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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근대를 사는 괴물의 자의식 그리고 소설의 불안

백민석 장편 『죽은 올빼미 농장』, 작가정신 2003

 

 

김영찬 金永贊

문학평론가. youngmarx@hanmir.com

 

 

어느날 ‘나’는 ‘나’의 주소로 배달된 자기 것이 아닌 편지를 무심코 뜯어 읽고서는 소스라치게 놀란다. ‘나’는 이미 삼년 전에 그와 똑같은 일을 겪었던 것이다. ‘나’는 ‘죽은 올빼미 농장’이라는 곳에서 보내온, 병든 아이와 어미의 사연이 담긴 잘못 배달된 편지 두 통의 발신지를 찾아나선다. 그러나 ‘나’가 편지의 주소를 찾아가 발견한 것은 이미 삼십년 전에 없어졌다는 농장의 황량한 폐허뿐이다. 『죽은 올빼미 농장』에서 백민석(白旻石)은 이 기이한 서사적 장치를 배경으로 ‘아파트먼트 키즈’의 분열된 삶과 의식에 대해 이야기한다.

죽은올빼미백민석이 그리는 소설 속 인물들의 모습은 하나같이 어딘가 불길하고 일그러져 있다. 우선 대중음악 작사가인 주인공 ‘나’부터가, 자기 눈에만 보이는 인형과 말을 주고받으며 어릴 적 들었던 그로테스크한 자장가에 강박적으로 집착하는 퇴행적인 인물이다. 그런가 하면 ‘나’가 가사를 써주기로 한 여고생 신인가수 ‘해아리’는 기르던 개가 영특하게도 자기를 대신해 발코니에 목을 매고 자살했다고 태연하게 이야기하는 그런 아이다. 또 ‘나’의 후배인 작곡가 ‘손자’는 아이를 낳고 싶다는 터무니없는 소망을 품고 수술비 때문에 난동을 부리다 큰 상처를 입은 후 결국 인형의 꾐으로 자살하는데, 그 역시 애초 뒤틀린 이상심리의 소유자이기는 마찬가지다. ‘나’가 의지하는 유일한 여자친구로, 매일 한치의 오차도 없는 계산된 삶을 기계처럼 반복하며 낡은 아파트의 황량한 무덤에서 수시로 희열에 들뜬 안식을 찾는 ‘민’ 또한 충분히 도착적이다.

백민석은 이 소설에서 이들의 기괴하고 뒤틀린 삶의 근원을 자연이 제거된 음울한 도시적 환경의 불모성에서 찾고 있는 듯하다. “무엇이든 더 옅고 얕”(51면)은 창백한 도시적 삶에 대한 우울한 자의식은 끊임없이 ‘나’를 사로잡고 있으며, 민은 아파트먼트 키즈에게 자연이 있다면 그것은 바다나 하천 같은 것이 아닌 아파트가 사라진 바로 그 삭막한 폐허라고 이야기한다. 그녀에 따르면, 설령 그곳에서 유령이 보낸 편지를 받는다 한들 하등 놀랄 일이 아니다. 죽음의 기운을 뿜어내는 농장의 폐허 같은 것은 이 도시 어디에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를 비롯한 이들 모두는 근대 도시가 낳은 괴물이다. 백민석은 ‘나’의 시점을 통해 이 괴물의 자의식을 건조하게 펼쳐 보인다. 그리고 ‘나’의 병적인 분열과 망상이 반영된 시점의 특성은 이 소설의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기괴한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담담히 전달하는 ‘나’의 어조 때문에 그 기괴함은 자연스러운 듯 받아들여지지만, 이야기는 그렇기 때문에 더욱 섬뜩하다. 가령 ‘나’와 대화하며 동거하는 인형이 ‘나’의 눈에만 보이는 가공의 존재라는 사실이나 ‘나’가 고성의 농장을 찾았을 때 본 두 사람(자전거를 탄 아이와 등이 바싹 휜 여인) 역시 농장의 유령이었다는 것을 독자들은 나중에서야 깨닫는다. 그리고 ‘나’는 문을 여는 순간 손자가 인형의 사주로 목에 줄을 매고 베란다로 뛰쳐나갔다고 서술하지만 ‘나’가 보았다는 그 장면의 진실은 끝내 의심스러운 것으로 남는다. 연필로 꼭꼭 눌러쓴 두 통의 편지가 ‘나’ 스스로 자기에게 보낸 편지가 아니라고 단언할 근거가 없는 것처럼, 손자의 죽음이 ‘나’가 의식하지 못한 채 ‘나’ 스스로 연출한 상황이 아니라고 할 근거 역시 어디에도 없다. 이같은 서사의 모호함은 애초에 장면을 포착하는 시점 자체의 특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소설을 이끌어가는 이러한 시점의 성격은 흥미롭게도 ‘나’가 아닌 다른 인물들에 의해 다른 방식으로 암시된다. ‘나’의 분열된 내면의 한쪽인 인형은 차라리 미쳐버렸으면 좋겠다는 ‘나’에게 야릇한 미소를 보내며 “걱정 마, 내가 네 대신 미쳐가고 있잖아”(87면)라고 이야기하며, 손자와 민은 모두 ‘나’에게 어느 순간 이렇게 말한다. “어딜 보고 있는 거야? 네 시선이 이상해” “지금 날 보고 있는 거야?”(133면)

이렇게 본다면 백민석의 이 정신병적 텍스트는 괴물 같은 근대를 괴물로 살아가는 도시의 자식들의 분열된 의식에 대한 일종의 과잉진술(overstatement)이다. 헤겔은 주어진 삶의 질서를 낯설어하고 불편해하면서도 그 낯섦을 삶의 조건으로 승인하는 근대의식의 구조 속에서 정신착란을 보았지만, 거기에서 더 나아가 스스로 괴물이 됨으로써 그 모든 근대의 광기를 내면화하는 ‘나’는 그러한 근대적 주체성의 병리적 극한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작품 속 ‘나’를 근대의식에 내재하는 정신착란의 섬뜩한 징표로 읽을 수 있는 것은 그런 까닭에서다.

‘나’가 잘못 배달된 편지의 발신지인 농장의 폐허에서 발견하는 것은 바로 그 자아의 진실이다. 등줄기를 서늘하게 만드는 황량한 빈터와 오래 전에 말라버려 잡흙으로 메워진 들샘, 그리고 그곳에서 발견되는 뼛조각, 그것들이 뿜어내는 죽음의 기운, ‘나’의 진실은 바로 그곳에 있다. 그런 측면에서 농장의 폐허는 ‘나’ 바깥에 존재하는 ‘나’인 셈이다. 현재의 ‘나’를 사로잡고 있는 그 죽음은 물론 과거의 망령이 드리운 그늘이다. “그때는 거의 모든 게 황혼처럼 예뻤나? 아니. 그렇다고 믿고 싶을 뿐이지. 내 기억엔 거의 모든 게 저 황혼처럼 핏빛이었어.”(13면)라는 진술에서도 드러나듯, 결코 아름답지 않은 ‘나’의 유년은 죽음을 불러오는 인형으로 살아남아 나와 동거하고, 불길한 죽음을 노래하는 자장가에 대한 ‘나’의 광적인 집착과 향수를 통해 끊임없이 현재로 되돌아온다. ‘나’는 수신인을 잘못 찾은 편지의 호명에 답함으로써, 죽음의 이미지로 얼룩진 그 과거의 망령이 현재의 삶과 한데 얽혀 ‘나’를 집어삼키는 “침울하고 음침한 소용돌이”(76면)로 회귀하는 바로 그 진실의 장소를 의식적으로 대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라깡(Lacan)의 말처럼 편지는 항상 목적지에 도착한다.

손자가 죽은 뒤 결국 ‘나’는 들샘을 파내 물을 다시 솟게 만들고 인형을 그곳에 던져버리며, 마저 기억해낸 자장가를 해아리에게 공연중에 부르게 함으로써 과거의 망령에 대한 애도작업을 끝마친다. 농장의 폐허를 다시 찾은 ‘나’는 “빈 땅 외의 다른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179면)는 자각과 함께 죽음을 부르는 음울한 과거의 망령을 떨쳐버리고 현재와 마주서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앞으로 이 도시에서 편안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아니, 결코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민의 말대로 그런 죽음의 농장은 “눈이 멀었거나 부주의해서 보지” 못할 뿐 “바로 우리 이웃에”(131면) 널려 있기 때문이며, ‘나’는 이제 인형과 자장가의 도움없이 그 죽음 같은 현재를 맨몸으로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끝난 후에도 새롭게 시작되는 듯 보이는 ‘나’의 불안은 거기에서 비롯된다. 과거의 망령에 들린 정신병적 분열은 역설적이게도, 죽음 같은 현재의 삶을 견디게 해주는 사악한 힘으로 ‘나’를 사로잡는,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기도 한 까닭이다.

지금 백민석의 소설은 이 불안 앞에 마주서 있다. 돌이켜보건대 『헤이, 우리 소풍 간다』(1995) 이후 백민석 소설의 미학은 ‘스스로 괴물 되기’의 자의식과 방법적 전략에 의해 작동되어왔다. 그것은 그의 소설에 새겨져 있는 한국적 근대의 트라우마(trauma)의 흔적이자 거꾸로 나름의 방식으로 그에 반응하는 일종의 주체 형식이기도 하다. 백민석의 소설에 수시로 출몰하는 유령-타자는 끊임없이 현재로 귀환하면서 그 트라우마를 환기시키는 유년의 망령이며, 그와 동거하는 일그러진 코기토(cogito)는 궁극적으로 그의 소설을 이끌어가는 동력이다. 백민석의 소설이 김영하나 배수아 같은 다른 90년대 신세대 작가들의 소설과 뚜렷이 다른 방식으로 발산하는 강렬하고도 불길한 매혹의 근원은 거기에 있다. 그러나 그의 소설에서 터져나오는 분노와 광기가 ‘나’바깥을 향한 시선과 참조틀을 동반하고 있지 않은 한, 그것은 언제든 관습화된 포즈로 굳어버릴 수 있는 위험에서 자유롭지 않다. 매혹의 근원이 동시에 감옥이 될 수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사실 『죽은 올빼미 농장』은 그같은 이전 백민석 소설의 익숙한 모티프와 스타일을 형태를 달리하여 반복하고 있는 소설에 가깝다. 이전 소설들에 대한 자기참조가 한층 자립화된 형태로 들어서고 있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이미 그렇게 위험의 한가운데로 발을 옮겨놓고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을 의미있게 만드는 것은 그 동어반복의 한가운데 끼여든 작은 변화의 징후다. 우선 이 소설에는 비록 소소하나마 스스로를 가둔 감옥에 대한 반성적인 되돌아봄이 있다. “괜히 취한 척하고 아픈 척하고, 괜히 배고픈 척하고 분노한 척하던”(186~87면)90년대에는 그 “척들까지”도 한결같이 규격품 같고 기성품 같았다고 회고하는 ‘나’의 진술은, 어떤 측면에서는 작가 자신의 소설을 되돌아보는 자기지시적 언급으로 읽히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이 소설 전체가 과거 작가 자신의 고유한 방법적 전략에 기대어 자신의 소설을 반성적으로 되돌아보는 자기 지시적 알레고리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오히려 그러한 에두른 자기성찰의 바깥에 있다. 소설의 마지막에 ‘나’는 농장의 폐허를 찾아 편지를 태워버리고 말라버린 들샘을 파내 그곳에서 “수십년이나 땅에 묻혀 썩으며 속이 다 허물어진 뼛조각”(184면)을 땅 밖으로 드러내놓는다. 이는 분명 현재의 ‘나’를 사로잡고 있는 죽음 같은 과거와의 결별을 연출하는 행위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농장에서 굶주리다 아무도 모르게 죽어 묻힌 어느 모자의 원한을 위무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이렇듯 죽음의 삶과 결별하는 ‘나’의 새로운 출발이 은폐된 타자의 죽음을 발견하고 어루만지는 행위와 겹쳐진다는 것, 백민석 소설의 새로운 가능성은 그 스스로 연출하고 있는 이 전환의 지점을 어떻게 뚜렷하게 의식화하고 밀고 나가 소설의 육체로 그러안을 것인가에 달려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백민석은 애써 도달한 그 지점에서 더이상 나아가지 않는다. 무엇보다 그 ‘다른 죽음’은 ‘나’의 죽음 같은 과거와 현재를 환기하는 거울상에 머물고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나’의 안에, ‘나’의 체험 안에 갇혀 있는 것이다. 근대의 악몽은 그렇게 또다시 사사화(私事化)된다. 죽음의 과거에 사로잡힌 자기를 되돌아보는 계기가 한낱 “뽕짝이 더 어울리는 나이”(50면)에 대한, “나이를 먹어간다는 게 어떤 건지”(116면)에 대한 상식적인 자의식에서 비롯된다는 것도 그렇게 보면 우연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트라우마와 광기를 떨치고 죽음의 현재 앞에 마주서기로 한 ‘나’의 불안은 또다른 측면에서 백민석 소설의 변화를 조심스럽게 예고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문제는, 감옥에 스스로를 가두지 않으면 미학도, 매혹도 없으리라는 불안이다. 백민석의 소설은 과연 일그러진 광기 없이 이 괴물 같은 근대를 또다른 방법으로 감당하고 헤쳐나갈 수 있을 것인가? 이 물음에 답하는 것은 물론 그의 소설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