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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척박했던 시절, 그들의 사랑

전숙희 『사랑이 그녀를 쏘았다』, 정우사 2002

 

 

이호철 李浩哲

소설가

 

 

꼭 53년 전 6·25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에 본인의 뜻대로 한강변에서 총살형으로 처형되었던 소위 여간첩 김수임(金壽任) 이야기가 뒤늦은 감은 없지 않지만 이제야 실록소설로나마 발간되었다는 것 자체는 우리 사회가 이 정도로 변했고 나름대로 성숙되었다는 것을 실감케 해준다. 더구나 이 실록소설을 김수임 본인과 남다르게 친숙했던 전숙희(田淑禧)라는 분이 80세가 넘은 나이에 옛날 그때 자기자신이 보고 겪은 그대로 써냈다는 데에도 각별한 뜻이 있어 보인다. 대목대목 면밀한 사실 검증은 더 필요하지 않겠나 싶지만, 살아 생전에 한때 필자도 가까이 지낼 수 있어 드물게 인간적 진폭이 컸던 모윤숙이라는 사람의 이 사건과 관련된 거취(去就)도 무척 실감을 더해주고 있다.

1940년대 후반의 해방공간 속에서 주로 이화여전 출신의 내로라 하는 신여성들 중심으로 ‘낙랑 클럽’이 모윤숙의 주도로 생겼다는 삽화 같은 것도 비록 본 책자에서는 주변적인 곁가지가 되겠지만, 1970년대 중엽 이후 모윤숙이 또 ‘라운드 클럽’이라는 것을 만들어 성수동의 널따란 자기 저택에 한달에 한번씩 당시의 문단 중진들이었던 월탄, 소천, 이산에, 안수길, 박진, 이항녕, 김종문, 전숙희, 입심 좋았던 조애실, 김남조, 정연희, 김후란, 김선영, 추영수 등등 그밖에도 스무남은 명씩 초대해 당시로서는 귀한 양주 곁들여 더러는 댄스 파티까지 벌였는데, 남정현, 박용숙과 함께 40대 초의 젊의 나이로 그 말석에 낄 수 있었던 필자 같은 사람으로서는 그때마다 매우매우 황감했던 것이어서, 그보다 또 20여년 전의 이 책자에 나오는 ‘낙랑 클럽’ 시절의 모윤숙과 김수임의 관계를 비롯한 당시 정황도 손에 잡히듯이 약여하게 와닿는다.

사실은 그때도 필자는 기회를 엿보다가 슬쩍슬쩍 김수임 얘기를 물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때마다 모윤숙은 얼근하게 술기운이 있는 속에서도 거의 역정을 내다시피 하였다. 이렇게 즐겁게 놀자는 자리에서 웬 그런 소리를 꺼내느냐고 빠락 소리를 지르던 것이었다. 그런 정도로 김수임 사건은 모윤숙으로서도 평생 씻을 수 없는 큰 상처로 보였다.

사랑이그녀를쏘았다사실은 이 책을 읽으면서 그런 쪽으로도 짙은 아쉬움이 남는다. 그나마 전숙희라는 사람이 팔십을 넘긴 고령으로 살아 있어 이만한 기록들을 남기게 된 것만도 참으로 요행이지만, 해방 전부터 해방 직후의 공간 속에서 이 사건을 처음부터 끝까지 곁에서 지켜보았을 뿐만 아니라 첫만남부터 깊이 관련되었던 모윤숙 본인 서술로 이만한 분량의 글을 남겼다면 더욱더 선열(鮮烈)하지 않았을까. 아니, 문학적으로도 그이의 대표작으로 후세에 회자되고 있는 『렌의 애가』보다 훨씬 값진 작품이 나오지 않았을까. 뿐만 아니라 우리 현대사의 심히 척박한 단면까지 깊숙이 도려내 보여줄 수 있지 않았을까. 모윤숙이 지금까지 살았다면 이미 94세를 넘겼을 것이니 그런 걸 바라는 것은 애당초 무리일는지도 모르겠다. 끝내는 이런 것을 일컬어 운명이라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김수임은 1911년 빈농의 딸로 태어나 열한살 때 민며느리로 팔려갔다가 탈출해 미국인 선교사의 도움으로 상경, 미국인 독신녀의 양딸로 이화여전 영문과를 졸업했다. 모윤숙과는 기숙사의 룸메이트였다고 한다.

한편 이강국은 1906년 경기도 양주생으로 보성고보와 경성제대 예과를 거쳐 법문학부 졸업 후 독일 베를린대학에서 유학한 지식인이다. 독일에서 사회주의에 투신, 독일공산당에까지 가입했던 그는 귀국해 노동운동 등으로 몇번씩 체포되었다. 이강국이 함흥형무소에 수감돼 있을 때 모윤숙과 함께 면회를 갔던 김수임은 첫눈에 그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이 실록소설은 이 만남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이들의 사랑은 이념이 치열하게 대립되던 해방정국에서 가시밭길을 걷는다. 북으로 넘어간 이강국이 돌아오지 않자 김수임은 ‘낙랑 클럽’에서 만난 미 헌병사령관과 동거하게 되고, 이강국은 김일성으로부터 남로당 재건의 임무를 부여받고 서울로 돌아와 김수임과 재회한다.

이강국이 당시 미군정하의 남한에서 단독정부 수립에 대한 반대공문을 공포했다가 긴급체포 대상이 되고, 김수임은 쫓기던 그를 의사로 변장시켜 개성으로 탈출시킨다. 이 사건을 계기로 김수임은 1950년 6월 17일경 당년 40세로 총살형당하고, 김수임의 도움으로 월북하여 북조선 인민위원회 사무국장, 상업성 법규국장, 인민군 병원장 등을 역임하던 이강국 역시 1955년 12월에 박헌영 등과 함께 미제(美帝) 간첩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는다.

이 책을 읽어보며 각자대로의 느낌이 있겠지만 한마디만 덧붙이겠다. 2003년 지금 이 싯점에서였다면 그 사건은 어느 누구에게든 간(肝)에 기별도 안 가지 않았을까. 처음부터 끝까지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로만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는 이런 일이 ‘총살형’으로 끝막음을 했던 것이었고 바로 그 일주일쯤 뒤에 6·25전쟁이 발발했다. 그 정도로 첨예하고 척박한 시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