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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생태적 유토피아의 꿈
박민규 장편 『지구영웅전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염무웅 廉武雄
문학평론가·영남대 독문과 교수. mwyom@yumail.ac.kr
1) 올해 우리 문단에 있었던 반가운 소식 가운데 소설가 박민규의 등장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10여년 넘게 지속되는 여성작가들의 강세를 뚫고 ‘문학동네신인작가상’과 ‘한겨레문학상’을 잇달아 거머쥔 남성작가가 나타난 것이 우선 기대를 모으고, 무엇보다 그의 두 장편 『지구영웅전설』(문학동네 2003. 6)과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한겨레신문사 2003. 8)이 기존의 소설문법과 서사적 관행을 깨고 자기 나름의 독특한 화술을 시험하고 있어 주목할 만하다.(그런데 후자는 장편의 명칭을 감당할 수 있겠지만, 전자는 책의 표지에 내세운 것과 달리 어느 모로 보나 중편소설이다.) 과연 박민규의 이러한 시도가 소설사적으로 그리고 세대론적으로 의미있는 징후인지, 아니면 다만 잠시 나타났다 사라지는 한때의 에피소드인지 판단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사실대로 고백하자면 나는 작품을 읽기 전에, 또 읽고 나서 책의 안쪽날개에 실린 작가의 사진을 여러번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나에게는 그 사진이 하나의 자그마한 문화적 충격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수염을 깎지 않은 얼굴에 썬글라스를 끼고 머리를 길게 길러 허리께까지 늘어뜨린 모습의 신인작가에게 나는 아직 익숙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까 그의 사진은 나의 구시대적 상상력에 타격을 가하는 문화적 도발인 셈인데, 그러나 히피예술가나 록뮤지션이 그런 차림이었을 경우에도 내가 놀라거나 섬뜩해했을 리는 없다. 이미 이외수(李外秀) 같은 선구적인 작가가 문인의 특권적 지위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던가. 그러고 보면 박민규는 지난날 이외수의 표정에 감돌았던 약간의 비장함 따위조차 모두 지워진, 뭐랄까 무심하고 자연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다. 한마디로 그는 유신체제하의 장발단속을 겪어보지 않았을뿐더러 울긋불긋한 머리염색조차 한물 지나간 시대의 젊은이이고, 문인이 배우나 가수에 비해 신분적 우위를 주장하기는커녕 오히려 사회적 약자로 전락해 있는 시대 즉 대중문화시대의 신진소설가인 것이다.
2) 『지구영웅전설』(이하 『전설』)과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하 『팬클럽』)의 소설적 원천은 작가와 주인공들의 소년기를 지배한 압도적인 문화체험이다. 이들은 두세 살씩 나이차가 있지만 대체로 동년배로서 70년대말 내지 80년대초에 열두살이 된다. 두 작품의 주인공이 모두 그 나이에 인생의 첫번째 전환점을 맞은 것으로 보면 열두살은 작가 자신에게도 정신적 외상 또는 심리적 각성의 흔적을 남긴 연대였는지 모른다. 어쨌든 그들은 그 싯점에 이르러 우리 시대를 양분하는 두 개의 문화영역에 결정적으로 빨려든다. 『전설』에서 그것은 「슈퍼맨」 「원더우먼」 같은 미국제 TV영화였고 『팬클럽』에서는 그때 막 출범한 프로야구였다.
급격한 산업화의 진전과 더불어 우리의 삶이 점점 더 인공적인 환경에 갇히게 된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거대도시의 생활이 각종 기술적 설비와 문화적 써비스에 의해 아무리 완벽한 편의와 안락함을 제공한다 하더라도 인간의 삶이 자연의 외부로 옮겨질 수는 없으며,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자연에 대한 갈증이 더욱 증폭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감성과 의식이 그의 문화체험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받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에도 그것은 다만 자연과 문화의 특정한 관계를 반영할 뿐이다. 이렇게 생각해본다면 『전설』의 TV 영웅들과 『팬클럽』의 프로야구는 작가의 자전적 과거에 직접 연관된다기보다 작가가 이 시대의 정치사회적 구조를 투시하기 위해 사후적으로 차용한 문학적 장치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작가는 이 시대의 현실에 어떻게 접근하는가. 『전설』의 주인공은 열악한 처지에서 살아가는 외로운 소년이다. ‘폐지 수집을 하는 아버지와 빌딩 청소일을 나가는 계모’ 밑에 있던 그에게 유일한 즐거움은 슈퍼맨 같은 영웅들의 이야기에 빠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는 동안의 일시적 환각상태를 벗어나면 그의 현실적 삶은 처량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나는 주로 폐지더미 속의 잡지를 찾아 읽거나, 고물딱지 라디오의 주파수를 맞추는 일로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것도 아니면 종이접기를 하고, 그게 시시해지면 줄넘기라도 하다가, 밤이 늦어지면 마루나 안방 아무 데서나 잠이 들곤 했다. 딱히 그럴 생각은 없었지만 나는 늘 지진아였다.”(30면) 그로부터 20여년이 지난 지금 그는 학원의 영어강사가 되어 힘들고 고단하게 생계를 이어나간다. “마지막 수업을 마친 후 마지막 전철을 타고 와, 고작 네 시간을 잔 후 첫수업을 위한 첫전철을 탄다. 장엄하지 않은가? 오전에 학원 근처의 캡슐룸에서 두어 시간 눈이라도 붙이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죽음이다.”(156면) 그런데 주인공이 처한 이 각박한 현실은 소설의 앞뒤에 설치된 액자이고, 액자의 창을 지나 소설의 몸체 안으로 들어가면 슈퍼맨, 배트맨, 원더우먼, 아쿠아맨 같은 지구영웅들의 ‘전설’이 차례로 펼쳐진다.
이 영웅들이 지구의 정의를 지키고 자유의 영역을 확장하기 위해 맹렬히 활동하고 있다는 서술은 그 캐릭터를 만들어낸 나라의 시점과 화법에 따른 것이다. 물론 이 소설에서 그 ‘정의’와 ‘자유’가 반어적 의미를 지닌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러나 완전히 반어적인 것만은 아닌데, 왜냐하면 슈퍼맨은 백인지배의 원칙을 대표하는 존재인 동시에 『전설』의 한국인 주인공 ‘나’에게 자기동일시의 대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나’는 수많은 시련과 훈련을 거쳐 바나나맨으로 변신한다. 프란츠 파농의 ‘검은 피부 흰 가면’처럼 그는 황인종의 피부와 백인종의 영혼을 가진(53면) 기형적 자기분열적 인물로 재탄생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전설』의 정치학은 아메리카제국의 세계지배에 대한 비판과 피지배자의 자아상실에 대한 자기비판을 동시에 포괄한다.
3) 『전설』이 미국지배체제의 메커니즘을 날카롭게 고찰하고 있다고 하여 이 작품이 훌륭한 소설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미국에 대한 그러한 관점 자체도 실은 이미 어느정도 보편화되어 있는 터이다. 무엇보다도 이 소설은 알레고리가 너무나 기계적이고 단선적이다.
이에 비하여 『팬클럽』은 만화적이고 우화적인 요소를 상당부분 그대로 간직하면서도 훨씬 더 본격적인 소설에 근접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문화적 아이콘으로 채택된 것은 프로야구이다. ‘나’는 같은 반 친구인 조성훈과 함께 그들이 사는 도시를 연고지로 한 야구팀 ‘삼미 슈퍼스타즈’의 어린이팬클럽 회원이 된다. 그런데 주인공이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창단되어 고등학교에 진학한 직후까지 3년 반 동안 존속했던 이 야구팀은 수많은 전설적인 기록을 남기고 자취를 감춘다. 지구정의의 수호자 슈퍼맨을 마스코트로 삼은 야구팀 삼미는 그러나 『팬클럽』에서는 슈퍼맨의 강력한 이미지를 완전히 뒤집어 최하위 팀으로서의 갖가지 진기한 기록을 세운다.
소설의 이 부분, 전체 3부 중의 제1부이자 길이로는 거의 절반에 가까운 이 부분을 읽는 동안 우리는 묘한 균열을 경험한다. 한편으로 우리는 이 부분을 쓰기 위해 작가가 무척 고생해서 자료조사를 한 데에 감탄한다. 다른 한편 우리는 삼미팀의 전적을 충실하게 연대기적으로 옮기면서 거기에다 등장인물들의 감정적 기복을 짜넣는 일에 매달려 애쓰는 작가의 노고가 소설창작에 필수적인 것이 아니라는 의혹에 사로잡힌다. 근본적으로 모든 소설은 실재하는 현실의 기록으로 간주될 만한 측면을 가지지만, 그러나 그와 더불어 작가는 현실이라는 주어진 캔버스 위에 마음대로 선을 긋고 형상을 만들고 색칠을 하는 자유를 누린다. 물론 이때 작가가 누리는 자유의 정도에 예술적 성취의 강도가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엄격한 규범의 강제에도 불구하고 최고의 창조가 이루어질 수 있고 반대로 최대의 방임 속에서만 위대한 예술이 달성될 수도 있다. 그것은 각시대의 구체적 조건에 대한 개별예술가의 불가피한 선택이다. 그런데 『팬클럽』의 전반부는 소설과 논픽션 사이의 접경지대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고 있다. 역사소설 중에 역사로서 미흡하고 소설로서도 미숙한 것이 있듯이 이러한 줄타기는 사실의 객관성과 상상의 창조성 양면에서 공히 결함을 드러낼 가능성을 가진다.
『팬클럽』의 후반부가 진행되면서, 즉 주인공이 삼미팀의 소멸 이후 입시공부에 전념하여 일류대학에 진학하면서 작품은 점차 소설적 육체를 획득한다. 교육현실의 모세혈관이라 할 일선교실에서까지 관철되는 국가주의의 폭력성이 실감있게 묘사되며, 가정과 학교가 자발적으로 그 국가폭력에 예속되어 있는 상황이 소년소녀들을 어떻게 멍들고 망가져버리게 하는지 고발된다. 그러니까 자연의 순리에 따른 평범한 삶이란 이 사회에서 낙오와 배제의 운명을 피하기 어렵다. 꼴찌팀 삼미는 바로 속도와 승부가 지배하는 경쟁사회에서 그 체제에 저항하는 야구를 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여기서 야구라는 것이 인생의 비유임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런데 문제는 비유의 내용적 정당성이 아니다. 『전설』보다는 훨씬 덜하지만 『팬클럽』에서도 작가의 견해가 너무 직설적으로 드러나 독자를 설득하려는 것이 문제점이다. 일찍이 엥겔스가 경향문학에 대해 언급하면서 정치적 주장이 “명시적으로 지적되지 말고 상황과 행위 자체로부터 저절로” 우러나야 한다고 말했던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물론 『팬클럽』은 작가의 세계관을 펼치기 위한 메마른 논증인 것은 아니다. 절실한 광경, 생동하는 인물이 그려진 많은 부분들에서 우리는 작가의 의도와 관계없이 커다란 감동을 받는다. 가령 이런 장면: “하루는 공부를 마치고 돌아오던 길에 서편으로 펼쳐진 아름다운 밤하늘을 보았다. 문득 여름밤의 별들은 필요 이상으로 한가한 삶을 사는 듯했고, 거기 비해 나는 필요 이상으로 바쁜 삶을 사는 듯했다.”(134면) 직장에서 퇴출되고 이혼까지 한 어느날 친구와 공던지기를 하다가: “그때였다. 매미들의 울음이 갑자기 멈춘 것은, 그리고 공이 시야에서 사라진 것은. 그 대신 나는 무언가 거대하고 광활한 것이 내 머리 위에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하늘이었다.”(239면) 이런 깨달음 끝에 ‘나’와 친구는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을 모아 삼미팀과 같은 유희적 야구를 즐길 클럽을 만든다. 그리고 놀이삼아 삼천포의 어느 해변마을로 전지훈련을 간다: “해가 뜨면 마을 사람들은 일을 시작한다. 아무도 서두르지 않는다. 뛰어다니는 것은 개들뿐이고, 때가 되면 밥을 먹고, 해가 지면 잠을 잔다.”(276면) 소속과 등급, 경쟁과 퇴출 대신에 자율과 협동, 근로와 휴식이 어우러진 생태적 유토피아를 목격함으로써 그들은 이 세계가 그런 꿈을 지닌 새로운 인간들에 의해 천천히 재구성될 것으로 기대한다. 이렇게 살펴본다면 『팬클럽』은 현존질서에 포박된 한 소년이 심리적 장애와 사회적 난관을 돌파하여 자아의 해방에 이르는 과정을 추적하는 성장소설이며, 억압과 강제가 극복된 세계의 빛나는 사회적 영상을 보여주는 일종의 미래소설이기도 하다. 그러나 앞에서 지적했듯이 이 소설에는 결함과 가능성이 혼재한다. 신진작가 박민규가 건강한 역사의식의 소유자일뿐더러 해학과 풍자에 넘치는 능숙한 문장의 필자라는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하지만 난마와 같이 얽힌 이 시대의 복합적 현실을 거대한 서사적 형상 안에 담아내는 데는 그것만으로는 아직 모자란다. 이제부터 이 작가의 진정한 내공이 필요하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