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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평

 

냉정한 균형감각이 부족한 화제의 영화

영화 「바람난 가족」

 

 

권지예

소설가. kjiye@hanmir.com

 

 

「처녀들의 저녁식사」(1998)에서 세 처녀들의 노골적이고 솔직한 수다로 몸과 섹스에 대한 이야기를 보여줬던 임상수(林相洙) 감독이 「바람난 가족」이란 영화를 들고 나왔다. 영화 개봉 즈음 TV에서는 「앞집 여자」란 드라마가 뜨고 있었고, 바로 얼마 전엔 부부간에 파트너 교환을 하는 ‘스와핑’이 문제가 되어 떠들썩했다. 부부전선에 그야말로 바람 잘 날이 없다. ‘불륜 씬드롬’이란 말도 여기저기서 심심치 않게 들린다. 마치 ‘바람난 사회’ 속에 우리 모두가 살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원래 ‘바람’의 속성은 ‘뜨거움’인데, 요즘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오히려 그것을 ‘쿨(cool)하게’ 즐기려는 ‘심리적 전술’이 유행하고 있는 것 같다. 촌스럽게 관계에 집착하지 않고 감정에 질퍽대지 않으면서도 자신들의 욕망에 솔직하고 충실하려고 한다.

어느 인터뷰에서 임상수 감독은 “물론 인생은 절대 쿨하지 않고 핫(hot)하다. 핫한 인생을 핫하지 않고 쿨하게 그리는 것, 그것이 내 영화적 전술이다. 삶의 전술일 수도 있겠다. 쿨하다는 거? 남에게 하는 얘기를 자기에게도 적용시키는 것, 지행일치, 말과 행동의 격차 좁히기, 너무 고매한 말과 행동을 하지 않는 것, 자기 객관화 능력, 이런 거 아닐까”라고 말한 적이 있다. 「바람난 가족」은 그의 그런 전술이 솔직하고 거침없이, 아니 오히려 노골적이고 위악적이고 뻔뻔스럽게 드러났다는 점에서 일단은 화제의 영화가 되기에 충분했다. 우리의 전통적 불륜멜로영화를 뛰어넘는, 이런 도발적 시선을 가진 이단아의 등장은 반갑고도 귀하다. 게다가 임상수는 남성감독으로서 가부장제에 주눅들지 않는 여성을 그리고 있는 점에서 페미니스트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특히 임상수가 「처녀들의 저녁식사」에 이어 끈질기게 집착하는 화두는 ‘몸’에 관한 문제인데 「바람난 가족」에서도 이어진다. 오히려 「바람난 가족」은 우리들에게 ‘몸에 대한 예의’를 끊임없이 일깨운다. “니 몸 원하는 대로 니 몸 위하면 되는 거 아냐?”라는 바람난 시어머니의 대사가 말해주듯 몸의 욕구를 해소하는 섹스가 주요장면을 차지한다. 다만 「바람난 가족」에서는 ‘섹스를 통해서 생의 쾌락을 느끼는 몸’뿐 아니라 ‘죽어 없어지는 몸’도 자주 나온다. 섹스와 죽음이라는 두 축이 이 영화를 받치고 있다.

우선 섹스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이 영화에서 부부는 가정 안에서 서로 소통하지 못한다. 배우자와의 섹스에 만족하지 못한 주인공들은 아무 죄의식 없이 바람이 나게 되며 그 사실을 알고도 질투하거나 악다구니 쓰지 않는다. 주인공 ‘영작’과 ‘호정’은 부부관계에서 오르가슴을 느끼지 못한다. 변호사 영작은 ‘연’이라는 젊은 애인을 두고 있으며 호정은 남편과의 만족스럽지 못한 섹스 후에 하는 자위행위로 겨우 마음을 달래다가 옆집의 ‘고삐리’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또한 실향민의 아픔을 안고 알코올중독자로 살다 간암으로 죽음을 맞게 된 남편과 섹스 안한 지 15년이 된 시어머니 ‘병한’도 초등학교 동창과 바람이 나서 평생 처음 오르가슴을 느낀다.

바람난 애인들과의 섹스도 그리 정상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특히 영작과 애인 연이 섹스를 할 때의 몇장면은 흔히 볼 수 있는 섹스 체위가 아니다. 연이 영작의 등 위에서 특이한 여성상위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이만 어릴 뿐 그들의 관계에서 그녀는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상위에 있다. 그들은 섹스하면서 모든 요구를 솔직히 이야기하고, 받아들이고, 실행한다. 영작은 연과의 관계에 몰입하려고 하지만 그의 의식은 분열되어 있다. 그런 영작에게 연이 “당신은 하나도 쾌락을 못 얻고 있다. 당신은 쿨한 척하지만 정작 쿨하지 못한 거 같다”라고 한 말은 의미심장해 보인다. 정작 겉으로는 ‘쿨한 척’ 바람을 피우고 있지만, 그는 그의 몸에 각인된 가부장제의 트라우마(trauma)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바람난-2

 

그러면 이 영화에서 죽음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 영화에는 앞서 말했듯이 왜 이리 여러차례 죽음이 나올까? 하나는 변호사인 영작이 관여하고 있는 한국전쟁 때 묻힌 유골의 발견, 영작의 자동차 앞에 놓인 개의 시체, 다음은 입양아 수인의 죽음, 영작의 아버지의 죽음, 그리고 직접 나오지는 않지만 아들과 손자도 모르게 죽어간 영작의 할아버지의 죽음, 마지막으로 수인을 죽인 알코올중독자 우체부의 자살이 있다. 아버지의 죽음과 할아버지의 죽음으로 대변되는 가부장제의 계승과 무너짐, 그리고 학살이란 역사적인 죽음으로 상징되는 전통적인 의미의 가부장적 질서의 해체, 그리고 호정이 애정을 쏟던 입양아의 죽음은 가족해체의 실마리로 보인다. 이렇게 시공간적으로 가족의 해체를 부추기는 역사적·사회적 요소를 감독은 부각시키고 싶었던 걸까? 위선적인 가부장제로 거짓 포장된 가정과 가족의 운명은 결국 파멸의 씨앗을 배태하고 있다는 걸 얘기하고 싶었던 걸까?

그러나 솔직히 영화를 보았을 때 왜 이런 죽음이 많이 나와 영화의 본말을 오도하는 것일까 의아스러웠다. 차라리 ‘바람난 가족’의 ‘바람’에만 확실하게 촛점을 맞추어 어떻게 ‘콩가루 집안’이 되어가는지를 보여주는 게 낫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기에는 영화가 남녀의 ‘바람’을 묘사할 땐 너무 ‘쿨한 척’을 하느라 진정성이 돋보이지 않고, ‘가족’의 의미를 보여주는 데 있어서는 역사적·사회적 의미를 강박적으로 표현하고자 한 감독의 욕심이 너무 ‘오버’되었다. 그래서 영화의 서사가 통일성과 설득력을 갖추기보다 좀 산만해져버렸다. 자극적이고 쎈쎄이셔널한 대사나 장면만이 주로 남게 되는 영화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결말부분에서 고등학생과 섹스를 하며 오르가슴을 느끼며 통곡을 하는 호정의 모습과 그의 아이를 임신하여 낳기로 결심하며 영작을 끝내 거부하는 호정의 새로운 가족 만들기가 그리 설득력있게 가슴에 와닿지 않는다.

물론 가족의 실체가 끔찍하게 구속적이고 허울뿐인 제도라는 새로운 관점을 선사해주고, 판타지가 아닌, 거르지 않은 너무 리얼한 섹스씬을 보는 색다른 불편함을 맛보게 해준 것만으로도 ‘화제의 영화’가 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화제의 영화’ 「바람난 가족」이 우리 시대의 ‘문제적 영화’가 되기에는 아직까지 본질에 대한 냉정한 시선과 거리를 못 획득하지 않았나 싶다. 즉 냉정한 균형감각을 가지고 ‘바람’과 ‘가족’ 간의 줄타기에 성공해야 할 것이다. 요즘은 영화나 소설이나 현실을 못 따라간다.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스와핑’ 찬성론자들은 ‘스와핑’을 함으로써 부부가 공범으로서 죄의식을 공유하기 때문에 배신감 없이 가정을 더욱 공고히 지킬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이쯤 서늘해지면 가족의 해체 운운은 순진한 이야기가 될까? 그런데 도대체 ‘쿨하다’라는 것은 어느 정도의 서늘함을 말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