리고」, 『창작과비평』 2005년 여름호 75면.
  9. 최근에 시집 『춤』(창비 2005)을 출간한 박형준의 경우도 유사한 특징을 보여준다. 이 시집은 시 「춤」에 단적으로 그려진 대상 부재의 관념적인 자연풍경과, 시인의 상상이 만들어낸 옛 추억의 편린들로 이루어져 있다. 한정된 지면 때문에 다루지 못했음을 밝혀둔다.
  10. 따이 진화 「상상된 노스탤지어」, 『문학수첩』 2005년 여름호 390~91면 참조.
  11. 여기에는 90년대 이후 민중시인들이 경쟁하듯 ‘자연’으로 향한 여파가 침전되어 있다. 민중시인들이 ‘민중’ 대신 ‘자연’을 새로운 파트너로 택했을 때, 거기에는 몇가지 다른 지향성이 공존했다. 첫째, 가혹한 노동현실과 파괴된 자연현장의 연대와 통합(하종오 정도를 제외하면 이 계열의 성과는 빈약하다. 민중시가 생태시로 계승 발전될 수 있는 가능성의 면에서 아쉬운 부분이다). 둘째, 자연의 이치를 통해 현실과 삶의 해법 찾기(김지하, 백무산, 박노해, 최하림, 이성부 등. 가장 많은 시인들이 선택한 것인 반면, 현실인식과 시적 성과에 있어 편차도 크다). 셋째, 황폐한 현실에 거리를 두고 낭만적인 자연을 꿈꾸기(안도현, 김용택. 자연의 매트릭스로 연결되는 길이다). 여기서 둘째 계열의 부정적인 측면과 셋째 계열이 자연의 매트릭스의 형성에 기여해왔다.
  12.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졸고 「살아 꿈틀대는 노동의 시: 김신용의 시세계」,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웹진 『문장』, 2005년 창간호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