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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이문숙 李文淑
1958년 경기도 금촌 출생. 1991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silmoon@dreamwiz.com
윤이월
칠이 바래고 기둥이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한
樓입니다
봄볕이 좋아라 사람들이 다 쏟아져 나와
樓 난간에 빙 둘러앉았습니다
平心樓라니요
이따금 홀로 앉아 ‘平’자를 들여다보면
마음이 착 가라앉는게 영 밋밋하고 뭉툭해서
평자 뒤에 ‘安’자를 슬쩍 끼워넣곤 하였습니다
오늘은 樓가 비칠합니다
눈 떨어지는 데 망울을 깨우는 진달래가 있고
눈 떨어지는 데 벼룩자리가 아물거립니다
미친 버들이라니요 곱게 물오른 가지가 툭툭 떨어집니다
목을 가누지 못하는 아가의 머리를 받치느라
쩔쩔매는 앳된 청년 아빠를 보면서
할매씨 웃어요 홀쭉한 입이 더 쪼그라져요
첫만남인지 저쪽 처녀총각은
뜨일 듯 말 듯 살짝 비켜 앉았습니다
이제서 ‘平’자가 바로 보이네요
이 들썩대는 樓를 지그시 눌러줍니다
밥솥을 닮은 이 산
입 안에서 데그럭대며 굴러다니는 설익은 밥알이
부드럽게 퍼지며 익어갑니다
平安樓입니다
서까래와 기둥과 마루가 분주한
閏이월 초하루입니다
세탁소
갑자기 공중에서 셔터 떨어지는 소리 들린다
세상은 거대한 셔터가 달린 상점이 된다
못해놨어요 그 말만 던지고
다림질만 해대는
주인의 펑 젖은 등이 갑골문자처럼 단단해진다
가로수 넓적한 이파리 아래 피신한 새들을 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쫄딱 비를 맞는다
그렇게 되면 세탁소에서 빠져나온 처마 아래
연통이 그들의 마지막 피난처가 된다
비좁은 자리를 교대로 앉아 있다 날아간다
그동안 다른 새들은 빗속에서 펄쩍펄쩍 뛴다
내려앉을 연통 위 자리가 넉넉지 않은 것이다
연통 위에 쪼르라니 앉아 저 급작스런
셔터 떨어지는 소리도 들을 수 없는 것이다
양철 표면을 긁는 발톱 소리가 요란타!
몸에 온기가 도는지 달라붙었던 털이 일어서고
물찌똥을 찍 갈긴다
이 비 그치면 지상에 뵈지 않던 것들이
하나둘 늘어난다
다림질된 옷들이 횃대에 하나둘 걸리는 세탁소
천둥과 번개를 쪼개고 작은 씨앗들이 들어앉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