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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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금진 崔金眞

1970년 충북 제천 출생. 2001년 『창작과비평』으로 등단. upthere@hitel.net

 

 

 

소년 가장

 

 

밤길을 걸어 집으로 가는데 죽은 아버지 부르는 소리

 

얘야, 오늘은 마을에 제사가 있구나

 

목구멍이 빨대 같은 풀들이

피묻은 꽃들을 혓바닥처럼 밖으로 꺼내어놓을 때

빠드득 빠드득 이빨을 갈며 풀벌레가 울고

소년의 굽은 어깨 위로 뛰어내리는 나무 그림자

귀를 틀어막아도 따라오는

 

얘야, 아비랑 가서 실컷 먹고 오자

 

어둠이 허방다리를 놓아주는 늦은 귀가길에

배 고플까봐, 배곯고 다닐까봐, 소년을 올라타는 소리

 

아비랑 가자, 아비랑 함께 가자

 

 

 

이상한 투숙객

 

 

그는 팬티 차림으로 앉아 막잔을 비운다

집 나온 지도 석달, 이제 남은 건

포르노 테이프와 차갑게 식은 야식집 전화번호

그러나 잠들기 위해선 아직도 더 깨어 있어야 한다

피부병처럼 가렵다가 점점 아파오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 따위조차

생각 속의 성욕만큼이나 대수롭지 않다

창문을 열고 내다보면 北國에서 흘러온

역마살의 진눈깨비들, 온몸으로 길을 실어

바닥에 쏟아붓는 것으로 일생의 혐의를 끝낸다

너도 가벼워지고 싶었구나

그는 손을 뻗어 유리창에 글씨를 쓴다

그러나 이 마지막 담배를 다 태우는 동안은

아무것도 반성하고 싶지 않다

러닝셔츠와 팬티를 훌훌 벗어놓으며

그는 유리창에 얼굴을 댄다

누군가 주차장에 세워놓은 눈사람을 내려다보며

그도 어디론가 걸어가고 싶다

핏덩이인 진눈깨비들이 우르르 몰려가는 골목

그 후미진 끝에서

어떤 의도도 없이 내려지는 결론의

깨끗한 폐막식을 보고 싶다

내일은

지상에서 가장 먼 곳, 마음의 極地에 이를 것이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엄마는 오지 않았다

누나는 추워서 노루처럼 자꾸 웃었다 밤새

쥐들이 사람의 목소리로 문고리를 잡아당겼고

누나는 초경을 했는데 받아낼 그릇이 없었다

두부 같은 누나의 살들이 부서질까봐 나는

자꾸 이불을 끌어 덮어주었다

대접 속에 얼어붙은 강은 녹지 않았다

나는 벽에 걸린 엄마사진이 부끄러웠다

뒷문을 열고 내다보면 하얗게 늙은 애들

군가를 부르며 지나갈 때마다

누나는 콩나물처럼 말갛게 속살이 익어갔다

밥상을 차리며

나는 눈물이 나왔다, 군불을 때면

아지랑이가 눈알 속에 피어오르고

거뭇거뭇해진 내 입 주위에도

변성기가 우르르 사나운 눈발처럼 달라붙었다

아아, 엄마, 나는 무엇을 잘못한 걸까요

밤이면 몰래 손톱으로 가려운 몸을 긁어댔다

엄마는 오지 않았고

겨울밤의 흰 문종이를 뚫고 몽유병처럼

신음소리를 흘려보내는 누나를 부둥켜안고

나는 오지 않은 봄을 향해 달려나갔다

엄마야…… 누나야…… (제발)

강변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