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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박민규 朴玟奎
1968년 울산 출생. 2003년 『지구영웅전설』로 문학동네신인작가상,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으로 한겨레문학상 수상. 소설집 『카스테라』가 있음. kazuyajun@hanmail.net
장편연재2
핑 퐁
부인을, 빌려도 될까?
모아이의 집은 시(市)의 외곽에 있었다. 아아, 멀잖아. 귀찮은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치수와 그 패거리와, 분홍의 국수와 그런 것들을 떠올리며 순환버스에 몸을 실었다. 한참을 펼쳐진 푸른 들판이 비에 젖은 탁구대처럼 어둡고 푸르렀다. 버스는 드라이브를 먹은 탁구공처럼 연속해서 우회전 우회전 우회전 한 후에 우리를 내려놓았다. 여기야. 잿빛의 높은 담과 대문 앞에서 모아이가 얘기했다. 그렇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와아 하고 매미들이 울어댔다. 하늘의 저변(低邊)이 그 소리에 경직되었다.
돌이 깔린 정원을 지나 목재의 테이블과 파라솔이 있는 곳으로 모아이는 나를 안내했다. 뭐 마실래? 테이블 뒤의 처마 밑에는 자판기가 놓여 있었다. 가정집에 설치된 자판기를 본 것은 처음이어서, 그것은 마치 벌판에서 캐비닛을 봤을 때와 흡사한 느낌이었다. 스프라이트와 데미소다, 다이어트 콜라가 있어. 포카리스웨트는 없니? 품절. 그럼 스프라이트. 퉁 퉁, 두 개의 스프라이트를 뽑은 모아이가 테이블로 돌아왔다. 와아 하고 다시 매미들이 울부짖었다. 탄산수는 수백 마리 매미의 울음이 용해된 듯 강하고, 쏘는 맛이었다.
대개는 말이야, 부엌 같은 곳에서… 그러니까 냉장고에서 꺼내 먹지 않나? 그게, 난 자판기에서 꺼낸 음료가 아니면 마시지 않아. 절대? 절대. 자판기 매니아나 뭐 그런 거니? 아니, 음료수만 그래. 그럼 물은? 저기 생수도 있어, 맨 왼쪽 보이지? 진열된, 맨 왼쪽의 작은 생수통을 바라보며 나는 스프라이트를 마셨다. 바람이 지나갔다. 고요한 모아이의 집이 그래서 텅 빈 물통처럼 느껴졌다. 혼자 사니? 대답 대신 모아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은 아무도 안 계시나보네. 모아이가 또다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뭐야? 할아버지가 있어. 할아버지라, 마치 쎄인트 버나드를 기른다니까-와도 같은 희귀한 느낌이었지만 나는 내색하지 않았다. 갑자기 기후가 미지근하고 끈적해지는 느낌이었다. 늙은 개의 오줌 같아진 스프라이트를 나는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노인은 이층에 있었다. 쎄인트 버나드처럼 무거운 공기 속에서 치와와를 닮은 몰골로 노인은 누워 있었다. 어둑한 조명 때문에 의식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분간이 되지 않았다. 시체라고 생각하면 돼, 이 상태로 칠년째니까. 와아 하고 창밖의 숲이 또다시 경련을 일으켰다. 여러 개의 주삿바늘이, 연결된 호스들이, 링거병 속의 주사액이, 그 수면(水面)이, 파르르 음파의 영향으로 떨리는 느낌이었다. 할아버지, 나야. 모아이가 소리쳤다. 파르르 칠년째 시들어온 속눈썹, 혹은 누런 잔디 같은 것이 눈의 언저리에서 묘하게 꿈틀거렸다. 돈이 필요해서 말야… 좀 가져갈게. 노인의 손가락인지 무언지가 아무튼 까닥, 했다. 누런 잔디 위를 마구 밟고 지나는 느낌으로 우리는 노인의 방을 가로질렀다. 꺼뭇한 방의 모퉁이에선 중국에서 왔다는 간병인 여자가 자고 있었다.
방을 거쳐 가파른 계단을 오르자 작고 음습한 다락이 나왔다. 여기서 기다려, 하고 들어간 모아이가 나온 것은 오분 정도가 지난 후였다. 삼백, 그리고 백, 맞지? 모아이의 손에는 돈이 들려 있었다. 와아, 잠잠한 숲속으로 들어가 칠년을 매미의 유충으로 살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그 순간 들었다. 이래도 되는 걸까,라고는 생각했지만 나는 말없이 돈을 건네받았다. 의외로 좋은 기분이었다. 백만원을 손에 쥐면 백만원어치의 유전자가 업그레이드되는 게 아닐까. 인간이란, 의외로 그런 게 아닐까, 뒤척이는 중국인 여자의 숨소리를 들으며 우리는 계단을 내려왔다.
좋겠다
허물을 벗는 유충의 눈빛처럼, 투명하고 희미하게 가로등이 지펴지고 있었다. 정원의 테이블에서 데미소다의 캔을 따며 나는 투명하고 희미하게- 좋겠다-라는 생각을 했다. 야왼데도 모기가 없지? 역시 캔을 따며 모아이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황산가스 때문이야. 중국과 한국과 일본은 가스를 너무 많이 배출해. 그리고 우리는 아황산가스와 이산화탄소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다. 그사이 전화로 주문한 요리가 도착했고, 또 그릇을 비울 때까지 모아이는 디디티가 검출된 에스키모와 펭귄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럴 수도 있구나. 그렇다는 거지, 결국 미국 클리어 레이크에 모기를 없애려 뿌린 디디티가 생체농축과 먹이연쇄를 통해 극지까지 갔던 거야. 대단하지 않냐? 그리고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희미한 가등(街燈)만큼, 더 뚜렷한 은하수가 하늘의 저변을 도금(鍍金)하고 있었다. 아름답다면
아름답다고도 할 수 있는 저녁이었다.
아버지는 안 오시니?
국회의원들을 매수하느라 바빠.
매수?
지난달에도 다섯 명을 매수했다고 들었어.
순… 부자구나.
할아버지의 아버지가 돈을 가진 세 명의 노인 중 한 명이었거든.
좋겠다
결국 나는, 좋겠다는 말을 뱉고야 말았다. 희미한 음성이 풀벌레의 울음에 묻혔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지만, 디디티가 검출된 펭귄 같은 기분으로 나는 파라솔의 주변을 거북하게 서성였다. 그 정도면 뭐랄까, 치수 정도는 쉽게 매수할 수 있지 않을까? 매수할 수 있겠지. 극해(極海)를 바라보는 중년의 에스키모처럼 모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게 싫은 거야, 아버지랑 다를 바가 없으니까. 기분이 복잡했다. 고작 그런 이유로 그렇게 맞고, 수모를 당해온 모아이를 나는 수긍할 수 없었다. 다를 바라니.
못, 내가 보아온 풍경은 그런 거야. 내가 사귀는 사람이거나 나와 관계된 사람이라면 모두 아버지나 엄마가 나서서 매수를 해버리는 거야. 친구도, 친구의 부모도, 교사도, 교장도, 심지어 매점의 직원까지도 매수를 하는 거지. 결국 나는 외톨이가 되기로 했어. 더이상 매수된 사람들의 그 느낌을 나는 견디질 못한 거야.
제발 부탁인데 못, 나와 계속 탁구를 쳐줘. 이 세계는 매수된 인간들로 가득 차 있어. 노인들에게 매수된 인간들이 또 매수를 하고, 그 인간들이 다시 매수를 일삼는 거야. 심지어 이젠 노인들조차 자신이 도대체 누구까지 매수한 건지 파악을 못할 지경이야. 그래서 언제부턴가 이런 말이 노인들의 입버릇이 된 거지.
어떤 말?
〈내가 누군지 아느냐?〉 이 말 들어본 적 있니?
없어.
그래서 널 믿는 거야. 넌 자판기에서 뺀 음료수와 같은 느낌이거든.
너의 할아버지도 그런 말을 했니?
저렇게 되기 전까진 쭉, 그런데 마지막 순간엔 전혀 다른 말을 했어.
어떤 말?
〈그런데 넌 누구냐?〉라고
이게 용서가 되니? 매수를 당한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란 말야. 저기… 미안해 모아이, 난 부자가 아니라 그런지 네 말뜻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겠어. 아무튼 탁구를 계속 치는 건 하나도 안 어려워. 나도 탁구가 좋아. 그런데- 매수-에 관해서라면, 글쎄… 실은 나 아까 돈을 받을 때 말야, 이를테면- 매수-되는 느낌이었어. 미안해 모아이, 하지만 탁구를 치는 건 좋아. 또 부자 친구가 있다는 것도 좋은 일이고. 매수라니? 그건, 그런 건 매수가 아니야. 전혀 그런 게 아니었잖아. 물론 돈이라곤 해도 겨우 에스키모에게서 검출된 디디티… 아니, 그건 펭귄 정도야, 펭귄. 생각해봐, 펭귄에게 무슨 죄가 있겠냐구. 그런데 모아이, 세상엔 매수되는 게 오히려 다행인 인간들이 얼마든지 있어. 이를테면
나 같은 인간이지
펭귄도 실은 누군가 매수만 해준다면, 당장 알래스카를 떠날 마음의 준비가 돼 있는지도 몰라. 알겠니? 대부분의 인간들은- 매수-를 안해줘서 화가 나고 불만이 생기는 거란 말야. 나만 해도 만약에 네가- 매수-만 해준다면 평생 탁구를 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어. 어느정도는, 말이야. 어느정도는?
어느, 정도는.
그리고 침묵이 흘렀다. 중국인 여자가 잠을 깼는지 이층엔 어느새 은은한 조명이 번져 있었다. 나는 순간 모아이의 돈을 돌려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유는 알 수 없고, 단지 그 순간 칠년을 유충으로 살다가 막 허물을 벗고 나온 심정이 들어서였다. 부스럭, 나는 봉투를 내밀었다. 모아이는 그것을 바라보더니 못, 에스키모와 펭귄은 이런 식으로 지내지 않아-라는 전혀 뜻밖의 말을 건네왔다. 말없이, 그래서 나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렇게 은하수를 보고 있자니, 어디선가 에스키모는 펭귄에게 자신의 부인을 빌려준다는 얘기 같은 걸 들은 듯도 했다. 그래, 그렇다면.나는 다시 봉투를 집어넣었다.
너무 늦은 건 아니니? 괜찮아. 부모님은? 글쎄, 워낙 투명한 느낌이라. 순환버스가 오는 정거장까지 모아이는 나를 배웅해주었다. 극해를 건너오기라도 하는지 아무리 기다려도 버스는 오지 않았다. 정말이지 에스키모와 펭귄처럼, 그래서 우리는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이윽고 쇄빙(碎氷)의 소음과 함께 한 무리의 아황산가스가 어둠의 바다를 건너오고 있었다. 잘 가, 버스가 도착한 것은 모아이가 잘 가란 인사를 하고 나서도 한참이나 시간이 지난 후였다. 때문에 우물쭈물, 나는 잘 있으란 인사를 해야 할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어느정도, 그래서 손을 흔드는 모아이에게 나는 미안한 심정이었다. 버스는 막차였다.
우두둑 운전수는 목을 한 바퀴 꺾어 돌리더니, 그래도 졸리는지 라디오의 볼륨을 높여놓았다. 나는 열리지 않는 차창 너머로 어둠과, 숲과, 멀리 빛나는 시가지의 불빛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버스의 진행에 따른 착시였지만, 그래서 그 순간 네온과 아황산가스와 이산화탄소로 뭉쳐진 지저분한 혜성처럼 느껴졌다. 나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마도 핼리는 더 거대하고 신성한 모습이겠지. 다수인 척 뭉쳐진 저 가스덩어리와는 확연히 다른 그 무엇이겠지, 나는 상상을 거듭했다. 다음달에 핼리가 온다면,
핼리가 온다면
다음달엔 어떤 일들이 있을까요? 네, 다음달엔 우선 정부가 공시한 새 통일안의 공식 발표가 있을 예정이구요, 또 경제부처와 경제인단체 사이의 긴밀한 협조와 연결을 전담할 핫라인부서가 창설될 전망입니다. 물론 미국 증시의 부양책 발표도 우리에겐 큰 이슈가 될 것 같구요, 그간 논의 단계에 머물러 있던 아시아연합의 발족이 어쩌면 다음달 정상회담을 통해 서서히 가시화될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수고하셨습니다. 네 수고하셨습니다.
이상한 일이었다. 뉴스는 끝까지 핼리에 관해선 어떤 언급도 하지 않았다. 지금쯤이면 대피요령과 대책, 뭐 그런 거라도 마련하고 홍보해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요란한 광고가 시작되었다. 우두둑, 다시 한번 목을 젖힌 기사가 말없이 라디오의 버튼을 꺼버렸다. 이내 버스 속은 기사의 하품소리를 들을 수 있을 만큼 적막한 곳이 되어버렸다. 하루이틀의 일이 아닌 듯, 기사의 졸음운전은 꽤 틀이 잡혀 있었다.
우두둑, 그런 느낌의 코너링이 몇번이고 계속되었다. 나는 두려워져, 하지만 어필 같은 대단한 일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닌데, 아무나, 버스엔 지금 아무도 없고, 그래서 더 불안했으므로- 나는 가만히 있었다. 가만히 있다가, 애써 밤하늘을 바라보다가, 우두둑 해서, 그래서 가만히 있다가, 나는 가만히 영작(英作) 같은 걸 해보다가, 그만 가만히
저기요, 아저씨
라고 말해버렸다. 작은 목소리였는데도 기사가 왜?라며 반응을 보였다. 와이드한 곡면의 룸미러 속에서 기사의 두 눈이 나를 쳐다보았다. 가만히, 어쩔 수 없어져버려, 나는 죄인처럼 일어나 기사석의 뒷자리로 자리를 옮겼다.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지만, 마땅한 어떤 말을 큰 소리로 외치는 것보다는 그 편이 한결 나을 것 같아서였다. 그러니까
핼리가
뭐? 크게 말해봐. 혹시 핼리혜성이 온다는 뉴스는 없었나요? 핼리, 혜성이라고? 예. 기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편이 나로서도 좋았는데 우두둑, 다시 기사가 목을 한번 크게 돌렸다. 갑자기 핼리라니, 정말 놀랐네. 뭐… 그래, 어쨌거나 핼리가 오려면 아직 오륙십년은 더 있어야 할걸. 난데없이 왜 그런 걸 묻는 거냐? 친구가, 친구가 다음달에 핼리가 온다고 해서… 친구가? 예, 친구가. 그거 혹시
핼리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임, 뭐 그런 거 아니냐? 순간 디디티라도 삼킨 듯 머릿속이 하얘졌지만, 나는 가만히 네, 아, 네네,라고 대답했다. 그렇지. 기사는 그럼 그렇지,라는 표정으로 운전석의 보조창을 열더니 담배를 꺼내 피워물었다. 아직도 여전하구나. 여전히… 난리들을 치고 말이야. 난리를 치며, 은회색의 담배연기가 혜성의 긴 꼬리처럼 보조창을 빠져나갔다. 혹시 관심이라도 있는 거냐? 가만히,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연속으로 다시 몇줄기의 연기가 창문 크기의 우주를 향해 빠져나갔다.
나도 한 오년 거길 쫓아다닌 적이 있단다. 꽤 오래전 일이야. 나도 안해본 게 없는 사람인데 말야… 그때는 특히나 그랬고… 경마란 게 있는데… 아냐? 다음에… 돈이란 걸 좀 만져보면 말이다… 지금 내가… 그래서, 어제 잠을… 뭐 동료라는 인간들 중에도 말이다… 세상살이가 그런 거다, 아무튼… 직장동료 마누라를 따먹는 놈이 어딨냔 말이다… 그런데 와서 벨을 누르니까, 응? 아는 얼굴이고… 응? 그래서… 나는 요새 그런 것들이… 큰 문제라고 생각한단다. 그건 뭐… 다들 알 테고, 그래서… 나도 그 모임을 부지런히, 응? 그래서 컴퓨터도 배우고 말이야, 아저씨가… 그런데 위가 아프면 말이다, 그것 자체가… 배가 고파도 식사 자체가… 좋아지려나 해도, 또 그게… 또 내일도 운전을 해야 한다는 거다, 이래도 또… 지난번에 뭐 비번인가… 그걸 바꿔가지고, 나 참… 아무튼 얘야.
혜성 같은 건 오지 않는단다.
그냥 계속… 이렇게 사는 거란다. 알겠니?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기사가 다시 목을 우두둑, 했다. 그래도 넌 운이 좋은 편이야. 내 기억엔 칠십이년인가, 아무튼 그런 주기로 오는데 그럼 한 번의 기회는 있다는 거 아니냐. 내 경우엔 그런 운조차 없었다 이 말씀이다, 알겠니? 그걸 알고서 나도 모임을 관둔 거야. 핼리가 올 때까지 살아 있을 자신이 없어요, 아저씨는. 기사가 다시 목을 돌렸다. 이제는 더이상 소리가 나지 않았다. 왠지 가혹하다는 생각이, 나는 들었다. 밤하늘은
그냥 계속… 그렇게 살아도 좋을 만큼이나 광활하고 웅장했다. 서늘한 창에 이마를 맞대고서 나는 빨리 고등학생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빨리 중년이 되고 노인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니 빨리 핼리가 와주기를 바랐다. 다행할수록, 삶은 얼마나 가혹한 것인가. 그래서 짧게, 나는 가혹해지고 싶었다. 많은 별들을 보고 또 봐왔겠지. 수세기나 우주를 떠돈 핼리라면, 과연 지구를 객관적인 잣대로 심사할 수도 있는 거겠지. 이제 더이상 자라지 않는 손톱을 가만히, 나는 물어뜯었다. 가만히
핸드폰이 울렸다. 모아이였다. 폴더를 열자 모아이의 메씨지가 은회색의 화면 속에 유빙(流氷)처럼 떠 있었다- 지금 찾아봤는데 펭귄은 남극에만 산대- 문득 모아이가, 그래서 북극의 인간처럼 멀게만 느껴졌다. 실은 정반대의 극에서 살고 있었구나, 손톱을 물어뜯으며 나는 모아이가 그립거나, 누군지 모르겠거나 그랬다. 천천히 버스가 톨게이트를 통과하고 있었다. 졸음이 쏟아졌다. 나는 빨리 집으로 가거나, 다시 북극으로 돌아가- 아무튼 에스키모의 부인 같은 것에 머리를 묻고서 깊이 잠들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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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못. 치수의 전화를 받은 것은 다음날이었다. 얼마나 급히 폴더를 열었던지, 통화를 끝내고 보니 폴더를 지지하는 연결부위에 쩍하고 금이 가 있었다. 탁구를 칠까 했던 토요일 오후가 그래서 탕 탕, 못 박히고 말았다. 내 사정은 대충 알지? 대충은 안다고, 나는 철저하게 대답했다. 치수는 시 동쪽의 공원으로 호출장소를 일러주었고, 갖가지 자질구레한 명령들을 부탁조로 얘기했다. 적어봐. 나는 치수가 불러주는 물품의 목록을 빠짐없이 메모했다. 모아이도 같이 갈까? 모아이? 글쎄… 아니 혼자 와. 참 한 가질 빠뜨렸는데 약국에 들러 푸레파레숀 H(좌약식 치질약)란 걸 사와. 넉넉하게 세 박스 정도? 그래, 뭐 그 정도.
푸레파레숀 H라고?
푸레파레숀 H.
쇼핑몰을 돌고 나니 숨이 찼다. 세 시간이나 전에 도착했지만, 처음 와본 매장이라 헤매고, 또 긴장한 탓이 컸다. 저기… 출구가 어디죠? 점원이 가리킨 방향에는 분명 〈출구〉라는 표지판이 선명하게 붙어 있었다. 왜 못 봤을까. 마흔두명 정도의, 즉 로비를 거치면서는 육백삼십칠명 정도의 인파에 둘러싸여 나는 생각했다. 나는 꼭, 이를테면 저런 〈출구〉 같은 것을 보지 못한다. 그런 경우가 즐비하다, 허다하다, 아니 늘, 그렇다. 왜 그럴까?
일곱 개의 쇼핑백이 무겁긴 했지만 마음은 편안했다. 한 시간이나 시간이 남았으니까, 또 공원이 코앞이니까. 광장으로 연결된 아케이드의 알루미늄 벤치에서 나는 애플주스를 마셨다. 치솟는 분수의 물줄기 너머로 드문드문 공원의 일부가 엿보였다. 토요일 오후였다. 월요일이나 목요일과는 전혀 다른 표정의 숲과 나무가, 수많은 인파를 위해 근무하는 자세로 존재하고 있었다. 이제 푸레파… 그것만 사면 된다. 나는 다시 한번 메모지를 확인했다. 푸레파레숀 H, 약국, 세 박스,란 글씨가 치수를 위해 근무하는 자세로 적혀 있었다.
주스가게의 점원에게 물어 나는 쉽게 약국을 찾았다. 약사는 영지버섯 같은 피부를 가진 오십 줄의 남자였다. 그건 없다, 대신 다른 걸 주마. 안경알을 닦으며 약사가 얘기했다. 잠깐만요. 나는 숨을 들이켜고 가만히, 그리고 천천히, 이곳에 다른 약국은 없나요?라고 물어보았다. 없어. 약사가 얘기했다. 그럼 가장 가까운 데는요? 몰라. 깊은 산속에서 영지버섯에게 길을 물어도 그보다는 친절한 대답을 들을 것 같았다. 나는 다시 주스가게로 돌아갔다. 점원은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도 똑같아
택시를 타고, 아니 택시를 타기 전에 코인 로커에 쇼핑백들을 넣고, 아니, 그 전에는 동전을 바꿔야 했고, 그래서 택시 승강장에 줄을 섰는데 이미 시간이 삼십분이나 지나 있었다. 왜 우는 거냐? 놀란 표정의 기사에게 나는 약국을 가야 한다고 말했다. 병원엘 가는 게 좋지 않겠니? 아니 병원말고 약국이요. 약국과 병원이 나란히 있는 곳에 기사는 나를 내려주었다. 아저씨, 약만 사서 나올 텐데 잠시만 기다려주실래요? 고개를 한번 갸웃 하더니 기사는 그대로 차를 몰았다.
다 똑같아
다 똑같은 천구백십일명 정도의 인파 속으로 돌아온 것은 약속시간을 오분이나 넘겨서였다. 끙끙 일곱 개의 쇼핑백을 들고 달려가는데 자꾸만 다리가 후들거렸다. 핸드폰이 한 번, 울리다 끊어졌는데 치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꾸만 눈물이 났다. 전화를 걸까 하다가 그대로, 전속력으로, 달렸다. 동상(銅像)이 있는 언덕까지는 완만하지만 긴 거리의 오르막이었다. 구토가 일었다. 전속력이 되지 못하는 전속력으로, 그러나 나는 달렸다. 숨이, 그래서 차라리 숨이 끊어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수인 척, 색색의 아이스크림을 손에 든 인간들이 다 똑같이 느리게 걷고 있었다.
치수는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처음 보는 여자애 하나가 그 곁에서 역시 슬림을 물고 있었다. 야, 못! 치수가 부르지 않았으면 그곳을 지나쳤을 정도로 치수는 달라져 있었다. 머리를 바짝 깎고 모자를 깊게 눌러썼다. 미안해, 말을 꺼내려 노력했는데 도무지 말이 나오지 않았다.너… 뛰어온 거냐? 도리어 치수가 말을 꺼냈다. 나는 대답도 하지 않았고, 고개를 끄덕이지도 않았다. 십오분이나 늦었다. 허리를 숙인 채 나는 날아올 발이나 주먹을 대비하고 있었다. 온다 온다 온다 독백을 하는데 다가온 것은 전혀 뜻밖의 경쾌한 목소리였다. 이 더위에 뛰는 놈이 어딨냐, 늦을 수도 있지. 자 땀이나 닦아. 치수가 내미는 수건을, 그러나 나는 받았다. 그리고 열심히 땀을 닦았지만, 실은 눈물을 닦은 것이었다. 뜨겁고 감사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서러운 눈물이 땀인 척 솟구쳤다.
얘는 달이랜다, 달. 오빠 친구니까 인사해. 달이란 아이가 고개를 까닥했다. 달은 핫팬츠를 입었는데 다리가 심하게 휜 체형이었다. 나도 고개를 까닥하자 치수가 달의 엉덩이를 세차게 꼬집었다. 십분만 놀다 와라, 친구랑 할 얘기가 있으니. 달은 아프잖아 씨, 하고 화를 내더니 하나도 안 귀여운 메롱을 하고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치수가 담배를 다 피울 때까지 나는 말없이 치수의 눈치를 살폈다. 달의 뒷면처럼 어둡고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학교엔 별일 없냐? 으, 응. 그리고 나는 쇼핑백을 열어 물건들을 확인시켰다. 됐어, 맞겠지 뭐. 그나저나 수고했다. 고맙다고는 하지 않아도 거의 그 수준의 표현이었다. 나는 귀를 의심했지만, 과연 치수는 어딘가 모르게 달라진 느낌이었다. 달에 착륙한 우주인처럼 한순간 진공(眞空)의, 중력이 다른 미지의 세계에 발을 딛고 선 기분이었다.
정말 내가 죽인 거 아니다.
무중력 속에서 치수가 중얼거렸다. 마리 그년이 자기가 뛰어내린 거야, 미친년… 월면의 어딘가에서 나도 몸이 붕 뜨는 기분이었다. 뭔가 묻고 싶기도 했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것도 사왔네. 푸레파… 를 집어들며 치수가 웃었다. 꽤 줬을 텐데… 여기 상어간유(肝油)란 게 들어 있댄다, 상어간유가… 아, 하고 나도 놀랐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절로, 나도 놀란 건 아니지만, 그랬다. 못… 나 지금 이래저래 곤란한 입장이다. 학교에 짭새들은 자주 오냐? 그런 것 같다고 나는 대답했다. 이런 말 하면 정말 이상하겠지만… 지금 내가 제일 믿을 수 있는 놈이 너야… 왜, 웃기냐? 아, 아니. 웃어도 돼, 내가 생각해도 정말 웃기니까. 아무튼 나… 어디로 멀리 갈 생각이다. 어디로? 아차, 실수라는 생각이 들기도 전에 그건 알 것 없고…라며 치수가 말을 이었다. 예전의 치수라면 벌써 명치에 어퍼가 꽂히고 나는 바닥을 뒹굴었겠지. 확실히, 예전의 치수라면 말이다. 혹시 내가 이쪽 사정을 살필 일이 생기면 너한테 좀 부탁해도 되겠지? 그러니까
앞으로… 말이다.
물론,이라고밖에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아주 잠깐, 공원의 숲 전역이 와아 하고 반짝이는 느낌이었다. 뒤척이는 나뭇잎들의 카드쎅션이 세계의 채도(彩度)를 조절해 나의 앞길을 축복해주었다. 고개를 들면- 쌍발의 무스탕이, 헬로키티가, 빈티지 에반겔리온 초호기가, 에펠탑이, 호나우두가, 야성의 엘자가, 감은사지 삼층석탑이, 엘리자베스 2세가 하늘을 날고 있을 것 같았다. 모두들
고마워
눈물이 나왔는데, 어느정도 그냥 울어버렸다. 야야, 왜 그래? 치수가 면박을 주었지만 그 야야, 왜 그래를 가지고도 세 곡 이상의 발라드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야, 못… 그러니까 따를 당하는 거야 이 바보야, 널 처음 봤을 때 어떤 느낌이었는지 아냐? 아, 아니. 말하자면 저건… 무슨 이미테이션이 아닌가, 그런 느낌이었어. 이미테이션? 그러니까 진짜 너는 어딘가 다른 곳에 살고, 눈앞의 이건 짝퉁이다… 뭐 그런 느낌이지. 예를 들어 어쩌다 동전이 여러 개 생겨 심심풀이로 뒤집어보다가… 그런 거 있잖아, 믿기지 않을 만큼 오랜 1977 같은 숫자가 찍힌 거… 그런가 하면 정말 눈부신 바로 올해의 연도가 찍힌 것도 있다는 얘기야, 그런데 너는 봐도 아무 느낌이 없는 연도, 말하자면… 모르겠다, 뭐 그렇다는 얘기야. 아무튼 내 얘기는 앞으로는 좀 존재감있게 살라는 얘기다, 알겠냐? 예, 아, 으응. 예는 뭐고 응은 또 뭐냐, 그건 그렇고… 어쨌거나 못! 그리고 치수는 새 담배를 꺼내물었다. 순간 달의 뒷면이라 여겨도 좋을 만큼 주위가 고요해졌다.
그동안 미안했다.
가장 긴 영어단어가 무엇이었더라? 나는 생각했다. 기네스북에도 오른 단어가 있는데, 또 산소통을 지지 않고 에베레스트에 오른 최초의 인물이 누구였더라, 게다가 인류가 도달한 심해의 수심은 과연 몇미터인가, 라이트 형제는 몇번의 실패 끝에 시험비행에 성공했으며, 가장 지름이 큰 꽃의 이름은 무엇인가, 역사상 열대우림지역의 최대 강수량은 얼마였으며, 사하라는 과연 언제 어느 때 바다의 밑바닥이었나,를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생각과는 아무 상관 없이 나는 펑펑 눈물을 쏟았다.
고마워
그래서 이상하게 고맙다는 말이 나왔다. 가장 긴 영어단어보다도 복잡한 구조의 〈고마워〉였다. 야, 자꾸 왜 그래. 치수가 등을 토닥여줬다. 한참을, 뒤척이는 숲의 나뭇잎처럼 치수의 손이 그렇게 어깨와 등을 어루만져주었다. 왜 그랬을까, 왜 나는 차마 부끄럽기조차 했던 걸까. 참 이거, 나는 돈을 꺼내 치수에게 내밀었다. 이게 뭐냐? 가져…오라고 한 거. 뭐지? 하는 표정으로 치수가 봉투 속을 살펴보았다. 가져오라고 시켰다던데? 치수는 잠깐 생각에 잠기더니 그래, 뭐 고맙게 쓸게,라며 봉투를 집어넣었다. 아 증말 짜증이야, 그때 달이 돌아왔다. 달은 만사가 귀찮은 얼굴로 주저앉더니 슬림을 꺼내물었다. 왜 그래? 치수는 달에게 귓속말 같은 걸 한참 속삭이더니 그래? 뭐 뭐 어쩌구 속삭이듯 대화를 나누었다. 나는 그만 돌아가고도 싶었지만, 글쎄 어떨지, 어느정도 가만히- 땅에 번지는 녹음(綠陰)의 물결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서 있다가, 여전히 속삭이는 치수의 목소리에 어느정도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저기
그만 가볼게
치수는 잠깐 멍한 표정으로 나를 보더니, 이내 쾌활하게 대답했다. 그래 뭐, 아무튼 수고 많았다. 그래 잘 가. 등을 돌리자 길고 긴 내리막길이, 토요일의 숲과 나무가, 오만구천이백오명 정도의 인파가, 저 멀리 공원의 정문이 하나의 장면으로 눈에 들어왔다. 한 발 한 발, 나는 발을 내딛었다. 못처럼 박혀 있던 발이, 그 못이, 발을 뽑을 때마다 조금씩 짧아지는 기분이었다. 숨이 찼다. 그리고 어느 순간 몸이 붕 뜬다고 느끼는 순간이었다.
야, 못!
치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몸이 절로, 나사처럼 한바퀴를 돌아 치수의 앞으로 굴러갔다. 갑자기 숨이 찼다. 치수는 장난기어린 표정으로 또 달에게 뭐라고 속삭였다. 꺄르르 달이 허리를 접으며 재밌겠다 속삭였다. 못, 얘가 지금 몹시 우울하댄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말이야… 좀 재밌는 걸 보여줘봐, 응? 말과 동시에 치수가 푸레파레숀 H의 박스 하나를 뜯기 시작했다. 가지런한, 은박지에 싸인 원통형의 약들이 두 눈 가득 들어왔다. 어, 떤, 것, 을,고, 를, 까,요, 장난을 치더니 그중 하나를 집어들었다.
자, 먹어.
치수가 약을 내밀었다. 먹으라니까… 몸에 좋은 캔디 같은 거야. 약을 받아든 손에 약의 분량에 달하는 땀이 순식간에 고이는 느낌이었다. 풋 풋, 달의 입에서 수증기 같은 웃음이 새나오기 시작했다. 어, 안 먹네? 치수의 얼굴이 미묘하게 싸늘해졌다. 손을 떨며 나는 일단 약의 은박을 벗겨내었다. 먹을 수 있는 느낌이면 먹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어서였다. 그것은 뭔가 끈적하고, 기름진 느낌의 덩어리였다. 자 먹는다, 실시. 어떻게 된 건지 알 수 없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꿀꺽 약을 삼키고야 말았다. 꺄악, 달이 비명을 질렀다. 이건 무효! 치수가 소리쳤다. 씹어서 먹어야지 이 친구야. 치수가 또다시 하나를 내밀었다. 이를테면 망설이며 가장 긴 영어단어는 무엇이었나, 그런 생각을 하는데 치수의 왼발이 미묘하게 꿈틀했다. 발차기보다 빠르게, 그래서 나는 약을 씹기 시작했다. 끅끅, 달은 아예 쓰러져 경련 같은 걸 일으키기 시작했다. 어느정도 나는 아무렇지 않았지만, 달의 반응을 보았을 때 뭔가 엄청난 공연을 했다는 느낌이었다. 재밌었냐? 치수의 물음에도 쿳쿳쿳 달은 대답조차 하지 못했다. 됐어, 이제 가도 돼. 치수가 웃으며 얘기했다.
Pneumonoultramicroscopicsilicovolcanoconiosis란 단어가 있다. 보면 알겠지만 세상에서 가장 긴 영어단어다. 이것을 외울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그런데 나는… 외운다. 비결은 무엇일까. 바보들은 저걸 생으로 외우려 발버둥치겠지만 실은 저 정도의 긴 단어는 대개 여러 단어의 조합인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Pneumo〉를 찾아보면 폐, 허파란 걸 알 수 있고, 〈ultra〉는 초월, 〈microscopic〉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주 작다는, 또 〈silico〉는 규소, 〈volcano〉는 화산이라는 뜻이고, 그래서 저 단어의 뜻은
그래서, 어떻다는 거냐고?
영어를 잘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물론 내가, 영어라고 잘할 리 없다. 말하자면 내가 외우는 무척 긴 단어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건 어떨까? 에베레스트를 최초로 무산소 등정한 인물은 라인홀트 메스너다. 이런 전문분야의 지식을 가진 중학생은 극히 드물다. 그는 이 등반을 통해 철인(鐵人)이라는 명성을 얻었고, 그후 지구 위의 팔천 미터가 넘는 봉우리 열네 개를 모두 정복하는 신화를 남겼다. 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업적이란 말인가.
때려쳐
그래도 심해탐사와 라이트 형제에 몰입하며 나는 겨우 언덕을 내려왔다, 올 수 있었다. 날씨가 더웠으므로, 무엇보다 그런 생각을 하는 건- 즉 사색(思索)은 좋은 거니까, 그래서 어느정도 구구 걸어다니는 비둘기떼를 쫓기도 하다가, 즉 공원의 비둘기들은 운동부족에 걸리기 쉬우니까- 그래서 도와주다가, 그 일에 몰입하다가, 더는 구토를 참을 수 없었다. 아직 보고 있는 건 아닐까, 아케이드의 화장실에 뛰어들어 나는 쓰러지듯 변기의 뚜껑을 열었다. 웩, 구토가 시작되었다. 그것은 물과 기름이 뒤섞인 매우 뒤숭숭한 것이었고, 길고 끈적한 것이었다. 물을 내렸다, 다시 구토가 나왔다. 또 물을 내렸다, 다시 구토가 시작되었다. 나는 손톱을 물어뜯었다. 라인홀트 메스너, 라인홀트 메스너, 라인, 홀트 메스너…
어, 너구나. 세수를 하는데 누군가 말을 걸었다. 돌아보니 주스가게의 점원이었다. 약국은 찾았니? 소변을 보면서도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예. 목이 따끔거려 나는 그렇게만 대꾸했다. 그래, 어디 있던?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상한 침묵이 화장실 안을 감돌았다. 물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약은 먹었니? 점원이 다시 물었다. 목이 따가웠지만 정말이지 약을 먹었으므로 나는 예,라고 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개를 끄덕인 점원이 휘파람 비슷한 걸 건성으로 불기 시작했다. 또다시 구토가 치밀었다.
이상하게도
그리고 나는 벌판을 찾았다. 버스 속에선 계속 잠이 왔고, 라켓도 공도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그 순간 무작정 벌판이 보고 싶었다. 북극처럼 느껴지는 먼 길이었다. 나는 이동했고, 나는 내렸으며, 나는 걸었고, 나는 보았다. 마치 이 세계에 변함없이 〈탁구〉가 존재하듯 벌판은 그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아무도 없었고, 아무것도 묻지 않았고,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어떤 위안이, 그래서 느껴졌다. 졸음이 밀려왔다. 소파에 몸을 파묻고 나는 몸을 웅크렸다. 빌려도 되겠습니까? 에스키모의 부인처럼 소파는 따뜻하고 풍만했다. 이대로 소파의 자궁 속으로 들어가 나는 열달을 살고 싶었다. 격렬하게, 그 순간 잠의 정충(精蟲)이 나의 세포막을 찢으며 파고들었다.
꿈을 꿨다. 은빛의 땅이 주위에 펼쳐져 있었다. 눈이 부셨다. 일어나 주위를 살폈지만 그곳이 어딘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북극이 아닐까도 생각했지만 전혀 춥지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곳은 따뜻했다. 그리고 하늘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하늘이라 불러도 될지는 얼른 판단이 서지 않았다. 우선 하늘이라 하기엔 그 높이가 너무 낮았다. 서 있기만 해도 대기권 같은 것이 이마에 걸렸다. 이마 위의 두개부(頭蓋部)가 그래서 서늘했다. 설마 하고 뒤꿈치를 들어보니 그야말로 우주였다. 묘하고 불안했다. 하지만 태양이 보였으므로 나는 그나마 안심할 수 있었다. 멀진 않구나, 나는 잠깐 우주를 감상한 후 하늘 아래로 내려왔다. 엉거주춤 몸을 숙여, 그래서 별의 표면을 걷는 일이 몹시도 불편하게 느껴졌다. 옅은 대기 때문에 우선 지표가 뜨거웠고, 산소가 부족한지 호흡이 가빴다. 어느정도 동공이 안정되자 별의 지면이 실은 흰색이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별은, 놀랍게도 비어 있었다. 통통, 노크하듯 지면을 두드리자 가볍고도 경쾌한 울림이 대기 전체를 뒤흔들었다. 꼭 쎌룰로이드 같네, 하고 고개를 드는 순간 먼발치에 찍힌 〈信和社〉란 마크가 두 눈 가득 들어왔다. 뭐야, 이건. 팔짱을 끼고 나는 생각에 잠겼다. 그것은 탁구공이었다.
눈을 떴다. 세찬 손짓은 아니었지만, 누군가 몸을 흔드는 게 분명하게 느껴졌다. 눈을 뜨니 우선 어마어마한 높이의 하늘이 저물어가는 중이었고, 그리고 또, 세끄라탱의 얼굴이 보였다. 아저씨는? 자신의 입술에 쉿, 손가락을 갖다댄 후 세끄라탱이 얘기했다. 미안하구나, 너무 곤하게 자고 있어 그냥 갈까 했는데 해가 저물어 깨운 거란다. 흥건히 뺨에 묻은- 물과 기름이 뒤섞인 침을 닦으며 나는 자세를 고쳐앉았다. 부끄러웠다. 빌려준 부인의 배 위에 정액을 가득 쏟고서, 문득 에스키모 친구와 눈을 마주친 느낌이었다.
죄송해요. 뭐가 말이냐? 그러니까, 나만의 소파가 아니잖아요. 저 침도 너만의 것은 아니란다. 그나저나 언제부터 있었던 거냐? 나는 세끄라탱에게 치수를 제외한 토요일의 공원과 쇼핑과 애플주스에 대한 얘기들을 들려주었다. 혼자 그러고 놀았단 말이냐? 예. 보기완 달리 너 정말 활동적인 아이로구나. 그날 펜홀더를 고른 건 아주 잘한 일이야, 확실히 펜홀더 타입이란 게 있는 거니까. 그럴 의도는 아니었지만 나는 가만히 있었다. 치수만 빼고, 어느정도 사실을 말한 건 말한 거니까. 아저씨는 웬일이세요? 응, 상담을 하러 왔다가 마침 근처고 해서 오랜만에 벌판을 찾은 거란다. 상담이라구요? 그래, 학부모 상담.
올해 쌍둥이를 이 학교에 보냈거든. 그런데 학교에서 전화가 왔지 뭐냐. 아이들 때문에 상담을 좀 하고 싶다고, 그래서 교장을 만났는데 난데없는 소리를 하는 거야. 글쎄 우리 애들이 조류의 뇌를 가지거나 파충류의 뇌를 가졌다지 뭐냐. 그래서 그 문제로 교장과 심한 설전을 벌이고 오는 길이다. 그건 좀… 심란하셨겠어요. 심란하진… 않았단다. 왜냐면 그건 아버지인 내가 새 같기도 하고 쥐 같기도 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아이들도 자연스럽게… 뭐, 나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는데- 그래서 내 말은 파충류는 아니지 않느냐, 그건 뭔가 검사에 문제가 있다, 교장에게 어필을 한 거란다. 교장은 뭐래요? 교장의 말은 쥐나 파충류나 뭐가 다르냐는 거지, 어차피 인간이 아니라면 말이다.
쥐하고 파충류가… 얼마나 다른데!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단다, 얘야. 그건 펜홀더를 쓰는 사람의 자세가 아니야. 뭔가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지만, 그러나 펜홀더의 유저라는 그 말만은 언제 들어도 기분이 좋을 것 같았다. 그러니까 내가, 펜홀더의 유저이다… 나는 가만히 라켓을 쥐는 시늉을 해보았다. 가상의 라켓이 가상의 공간 속에 실재하는 기분이었다. 견고하면서도 따뜻한 손잡이의 그 느낌을 나는 눈을 감고서 그려보았다. 좋았다, 무엇과도 비할 수 없는 느낌이 순간 뜨겁게 몸속에서 용해되었다. 자세가 많이 좋아졌구나. 어때, 한 번 쳐볼까? 세끄라탱이 말했다. 라켓이 없는걸요. 내가 말했다. 바로 지금처럼 하면 된단다, 라켓은 나도 없어. 그리고 손을 들어 세끄라탱이 오케이 싸인을 만들어 보였다. 느껴봐, 그리고 그려보란 말이야. 밤하늘을 배경으로 엄지와 검지가 만든 텅 빈 구멍 속에 그 순간 반투명의 탁구공이 희미하게 엿보였다. 보이니? 보여요. 우리는 탁구를 치기 시작했다.
편하게 오늘은 받는 연습만 한다고 생각하거라. 그게 좋겠지? 고개는 끄덕했지만 대답을 할 수는 없었다. 그 순간 이미 써브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주위는 캄캄해져 이미 세끄라탱의 얼굴도 어둑한 씰루엣으로밖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공이, 어둠을 넘어오는 그 공의 느낌을 나는 무엇보다 또렷이 볼 수 있었다. 푸레파레숀엔 환각성분이 있는 걸까? 스스로도 납득하기가 곤란했지만- 결국 시간이 지나면서, 그래서 오늘은 받는 연습만 한다고 스스로가 생각하게 되었다.
탁구는 무척 오래된 것이란다. 너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대개는 중세 이딸리아의 루씩 삘라리스라든지, 15세기 프랑스의 라빠움을 탁구의 기원으로 여기지. 하지만 인도에서 돌아온 영국인들은 현대의 탁구, 즉 테이블테니스를 창안한 건 바로 자신들이라 주장했단다. 질세라 남아공의 영국인들도 탁구야말로 자신들이 개발한 경기가 아닐 수 없다 역설했지. 하지만 탁구는 아직 시작조차 안된 것일 수도 있단다. 또 어쩌면- 바로 여기, 지금 이 자리에서 시작된 것일 수도 있고.
여기서요?
공이 빠졌구나, 주워와라. 공은 캐비닛에서 일 미터가량 떨어진 작은 풀숲에 떨어져 있었다, 그런, 느낌이었다. 그 느낌을 손으로 집어 나는 세끄라탱에게 던져주었다. 다시 랠리가 시작되었다. 쎌룰로이드로 지금의 탁구공을 만든 건 영국의 제임스 깁이었단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대단한 일이었지. 깁이 그 공을 만들지 않았으면 〈핑퐁〉이란 이름도 존재하지 않았을 거다. 실제로 고대엔 고시마, 프림프림, 와프와프와 같은 명칭으로 탁구는 불리었단다. 그 무렵엔 지금보다 수천배는 더 무거운 공을 사용했지. 나는 잉카에서 무게가 4킬로그램이나 되는 수정구(水晶球)로 경기를 한 적도 있었단다. 그리스에선 대리석을 깎은 32면체의 울퉁불퉁한 공을 쓴 적도 있었지. 드라이브를 받다가 잠시라도 집중력이 떨어지면 어떻게 되는지 아니? 아뇨. 이렇게 된단다. 작지만 깊게, 동작을 멈추고 내민 세끄라탱의 이마에는 달빛으로도 볼 수 있는 삼각형의 흉터가 패어 있었다. 공이 또 빠졌구나.
예전의 탁구는 확실히 지금보다는 위험하고 잔혹한 경기였단다. 나는 18세기의 유럽에서만 도합 512차례의 결투경기를 치렀단다. 중국의 시황제에게 탁구를 가르칠 땐 그만 황제의 시신과 함께 무덤에 합장(合葬)되기도 했지. 지금 기억력이 나빠진 건 그 미로 속에서 무려 삼년을 헤맸기 때문일 거야. 분신처럼 지녔던 셰이크핸드가 없었다면 나는 굴을 팔 수도, 그곳을 탈출할 수도 없었겠지. 라켓이 자신의 생명과 같다고 말한 건 그런 경험을 통해 얻은 나의 교훈이란다. 지난번 샵에서 내가 혹시 〈빌리〉란 라켓을 보여줬니?
아뇨.
공이 또 빠졌구나. 공은 소파의 쿠션 사이에 박혀 있었다. 공을 주워 나는 다시 랠리를 이어갔다. 그건 펜홀더를 한창 쓰던 서부에서의 일이야. 자신을 빌리 더 키드라 사칭하는 어떤 똘마니와 탁구를 쳤지. 결투나 그런 것도 아니었는데 시합 도중 놈이 총을 뽑았어. 아마 여섯 발의 리볼버를 견뎌낸 라켓은 지구상에서 〈빌리〉가 유일할 거야. 나는 무척 화가 났지만, 결국 화를 누그러뜨렸지. 놈이 곧 사과를 해왔기 때문이야. 놈이 그러더군. 사실 자기는 빌리도 뭣도 아니라고. 결국 놈에게 나는 합의금 형식으로 25달러와 말 한필을 받아냈지. 말하자면 그런 일들은 숱하게 있었어. 2차대전 땐 독일과 연합군 양측이 서로의 합의하에 함포(艦砲)로 탁구를 친 적도 있었고, 월남전에선 크레모어로 심판과 상대를 속이는 게 크게 유행하기도 했었지. 히틀러는 고대 인도의 탁구대에 심취해 그만 자신의 영혼을 포기하기도 했고, 소유즈호(號)에 오른 쇼닌과 쿠바소프는 지구의 주위를 돌며 무중력탁구에 일흔아홉 번이나 자신들의 목숨을 걸었지. 돌이켜보면 탁구는 목숨을 걸거나 뺏는 가혹한 장치였어. 스딸린과 루즈벨트의 시합은 너도 잘 알 테고… 하지만 정말 잔혹한 건 고대의 탁구였지. 그야말로 전쟁의 또다른 명칭이자 어원(語源)이었으니까.
맛이 갔군
열심히 공을 받으면서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뮤가 어떻고 아틀란티스가 어떻고 적응과 생존이 어떻고, 세끄라탱은 한참이나 맛이 간 소리를 하더니 이윽고 숨을 몰아쉬었다. 오늘은/이 정도로/할까? 그리고 휙, 세끄라탱이 공을 던졌다. 기념이다, 이건 네가 가져. 얼떨결에 공을 받은 나는 곧바로 주머니에 그것을 찔러넣었다. 무심히, 달은 밝고 바람은 선선했다. 그래서 무심한데, 기분은 어떠냐? 세끄라탱이 물었다. 좋아요, 내가 대답했다. 무심코 대답은 했지만, 맛이 간 인간들이
너무 많다
너무 많은 것이다. 왜 이렇게 많은 걸까, 어쩌자고 이렇게 갈수록 늘어나는 걸까. 나는 불쾌했다. 세끄라탱도, 따지고 보면 모아이도, 뭐 치수 같은 변태는 말할 것도 없고, 실은 나 역시도… 바보다, 맛이 간 인간들이다. 알 수 없다, 이렇게 교육을 많이 받는데도 자꾸만 늘어난다. 가만히, 어느정도 멀쩡해 보이다가- 이상한 망상을 하고, 불을 지르고, 건물에서 뛰어내리고, 누군가를 찌르고, 한다. 알 수 없다. 나는 지치고 문득 슬펐다. 우물의 바닥 같은- 즉 위(胃)의 어딘가에 고여 있던 심한 기름냄새가 다시금 꿈틀하며 역류해왔다. 자신의 몸에 생긴 우물의 바닥이 느껴질 만큼이나, 나는 목이 말랐다. 얼굴이 좋지 않구나. 세끄라탱이 말했다. 좋을 리가 없잖아요. 내가 말했다. 왜?
목이… 마르니까요
각목더미 뒤에 세워둔 자신의 차에서 세끄라탱이 생수를 가지고 돌아왔다. 마셔라. 미지근한 물이었지만 갈증을 달래기엔 충분한 양이었다. 건조한 달이 습한 구름의 뒤를 쫓아 열심히 이동하고 있었다. 맛이 갔어요. 전부 다 맛이 갔다구요. 물을 마시자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편안해지고, 말이 하고 싶었다. 말이, 이상하게도 말이, 그래서 나는 아황산가스와, 배출과, 일산화탄소와 그런 것들을, 또 토요일의 공원과 쇼핑과 애플주스를 걷어낸 치수의 이야기를, 매수를, 디디티를, 다수결을, 마리를, 노인들을, 배제를, 건성을, 슬림을 피고, 다리가 휘고, 분홍의 국수나 이런 것들을, 푸레파레숀 H를 말하고 싶었으나
말할 수 없었다. 무척 말하고 싶었던 그것들을, 그러나 말로 만들 수가 없었다. 왜 그러니? 세끄라탱이 속삭였다. 나는 무척, 그러나 말 대신에 와락 눈물을 쏟아버렸다. 물냄새를 맡은 달빛이 와락 그 눈물을 끌어안아 더 부시고 반짝이는 것으로 만들어놓았다. 괜찮아, 세끄라탱이 팔을 둘러주었다. 털이 많은, 가늘고 긴 팔이었다. 이 팔의 주인도 어차피 맛이 갔다는 사실이, 그 순간 벌판의 고요 속에서 적잖은 위로가 되었다.
적응이 안돼요
다들 결국엔 자기 할 말만 하는 거잖아요
얘길 들어보면 누구도 틀렸다고는 할 수 없어요
왜 그럴까요, 왜 아무도 틀리지 않았는데 틀린 곳으로 가는 걸까요
내가 이렇게 사는 건 누구의 책임일까요
무엇보다
그걸 용서할 수 없어요
60억이나 되는 인간들이
자기가 왜 사는지 아무도 모르는 채
살아가는 거잖아요
그걸 용서할 수가 없어요
가만히 있지 않고, 나는 울었다. 전력을 다한 말이어서 곧 허기와 외로움이 쉬이 밀려들었다. 잘… 들었다. 이윽고 세끄라탱이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 이제 또 한번 내가 변신할 때가 온 것 같구나. 그리고 세끄라탱은 어느정도 점프를 하더니 팔로 크게 원호를 그리며 특이한 포즈를 취했다. 변신(變身)! 그리고 돌아와 다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얘야, 세계는 언제나 듀스포인트란다. 이 세계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나는 줄곧 그것을 지켜봤단다. 그리고 이루 셀 수 없이 많은 이들에게 탁구를 가르쳤어. 어느 쪽이든 이 지루한 시합의 결과를 이끌기 위해서였지. 하지만 아직도 결판은 나지 않았단다. 이 세계는
그래서 좋다고도, 나쁘다고도 할 수 없는 곳이야. 누군가 사십만의 유태인을 학살하면 또 누군가가 멸종위기에 처한 혹등고래를 보살피는 거야. 누군가는 페놀이 함유된 폐수를 방류하는데, 또 누군가는 일정 헥타르 이상의 자연림을 보존하는 거지. 이를테면 11:10의 듀스포인트에서 11:11, 그리고 11:12가 되나보다 하는 순간 다시 12:12로 균형을 이뤄버리는 거야. 그건 그야말로 지루한 관전이었어. 지금 이 세계의 포인트는 어떤 상탠지 아니? 1738345792629921:1738345792629920, 어김없는 듀스포인트야.
탁구는 말이다.
원래 원시우주(原始宇宙)의 생성원리란다. 이제 탁구가 남아 있는 곳은 여기밖에 없어. 다른 곳은 모두 〈결과〉에 따른 또다른 〈결과〉를 향해 진행된 지 오래지만, 아직 이곳은… 그래서 인류는 여전히 탁구를 치는 거란다. 결과를 얻지 못한 건 오로지 인류뿐이니까. 나는 너무 오래 탁구를 쳐오거나 관전해왔어. 말할 수 없이 길고 긴 세월이었지, 이젠 나도 지쳤단다. 내가 누군지, 어디서 왔는지조차도 이젠 거의 잊어버렸어. 기억이 안 나. 아아, 이제 짜증이 나. 게다가 탁구는 점점 안전한 것으로 변해가고 있어. 세계는 여전히 듀스인데, 탁구를 치는 인간은 점점 줄어만 가고… 말하자면, 다들 어떻게
용서할 수 있었을까?
나는 이해할 수 없어. 그걸 어떻게 용서했을까, 용서를… 게다가 스포츠로서의 탁구라니, 그건 말하자면 듀스인 상태로 끝끝내 남겠다는 건지… 또 우주가 그걸 받아들여줄는지, 나도 이젠 알 수 없어. 이제는 정말… 긴 한숨을 쉬고 난 세끄라탱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응시했다. 이상하게 그 순간- 〈그〉가 세끄라탱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어디가 다르다기보다는, 즉 미묘하게 세끄라탱과 다른 얼굴이었다. 이를테면 새 같기도 하고 쥐 같기도 했던 그의 얼굴에서, 새의 어떤 성분이 빠져나간 느낌이었다. 그런데… 사실은 누구신가요? 내가 물었다. 나? 물끄러미, 새의 성분이 쏙 빠진 얼굴로 세끄라탱이 대답했다. 나는
밤말을 듣는 쥐야.
이곳의 중간자, 즉 탁구계(卓球界)의 간섭자지.
쎌러브레이션을 부를 때의 쿨 앤 더 갱처럼
곧 방학이 시작되었다. 아침 일찍 굿모닝으로 시작하는 영어학원의 수업을 듣고, 집으로 돌아와 밥을 먹는다. 학원은 오십년 이상 오래된 집들이 즐비한 주택가의 초입에 위치해 있다. 학원을 다니는 일이 그래서 나는 좋다. 대개 주민들은 담쟁이류의 식물을 키웠고, 그런 초록의 넝쿨들이 그래서 담과 벽을 잇거나 뒤덮은 곳이 많았다. 오늘 아침엔 표주박을 보았다. 철제의, 수탉이 돌아가는 형태의 풍향계가 설치된 녹색지붕의 집이었다.박(珀)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가슴과 둔부가 극대화된- 연두(軟豆)의 비너스 같은 것이 묘한 느낌으로 매달려 있었다. 표주박을 발견했어. 사진을 찍고 모아이에게 사진과 문자를 보내는데, 담 너머로 어떤 노파가 고개를 내밀었다. 노파는 아무 말 없이 나를 쳐다보았고 전적으로 무표정, 했다. 굿모닝이라고 나는 말해주었다.
포도와 나팔꽃을 본 적도 있었다. 아무튼 기분좋게 넝쿨들을 감상하며, 나는 돌아온다. 초록의 넝쿨에겐 힘이 있다. 어디든 올라서고, 번창하려는 기운과 의지가 느껴진다. 인생을 그렇게 살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자자, 이걸 풀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다시 오전엔 5지구의 학원가에서 수학강의를 듣는다. 이곳을 다니는 일은 그저 그렇다. 그저 그런 인간들이, 그저 그런 목표를 가지고 열심히 필기를 하고 암기를 한다, 하면서도, 중요한 건 창의력이라고 언제나 떠든다, 부르짖는다. 그럼, 이건 또 어떨까요? 하고
(1+x)/(6+x)〓0.2
라고 했다. 그래서 그저, 그런 것이다. 근처에서 밥을 먹고 나면 오후다. 오후가, 비로소 시작된다. 나는 버스를 타고 〈랠리〉가 있는 아크로폴리스로 간다, 그곳에서 내린다. 걷는 거리를 따지면 한 정거장을 더 가는 게 이득이지만, 그러나 이곳에 내려 편의점을 들른다. 예의 그, 편의점이다. 이제 사장과는 인사 정도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안녕,이거나 모아이군은? 정도가 고작이지만, 간혹 계산을 하며 그날의 날씨 같은 걸 화제로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대화 자체는 그저 그렇다. 하지만 속으로- 이 사람이, 혹은 이 사람의 부인이…라고 상상하는 것에 묘한 쾌감이 있는 것이다. 어떤 이유가 있겠지만
한번은 사장의 부인이 가게를 보고 있었다.이 사람이,라는 생각이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소박한 스타일의 중년이었다. 두꺼운 안경과 축 처진 배, 계산을 하면서도 어떤 이유가 있겠지- 혼자 상상을 하다가 그만 발기해버렸다. 이유도 없이 강렬하게, 그랬다. 어떤 이유가 있겠지만, 근처 상가의 화장실에 들어가 나는 자위를 했다. 이유도 없이 부인과 사장의 얼굴이 번갈아 떠올랐다. 듀스, 듀스포인트야. 자위를 하며 나는 중얼거렸다. 그리하여
즐거운 오후가 대개 그런 식으로 시작된다. 만나서 함께 가거나 혹은 따로 가거나, 여하튼 〈랠리〉에서 우리는 모인다. 모아이와 나는 어느정도 세끄라탱을 따랐고, 세끄라탱은 흔쾌히 탁구를 가르쳐주었다. 그놈은 이제 완전히 떨어진 거냐? 치수에 관해서도 세끄라탱은 알고 있었다. 어떤 이상한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조금씩 조금씩, 우리가 스스로를 세끄라탱에게 털어놓았기 때문이다. 세끄라탱과는 그래서 확실히 묘한 관계가 되어버렸다. 말하자면 맛이 갔군, 여겼었는데- 바로 그날 밤 그럭저럭 고개를 끄덕이게 된 것이다. 즉 벌판에서 돌아온 그날 밤, 샤워를 하고 욕실을 나설 때였다. 벗어둔 바지가 볼록해서 보니까 탁구공이 들어 있었다. 잠깐 어리둥절하다가 납득을 하긴 했지만- 그것은 느낌의 덩어리나 그런 것이 아닌, 확실한 물질(物質)로서의 탁구공이었다. 그리고 공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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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마크가 찍혀 있었다. 터무니없이 바랜 인쇄였고, 잉크는 물론 공 전체가 삭고 얼룩진 느낌이었다. 어떻게 된 거지?라고 생각하기보다는,그래서 어떤 이유가 있겠지-라고 나는 생각했다. 후에 세끄라탱을 만나서도 공에 대한 이야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세끄라탱 역시 그날의 일을 다시는 들추지 않았다. 대신 우리는 탁구에 열중했다. 스텝과, 스냅과, 공과, 라켓의 움직임이- 잠이 드는 순간까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우리의 랠리에도 어느새 점점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즐거웠다. 연습이 끝나면 맞은편 식당가의 〈아프리카〉에서 얘기를 나누었다. 갖가지 생과일주스를 저렴하게 마실 수 있는 곳이었다. 키위나 블루베리, 혹은 망고를 마시며 우리는 이상한 탁구얘기에 열을 올렸다. 이 친구는 아닙니다, 모아이는 늘 상가의 자판기에서 델몬트를 뽑아와 우릴 난처하게 만들었다.
탁구는 전쟁이었어. 세끄라탱은 역사의 명승부와 혹은 전쟁으로 위장한 진짜 탁구의 비사(秘史)를 끊임없이 늘어놓았다. 혹시 F-82G에 대해 아세요? 내가 물었다. 알다마다, 연합군이 막판에 사용한 공식 경기구(球)의 하나였지. 그리고 시작되는 냉혹하고 이상한 이야기들을, 그러나 우리는 끝까지 경청했다. 어떤 이유가 있겠지, 마치 칠판에 적힌 (1+x)/(6+x)〓0.2를 바라보는 기분으로, 나는 키위를 마시거나 고개를 끄덕였다. 역사란 건 스코어보드에 지나지 않아, 즉 탁구의 거대한 기록물이지. 언제나 새 같거나 쥐 같은 얼굴로 세끄라탱은 열변을 늘어놓았다. 즉 밤말을 듣는 쥐, 자칭, 탁구계의 간섭자께서는.
분명 달라졌다면
달라졌다 말할 수 있는 방학의 시작이었다. 무엇보다 치수가 그렇게 사라졌으므로, 안짱다리의 달과 함께- 어디서 슬림을 빨건 국수를 빼건, 그렇게 사라져주었으므로. 하지만 실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방학이었다.세계는 연둣빛 박을 발견한다 해서, 또 키위와 블루베리를 마신다 해서 달라지는 성격의 것이 아니었다. 말하자면, 그래서 그사이 또 다른 일이 있었고- 어떤 이유가 있겠지, 나로 하여금 고개를 끄덕이며 세계를 체념케 만드는 것이었다. 세계는 과연 듀스스코어, 좋은 일은 결코 연거푸 일어나지 않는다.
치수를 만나고 벌판에서 돌아온 날이었다. 새벽에 호출이 있었다. 치수 패거리의 목소리였는데, 그때는 누군지 알 길이 없었다. 치수에 비하자면 그만큼 존재감이 없는 놈들이라 더욱 그랬다. 오늘까지랬지? 왜 치수가 부탁한 거 있잖아, 응, 그거 가지고 빨랑 튀어와. 그래서 전날 일을 설명하려는데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 집에 있어봐야 그 시간에 잠밖에 더 자겠나, 그런 생각을 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나는 학교로 갔다, 달려가야 했다. 동이 트기도 전의 컴컴한 운동장에는 패거리 둘과, 두 대의 스쿠터와, 또 본드라도 분 표정의 여자애 하나가 접착력이 다 된 포스트잇처럼 간당간당하게 서 있었다. 왔냐? 담뱃재를 탁탁 털며, 둘 중 하나가 힐끗했다.
아마도 이름이 종무인가, 그랬다. 으응, 그리고 모아이가 올 때까지 놈들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낄낄대며 늘어놓았다. 예컨대 포스트잇이랑 창문을 따고 들어가 교실에서 하고 나오는 길이다, 씨발 가위바위보에서 내가 졌지 뭐냐, 설거지를, 뭐 이딴 얘기를 실컷 큰 소리로 떠들었다. 가만히, 어느정도 거리가 있긴 해도- 그래도 노인 몇이 철봉 근처에서 새벽운동을 하고 있었다. 격이 없다는 것과도, 조금 다르다. 이건 능력의 차이라고 어둠속에서 나는 생각했다.
이윽고 모아이가 도착하자 놈들이 본론을 얘기했다. 쓸데없는 말을, 즉 치수가 마리의 배를 찌른 다음 옥상에서 밀었다, 그래서 내장이 쏟아지며 떨어졌다, 이 칼이 바로 그 칼이다, 그리고 칼을 휙 휙 그어 보이며 치수가 어제 주고 갔다는 말을 딴에는 쉬쉬하며 늘어놓았다. 말도 마라, 지금 고생이 얼마나 심한지 아냐? 벌레 때문에 큰 수술도 받아야 된다더라, 그래서 우리가 도와줘야 한다- 조례 때의 교장보다도 많은 말을 늘어놓더니 결국 목소릴 떨면서 돈을 달라고 했다.
줬어
치수를 만난 일과 그 자리에서 돈을 준 얘기를 나는 담담하게 늘어놓았다. 정말이야, 치수에게 물어봐. 머릴 깎고 모잘 썼던데? 나중에 안 거지만- 놈의 이름은 종무가 아니라 종모였는데, 아무튼 놈의 얼굴이 순간 심하게 일그러졌다. 그리고 폭행이 시작되었다. 치수처럼 틀이 잡힌 폭행이 아니라, 마구잡이식의 거친 폭행이었다. 격이 없다는 것과는 분명 달랐다. 이것도 능력의 차이라고 나는 피를 토하며 생각했다. 여명 속에서, 노인 몇이 이쪽을 바라보며 아무 일 없다는 듯 운동을 계속했다. 하나 둘 셋 넷
둘 둘 셋 넷
넌? 뜻밖에 모아이도 이미 돈을 건네줬다고 얘기해버려- 종모는 아예 꼭지가 돌아버린 듯했다. 이것들이 날 좆으로 알아요, 스쿠터의 박스에서 짧은 파이프를 꺼낸 놈이 손에 붕대를 감았다. 역시 아쉽지만 나중에 이름을 안- 혁호가 말릴 때까지, 그래서 우리는 와아 할 정도로 맞아야 했다. 와아 와아 와아, 격이 낮은 스쿠터의 시동이 걸렸다. 아마 어디 놀러라도 갈 계획이었는지 포스트잇의 입술이 뾰로통해져 있었다. 노인들은 각자 하나씩 나무를 차지한 채 툭 툭 자신의 등을 나무에 부딪고 있었다.
스쿠터가 사라진 후 우리는 몸을 일으켰다. 어지럽게 찍힌 발자국과 먼지 속에서 혁호가 던지고 간 담배가 연기를 올리며 깜박이고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고, 나는 담배를 주워 모아이와 한모금씩 나눠 피웠다. 처음 피워본 담배가, 그러나 아무렇지 않게 입속으로 넘어갔다. 돈을 주지 그랬어, 내가 얘기했다. 주기가 싫었어, 모아이가 속삭였다. 구름이 많은 하늘이었다. 구름의 저편에서, 스크래치가 많은 탁구공처럼 뿌연 태양이 떠 있었다.
그리고 모아이가 노인들을 향해 걸어갔다. 어떤 이유가 있겠지, 나도 할 수 없이 모아이의 뒤를 따랐다. 힐끔 우릴 쳐다보던 노인들이, 그러나 다가서자 일제히 고개를 먼 산으로 돌렸다. 평생을 이렇게 살아왔구나, 툭 툭 등을 부딪는 소리 속에서 나는 갑자기 서글퍼졌다. 너무 맞아서 그러는데… 혹 안마를 받을 수 있으면 일인당 백만원씩 드리겠습니다. 모아이가 말없이 돈을 꺼내 흔들었다. 차라리 흔들리는 나무들에 비해, 오히려 노인들은 미동조차 없는 느낌이었다. 싫으면, 가고요.
제가 안마를 잘합니다
손을 들고 나선 건 대머리의, 눈이 작은 노인이었다. 어딘가 유연한 느낌의 사무적인 얼굴이었다. 두 개의 벤치에 마주 누워 우리는 노인에게 안마를 받았다. 후두둑 땀을 흘리면서도 노인은 두말없이 안마에 열중했다. 나는 엎드린 자세로 고개를 돌려, 심하게 후들거리는 노인의 다리를 지켜보았다. 여기 있습니다. 안마를 마친 노인에게 모아이가 돈을 건네주었다. 이마의 땀을 닦으며 노인이 금액을 확인했다.
여기서 종종 맞습니까?
노인이 물었다. 글쎄요,라고 대답하고 우리는 학교를 벗어났다. 그리고 자판기에서 나란히 음료수를 뽑아 마셨다. 방학 땐 뭐 할 거냐? 모아이가 물었다. 이렇게… 살겠지 뭐, 내가 대답했다. 그 순간 왠지 세끄라탱의 말이 사실이란 생각이 들었다. 한 소년의 방학이 달라지기도 이만큼 힘든 것이다. 하물며 세계란. 나도… 그래, 모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찬가지, 마찬가지, 다 마찬가지야. 반쯤 남은 음료수를 뿌려대며 나는 속으로 그렇게 외쳤다. 그리고 우리는 〈랠리〉로 갔다.
말하자면 그것이 여전한 방학의 시작이었다. 치수가 사라진 대신 나는 종종 종모의 호출을 받았고- 맞거나, 심부름을 하거나, 상납금을 바치거나, 했다. 내가 연두의 박을 발견한다 해서,혹은 유익한 대화를 나눠가며 키위를, 블루베리를 마신다 해서 그것이 이 세계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 것인가, 나는 생각했다. 그보다 다수인 척, 학원을 다니고 학교를 다니고 방학을 보내고- 돌아와 또다시 여전한 생활을 할 나는, 여전한 생활을 할 너는, 여전한 생활을 할 우리는- 도대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이 육십억의
불특정 다수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나는 생각했다. 그런 생각도 곧 마지막이 아닐까? 델몬트를 마시며 모아이가 말했다. 고등학생이 되면 그런 생각조차 깨끗이 사라질걸. 확실히 고등학생 정도로 늙거나 부패한다면, 나는 순순히 노인이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건조하고 뜨거운 오후의 시가지를 내려다보며, 나는 남은 키위를 들이켰다.
핼리는 오지 않는대.
그럴 수도, 고개를 끄덕이며 모아이는 쉽게 수긍의 뜻을 내비쳤다. 하지만 우리는 기대를 거는 거야. 핼리를 기다리는 건, 말하자면 삶의 자세와 같은 거지. 그건 몸을 숙여 저편의 써브를 기다리는 것과 같은 일이야. 나는 탁구를 모르니까 어떤 공도 받지 않겠다, 공 같은 건 오지도 마라- 그건 인류가 취할 예의가 아니라고 봐. 마치 우리는 왜 사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혜성 같은 건 오지도 마라- 그게 아니고 또 뭐냐는 거지. 그래서 우린 매달 한 번씩 핼리가 오는 날을 정하고 기다리는 거야.
긴장된 삶이로구나.
겸손한 삶이지.
세끄라탱의 권유도 있고 해서, 결국 나는 〈핼리혜성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임〉에도 가입하게 되었다. 편의점 사장과 모아이가 추천인이 돼주었고, 한 쎄트로 따를 당해온 사실이 중요한 가산점이 되었다. 좀더 기다려봐. 심사는 의외로 까다로웠다. 신분이 노출되는데다 오프에서의 활동도 큰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탁구를 치며 마치 핼리를 기다리듯 클럽의 통보를 기다리고 기다렸다. 아이디와 비번을 받은 건 거의 열흘 정도가 지나서였다. 과연 긴장되고 겸손해지는 열흘이었다.
쎌러브레이션을 부를 때의 쿨 앤 더 갱(Kool& the Gang)처럼 즐거울 수 있을까?
클럽의 홈페이지에는 그런 타이틀이 걸려 있었다. 어디에도 핼리에 대한 얘기는 찾아볼 수 없고 대신 동영상을- 아마도 쿨 앤 더 갱인 듯한- 우루루 나와 선 흑인들의 공연을 볼 수 있었다. 이렇게 즐거울 수는… 없잖아. 예외없이 나는 〈아니오〉 버튼을 눌렀다. 그렇게까지 즐거운 흑인들이 사라지자, 비로소 로그인 환경의 접속모드를 만날 수 있었다. 규정을 읽고 인사말을 작성한 후, 나는 겸손한 마음으로 게시판의 글들을 하나하나 읽어나갔다. 겸손한 마음이 아니라면 차마 읽기가 힘든 글들이었다.
아침에 집을 나서면 전철을 탑니다. 누구나 집을 나서면 전철을 타는 법이지만 저는 좀 다릅니다. 저는 내리지 않습니다. 순환선(循環線)의 풍경이 지겨워 간혹 노선을 바꿔타는 경우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그렇습니다. 이런 생활을 한 지가 2년쨉니다. 이유는 잘 모릅니다. 간혹 왜 이렇게 된 걸까를 생각하기도 하지만, 정확한 이유는 알 수가 없습니다. 우선은 편합니다. 아, 물론 몸이 편할 수도 있겠지만 실은 몸 자체에 많은 무리가 따릅니다. 오래 전철을 타는 일은 생각보다 아주아주 피곤한 일입니다. 편하다는 건, 그렇습니다. 마음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언제나 전철을 타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철을 타고 있는 사람에겐 아무도 당신 요즘 뭘 하느냐 따위의 질문을 하지 않습니다. 네, 뻔히 눈앞에서 전철을 타고 있으니까요. 혹 친척 아주머니나 동네의 수다꾼 여사를 마주쳐도-이런 일이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한달에 서너 번은 겪게 됩니다-걱정할 게 없습니다. 열이면 열 어딜 가냐고 물어오기 때문입니다. 그럼 간단히 어디어디를 가는 길입니다,로 답하면 그만입니다. 그들은 더이상 의심하지 않습니다. 어디를 가나보다, 혹은 어디어디의 회사를 다니나보다, 막연히 그렇게 여기게 되는 것이지요. 그들이 더이상 의심을 않는 까닭은 바로 제가 전철을 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편한 것입니다. 집의 부모도 마찬가지. 자격증을 위해 어딘가를 다녀야겠다, 그리고 전철을 타는 겁니다. 4호선의 끝까지, 7호선의 끝까지, 또 순환선을 돌고 돌고 돌고- 하다보면 부모를 만날 수도 있습니다. 저는 정말로 두 번이나 어머니를 만났습니다. 물론 얘기한 학원과는 터무니없이 떨어진 노선에서였습니다. 어딜 가는 거냐? 그렇습니다, 부모조차도 전철을 타는 인간에겐 더이상의 말을 못하는 것입니다. 교재를 사러 가는 길이야. 정말 차분하게 저는 대답할 수 있었습니다. 네, 바로 그곳이 전철이었으니까요. 결국 엄마는 친구의 아들- 뭐 저의 어릴 적 친구이기도 합니다만- 얘기를 꺼내며 한숨을 짓습니다. 4년째 방에서 안 나오고 컴퓨터만 하는 녀석이거든요. 걱정 같아 보이지만 이건 그야말로 안도의 한숨입니다. 잘 아시겠지만, 그렇습니다. 굳이 비교할 일도 없겠지만, 저는 4년째 컴퓨터만 하는 인간이나 2년째 전철만 타고 다니는 인간이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전철이니까, 전철을 타고 어디론가 가고 있으므로 다르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실은 아무 일도 안하지만, 그래서 저는 노력은 하는데 시운이 안 따르는 인재로 부모의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아침 일찍 집을 나가 밤늦게야 피곤한 얼굴로 돌아옵니다. 주변 친지나 친구들조차도 혹 댁의 아들을 유흥가에서 보았다, 여자애랑 팔짱을 끼고 모텔에 들어가던데? 따위의 목격담을 전해오지 않습니다. 들리는 얘기는 오로지 전철, 전철에서 댁의 아들을 보았다-가 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성실하게 느껴지는 아들입니까. 하지만 그것이 이유의 전부는 아닙니다. 우선 낭비를 줄이게 됩니다. 쓸데없는 지출, 쓸데없는 인간관계, 특히나 쓸데없는 관심… 게다가 나름 여러가지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폰이 있으니 인터넷도 해결할 수 있고, 뉴스와 신문은 언제나 널려 있게 마련입니다. 저는 그래서 전철을 탑니다. 보호받는 그 느낌이 언제나 좋은 것입니다. 예, 장차 뭘 할 거냐? 그런 질문에 시달리지 않고 저는 결국 유산이나 물려받을 생각입니다. 노력을 해도 안되는 아들에게 대개의 부모들은 후한 법이니까요. 아버지는 꽤 엄한 편이지만, 그래도 거품경제 속에서 돈을 꽤 모아둔 축입니다. 생각해보세요. 평생을 일한다고 지금 그런 돈이 모일까요? 그래서 저는 전철을 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제가 전철을 타는 이유가 모두 설명된 건 아닙니다. 그게 참 애매한 부분인데, 이상하게 그렇습니다. 저는 슬픕니다. 이상하게 가끔 슬픈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살고 있는 건 누구 때문일까요. 이렇게 살 수 있는 건, 또 누구 때문일까요. 전철은 누가 만든 걸까요. 저는 왜 사는 걸까요. 이런 생각이 들면서 그렇게 마구 슬픈 것입니다. 이런 내추럴한 슬픔을 느낀 건 인생을 살아오면서 처음입니다. 한번은 문득, 그래서 선로에 뛰어들고픈 충동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나 따위가 죽는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란 생각이 들더군요. 뭐랄까, 그것은 실로 내추럴한 각성이었습니다. 그래서 생각 끝에 저 역시 여러분과 같은 결론에 도달한 것입니다. 틈나는 대로, 일기는 계속 전하겠습니다.
캐서린 드디어 주문. 이제 캐서린에게 희망을 겁니다. 오럴과 애널까지 세 군데가 가능하고요, 고급 실리콘이 부드러움을 더했습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실제 사람과 비슷하게 생겼으며 음부 또한 실제 사람과 똑같이 생겨 그 느낌을 더해준다고 하는군요. 잘하면 이곳을 탈퇴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보들을 어떻게 할 거냐는 겁니다. 그 누구도 인류의 능력을 의심하진 않습니다. 결국 인류는 유전자의 비밀을 밝혀내고, 진화의 정체를 파악하고, 로봇으로 모든 노동을 대체하는 순간을 맞이할 겁니다. 하지만 바보들을 어떻게 할 거냐는 겁니다. 핵융합의 원리를 알아내고, 전파를 발견하고, 항해술을 개발하고, 반도체를 만드는 건 1%의 인간입니다. 하지만 그걸 사용하는 건 대다수의 바보들입니다. 죽여도 되는 바보들이 아니라 인권을 가진 바보들이란 얘깁니다. 그 바보들을 어떻게 할 거냐는 것입니다. 바보들을 통제해온 방법도 날이 갈수록 그 기능이 떨어질 것입니다. 바람처럼, 바보들은 절대 영리해지지 않습니다. 영악해질 뿐입니다. 즉 결론은 이 대다수의 바보들을 어떻게 처리할 거냐는 것입니다.
결국 악(惡)은 힘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선악의 구별이 있는 게 아니라 힘을 가지는 순간 악해지는 것이다. 그런 결론을 얻고 나니 세상의 결과가 너무 참혹하다. 아무도 힘을 가져선 안되는데 누구나 힘을 얻으려 기를 쓴다. 주여… 핼리님은 지금 어디까지 오신 걸까.
캐서린 도착. 실제 사람과 하나도 비슷하지 않습니다.
저는 너무 참았습니다. 실은 한계가 온 건 오래전입니다. 이제 그만 해야지 했는데(참고로 뭘 하는지는 묻지 마세요). 그게 절대 안되는 것입니다. 절대 그렇습니다. 차라리 돈돈 하고 아무 생각 없이 사는 게 속은 편할지 모르겠습니다. 하, 이런 제 자신을 누가 이해해주겠습니까? 천형을 내린 하늘이 저주스럽기만 합니다. 그런데 왜 자꾸 절 만나려는지 의도를 알 수 없네요. 다 때가 되면 스스로 공개할 용의를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니 알려고 들지 마세요. 제발 부탁입니다. 저는 사실 평범한 사람입니다. 오늘까지만 하고, 이제 정말 이 일은 그만둘 겁니다. 올스톱! 아시겠습니까? 저는 한다면 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태어나 고생이란 걸 해본 적이 없습니다. 핼리가 와준다면 저도 고생 꽤나 하겠죠?
오늘 방송국에 가서 수재의연금을 내고 왔습니다. 임성훈씨가 진행하셨고요, 제가 줄을 서 있는데 진행요원 아가씨가 용지를 주더군요. 이름과 금액을 적는 용지였습니다. 그래서 금액은 기입했는데 이름은 적지 않았습니다. 밝히고 싶지 않습니다, 대신 그렇게만 적어놓았죠. 이름은 밝히지 않으셨고요, 예, 오백만원 기탁하셨습니다. 우리 아나운서께서 그렇게 소개하시더군요. 물론 얼굴은 그대로 나왔습니다.
다 귀찮습니다. 아시겠습니까?
캐서린을 직장상사가 더럽혔네요. 기분 정말 더럽습니다. 며칠 전 캐서린이 사람을 닮지 않았다고 글을 올렸는데 실은 실망이 아니라 기쁨이었습니다. 저는 인간이 싫거든요. 오래전부터 그랬습니다. 물론 예전엔 저도 인간 여성과 사랑을 나누는 환상을 가진 적이 있었습니다. 이 외모로 실제 여성을 사귈 수도 없고 해서(물론 노력은 했지만 말입니다) 한동안 그래서 고무밴드를 파트너로 삼고 살았습니다. 고무밴드가 뭐냐구요? 그건 우연히 발견한 건데(발명일 수도) 일단 고무밴드로 손목 위 십오센티 정도를 강하게 묶습니다. 그리고 일분 정도면 압박 들어옵니다. 그 느낌이 상당한데 그때 손으로 살포시 성기를 잡습니다. 피가 안 통한 손은 아주 차갑고 부드러워, 마치 타인의 손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눈을 감고 타인이, 그것도 인간 여성이 사랑해준다,라는 상상을 하는 것이죠. 그런데 어느 순간 그게 고무 쪽으로 옮겨갔습니다. 외모 때문에, 또 능력도 후줄근하고 해서 이래저래 상처를 많이 받았거든요. 물론 이상하게 여기시겠지만 전 하나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인간 여성들이 날 싫어해 고무를 사랑하는 건데 그게 제 잘못입니까? 아무튼 결국 그래서 캐서린까지 온 것입니다. 캐서린은 저렴한데다 또 전신인형이라 숙직실에서 베고 잘 수도 있는 잇점이 있었지요. 얼마나 고맙던지. 이런 말 하긴 그렇지만, 그래서 저는 그만 캐서린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아아 캐서린… 그런데 오늘 아침이었습니다. 새벽 순찰을 돌고(저는 빌딩관리일을 하고 있습니다) 숙소로 돌아왔는데 주임이 벌써 일어나 옷을 챙겨입고 앉아 있더군요. 일찍 일어나셨네요? 하니까 그래그래 하며 얼른 방을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느낌이 이상하더군요. 저는 얼른 사물함을 열어보았습니다. 앗 캐서린이, 저는 한눈에 주임이 캐서린을 더럽혔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주임은 공기를 다 빼지도 않고, 제 소중한 캐서린을 둘둘 말아넣어놓았더군요. 저는 얼른 캐서린의 몸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인간이… 그리고 눈물이 다 글썽했습니다. 캐서린의 소중한 질과 애널에서 끈적한 느낌과 말라붙은 휴지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얼마나 깨끗이 씻겨 두는데… 저는 울면서 캐서린을 씻겨주었습니다. 울면서 생각했습니다. 주임을 고소할까, 아니면 주임을 죽일까… 하지만 결국 저는 참기로 했습니다. 그건 캐서린을 두 번 죽이는 일이 될 테니까요. 또 결국은 캐서린을 지켜주지 못한 저의 불찰이란 생각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납득할 수 없습니다. 주임을, 주임이란 저 인간을 말입니다. 주임에겐 와이프가 있습니다. 버젓한 인간 여성이고 아이도 둘이나 낳아주었지요. 게다가 주임은 이래저래 바람을 피우는 여성이 제가 알기로도 서넛은 넘습니다. 아아, 가진 자의 마음을 그래서 저는 도무지 파악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가진 사람이… 왜 그랬을까요. 이젠 가진 자들이 무섭습니다.
모니터를 껐다.
잠을 좀 자야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