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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윤대녕 尹大寧

1962년 충남 예산 출생. 1990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소설집 『은어낚시통신』, 장편 『옛날 영화를 보러 갔다』 『추억의 아주 먼 곳』 『미란』 등이 있음. parisbell@hanmail.net

 

 

 

낙타 주머니

 

 

1

 

낙타 주머니는 낙타 그림이 있는 검은 주머니이다. 다시, 낙타 주머니는 낙타를 끌고 가는 소년의 모습이 수놓인 둥그런 주머니 혹은 가방이다. 두툼한 천으로 만든 것으로 양쪽에 끈이 달려 있어 어깨나 목에 걸고 다닐 수 있다. 빨간 고깔모자를 쓴 소년은 무릎까지 내려오는 보라색 긴 털옷에 파란 바지를 입었고 펠트화로 보이는 회색 신발을 신었으며 왼손엔 긴 지팡이를 들고 있다. 오른손은 고삐를 쥐고 있다.

이 주머니를 더욱 아름답게 하는 것은 낙타 머리 위에 달처럼 비스듬히 떠 있는 ‘신평(新平)’이라는 붉은 낙관이다. 그런데 왠지 만든 사람의 아호나 이름 같지가 않다. 지명(地名)이 아닐까라고 추측도 해보지만 지도를 펴놓고 찾아봐도 그런 곳은 보이지 않는다. 지금 와서 붙잡고 물어볼 사람도 없다.

낙타 주머니가 내 손에 들어온 것은 1995년 2월 14일이었다. 낡은 여행수첩에 그렇게 적혀 있다. 중국, 투루판 근처 화염산 남록에 있는 고창고성 입구에서였다. 투루판은 천산북로와 천산남로의 분기점에 위치한 사막의 도시로 조상이 터키계 유목인으로 알려진 위구르인들이 주로 모여 사는 곳이었다. 또한 7세기 무렵 인도로 가던 현장법사가 여독을 풀며 잠시 머물다 간 곳이 바로 고창고성이었다.

그는 당나귀를 타고 왔다. 기울어가는 해를 등진 채 상체를 기우뚱거리며. 오후 5시경이 아니었나 싶다. 날씨는 무척 추웠고 모래를 핥고 싶을 만큼 배가 고팠다. 고성으로 들어가려는 참에 우리는 멀리서 그가 오는 것을 발견했고, 그를 기다려야만 하는 것처럼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우리란 함께 여행중이던 동갑내기 화가와 나였다. 그때 우리는 서른네살의 젊은 나이였다.

그 노인은 마치 양동이를 뒤집어쓴 것 같은 커다란 검은 모자에 낡아빠진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 귀에 하얀 테가 있었으나 당나귀도 역시 검은색이었다. 노인이 쓰고 있는 모자엔 붉은색과 푸른색이 뒤섞인 화려한 꽃문양이 여섯 개나 박혀 있었는데 앞자락으로 길게 뻗어내린 흰 수염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우리는 그가 사막에서 만난 현자일지 모른다고 짐작했으나, 알고 보니 주머니를 팔고 다니는 위구르족 노인네였다. 당나귀 목에 주머니가 스무 개 남짓 걸려 있었다. 바탕 색깔과 무늬만 약간씩 다를 뿐 모양은 다 비슷했다. 눈썰미가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정성을 들여 만든 물건이었다. 그런데 이걸 사서 뭐에 쓰지? 나는 동갑내기 화가를 돌아보며 투덜거렸다. 노인이 현자가 아니라서 실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건 말하자면 가방이라는 거요. 몰랐소?”

당나귀 목에 걸린 주머니들을 들춰보며 그가 말했다.

“이게 무슨 가방이오. 주머니지.”

“주머니든 가방이든 끈이 달려 있으니 목에 걸고 다니면 되질 않소.”

“서울 한복판에서 그러고 다니면 사람들이 뒤에서 따라올 텐데. 눈에 튄다 그 말이오.”

아주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동갑내기 화가가 나를 돌아보았다.

“김형은 그럼 서울에서도 이걸 몸에 걸치고 다닐 생각이오?”

만난 지 며칠밖에 되지 않았으나 동갑내기라는 이유로 그와 나는 어느덧 가까운 사이가 돼 있었다. 노인은 대들보에 짓눌려 있는 돌쩌귀처럼 아무 표정이 없었다. 당나귀만 이래저래 힘들어 보였다.

“길에서 산 물건은 흔히 짐이 될뿐더러 갖고 가면 집까지 좁아지게 마련이지.”

내가 계속 비아냥거렸으나 그는 들은 척도 않고 자줏빛 바탕의 주머니 하나를 골라냈다. 푸른 낙타가 수놓아져 있는 주머니였다. 그가 내 몫까지 값을 치르고 나서 말했다.

“당나귀를 봐서라도 김형도 하나 고르시오. 내가 보기엔 흔해빠진 물건은 아닌 듯싶소.”

정세를 염탐하고 있던 노인이 당나귀 목에서 검은 주머니를 빼내더니 내 목에 걸어주었다. 값은 주머니 하나에 담배 두 갑 정도였다. 나는 하얀 낙타였다.

“아름답기 짝이 없는 가방이오. 노인이 당나귀를 타고 오는 걸 보고 나는 알았소. 그가 곧 무언가 가져오리라는 것을.”

노인이 돌아간 뒤 동갑내기 화가가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아마도 화가이기 때문에 그렇게 느꼈으리라. 비단길에서 돌아올 때까지 동갑내기 화가와 나는 그 주머니를 당나귀처럼 계속 목에 걸고 다녔다. 방독면을 착용하듯 왼쪽 목에 걸면 주머니는 오른쪽 허리춤에 와닿았다. 나는 거기에 돈과 여권과 여행수첩과 관광안내서 따위를 넣고 다녔다. 지퍼가 달려 있어 사용하기 편리할뿐더러 여행중에는 꽤나 유용한 물건이었다.

주머니를 산 다음날 동갑내기 화가와 나는 화염산 북록에 있는 천불동 위에서 서쪽으로 강물처럼 뻗은 저물녘의 천산남로를 내려다보며 함께 두 팔을 벌리고 사진을 찍었다. 각자 허리춤에 주머니를 찬 우스꽝스런 모습으로. 나중에 인화한 사진을 보니 두 남자는 마치 독일제 쌍둥이칼에 새겨진 검은 심벌처럼 보였다.

 

 

2

 

서울로 돌아온 뒤 나는 낙타 주머니를 현관 옆에 걸어놓고 공과금 고지서나 편지가 오면 우선 거기다 집어넣었다. 술 먹고 돌아온 다음날 바지를 뒤져 명함이나 신용카드 영수증 따위를 집어넣기도 했다. 그 용도 외에는 한국에서 더이상 쓸모가 없었다.

3월 말에 광화문의 한 생맥주집에서 비단길에 함께 갔던 사람들의 모임이 있었다. 서로 시간들이 맞지 않아 몇차례나 미루다 성사된 모임이었다. 당시 동행했던 이들은 모두 여덟 명이었는데 그나마 두 명은 빠졌다. 일행은 각자 사진을 교환하고 생맥주를 1000cc가량씩 마시고 훗날 또 만나자는 지킬 수 없는 약속을 남긴 채 뿔뿔이 흩어졌다.

“고작 이건가? 그 추운 사막의 먼지 구뎅이에서 보름을 함께 지냈건만 그래, 두 시간도 채 버티지 못하고 다들 허둥지둥 내뺀단 말인가?”

담배꽁초가 가득 들어차 있는 재떨이를 내려다보며 동갑내기 화가가 푸념조로 늘어놓았다.

“자네가 술을 통 안 마시니까 그렇지. 담배라도 좀 피우든지. 그리고 왜 중처럼 머리는 박박 밀고 나온 거요? 그러니 무슨 낙으로 앉아들 있겠소.”

그가 눈을 천천히 감았다 뜨고 나서 나를 마주보았다. 갑자기 그는 사마귀처럼 외로워 보였다.

“담배는 가난한 사람들이 피우는 거예요. 그러니 김형도 속히 끊어요. 보아하니 기관지도 안 좋은 것 같은데.”

안된다고 나는 말했다. 담배를 끊는다고 금방 부자가 되는 것도 아니었다.

“나한테 담배는 정부예산과 같은 것이어서 형편에 따라 어느정도 삭감은 가능하지만 아예 끊을 수는 없소이다. 실제로 정부예산 중에 담배 수입이 차지하는 비중이 어느 정돈지는 당신도 잘 알 거요. 나라부터 살리고 봐야지.”

“말이 잘못됐소. 자신부터 살리고 봐야 하는 거요.”

“그럼 술은?”

“술도 육신을 갉아먹긴 마찬가지오. 잠 안 올 때 조금씩 마시는 건 어쩔 수 없겠지.”

“예술가가 그런 발언을 하는 게 적절타고 생각하오? 남들이 들을까 무섭소.”

“예술도 몸에 힘이 있어야 하는 거요. 술담배에 곯아서 하는 얘기를 요즘 세상에 누가 귀 기울여 듣겠소.”

소금에 절인 배추처럼 무력한 표정으로 그는 중얼거렸다. 실제로 여행에서 돌아온 뒤 그는 계속 무력감에 빠져 있다고 고백했다. 길에서 돌아온 자들이 무력감을 호소하는 것은 매우 흔한 증상이다. 나는 부지런히 생맥주잔을 비우며 안주삼아 담배를 피워대고 있었다. 담배연기가 날아갈 때마다 그는 코너에 몰린 복서처럼 얼굴을 이리저리 피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밖엔 바야흐로 봄비가 내리고 있었고 우리는 우산을 갖고 있지 않았다. 화장실에 다녀온 그가 슬그머니 내 옆자리에 와 앉더니, 아주 소중한 것을 없애버리듯 천천히 공을 들여 말했다.

“모두가 갖고 있지만 내겐 없는 게 있소. 그걸 무유(無有)라고 하오. 또한 있어도 희미하게 아주 조금밖에 없지.”

나는 머리를 쥐어짜며 대꾸했다.

“그렇다면 유무(有無)가 아니고?”

그가 당나귀처럼 고개를 흔들며 웃었다.

“둘은 백지의 앞뒷면 같은 거겠지. 무무(無無)에 이르러야 그게 진짜라고 하더이다.”

그만두자고, 나는 숨을 허덕이며 말했다.

“그래, 오늘은 여기까지. 비를 맞더라도 나는 이만 가봐야겠소.”

그제야 나는 옆을 돌아보며 말했다.

“왜, 빗소리가 들리는 단칸방에서 초저녁부터 아녀자가 기다리고 있나?”

그는 내 뒤통수를 툭 치더니 의자에서 일어나 계산서를 들고 카운터로 걸어갔다. 이어 출입문 앞에 잠시 서서 비행기에 탑승하는 사람처럼 내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와 다시 만난 것은 1996년 10월 중순의 일이었다. 혼자 북한산을 등반하고 구기동 쪽으로 내려와 배가 출출해 ‘할매두부집’으로 가던 길이었다. 오후 6시경이었고 ‘르 샤’(고양이)라는 찻집 겸 맥주집 앞에서였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그가 홀연한 모습으로 거기에 서 있었다. 하늘색 체크무늬가 있는 갈색 남방에 감색 면바지 차림이었고 엊그제 산 듯한 랜드로버를 신고 있었다. 그동안 머리가 제법 자랐으나 저녁 무렵이라 그는 추워 보였다. 손에는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았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두어 걸음 앞으로 다가오는 시늉을 하다 발을 멈췄다. 나머지는 내가 걸어서 갔다. 아침에 헤어졌다 만난 사람처럼 그는 아무 감정의 내색 없이 나를 보고 말했다.

“혼자 어슬렁거리며 산에 다니는 걸 보니 김형도 슬슬 나이를 먹는 모양이군.”

골 아픈 얘기는 하고 싶지 않아 나는 안에 일행이 있냐고 르 샤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인색하게 웃어 보였다.

“그런데 왜 여기 멀뚱하게 혼자 서 있는 거요?”

“글쎄, 김형을 만나러 온 모양이지. 실은 낮잠에서 깨어나 산에나 갈까 하고 나왔는데 마침 날이 저물어 오도가도 못하고 서 있던 참입니다.”

“그럼 할매집으로 두부나 먹으러 갑시다. 두부로 성이 차지 않을 것 같으면 그 아래 ‘싸릿골’에서 개고기를 먹든지.”

들은 척도 않고 그는 할매두부집으로 앞장서 걸어갔다. 우리는 막걸리 두 주전자에 두부를 각자 한 모씩 먹었다. 그가 술을 먹으니 보기에 좋았다. 이상기온처럼 금연 열풍이 불 때라 담배까지 권하지는 않았다. 고작해야 막걸리 두어 잔에 취한 그가 혀가 말린 소리로 입을 열었다.

“막걸리 다 먹고 나면 뭐할 거요?”

“뭐하다니? 요 아래 길 건너 오피스텔 지하에 있는 목욕탕에 들어가 땀 씻고 속옷부터 갈아입어야지.”

“그 다음엔?”

“인사동으로 택시 타고 나가 자네하고 한잔 더 해야겠지. 하나를 생략하라면 내 목욕은 양보하리다. 오늘은 저번처럼 쉽게 안 보내줄 거요.”

핏발선 눈동자를 굴리며 그는 엉뚱한 말을 늘어놓았다.

“김형도 늘 목욕재계하고 다리미로 옷 다려 입고 다니는 그런 사람이오? 언제 죽을지 몰라서 말이오.”

“그건 칼잡이들이나 하는 짓이고 동침을 할 수 없으니 목욕이나 함께 하자는 거요.”

인사동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었으나 나는 괘념치 않았다. 나한테도 전화번호나 주소를 알려주지 않아 오늘 헤어지고 나면 또 언제 만날지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우리는 온탕에 들어가 계단처럼 생긴 턱에 나란히 걸치고 앉아 벽에 타일로 모자이크한 물고기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배꼽까지 차오른 물은 저수지처럼 느리게 그리고 뜨겁게 흔들렸다. 아무래도 소리가 없어 슬그머니 옆을 돌아보니 그는 지친 노인처럼 눈을 감고 있었다. 그때 왜 이 말이 무심코 뇌리에 떠올랐는지 모른다. 무위(無爲). 즉, 형상은 있어도 작용하지 않는다. 출생해 나온 그 무(無)로 돌아가 마침내 형상이 없는 상태에 있다.

옷을 입고 인사동으로 나와 우리는 홍어찜에 또 막걸리를 마셨다. 두 사발을 채 마시지 못하고 그는 방바닥에 길게 드러누웠다. 왜 벌써부터 눕냐고 내가 투덜거리자, 그가 눈을 감은 채 중얼거렸다.

“누워 있는 게 아니라 잠시 벽에 등을 대고 서 있을 뿐이오. 자네가 원숭이처럼 벽에 붙어앉아 술을 마시고 있는 거지.”

“잠들지 마시오. 업고 갈 사람 없으니까.”

“알고 있소이다.”

그의 잠을 깨워가며 나는 물었다.

“전시회는 안하시오? 벽에 그림 걸면 내 꼭 가보리다.”

그가 대답을 하기까지는 한참이 걸렸다.

“한번은 할 수 있겠지.”

나는 그가 듣지 못하도록 숨을 몰아쉬었다.

“대체 무얼 그리오?”

그러자 그가 눈을 빤짝 뜨고 천장을 향해 공허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비.

“나비는 하나의 물상(物像)이라기보다는 한갓 그림자 같은 거겠지. 영혼의 상형(象形) 말이오.”

정말이지 지독하게 공허한 목소리였다.

“시간 내서 다음주에 붕어낚시나 함께 갔다 올까요?”

화제를 돌려 내가 물었다. 이번에도 그는 대답이 늦었다.

“멀지 않은 곳에 깨끗한 저수지를 한군데 알고 있소. 안된 얘기지만, 사람들이 북적대는 곳은 어디든 더럽게 마련이지.”

어린아이처럼 그가 물어왔다.

“붕어가 있나?”

“비 오는 날을 골라서 가면 하늘에서도 간혹 떨어지더이다.”

눈을 감은 채로 그는 웃었다. 그의 눈가에 잠시 별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1996년 10월 하순에 우리는 강화도에 있는 국화지로 붕어낚시를 갔다. 비는 내리지 않았으나 비만큼 많은 별들이 내렸다. 물가에 텐트를 치고 우리는 낚싯대를 드리운 채 저수지 위에 내려와 있는 별들을 바라보며 잔뜩 숨을 죽이고 있었다. 자정이 지날 무렵 그의 낚싯대에 첫 어신이 왔다. 황금빛의 붕어였다. 그로부터 새벽 3시까지 그는 무려 다섯 마리의 씨알 좋은 떡붕어를 잡아올렸다. 잡고 나서 도로 놓아주었으므로 아마 그놈이 그놈이었는지도 모른다. 4시에 그는 라면을 끓여먹고 텐트로 들어가 잠이 들었다. 새벽 6시 무렵에야 나는 간신히 첫 입질을 받았는데 붕어가 아닌 시커먼 민물장어였다. 이어 향어가 올라왔고 해뜰 무렵에야 겨우 손바닥만한 붕어가 한 마리 올라왔다. 언제 일어났는지 그는 텐트 앞에 앉아 내 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향어는 놓아주더라도 아침끼니로 장어는 구워먹자고 하자 그는 웃으면서 저수지로 다시 돌려보내라고 말했다.

 

 

3

 

그와 가장 최근에 대면한 것은 1998년 9월의 첫번째 수요일이었다. 붕어낚시 이후 2년 만의 만남이었다. 며칠 전 그가 우편으로 팸플릿을 보내와서 나는 인사동에서 전시회가 열린다는 사실을 알았다. 통화는 따로 없었으나 그는 2년 전에 한 약속을 지킨 셈이었다. 화랑이 문을 연 날 나는 저녁참에 인사동으로 나갔다. 그릇가게부터 들러 질항아리를 하나 고른 다음 미리 사들고 간 들국화로 가득 채웠다. 파장 무렵이었으므로 관람객은 두어 명에 불과했다. 그는 화랑에서 마련한 옹색한 철제 캐비닛 책상 의자에 앉아 자판기 커피를 마시며 담배라는 걸 피우고 있었다.

그날도 그는 별 안색의 변화 없이 나를 맞았다.

“드디어 가난해진 모양이지? 담배를 피우는 걸 보니.”

내가 들고 간 질항아리를 슬쩍 눈여겨보며 그가 말했다.

“자네를 기다리다 지쳐 관람객한테 한 대 빌려 피우고 있는 중이야. 이제 끊어야겠군. 역시 안 좋아.”

그는 출입구 밖을 주의깊게 노려보더니 서랍에서 안경을 꺼내 썼다. 머리는 알맞게 길었고 옆가르마를 타서 단정하게 뒤로 넘긴 모습이 오히려 보기에 좋았다. 화랑 직원들은 퇴근을 서두르고 있었다. 그가 걸려온 전화를 받는 사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 나 구역으로 나뉘어 있는 전시회장을 둘러보았다. 나비였다. 나비들이 화랑을 가득 채우며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러나 나비들이 날아다니고 있는 들판엔 꽃 한 송이, 풀 한 포기조차 보이지 않았다. 배경이 되는 것은 검은빛에 가까운 황량한 들판이었고 조금 밝다고 해봐야 보랏빛이거나 검붉은빛이었다. 혼잡한 적막감 속에서 나는 눈을 감고 오래전 그와 천불동 위에서 두 팔을 벌리고 서 있던 순간을 떠올리고 있었다. 거기서도 그는 나비를 보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 어디에도 내려앉을 곳이 없는 나비의 무리를. 그것을 그는 시간의 벽에다 고정시키려고 한 것 같았다. 삭막한 심정으로 데스크로 돌아왔을 때 그는 잠시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나는 의자에 앉아 그가 마시다 남긴 커피를 먹고 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피워물었다.

그때 여름의 캘린더 안에서나 등장할 법한 여자가 유리문을 밀고 화랑으로 들어섰다. 직원들은 모두 퇴근한 뒤였으므로 전시장에는 나 혼자뿐이었다. 그녀는 약간 마른 듯한 호리호리한 몸매에 팔소매가 없는 붉은 면티와 하얀 반바지 차림이었고 오른쪽 어깨엔 하늘색 비치백을 걸치고 있었으며 두 발에는 굽이 가는 파란색 쌘들을 신고 있었다. 더 말해 무엇하랴만, 그녀는 자판기 종이컵을 딱 반으로 잘라낸 크기의 배스킨라빈스 아이스크림 컵을 손에 들고 분홍색 스푼으로 조금씩 떠먹고 있는 중이었고 눈이 보이지 않는 짙은 농도의 썬글라스를 착용하고 있었다. 모자는 바람에 날려간 모양이었다. 어깨까지 치렁치렁 늘어뜨린 머리칼이 전시장의 조명으로 인해 밝은 갈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길을 잃은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누추한 화랑에 혼자 나타날 리 없었다.

전시장 안으로 들어선 그녀는 내가 앉아 있는 허름한 데스크를 돌아보더니 이내 시선을 거두고 나비가 날고 있는 벽을 따라 발소리를 죽이며 걷기 시작했다. 목이 말랐던 나는 페트병에 들어 있는 미지근한 물을 따라 마시고 종이컵을 구겨 책상 밑에 있던 쓰레기통 페달을 밟고 그 안에 던져넣었다. 그녀는 그림엔 그다지 관심이 없어 보였고 가, 나 구역을 다 돌아서 내게로 다가오는 데 4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녀가 뭔가 물어오리라 짐작하고 나는 호흡을 조절했다. 이윽고 그녀가 아이스크림 컵을 책상 위에 올려놓으며 저어, 하고 허리를 굽혔다. 빈 컵 안에는 분홍색 플라스틱 숟가락만이 사다리처럼 외롭게 대각선으로 놓여 있었다. 긴장했던 나머지 나는 그녀가 미처 말을 잇기도 전에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풀장은 엊그제 문을 다 닫은 것 같은데요. 지금은 9월이거든요.”

그 말을 하는 것도 모자라 나는 데스크 옆에 걸려 있는 달력을 가리켰다. 9월치 달력에는 암스테르담의 사진이 찍혀 있었다. 그녀는 달력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나서 심드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운하네요.”

“하이네켄 공장이 있는 암스테르담이죠. 9월에 가본 적이 있습니다. 그날 저녁에 운하 옆에서 많이 취했고요.”

그녀는 썬글라스를 벗고 머리를 가볍게 흔든 다음 손가락을 이용해 이마로 내려온 머리칼을 뒤로 빗어넘겼다. 얇게 쌍꺼풀진 커다란 눈은 지나치게 맑아서 오히려 밤처럼 어둡고 공허해 보였다.

“여기 직원인가요?”

아니오,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내 대답엔 조금도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녀는 군청색 바탕에 은빛 시곗바늘이 돌아가고 있는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더니 불안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때 화장실에 갔던 그가 손수건으로 얼굴을 문지르며 나타났다.

세 사람은 화랑 근처에 있는 ‘볼가’라는 술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배가 고팠으나 밥을 먹자고 우길 만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화가와 나는 안주로 속을 채웠고 그녀는 맥주를 딱 한 병만 마셨다. 그런 여자가 있다. 데리고 살 수 없을뿐더러 또 그럴 만한 엄두도 나지 않지만 평생 연인으로 곁에 두고 싶은 여자 말이다. 누가 보더라도 그녀는 매혹적인 여자였고 자신도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다. 또한 자신이 갖고 있는 아름다움을 애써 드러내지 않으면서 구태여 감추려 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젊다는 것말고도 그녀는 남들이 소유하기 힘든 미덕을 갖춘 여자였다. 상대를 편안하게 하는 온화하고 투명한 빛이 이마에 잔물결처럼 어른거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오래된 연인처럼 보였다. 자리에 앉아 있는 동안 그녀는 줄곧 화가의 팔을 붙잡고 있었다. 그러기에 두 사람은 모든 걸 한 손으로 해결해야만 했는데 그럼에도 조금도 불편한 기색이 없었다.

술기운을 빌려 나는 은근히 트집을 잡기 시작했다. 어쩌면 질투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제 썬글라스 좀 벗으면 안될까요? 날도 저물었는데.”

그녀의 남자가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입안에서 천천히 말을 굴려 밖으로 내보냈다.

“그냥 놔둬. 다 제멋대로 사는 거야. 이쁘잖아.”

그녀는 벽처럼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래도 벗는 게 낫지 않을까? 여긴 지금 8월의 해변이 아니라구.”

테이블 위에 몇초간 안개 같은 침묵이 떠돌았다.

“자네 이거 모르는군. 얘는 지금 벗고 있기 때문에 썬글라스가 필요한 거야. 봐, 이분의 일은 벗고 있잖아. 썬글라스까지 벗으면 사실상 다 벗는 거란 말이지.”

잡고 있던 그의 손을 슬그머니 놓으며 그녀가 희미하게 웃었다. 듣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계속 헛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러니 나라면 당장 데리고 나가 옷부터 사 입히겠다. 저 봐, 냉장고 속에 앉아 있는 아이처럼 떨고 있잖아.”

그가 나른한 미소를 짓더니 그녀를 돌아보며 문득 명령조로 말했다.

“너 나가서 옷부터 사 입고 와야겠다.”

“농담이죠?”

그녀는 여전히 입술에 웃음을 머금은 채 반문했다.

“갈아입고 와. 아무래도 네가 쇼걸처럼 보이나봐. 그렇게 보이는 건 나도 싫거든.”

그는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마치 벼루를 밀 듯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뭔가 어긋나는 중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지금 어디 가서 옷을 사 입어요. 백화점은 이미 문을 닫았을 테고 인사동에 옷가게가 있는 줄 아세요? 그렇다고 한복으로 갈아입을 수도 없잖아요.”

그는 침착하고 냉정한 목소리로 되풀이했다.

“한복까지는 바라지도 않아. 그러니 택시 타고 동대문에라도 갔다와. 귀찮겠지만 한번은 그럴 수도 있는 거야.”

좀더 대항을 할 듯하더니 그녀는 테이블에 놓여 있던 지갑을 집어들고 얌전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내가 보는 앞에서 그의 뒤통수에다 대고 혀를 내밀더니 밖으로 빠져나갔다.

“지나친 감이 없지 않은데.”

그의 눈치를 살피며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한번은 그럴 수 있는 거야. 딱 한번이겠지만.”

“이거 원 살벌해서 앉아 있을 수가 있나.”

“알아, 자네가 저애를 좋아하기 시작했다는 걸. 좋은 일이지. 하지만 알아둬야 할 게 있어. 저앤 산천어(山川魚) 같은 존재야. 더운 손으로 만지면 금방 화상을 입지. 잡더라도 곧바로 놓아줄 줄 알아야 한단 말이야.”

“산천어가 자네의 전재산이란 뜻이군.”

그가 고개를 모로 비틀고 픽 웃으며 대꾸했다.

“그렇다면 장롱 속에 깊숙이 넣어뒀겠지. 조심 또 조심해서 다가가란 뜻이야. 안 그러면 금세 돌 밑으로 숨어버릴 테니.”

“그치만 난 플라이낚시는 안해봤는걸.”

정확히 1시간 10분 후에 그녀는 쇼핑백을 들고 나타났다. 나는 무척 놀랐다. 그녀가 돌아올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다리에 착 달라붙는 검은색 면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래, 바지만 갈아입어도 이렇게 정숙해 보이지 않는가 말이다.

근사한 밤이었다. 그녀는 시간을 함께할수록 상대를 더욱 편안하게 만드는 여자였다. 헤어질 때까지도 나는 줄곧 마음이 설레었다. 그녀는 대학을 나와 통신회사에 근무하고 있는 평범한 직장여성이었다. 아까는 헬스클럽에 갔다가 약속시간이 늦어 곧바로 택시를 타고 화랑으로 온 길이었다. 그날 밤 세 사람은 노래방에도 갔고 청진동 해장국집에 들러 허전한 배를 채웠고 해장국을 먹는 동안 그는 피곤하다며 방바닥에 드러누웠다.

해장국집에 누워 그가 말했다.

“베토벤의 「코리올란 서곡」이 듣고 싶은 밤이군. 게반트하우스와 쿠르트 마주어가 1975년에 동독에서 연주한 걸로 말이야. 나는 그게 가장 좋아.”

그가 잠들어 있는 동안 나는 채란에게 그와 함께 붕어낚시를 갔던 얘기를 하고 있었다.

 

 

4

 

그의 사망 소식을 들은 것은 이듬해 3월이었다. 정확히 1999년 3월 24일 오전 10시에 나는 채란이 걸어온 전화를 통해 그 소식을 전해들었다. 19일 오후 7시쯤 그는 구기동 화실에서 가족에 의해 사체로 발견됐다. 의자에 앉은 채 숨이 끊겨 있었다고 한다. 유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의사가 사체를 해부하려 했으나 가족이 극구 반대하는 바람에 사인조차 제대로 규명할 수 없었다. 결국 과로사로 처리됐고 유해는 화장을 해서 평소에 그가 자주 가던 북한산 대남문 아래 뿌렸다.

채란이 전화를 걸어온 것은 북한산에 유골을 뿌리고 나서 사흘 뒤였다. 그녀가 인사동에서 봤으면 한다고 해서 나는 전에 세 사람이 만났던 볼가로 나갔다. 힘들다고 그녀는 말했다. 오죽하겠는가. 쓰디쓴 커피를 마시고 채란과 나는 인사동 사거리에서 마치 죽어가는 사람들처럼 헤어졌다. 돌아서다 말고 그녀가 나를 향해 절규하듯 말했다.

“우리 오늘 술 마실까요? 마셔요!”

나는 다음에 하자고 그녀를 달랬다. 갈 데가 있었던 것이다.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내 눈을 살피더니 그녀가 휘청거리며 다가왔다. 다가와 덥석 내 품에 쓰러지더니 이렇게 울부짖었다.

“저 지금 미쳐버릴 것 같아요. 오빠를 너무나 사랑했거든요. 고작 서른여덟살밖에 안된 남자였어요. 결혼도 못해봤다고요.”

알고 있다고, 나는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얼마나 힘들겠는가. 내 눈에서도 기어이 참았던 눈물이 비어져나오고 있었다.

“내일 다시 전화해도 되죠? 오빠가 보고 싶을 때마다 저 당신한테 전화할래요.”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녀를 만날 때마다 그가 생각날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만 가봐야겠다고 하자, 그녀가 내 어깨를 바투 끌어안더니 다시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를 택시에 태워 상도동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택시에서 내리기 전 그녀가 내 손에 축축한 손수건을 쥐여주며 말했다.

“알고 계신 줄 알았어요.”

“무엇을 말이오?”

망연히 나를 돌아보다가 그녀는 아녜요,라며 제풀에 말꼬리를 흐렸다.

그녀를 아파트단지 앞에 내려주고 나는 택시 운전사에게 차를 돌려 구기동으로 가자고 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사람은 누구나 죽게 돼 있다. 그러나 때로 용납 못할 죽음이라는 게 있다. 요절, 자살, 또한 요절이면서 자살 같은 죽음. 그런 경우 우리는 심지어 죽은 사람을 욕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그를 욕할 수가 없었다.

구기동 북한산 입구에 내린 나는 밤길을 타고 대남문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아침이 올 때까지 이슬을 맞으며 대남문 마루에 혼자 앉아 있었다. 가라, 이제는 더이상 힘들게 벽에 기대 서 있지 말고 제대로 편히 눕거라.

 

 

5

 

삶에는 여자의 내부처럼 함부로 열어보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있다. 그렇지만 결국은 누구나 열어보게 돼 있다. 이유야 어떻든. 한데 열지 말 것을 열게 되면 대개 뜻하지 않았던 장면들이 그 안에서 튀어나온다. 자기, 이제부터 담배 좀 줄여,라는 정도면 그래도 괜찮은 편이다. 그거야 줄이는 시늉만 하면 되니까. 그러나 삶이라는 건 내 형편에 맞게 선택할 수 있는 수준의 문제만을 제공하는 게 아니다.

아침에 북한산에서 내려와 나는 오후 6시까지 잠을 잤다. 꿈 없는 완벽한 잠이었다. 침대에서 깨어나 나는 여느날처럼 커튼을 걷고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마신 다음 담배를 피워물고 베란다로 나갔다. 그때 나는 보았다.

 

흰나비 한 마리가 막 꽃이 피기 시작한 재스민 화분 위에서 춤을 추듯 맴돌고 있었다.

 

낙타 주머니로 눈길이 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 검은 주머니는 거실 벽시계 밑에 걸려 있었다. 그렇다고 항상 거기에 걸려 있던 건 아니었다. 비단길에서 돌아온 후 나는 두 번의 이사를 했고 그때마다 낙타 주머니는 잡다한 물건들과 함께 박스에 담겨 책상 아래 방치되거나 심지어는 2년씩이나 지하창고에서 곰팡이에 뜯어먹히며 지낸 적도 있었다.

1998년 가을에 나는 어렵사리 전세의 삶에서 벗어나 24평형 주공아파트를 마련해 신도시로 이사를 했다. 인사동에서 그와 마지막으로 만나고 나서 한달쯤 뒤였다. 아무튼 내 집이 생긴 터여서 짐을 꼼꼼히 정리하다보니 누런 종이상자 안에서 퍼렇게 곰팡이가 슬어 있는 낙타 주머니가 나왔다. 지퍼를 열어보니 이제는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 사람들의 명함과 심지어는 술집 여자의 명함과 각종 공과금 영수증과 신용카드 청구서 따위가 축축이 습기가 밴 채 가득 들어 있었다. 나는 그것들을 잘게 찢어 쓰레기통에 버린 다음 낙타 주머니를 깨끗이 세탁해 사흘 동안 베란다 건조대에 걸어 말렸다. 그리고 이따금씩 추억이나 떠올릴 요량으로 거실 벽시계 밑에 못을 박아 걸어두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전과 같은 용도로 사용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5개월 만에 나는 낙타 주머니를 다시 열어보았다. 북한산에서 밤을 새우고 내려온 그날 저녁에. 주머니 안에서는 역시 그렇고 그런 잡다한 것들이 쏟아져나왔다. 그새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 사람들의 명함과 누군가 먼 데서 보내온 관광엽서와 피우다 남긴 담뱃갑과 각종 영수증 따위들. 그리고 보낸 사람의 주소와 이름이 써 있지 않은 편지가 한통 나왔다. 그런데 왜 뜯어보지 않았을까? 아마도 식당이나 세탁소 개업 안내문이거나 과외모집 안내문쯤으로 여겼을 것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우편함을 들춰보면 수시로 쌓이는 게 그런 익명의 우편물이었다. 인터넷과 휴대폰이 만연한 세상에 누구라도 번거롭게 사신을 보낼 리 없다고 생각했음이 분명했다. 밖에 나가면 우체통 찾기도 어려운 세상이 아닌가 말이다.

놀랍게도 그것은 그가 사망하기 불과 보름 전에 내게 부쳐온 편지였다. 이진호. 동갑내기 화가. 돌연 숨이 차올라 나는 편지를 읽기도 전에 베란다로 나가 바깥문부터 열었다. 그 순간에도 나비는 재스민 화분가를 너울거리며 날아다니고 있었다.

 

자네 주소를 알아내느라 꼬박 이틀이 걸렸네. 전화번호는 알고 있었지만 막상 걸고 싶지 않았네. 말과 글의 차이를 자네도 알고 있겠지. 하여 나는 글로써 적네.

그때 비단길에서 시작된 만남이 마침내 이 지경에 이르렀군. 몇번 되지도 않는 만남이었지만 모두가 멋진 시간들이었네. 강화도에서 붕어낚시 하던 밤과 인사동에서 여동생과 셋이 데이트하던 밤을 영원히 잊지 못할 걸세. 그애는 내 친여동생이라네. 그날 자네가 불러준 조영남의 ‘제비’ 잘 들었고 해장국 맛있었네.

1995년 2월 그날의 일을 자네도 기억하겠지. 비단길. 그 추운 폐허의 고성 앞에서 함께 서 있을 때 우린 보았지. 멀리서 당나귀를 탄 노인이 다가오는 것을. 이제와 고백하건대 그때 나는 알았네. 내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그 노인은 내 숨을 거두러 왔던 거야. 낙타 주머니를 들고 말일세. 하지만 오해는 말게. 나는 이미 지병을 앓는 몸이었고 겁에 질려 방황하고 있었지. 그 때문에 낯선 사람들 사이에 섞여 비단길에 갔는지도 몰라.

노인이 검은 당나귀를 타고 왔을 때 비로소 나는 편안하게 체념할 수 있었네. 그후 오히려 긍휼한 나날들이 무려 4년이나 흘러갔지. 이렇게 오래 살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네. 마지막 4년 동안 친구는 자네 하나뿐이었네. 기억하고 가리. 또한 자네가 아니었다면 전시회 따위는 열지도 않았을 걸세. 혹시 알고 있었나?

남은 시간이 별로 없음을 느끼네. 며칠 전부터 나는 아침에 일어나면 정성껏 목욕을 하고 옷부터 다려 입네. 요즘 꿈속에 당나귀를 탄 노인이 자주 나타나는 걸 보면 이제 다된 거야.

내가 끝까지 운이 좋은 사람이라면 자네는 이 편지를 읽게 될 테지만 아마 못 읽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어느 쪽이든 상관없네. 혹시 이 편지 읽게 되면 자네와 붕어낚시나 한번 더 해보고 싶군. 가기 전에 말일세. 그만 접어 보내네.

한데 봄에도 붕어가 잡히나?

 

편지를 세 번 되풀이해서 읽고 나서 나는 베란다로 다시 슬그머니 나가보았다. 나비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베란다에서 거실 턱을 넘어오려는 터에 갑자기 읍, 하고 숨이 막혔다. 마치 누군가 등에 못을 대고 망치로 친 것 같았다. 이어 읍읍, 하고 목에서 쉭쉭 뱀 기어다니는 소리가 나더니 급기야 기도가 막혀버렸다. 허리를 구부린 채 소파 쪽으로 다가가다 나는 거실 바닥에 비스듬히 쓰러졌다. 더이상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병원에 실려가는 동안에도 목에서는 계속 쇳소리가 났고 간헐적으로 뻐꾸기 우는 소리가 새나오기도 했다.

나는 종합병원 응급실에 산소마스크를 쓰고 누워 있었다. 철제침대 옆에는 LPG 가스통과 조금도 다르게 생기지 않은 낡은 산소통이 세워져 있었고 머리 위에서 직선으로 쏘아대는 형광등 불빛 때문에 눈조차 함부로 뜰 수 없었다. 저녁을 먹으러 간 견습의사는 그로부터 한 시간 뒤에나 나타났다. 나는 산소마스크를 떼고 의사에게 이게 어찌된 거냐고 물었다. 왜, 모르고 있었냐는 투로 의사는 어택이 심한 편이라고 말했다. 어택이라면, 공격을 뜻하는 군사용어 말이오? 쉽게 좀 얘기하라고 하자, 의사는 내게 천식이 온 것 같다고 말했다. 왜, 어째서? 그야 나도 모르죠. 더이상 나는 묻지 않았다. 의사한테는 불필요한 질문일뿐더러 암만해도 속시원한 대답을 해줄 것 같지 않았다. 차라리 내가 원인을 알아내고 말지.

마음에 어떤 일이 생기면 그것이 곧 몸으로 나타나게 마련이다. 몸과 마음은 자웅동체로 결국 하나이기 때문이다. 지루하게 응급실에서 밤을 보내고 나서 다음날 오전 10시에 나는 호흡기내과로 불려가 흉부 엑스레이를 촬영한 다음 폐기능 검사, 폐기종 검사와 더불어 각종 알러지 검사를 받고 녹초가 돼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기관지 천식이라는 선고를 받고.

그로부터 일년간 나는 통원치료를 받으며 하루 세끼 한번에 일곱 알의 알약을 복용하며 수시로 응급처치용 구강흡입제를 사용해야 했다. 그래야만 숨을 얻어 쉴 수 있었다. 자다가 깨어나 응급처치를 해야만 하는 경우도 자주 발생했다. 주머니에 늘 벤토린과 쎄레타이드를 넣고 다녔음은 물론이었다. 그래도 운전을 할 때는 항상 불안에 떨어야만 했다. 먼 데 여행이라도 갈 때면 두세 군데의 병원을 돌며 약을 사 모았다. 2년째부터 나는 흡입제만으로도 버틸 수 있게 상태가 호전되었다. 병원에도 한달에 한번만 가면 됐다. 낙타 주머니를 열어보았을 때처럼 극심한 어택은 더이상 반복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나는 도둑질하듯 다시 담배를 슬슬 입에 대기 시작했다.

그후 나는 여러 명의 의사와 만났고 그들은 개성이 각기 달랐다. 한가지 그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은 담배를 끊으라는 것이었다. B라는 의사는 십자가에 못 박혀 있는 예수상을 자신의 뒤통수 위에 걸어놓고 내게 이렇게 외치곤 했다.

“당장 끊어! 왜 못 끊어! 개중엔 피워도 별 문제가 없는 사람들이 있지만 당신은 피우면 죽어! 죽고 싶어?”

말투를 보아 하니 광신도인 모양이었다. 병원에 갈 때마다 사탄이 된 기분이 들어 나는 C라는 의사한테 옮겨갔다. C는 비록 호흡기 전공은 아니었으나 환자에게 말 한마디를 하는 데도 세심한 주의와 배려를 기울이는 의사였다. 절망에 빠진 남자를 달래듯 그녀는 늘 부드럽게 미소를 짓고 말했다.

“담배 끊기 힘든 건 의사들도 마찬가지예요. 저도 비 오는 주말엔 한 개비씩 피우곤 하니까요. 그러나, 선생님의 경우는 끊으셔야 해요. 보조기구를 사용하더라도요.”

“보조기구라뇨?”

정색하고 내가 물으면 C는 얼굴을 붉힌 채 시선을 피하곤 했다. 나는 3년이나 그 병원을 단골로 드나들었다. 한번은 그녀가 아예 작정을 한 모양으로 화를 내면서까지 간곡히 얘기해서 나는 석달 정도 또 담배를 끊었다. 그렇다고 딱히 상태가 호전되는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목에 가래도 여전해서 나는 의사의 처방대로 하루 두 차례 구강흡입제를 계속 사용했다. 그리고 어느날 술자리에서 386임을 자처하는 기회주의자와 주먹다툼을 하고 나서 나는 홧김에 편의점으로 달려가 담배부터 샀다. 마음이 가난했으므로 피워야만 했다.

나는 5년을 응급처치용 흡입제로 연명하며 살았다. 그리고 해마다 3월과 9월에 채란을 만나 3월에는 북한산 대남문에 올라가고 9월에는 인사동에서 함께 술을 마시고 헤어졌다.

E라는 의사와 대면한 건 작년 가을이었다. 이사와 함께 다시 병원을 옮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는 호흡기내과 전공이었고 개업한 지 몇달 되지 않은 새파란 젊은이였다. 천식 때문에 왔다고 하자 그는 전문의답게 우선 가슴 사진부터 찍고 폐기능, 폐기종 검사를 마친 다음 진료실로 나를 불러들였다.

E가 하는 말은 지나칠 정도로 단순하고 간결했다.

“기관지가 많이 안 좋네요. 담배 끊고 약 드시고 사흘 뒤에 다시 오세요.”

“흡입제가 필요해서 왔는데요. 벤토린과 쎄레타이드 디스커스 250.”

“그건 천식에 쓰는 약이에요.”

안경 너머로 나를 살펴보며 그가 건조하게 말했다.

“아까 그렇다고 분명히 밝혔을 텐데. 검사가 잘못된 거 아니오?”

E는 나더러 돌아앉아 옷을 올려보라고 했다. 아까도 한 짓이었는데 형식적으로 배려를 하는 눈치였다. 등에 청진기를 서너번 대보더니 그가 말했다. 됐습니다, 옷 내리고 돌아앉으세요. 나는 능숙하게 회전의자를 돌려 0.2초 만에 혈색이 유난히 좋은 E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잘 들으세요. 천식, 아니에요. 전에는 어땠는지 몰라도 지금은 아닙니다. 기관지가 안 좋은 것뿐예요. 담배만 끊으면 별문제 없다는 겁니다. 이제 아셨죠?”

나는 그의 금테 안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뜻밖의 소식이었지만, 그래도 나는 혹시 모르니 약국에서 흡입제를 구입할 수 있는 처방전을 써달라고 했다. 안된다고 E는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거의 애원하다시피 했다. 무의미하게 의사와 말씨름을 하는 동안 나는 5년 전에 죽은 그에 대한 마음이 아직도 완전히 정리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나 자신조차 미처 모르고 있던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E는 끝내 처방전을 끊어주지 않았다. 진료실에서 나와 뒤를 돌아보며 나는 씨부렁거렸다. 젊은 놈이 이렇게 융통성이 없어서야 원. 내 너한테 다시는 오나 봐라.

병원을 빠져나오는데 병신처럼 와락 눈물이 나왔다. 대낮이었으므로 거리엔 사람들이 분주히 오가고 있었다. 낯모르는 그들에게 내 꼬락서니를 보이고 싶지 않아 나는 공중전화 부스로 몸을 피했다. 그리고 불현듯 채란이 생각나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휴대폰을 갖고 있었으나 나는 주머니에서 동전을 찾아 공중전화에 집어넣고 다이얼 버튼을 하나씩 꾹꾹 눌렀다.

채란은 회사에서 근무중이었고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어찌된 일인지 나는 밤에 잠자리에 들어 혼자서 간혹 읊조리던 말들을 무심결에 내뱉고 있었다. 그녀는 묵묵히 끝까지 듣고 있었다.

 

이봐, 잘 있는 건가? 별들이 무수히 깔려 있는 하늘 어딘가에 오늘도 잘 계신가? 거기도 때 되면 기러기떼 날고 눈 내리나? 우리 곧 또 만남세.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지금 얘기해. 그때 가져가리. 저번에 들러 물어보니 청진동 해장국 포장도 해준다더라. 우리 뜨거운 해장국 나눠먹으며 맑은 하늘가에 나란히 붙어앉아 그때 못한 낚시 한판 하세. 거기도 붕어 있지? 그럼, 오늘은 이만 끊으이. 아 참, 낙타 주머니는 여태 잘 가지고 있으니 염려 말게. 거 왜 있잖아, 낙타 가방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