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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김원일 金源一

1942년 경남 김해 출생. 1966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장편 『불의 제전』 『바람과 강』 『마당 깊은 집』 등, 소설집 『마음의 감옥』 『푸른 혼』 등이 있음. pine2545@hanmail.net

 

 

 

오마니별

 

 

1

 

조씨 있는가 하고 부르는 소리가 길 아래쪽에서 들렸다. 전짓불빛이 마당 입구를 스쳐갔다. 어스름은 늘 골짜기 아래에서부터 바람을 몰아왔고, 등성이를 타고 오른 바람이 펼친 치마폭처럼 산을 흔들며 훑어나갔다. 느릅나무와 개암나무가 스산스레 잎을 떨구었다. 마당을 덮은 가랑잎이 아이들 줄 서듯 가지런히 선 참깨 묶음을 비껴 언덕 아래로 쓸려갔다. 전짓불빛이 마당까지 올라오자 불빛과 인기척을 알아챈 염소우리의 염소들이 기척을 내며 수런댔다. 삽짝은커녕 울조차 없는 마당으로 당주골 이장 황씨가 들어섰다. 이장 손에 들린 전짓불빛이 툇마루에 나앉은 조씨를 집어냈다.

“귀신 나오겠군. 왜 불도 안 켜고 우두커니 앉았어.” 가는귀먹은 조씨라 황이장이 큰 소리로 나무라곤 마루로 올라와 손수 형광등 스위치를 올렸다. 형광등 전구가 몇번 깜박대더니 흐릿한 빛을 냈다. “전구를 갈아야겠군. 저녁은 먹었어?”

조씨가 한술 떴다고 시무룩이 말하자 황이장이 전기플러그가 꽂힌 전기밥통 뚜껑을 열어보았다. 혼자 두 끼니쯤 먹을 밥이 남아 있었다. 흠투성이 낡은 두레상에는 치우지 않은 먹다 남긴 밥그릇에 찬이라곤 김치, 멸치조림, 새우젓이 고작이었다. 홀아비 노인의 지지리 궁상에 이장이, 나이도 있는데 이렇게 먹어서야 어떻게 힘을 써 하곤, 저녁 찬으로 먹고 온 김치찌개며 된장국이 남았다면 처에게 가져다주라 일러야겠다고 생각했다.

“자네 어디 갔더랬어?”

“뭐라구?”

“낮에 말야.”

목을 빼고 꾸부정히 앉은 조씨가 대답을 않다 허리 뒤를 가만가만 주물렀다. 이장이 허리가 아프냐고 물었다. 조씨가 아니야, 괜찮아 하며 호작질하다 들킨 아이처럼 하던 동작을 멈추었다. 낮참에 조씨는 염소들을 몰고 범바위로 올라갔다가 새끼염소 한마리가 엇길을 놓기에 그놈 뒤를 쫓다 허방에 발을 접질러 바위에 허리를 찧은 게 시큰하게 둔통이 왔던 것이다. 조씨는 풀을 한짐 베어서 지게에 지곤 여덟 마리 염소를 몰고 절름거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아예 일을 작파해 참깨털이도 제쳐두고 누웠다가 저녁밥 한술도 뜨다 말다 했다. 한해 다르게 염소치기며 밭농사가 힘이 부치는 조씨에게 그런 실수는 흔한 일이 되고 말았다.

“낮에 말일세, 분교 선생이 마을로 올라왔어. 자네 만나러 집에 들렀더니 없더라며, 내일 다시 오겠다더군.”

“뭐라구, 선생이?”

“그래, 선생이.” 이장이 뜸을 들였다가 조씨 곁에 바투 앉아 큰 소리를 내질렀다. “자네한테 손위 누이가 있었다고 했지? 전쟁 때 잃었다는 누이 말야? 그건 기억하고 있잖은가.”

“암, 누이가 있었어. 폭격 맞고 죽었지. 그런데 왜?” 조씨가 머리를 틀고 침침한 눈을 닦으며 물었다.

1951년 초다듬 그해 첫 겨울, 조씨는 누이가 비행기 폭격에 죽었다 믿고 있었다. 엄마도 그렇게 폭격 맞고 운신 못한 끝에 숨을 거두었다. 조씨는 엄마가 숨 거두는 순간을 누이와 함께 지켜보았기에 다른 기억은 다 망가졌어도 그때 보았던 그 장면만은 색바랜 사진처럼 남아 있었다. 땅이 꽝꽝 얼어 오마니를 묻어줄 수도 없다며 누이가 오랫동안 섧게 울었다.

“만약에 말일세, 그 누이가 아직 살아 자네를 찾는다면 어떡하겠나?”

“날 찾는다구? 실없는 소리 말게. 내가 본걸. 갑자기 비행기가 나타나 총을 쏘아대구 폭탄 떨어지자 사람이 많이 죽었어. 나중에 보니 누이가 없어졌어. 아무리 찾아도 누이가 없어. 폭격 맞구 죽은 거야.”

“자네는 누님을 늘 누이라 불러 헷갈리네. 자네 말대로라면 손위로 누님 맞지, 그렇지?”

“그래 맞아. 내 위 누이야.”

조씨는 그해 겨울, 살을 도려내듯 했던 추위가 아직도 살갗에 알얼음으로 박혀 있는 듯 부르르 진저리쳤다. 그 많은 시체들 사이에 누이의 피투성이가 된 늘어진 몸뚱이가 떠올랐다. 조씨는 누이 시신을 직접 목격하지 않았으나 그 장면이 머릿속에 처음 그려진 후 누이만 떠올리면 그렇게 죽은 모습으로 아예 굳어져버렸다. 이제 와서는 살아생전 누이의 유독 반들거리던 눈빛과 길동그란 생김새조차 지워졌다. 그런 흐릿한 기억조차 말을 듣던 옆사람이 지난날의 장면을 재생해주려 조언을 보탰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눈 내리구, 너무 추웠어…… 그런데 갑자기 비행기가 폭탄을…… 사람이 많이 죽구 누이가…… 조씨가 겁에 질려 울 듯한 표정으로 그렇게 떠듬떠듬 말하면 옆에서 듣던 이가, 눈보라 치는 한겨울에 한뎃잠 자며 피란 나오다 비행기가 나타나 폭탄을 떨어뜨려 사람이 많이 죽었겠군. 그때 꽝 하고 폭탄이 터지자 그 진동으로 자네 귀청이 떨어져나갔구 누이도 그 파편에 죽었지? 그런 보탬말이 조씨 머릿속에 사실처럼 확인되어, 맞아, 맞아 하고 맞장구쳤고, 기억으로 저장되었던 것이다.

뿌연 하늘에 좁쌀알갱이 같은 눈보라가 휘몰아쳤다. 얼굴을 치는 눈보라가 얼마나 맵게 찬지 눈조차 제대로 뜰 수 없었다. 산지사방에서 모여든 많은 피란민들이 앙상한 버드나무 늘어선 한길 따라 걷고 있었다. 자전거, 수레, 지게에 걷지 못하는 아이와 덩이덩이 짐을 싣고 허리 휘게 등짐진 채 많은 피란민이 한데 뭉쳐 허연 입김을 뿜으며 어뜩비뜩 길을 재촉했다. 피란민들은 솜옷을 덧껴입었고 수건으로 목과 머리통을 싸맨 채 얼어 다져진 길바닥에 미끄러지지 않으려 신발에 새끼줄로 감발을 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앞쪽 언덕 너머에서 비행기 몇대가 머리를 스칠 듯 나타났다. 나이든 이와 아녀자 들은 오도 가도 못한 채 어린 자식을 품에 감싸고 그 자리에 머리 박고 엎드렸다. 청장년은 길가 개골창으로 뛰어들거나 밭등성이로 날랜 걸음을 놓았다. 저공으로 날아온 비행기들이 한차례 기총소사를 퍼붓더니 피란민들 머리꼭지에 폭탄 여러개를 떨어뜨리곤 살같이 사라졌다. 한순간에 당한 난리로 피란민 대열이 흩어졌고 한길은 아비규환이었다. 찢어진 몸뚱이와 피가 눈보라 속에 튀고 비명과 신음소리가 낭자했다. 어른 아이 들이 눈바닥에 피걸레로 늘어져 꼼짝을 안했다. 나란히 길을 걷던 소년은 그때 그만 누이를 놓쳤다. 소년은 시신을 안고 울부짖는 사람들과 아직 숨이 붙어 신음을 내지르는 부상자들 사이를 누비며 누이를 찾았다. 비행기가 되돌아와 나머지 사람들을 죄 몰살할 거라고 누군가 소리쳤다. 어서 여기를 떠나야 산다고 수염이 고드름 된 노인이 소년에게 말했다. 한 아낙이, 이 피 좀 봐 하더니 정수리에서 흘러내린 피가 면상을 덮은 소년 얼굴을 머릿수건으로 닦아주며, 앞서가는 사람들 속에 누이가 있나 찾아보라고 말했다. 겨우 목숨을 건진 피란민들이 다시 모여 살육의 현장을 빠져나갔다. 소년은 피를 철철 흘리고 걸으며 누이를 찾았다. 목청이 쉬도록 누이를 불러도 그들 속에 누이 모습은 간데없었다. 그때서야 소년은 누이가 폭탄이 터질 때 죽어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누이를 잃은 그해 겨울, 소년은 머리가 너무 아파 제정신을 놓쳐 피란민 대열에서 낙오되었으나 추운 날씨 덕에 정수리 상처는 그럭저럭 아물었다. 소년은 거지가 되어 문전걸식하며 시골집을 떠돌았다. 너무 굶어 기력이 다해서 쓰러지기도 여러차례였다. 얼어 죽기 직전 숨이 목젖에 걸린 소년을 행인이 발견해 길갓집 더운 방으로 옮겨 살려내기도 했다. 소년은 다시 길을 나섰다. 얼굴과 손발이 동상에 걸려 퉁퉁 부은 몸으로 여염집 처마 밑 따뜻한 굴뚝에 기대어 새우잠을 잤다. 그래도 명줄은 길어 봄이 왔을 때, 소년은 얼이 반쯤 빠져 맹해진 상태로 천안 부근 산골 장터를 떠돌고 있었다. 아무나 잡고 헛소리로 오마니, 누이를 불러대는 실성기를 보였다.

“조씨, 내일은 멀리 나서지 말구 집 안에 죽치고 있어, 알았지? 현선생이 자네를 만나러 온다니깐 내가 같이 옴세. 현선생이 인터넷인가 그걸 하다 누이가 자네 찾는 걸 알았다네.”

“누이가 날 찾는다구? 거짓말이야.”

“조만간에 나와 종씨인 박사님이 똑같이 닮은 사람도 만들어낸대. 자네 누이가 벌써 만들어졌는지 모르지만. 하여간 현선생 말로는 자네 누이 비슷한 분이 전쟁 때 잃은 남동생을 찾고 있다더군.” 황이장이 손에 든 전짓불을 켜고 마당으로 나섰다. “나 그럼 내려감세.”

조씨가 배웅을 하러 한쪽 다리를 절며 축담에 내려섰다. 다리까지 왜 저냐고 이장이 묻자, 조씨가 괜찮다며 손사래 쳤다.

“아침저녁으론 날씨가 많이 차졌어. 감기 조심하구. 군불 안 땠다면 전기장판에 스위치 넣고 자라구. 늙을수록 몸을 따뜻이해야지.”

“바람이 세어 별도 가물가물하군.” 틈만 나면 넋 빠진 꼴로 별 보기를 좋아하는 조씨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바람 건너 아스라이 멀리 있는 별빛이 흐릿했다. “말이 잘 안 들리는데, 눈까지 가나봐.”

“무슨 잠꼬대 같은 소릴. 바람 잠잠한 한겨울밤이나 여름밤에 별이 밝지.”

황이장 목소리가 전짓불빛 따라 언덕 아래로 멀어졌다.

그날 밤, 조씨는 뒤허리 둔통으로 몸을 돌려 눕지 못하고 밤 내내 골골 앓았다. 추석을 앞둔 절기라 골짜기를 훑는 밤바람 소리가 하루 다르게 기를 세웠고 귀뚜리 울음소리가 애잔했다.

봉창이 뿌윰하게 트여오자 우리에 갇힌 염소들이 날이 밝았다며 수런댔으나 오늘따라 조씨는 자리에서 일어나기가 힘에 부쳤다. 웬만큼 살았어, 이만큼 살았으니 됐어, 하고 늘 외는 소리를 읊으며 조씨는 꿉꿉한 이불 속에서 얕은 숨을 쉬며 꾸물댔다. 햇살이 느릅나무와 개암나무 우듬지를 비출 때야 겨우 몸을 일으켰다. 원숭이처럼 앉은걸음으로 마루로 나오니 하늘에는 새털구름이 높이 떠 있을 뿐 날이 맑고 건들바람이 쌀쌀했다. 조씨는 마당으로 나와 대나무관을 거쳐 확에 넘치는 찬물로 낯짝을 닦았다.

조씨가 전기밥통에 남은 밥을 한술 던 뒤 비누치대기로 밀린 손빨래를 대충 마쳐놓았을 때야 분교 현선생과 황이장이 서리 앉은 갈잎을 밟고 언덕 위 외진 조씨 집으로 올라왔다. 안경잡이 젊은 선생이 등산모를 벗으며 조씨에게 인사를 차렸다. 현선생은 우선 영감님 사진부터 찍겠다며 조씨에게 허리 곧추 세워 정면을 바라보게 했다. 웬 사진까지, 하면서도 자기 모습을 찍어준다니 싫지 않은 듯 조씨는 시키는 대로 꼿꼿한 자세를 취했다. 뒤허리가 결려 조씨가 찡그리자, 현선생이 카메라에 눈을 가져대곤 신 김치, 김치 하며 웃으라고 말했다. 군살 없는 몸에 허옇게 센 짧은 머리칼, 턱이 긴 질그릇색 얼굴, 골 깊게 파인 주름살, 무릎 앞에 늘어뜨린 굳은살의 거친 손, 겅성드뭇한 허연 수염이 전형적인 농사꾼 촌로였다.

“그러고 보니 조씨 상판이 영판 염소를 닮았어.”

황이장이 껄껄대고 웃었다. 정말 조씨는 성질마저 염소를 닮아 한없이 순량한 사람인데 간혹 뻗대는 그 염소고집만은 마을 사람들이 말릴 수가 없었다. 현선생이 무릎 접어 디지털카메라로 조씨 사진을 여러장 찍었다. 당주골 길흉사를 추억으로 남겨주려 선생이 구입한 카메라였다. 현선생은 사진을 찍은 뒤 마루 끝에 앉아 조씨에게 찾아온 용건을 꺼냈다.

“영감님, 육이오전쟁 나기 전엔 어디서 사셨습니까?”

조씨가 가는귀먹었으니 큰 소리로 말해야 한다고 황이장이 일렀다.

“어디 사시다 당주골로 들어왔냐구요!”

“저 산 너머 먼 데야. 거기가 평안도라 하데. 그래서 내 이름이 평안이 아니오.” 조씨가 자기 말이 재미있다는 듯 앞니 빠진 입 안을 보이며 흐물쩍 웃었다.

“실없는 사람하군” 하며 팔짱 끼고 선 황이장이 혀를 찼다.

조씨는 묽은 눈을 껌벅이며 마당귀에 선 한 그루 느릅나무와 두 그루 개암나무에 눈을 주었다. 가지를 떠날 서리 젖은 누른 잎이 아침햇살에 반짝였다. 조씨가 염소아저씨 조서방 따라 이 집으로 왔던 그해, 느릅나무는 아름드리 상수리나무 옆에 자식나무처럼 간짓대 굵기로 하늘하늘 서 있었다. 봄철에는 조서방 처가 느릅나무 어린잎을 따서 나물로 무쳐 먹기도 했다. 세월이 흘러 조서방 딸은 일찍 출가해 도붓장수 따라 먼 갯가로 떠났고 아들은 중학교를 마치자 염소 두 마리를 끌고 몰래 집을 떠난 후 소식이 없었다. 그리고 몇해 후 조서방이 죽고 뒤따라 그의 처도 세상을 떠났다. 조서방 내외 장례를 조씨와 당주골 사람들이 치렀다. 몇해 전인가, 조서방 아들이 당주골로 들어와 면소를 오가며 집터 팔겠다고 나서서 마을에 분답을 떨었다. 이 산골에서도 외진 언덕배기 그 땅이 몇푼 되겠으며, 살 임잔들 나서겠어? 다들 대처로 나가버려 당주골에 빈집도 흔한 걸 자네 눈으로 보잖는가. 그 땅과 헌집은 이제 조씨 몫이야. 조씨가 세상물정에 물러 새경도 안 받고 평생 조서방네 집안일을 거뒀잖은가. 범바위 아래 묻힌 자네 부모 묘에 벌초도 아들이랍시고 여태 조씨가 해오고 있는 줄 몰라? 부모 살아생전 코빼기도 안 비친 주제에 씨가 먹히는 소리를 해야지. 이장과 마을 늙은이들이 나서서 삿대질하며 따지자 조서방 아들이 머쓱하니 당주골을 떠난 후 여태 감감소식이었다. 그런 긴 세월이 흐를 동안 상수리나무는 마을 정자 기둥감으로 베어졌고 이제 느릅나무가 어미나무가 되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개암나무는 조씨가 이 집 정착한 그해 가을, 조서방이 데려온 자식 평안에게 지나가는 소리로, 죽은 네 엄마와 누이 보듯 하라며 심은 나무였다. 개암나무는 해마다 부쩍부쩍 키가 컸고 엄마와 누이가, 내 열매 먹고 너도 얼렁얼렁 크라는 듯 많은 열매를 달기 시작했다. 조씨 눈앞에 개암열매를 많이도 먹어온 지난 세월이 암암하게 흘러갔다.

“보자, 내 나이 예순하나 아닌가. 전쟁 난 이듬해라면 학교도 아직 입학 안한, 겨우 일곱살 아니었나. 나도 그때가 가물가물한데, 나보다 두어살쯤 위긴 하겠지만 제 이름에 나이도 몰랐던 조씨가 전쟁 전 이북 살았던 적을 어찌 기억하겠어?”

황이장은 조씨의 정확한 나이를 몰랐다. 조씨가 염소아저씨를 따라 당주골로 들어온 게 전쟁 난 이듬해 봄이었다. 면소 닷새장에 나가 염소 한마리 처분한 돈으로 마신 술에 거나해진 조서방이 마을 고샅길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말했다. 면소 장바닥에 비럭질하는 전쟁고아가 널렸는데 그런 애들 중에 하나야. 이번 장날에도 눈에 띄기에, 귀먹보라도 애가 하도 순둥이라 팔아버린 염소 대신 데려왔지. 그때 첫돌을 한살로 따져 여섯살이었던 황이장은 조서방이 쥔 새끼꽁다리에 매인 염소 두 마리 옆에 허수아비 같은 한 소년이 겁먹은 얼굴로 떨고 있음을 보았다. 땟물 흐르는 군복 윗도리가 무릎을 덮었는데 곯은 무처럼 퉁퉁 분 종아리 아래는 땟국 전 맨발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전쟁고아를 둘러싸고 이것저것 물었다. 이름은? 소년은 뭇 시선에 주눅이 들어 머리를 빠뜨린 채 떨고만 있었다. 이름과 나이를 물어도 소년은 대답을 못했다. 떠나온 고향을 알 리 없었다. 소년이 가는귀먹었음을 알자, 멀리서 왔냐고 묻는 큰 소리에 산 너머 먼 하늘을 가리켰다. 그러고 보니 숫구멍 자리 정수리에 머리털이 자랄 수 없는 큰 흉터가 있었다. 소년은 갈라터진 땟국 전 손등으로 눈물을 닦으며 오마니와 누이란 말만 겨우 흘리더니 머리를 흔들어대며 큰 소리로 울었다. 마을 사람들이 조서방이 데려온 전쟁고아를 두고 말을 맞추었다. 정수리 흉터로 보아 전쟁 때 파편을 맞아 머리와 귀를 다쳐 바보가 되었다. 영양실조가 원인이거나 태어날 때부터 머리가 모자란 아이일 수도 있다. 오마니란 말은 평안도에서 쓰는 엄마란 말이니 평안도에서 피란을 나왔음이 틀림없다. 남으로 피란 내려오다 엄마와 누이가 죽었기에 저렇게 큰 소리로 운다. 그렇게 결론 내리곤 마을로 고아를 무작정 데리고 온 조서방을 나무랐다. 면소 지서에 맡겨 고아원에 넘기든지 해야지 이런 귀먹보인 바보 아이를 데려와 어쩔 작정이냐고 따졌다. 다음 장날 면소로 나가 당장 지서로 데려다주게. 사람이 어디 염소새끼냐는 오례댁 말에 조서방이 버럭 역정을 내며, 자식도 둘뿐인데 내가 친자식으로 여겨 내 자식과 똑같이 키우면 되잖느냐고 되받았다. 마을에서는 사람 좋기로 호가 난 조서방인지라 이웃들은 그 말을 믿었다. 조서방은 자기 말을 책임지겠다는 듯 소년을 집으로 데려가 씻기고 먹인 뒤 아들이 입었던 옷일망정 멀끔하게 갈아입혔다. 자기 성에 소년 출신지를 따와 조평안이란 이름으로 두 자식 아래 호적에도 올렸다. 나이는 어림잡아 열살로 등재했다. 어느날, 면소 장에 나간 조서방이 간꽁치 몇마리를 사서 헌 신문지에 말아왔는데 평안이 그 신문에 박힌 큰 글자를 떠듬떠듬 읽었다. 그로써 평안이 전쟁 전 북에 있을 때 학교에 다녔음을 알 수 있었다. 조서방이 친자식 둘이 다니는 면소 초등학교에 평안을 데려가 선생과 상의한 결과, 늦게나마 입학이 가능함을 알았다. 평안은 조서방 두 자녀와 함께 시오리 길을 걸어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학습진도를 따라가지 못해 공부는 늘 꼴찌를 면치 못했다. 평안은 3학년을 마치곤 학업을 포기해야 했다. 평안의 한계가 거기까지였으니 머리 씀씀이는 십단위 더하기 빼기만 손가락 짚어 계산할 수 있을 뿐 초등학교 하급반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던 것이다. 더욱이 전쟁 전 기억을 회복하지 못해 아버지가 있었는지 없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엄마와 누이가 비행기 폭격으로 죽었다는 기억이 고작이었다. 엄마와 누이가 어디에서 그런 횡액을 당했는지도 몰랐다. 고향에서도 네 이름을 평안이라 불렀냐고 우스갯소리로 물으면, 평안이 맞아 하고 대답했다. 천둥이나 번개를 유독 무서워했고 마을에서 닭이나 개를 잡으면 이를 제대로 보지 못해 숨결이 거칠어져, 평안이 전쟁에 당했던 두려움을 잠재의식으로나마 느끼고 있음을 주위 사람들이 알아챌 뿐이었다. 조서방이 자식으로 거두며 돌보자 평안은 차츰 몸이 나고 살이 붙었다. 평안은 조서방 내외를 아버지, 엄마라 부르며 따랐다. 변성기를 넘길 즈음 평안의 머리도 웬만큼 트여 시키는 말은 대충 알아들었고 간단한 대화에는 별 지장이 없었다. 염소 키우기가 주업인 조서방은 평안에게 키우는 염소를 맡기게 되어 놀 짬이 늘자 주기(酒氣)를 달고 살았다. 친자식이 가출해버린 뒤로는 술병으로 몸져눕는 날이 늘었다.

“영감님, 인터넷을 조회하다 영감님과 살아오신 내력이 비슷한 분을 찾는다기에 혹시 영감님이 아닌가 하고 방문했습니다. 누이 이름이 기억나세요?” 현선생이 큰 소리로 물었다.

“누이? 누이라 불렀어. 이름은 몰라.” 마당 한귀를 멍청히 바라보는 조씨 표정이 땡감 씹듯 떨떠름했다.

자연생태에 관심이 많은 현선생은 초등학교 분교 교사를 자원한 총각선생이었다. 분교는 전학년 학생수가 고작 여섯이라 선생이 한 명뿐이었다. 현선생은 예순 넘은 노인들이 대부분인 당주골의 상담역을 맡아 산골 노인들이 겪는 어려움을 도와주는 일에 나이든 황이장보다 나았다. 그는 꼬마승용차로 틈만 나면 집집마다 방문해 노인들의 신상문제와 면사무소, 농협, 보건소 출타를 돕고 있었다. 집이 댓 가구씩 모여 있을 뿐 골짜기와 등성이에 독가로 흩어진 당주골은 모두 합쳐 이십여 가구였고 면소까지는 탑고개 너머 몇구비를 돌아야 하는 시오리 길이었다.

“영감님, 평안남도 안주군이 고향 맞지요?” 현선생 말에 조씨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영감님 누이 이름이 이순옥 아니에요?”

“이순옥, 조순옥? 그렇겠군, 그래. 아니야, 모르겠는걸.” 조씨가 머리를 흔들더니 뭘 그렇게 캐느냐며 찌무룩한 얼굴로 현선생을 흘겨보았다.

“현선생, 조씨가 그런 사람인 줄 내 대충 말했잖았나. 좀 구체적으로 말해보더라구. 인터넷인가 거기에 조씨 찾는다며 뭐라구 실렸는데?”

“한국에 온 지 이십년째로 경남 거제도에 사는 스위스 출신 간호사 선생이 인터넷에 글을 올렸어요. 스위스에 사는 안나 리라고, 한국 이름은 이순옥인데, 전쟁 때 헤어진 남동생을 찾는다구요.”

“남한 땅이 아니구, 그렇다고 미국도 아니구, 스위스란 나라는 구라파에 있잖는가? 경치가 그림같이 좋다는 살기 좋은 나라.” 면소에 있는 중학교를 나온 이장이 배운 지식을 읊었다. “스위스에 산다는 조씨 누이 되는 노친네가 죽기 전에 동생에게 유산이라도 넘겨주겠다며 나타났단 말인가? 거제도에 산다는 스위스 간호사는 또 누군데?”

“스위스에 사는 이순옥 여사 현지 가족의 부탁을 받아 줄리란 간호사 분이 인터넷에 글을 올렸다니깐요. 이순옥 여사 나이는 예순일곱이며 고향은 평안남도 안주군이고, 남동생 이름은 이중길이라구요. 천구백오십일년 일사후퇴 때 평안남도 안주에서 피란 나오다 어머니는 폭격에 돌아가시구 남매만 경기도와 충청도 접경지대까지 내려왔는데, 거기서 또 비행기 폭격에 그만 헤어졌다구. 출신지와 나이를 따져보니 염소 키우는 영감님과 비슷해 후딱 조평안 영감님이 떠오르지 뭐예요.”

“장본인이 기억 못하니 성씨와 이름이야 다르다 치구, 다른 건 다 맞잖아. 틀림없이 조씨가 순옥이란 노친네 동생이 맞다구.” 이장이 제 일인 듯 손뼉을 쳤다. 황이장으로서도 너무 오래전 일이라 긴가민가하면서도 동네 아이들에 둘러싸여 쏟아진 질문에 주눅든 조씨가 엄마를 두고 분명 오마니라 말했고, 현선생 말처럼 모든 정황이 조씨가 순옥 여사 동생이란 확신을 들게 했다. “조씨가 염소아저씨와 함께 당주골로 들어왔을 때 평안도 말씨를 썼으니 평안이 아냐. 출신지야 정확히 모르지만. 도 지경이라면 성환 부근에서 폭격 맞아 누이 잃구 조씨 혼자 천안까지 탈래탈래 내려온 게야. 여기가 천안시 성남면 아냐. 그런데 현선생, 그쪽에서 왜 여태 동생을 안 찾다가 서로 다 늙은 이제야 찾아볼 맘을 먹었을까?”

“한국에 수소문했어도 이름이 다르니 못 찾았겠고, 이쪽에선 누이가 전쟁 때 폭격 맞고 죽은 줄 알아 찾을 생각을 안했구……”

“그런데 조씨가 누이를 만난대도 가는귀까지 먹은 맹한 사람이 오십여년 전 누이를 어떻게 알아보겠어? 저쪽 역시 그렇겠지. 얼굴도 많이 변했을 텐데 무엇으로 남매간임을 증명해 보이겠어? 여보게, 현선생. 인터넷에 조씨의 무슨 특징 같은 건 씌어 있지 않아? 신체 어디에 점이 있다거나 흉터가 있다는 그런 것 말야? 조씨 머리통에 지네 꼴로 큰 흉터가 있긴 한데.”

“특징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이 없구요. 인터넷에 부모님과 고향에서 찍은 가족사진을 띄웠는데, 저로서도 사진에 박힌 소년이 조평안 영감님이란 데는 확신이 안 섭디다. 사진 아래에 ‘조국해방을 맞아’란 글씨가 박혔던데, 사십오년 해방된 해라면 조평안 영감님이 너댓살 때라……”

“그렇담 내가 보면 맞힐 수도 있어. 난 조씨가 당주골로 들어올 때 봤으니깐.” 황이장은 말을 하고 나자 금세 자신이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당시 조씨의 추레한 입성과 버썩 마른 몰골만 가물가물 떠오를 뿐 이목구비가 뚜렷하게 잡히지 않은 탓이었다. 그래서 현선생과 자기 말을 남의 이야기 듣듯 무관심한 조씨를 보고 버럭 역정을 냈다. “이 사람아, 뭐라구 말 좀 해봐. 자네 누이가 나타났다는데 사람이 어찌 그렇게 남의 소 보듯 멍하니 앉았어? 전쟁 때 폭격 맞고 죽었다는 누이가 구라파 스위스란 나라에 여태 살고 있다잖는가.”

황이장이 답답하다는 듯 조씨 소매를 흔들었다. 그때까지도 조씨는 별다른 느낌이 없는지 현선생을 보고 엉뚱하게, 오늘은 노는 날이냐고 물었다. 현선생이 일요일이라 수업이 없다고 말하곤 조씨 과거행적을 두고 큰 소리로 본격적인 질문을 시작했다. 그러나 별다른 수확이 없었다. 전쟁 당시 엄마가 죽었고 폭격에 많은 사람이 죽을 때 누이가 죽었으며, 그 겨울에 당한 추위와 굶주림 이외 조씨는 다른 어떤 증거도 대지 못했다. 당주골에 정착한 뒤 지내온 세월을 두고도 황이장과 의견이 일치하지 않은 점이 많았다. 나이 예순 중반이라면 정신 맑은 사람도 어릴 적 기억은 흐릿할 수 있다고 현선생은 그렇게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제가 줄리 선생 메일에 사실대로 답장 올리고 저쪽 소식을 기다리겠습니다. 컴퓨터 화상대화도 가능하구요. 제 생각으로는 조평안 영감님이 순옥 여사 남동생임이 틀림없다는 데 신빙성이 있습니다. 저쪽에서 서로 만나 확인해보자는 연락이 올 때까지 이 일에 적극 나서보겠습니다.” 현선생이 황영감을 보며 물었다. “당주골로 조평안 영감님이 들어왔을 당시 목격했던 증인은 더 없겠습니까?”

“자식들 따라 벌써 여길 떠났고, 나이 들어 다들 돌아가셨지. 환갑 넘긴 내가 아직 이장직에 손 못 터는 처지니 말해서 뭣해. 당주골은 이제 이빨 빠진 노인 천지 아닌가. 참, 신출이 성님이 있긴 한데 정신이 오락가락하니 제대로 기억이나 할는지……”

누구보다도 확실한 증인은 조씨를 당주골로 데려온 염소아저씨인데 타계한 지가 벌써 이십여 년 전이었다.

 

 

2

 

하숙집으로 돌아온 현선생은 컴퓨터 앞에 앉아 거제도에 거주하는 줄리 선생 이메일로 답장을 냈다. 사진으로 올린 조씨의 현재 모습, 신체조건, 정수리 흉터와 귀가 좀 먹었다는 점, 지나온 이력을 써 보냈다. 그날 저녁, 그는 인터넷 채팅으로 줄리 선생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안나 리 여사는 슬하에 남매를 두었는데 출가했고, 제네바 근교에서 포도농장을 크게 하던 남편이 심장마비로 급사한 후 작년부터 제네바 시내에 있는 양로원에서 여생을 보낸다고 했다. 안나 리 여사의 아버지는 한국전쟁 전 안주탄전 경리책 복무원이었고 어머니는 그곳 인민학교 교사였다. 전쟁이 나고 낙동강 공방전이 한창 치열할 무렵 아버지는 뒤늦게 징집되어 전선으로 떠났다. 유엔군과 국군이 안주로 들어왔다 중공군 참전으로 후퇴할 1950년 12월 중순, 어머니는 미군 비행기의 소나기 폭격을 피해 두 자식을 데리고 피란길에 나섰다. 어머니가 비행기 폭격으로 별세한 것이 의정부 부근까지 내려왔을 때였다. 남매만 살아남아 피란민 대열에 섞였는데 경기도와 충청도 접경 어름에서 다시 비행기 폭격을 만나, 그때 서로 헤어지게 되었다. 동생이 폭격에 희생된 줄 알고 부산까지 홀로 내려온 이순옥은 1951년 9월에 부산 시온고아원에서 미국의 볼티모어 근교에 거주하는 가정으로 입양되었다. 중산층 가정의 양부모 보살핌 아래 정숙하게 성장한 안나 리 여사가 거기서 대학 재학중 국제펜팔로 사귄 프랑스계 스위스 청년과 결혼하여 스위스 제네바에 정착한 것이 1961년이었다.

―줄리 선생께서는 어떻게 안나 리 여사 사연을 접하게 되었습니까?

―제가 제네바대학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할 당시 한국 간호사들과 기숙사 생활을 함께하며 김치와 김을 맛보았고 한국어도 배울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인연으로 한국을 여행하게 되었고, 한국 땅이 좋아 1984년 한국으로 건너와 5년 동안은 인천에서 살다 15년째 풍광 좋은 거제도에서 예수병원 간호사로, 병원에서 운영하는 보육시설 선생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지난 여름휴가 때 부모님과 형제들을 만나러 제네바로 나갔다 안나 리 여사 사연을 그분 따님한테 듣게 되었습니다. 한국에 나가는 대로 어머니 마지막 소원인 생존해 있을 동생을 찾아달라고 따님이 부탁하더군요.

―안나 리 여사가 여태 동생을 찾지 않다가 왜 이제 나서게 되었답디까?

―따님 말로는, 외삼촌 되는 분이 한국전쟁 당시 사망한 줄로만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여사가 동생 사망을 목격하지 않았으나 그렇게 되어 이별했다며 때때로 눈물을 흘리셨답니다. 그러면서도 그때 폭격을 모면해 한국에 생존해 있거나 미국으로 입양되어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나, 스위스는 너무 먼 나라 아닙니까. 오래전이 되겠습니다만 안나 리 여사가 제네바에서 한국 관계기관에 이중길씨 출생지, 이름, 나이를 대어 찾아달라는 편지를 낸 모양이에요. 아무 소식이 없었답니다. 그런데 안나 리 여사가 지난 봄 제네바 시민단체 ‘평화연대’가 벌인, 이라크 주둔 미군은 철수해야 된다는 시위에 노구를 이끌고 참가했다가 뇌졸중으로 쓰러져 혼수상태에 들었답니다.

―안나 리 여사가 평소에도 그런 국제정치 문제에 관심이 있었습니까?

―따님 말씀으로, 안나 리 여사는 모든 전쟁이란 전쟁은 적극 반대하는 평화옹호주의자였다고 합니다. 본인이 어린 시절 한국전쟁을 겪었기 때문이겠죠. 세계의 경찰을 자임하는 미국이 자국이 정한 기준치에서 벗어난다고 다른 나라 내정문제에 무력으로 간섭하는 걸 앉아서 보아내지 못하는 분이셨대요. 미국이 동맹국인 영국을 끌어들여 이라크를 침공했을 때도 평화연대 회원들과 함께 제네바 시청광장 시위에 연일 참가하셨답니다. 그땐 안나 리 여사가 양로원에 들어가기 전이었는데 티브이 저녁뉴스를 보다 낮에 있은 거리시위 앞줄에 나선 어머니 모습을 보고 따님이 놀라 어머니가 사는 집으로 달려갔대요. 연세도 있으니 가두시위에는 나서지 마시라고 말렸는데, 전쟁은 무조건 막아야 한다며 막무가내셨대요. 그런 과로가 누적되었던지 지난봄에 쓰러져 혼수상태에 드셨답니다.

―우리 채팅이 조금 엇길로 흐른 듯한데……

―현선생님, 안나 리 여사 병상을 제네바에 거주하는 자녀분이 번갈아 지켰는데, 여사가 기적적으로 일주일 만에 깨어났습니다. 정신이 돌아오자마자 비몽사몽간이란 한국말 그대로, 혼수상태에 있을 때 생존해 있는 동생 모습을 생시처럼 똑똑히 봤다며, 동생이 죽지 않고 살아 있으니 꼭 만나야 한다고 말했답니다.

―그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안나 리 여사 말로는, 깨어나기 하루 전에야 의식은 돌아왔으나 의사표시는 물론 눈꺼풀조차 움직일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밤낮을 구별할 수 있었고 자신을 내려다보는 자녀와 손자도 알아보았답니다. 주위 사람들 하는 말도 들었지만 자신이 식물인간이 아니라는 의사표시를 할 수 없다는 게 너무 답답하고 안타까웠는데, 그러다 다시 의식을 놓곤 했답니다. 생과 사의 갈림길이었는지 꿈인지 분명하진 않지만, 그 어느 순간에 양치기 동생을 보았답니다.

―줄리 선생이 안나 리 여사 자녀분을 만났을 때, 어머니가 혼수상태에서 동생의 환영을 보았다는 그 말에 자녀분 견해는 어땠습니까?

―신(神)이 잠든 어머니 영혼을 찾아와 기적의 선물을 주었다고 따님이 놀라워했습니다. 어머니 평생 소망을 신이 허락하셨다고 아드님도 말했습니다. 저도 양로원을 찾아가 안나 리 여사를 면회했는데, 처음은 그 말이 믿기지 않아 긴가민가했으나 안나 리 여사가 산 중턱에서 양 치는 동생을 본 장면을 너무 생생하게 들려주어, 그 기적의 실현을 종교인으로서, 그러나 과학적 치료에 평생을 일해온 간호사로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의학적으로 소생이 불가능하다고 99퍼센트 결론이 났음에도 삶에 대한 환자의 강렬한 의지만으로 기적적인 회복을 보이는 경우가 흔치는 않지만 간혹 있습니다. 안나 리 여사 경우, 죽음을 앞두고 동생을 환영으로 본 것도 그런 의지력의 현시겠지요. 다리가 편치 않아 휠체어에 의지하긴 했으나 안나 리 여사 건강은 비교적 양호했고 정신상태는 분별력과 판단력이 있었습니다. 재활치료를 받고 있으니 멀지 않아 지팡이에 의지할망정 걷게 되겠지요. 외삼촌을 만날 기대에 부풀어 어머니가 다 잊은 한국말 공부를 새로 시작했다고 아드님이 말했습니다. 열세살 때 한국을 떠났으니 기억 속에 남은 언어를 곧 되찾게 될 거라고 말입니다. 저는 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인터넷에 안나 리 여사 사연과 옛 가족사진을 올렸습니다. 그동안 이순옥 여사 동생이 틀림없을 거라는 이메일을 네 통 받았는데 저와 지금 채팅을 하는 현선생이 말씀한 조평안 노인도 그중 한 분입니다.

―그럼 당주골에 사는 조평안 노인 신상을 좀더 자세히, 제가 만나 알고 있는 사실대로 지금부터 설명하겠습니다. 판단은 줄리 선생께서 하시고 제네바로 연락 취해주시기 바랍니다.

현선생이 조평안 노인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 그대로를 문자로 화면에 띄우자니 자판 두드리는 손이 떨렸다. 조평안 노인이 누이와 헤어지기 전 기억을 망각해서 증거로 들이댈 만한 확실한 정보가 없었기 때문이다. 일방적으로 ‘아마 그럴 것 같다’란 추측에 불과했다. 한편 의식이 점멸되어 생사기로에서 헤맬 때 생존한 동생을 보았다는 안나 리 여사 말도 신빙성이 떨어졌고 어쩜 황당한 잠꼬대일 수도 있었다. 이순옥 여사 남동생이라며 연락해왔다는 나머지 세 명 중 한 명이 진짜 동생일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줄리 선생이 전해준 정보만으로는 이순옥 여사와 조평안 노인이 남매간임을 밝혀내는 데는 많은 난관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서 현선생은 자기 의견을 보태지 않고 객관적으로 조평안 노인을 만나 확인한 경위와 황이장, 마을 노인들 증언을 사실대로 화면에 올릴 수밖에 없었다.

―제 소견으로는, 서로 상봉하게 된다면 한국전쟁 전후 상황을 온전하게 기억하고 있는 안나 리 여사가 동생의 잃어버린 과거를 재생시켜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현선생은 이 문장을 첨부했다. 그는 줄리 선생과 안나 리 여사 가족의 판단을 기다리겠다며 쓰기를 마쳤다. 현선생이 ‘소식 기다리겠습니다’란 마지막 문장을 자판에 쳤을 때, 그제야 불현듯 ‘유전자검사’란 용어가 떠올랐다. 배울 만큼 배웠고 나이도 창창한 젊은이가 왜 그 간단한 친자확인 검사방법을 여태 놓치고 있었는지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상대방 문자가 화면에 떠오르기 전 추신을 달려 했을 때, 줄리 선생의 간단한 답신이 먼저 화면에 떴다.

―제네바에 연락하여 빠른 시일 안에 소식 전하겠습니다. 최종적으로 DNA 검사방법이 있긴 합니다.

그날 이후 현선생은 틈만 나면 컴퓨터를 켜 줄리 선생의 이메일이 들어왔는가를 확인했다. 일주일을 기다려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현선생은 몸이 달았으나 그렇다고 새로운 정보를 제공할 처지도 못되었기에 안달내며 먼저 나설 입장도 아니었다. 무슨 사정인지 모르지만 스위스와 연락이 지연되는 모양이라고 추측할 수밖에 없었다.

줄리 선생한테서 그 어떤 소식을 기다리며 초초해하기는 현선생만 아니라 당주골 노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당주골에서는 유일하게 담배와 일용품 따위를 취급하는 잡화점 주인인 황이장 집이 마을 들머리에 있었고, 이장집 앞 느티나무 아래가 정자라 당주골 사람들이 정자에 모이면 조씨를 두고 여러 말을 나누었다. 이야깃감이 궁한 그들에게 현선생이 전해준 조씨의 혈육 확인여부는 화젯거리로 충분했다. 가을걷이도 대충 끝냈겠다, 대처로 나간 자식들의 추석맞이 환고향을 기다리는 일 이외 별다른 소일감이 없다보니 마을 노인들은 정자에 나앉아 황이장 잡화점 막걸리에 조씨 화제를 안주로 주거니 받거니 입씨름을 했다.

가장 안타까워하기는 조씨의 기억상실증이었다. 1951년 1월이라면 조씨 나이가 만으로 아홉살인데 고향, 부모, 누이 이름은 그렇다 치더라도 어떻게 자기 이름조차 까먹을 수 있냐는 한탄이었다. 자기 이름만 정확히 대면 만사가 해결되는데 이름 석자조차 모르니 세상에 이런 기막힌 사연이 어디 있냐며 열을 올렸다. 더욱이 조씨 부모가 고등교육을 받았고 조씨도 북에서 초등학교에 다닌 것 같은데, 그놈의 전쟁이 조씨 인생을 저 꼴로 만들었다고 성토했다. 자네와 종씨가 세계적인 과학자라던데 그런 것도 해결 못하냐며 애꿎게 황이장을 닦아세웠다. 그 말을 받아 구조조정에 걸려 조기퇴직 당한 후 자녀들 학업 때문에 가족은 서울에 두고 작년에 낙향해선 상황버섯을 재배하는 강씨가 나섰다. 치매의 원인이 밝혀지면 망각된 기억도 재생이 가능할 거라는 그럴싸한 의견을 낸 뒤, 유전자검사만으로도 혈연관계는 밝혀낼 수 있다고 말했다. 황이장이 이장직을 넘기려 하자 그는 고향 떠난 지가 오래되어 농촌 현실을 제대로 파악할 내년쯤이나 맡겠다며 한사코 고사하는 중이었다. 유전자검사? 최신 과학이구 의학조차 믿을 수가 없어. 치술이 자네 아들 서울 큰 병원에서 종합검사 받고 위는 멀쩡하다 했는데 여섯달 후 위암 삼기로 덜컥 죽지 않았냐. 백내장을 앓는 윤씨가 붕어눈을 껌뻑이며 말했다. 치매란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순옥이란 노친네가 중풍 끝에 치매에 걸린 게 틀림없다고 고산지 배추농사를 짓는 박씨가 나섰다. 꿈에서 본 것도 깨어나면 말짱 헛것인데 저승 문턱에서 동생을 보았다니 그걸 어떻게 믿어? 팔순 노인이 저승 가는 길에 부모와 상봉했다는 그 소리 아냐? 그 말에 모두들 고개를 주억거렸다.황이장이 조그만 소리로 다른 의견을 냈다. 경치 좋은 알프스 산록에 양치는 스위스 그림을 달력에서 봤는데, 양치기 동생을 봤다는 말은 어지간히 맞군. 조씨가 염소아저씨 대를 이어 양은 몰라도 염소치기에는 선수 아냐. 그 말에 꿈보다 해몽이 좋다고 박씨가 빈정댔다.설령 유전자검사로 친남매가 틀림없다고 확인되면, 지금 이 나이에 뭘 어떡하겠다는 거냐? 끌어안고 통곡하면 끝 아니겠어? 그 노친네 비행기 타고 스위스로 떠나구, 조씨는 여전히 범바위 오르내리며 염소나 칠 테구. 박씨가 말했다. 그래도 동기간의 그 상면이 어딘데요. 이 세상 산다는 낙이 부모형제와 자식들 옆에 두고 보는 것 빼구 뭐 있나요? 남정네들 말에 나서지 않고 잠자코 있던 대평댁이 말했다. 그 노친네한테 아들이 있다는데 부모를 양로원에 내치다니 몹쓸 자식이로구먼. 거기도 처지가 딱한 게 아냐? 좌중 연장자인 동채 노인이 한마디 했다. 서양 선진국들, 이를테면 스위스만 하더라도 우리나라 양로원과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나이 들면 부자든 가난뱅이든 다들 양로원에 입소하는데, 노인 천국이 따로 없어요. 시설이 완벽하구 국가가 모든 걸 해결해줍니다.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자식이 부모 모시는 건 우리 세대로 끝입니다. 퇴직금 쏟아가며 저도 자식들 가르칠 만큼 가르치겠다고 이러지만 저 역시 자식한테 노후를 기대 않구요. 강씨의 말에 모두 떨떠름한 표정으로 입을 닫았다.

줄리 선생으로부터 현선생에게 이메일이 온 것은 추석 전날이었다. 본가가 대전이라 추석 차례를 지내려 하숙집을 막 나서기 전 혹시나 하고 이메일을 열어보니 받은편지함에 편지 한통이 떠 있었다.

―현선생님, 소식 늦어 죄송합니다. 모든 것을 확실히하기 위해 그동안 여러 절차가 필요했습니다. 먼저 알려드릴 말은, 안나 리 여사가 가족 동반으로 한국을 방문하겠다는 반가운 소식입니다. 안나 리 여사와 통화한 내용은, 지난 50여년 세월 동안 소녀시절에 받은 상처가 너무 컸기에 한국 방문은 생각조차 안했는데, 이번 기회에 한국 땅을 찾기로 자녀와 합의했다는 것입니다. 동생을 만날 수 있다는 부푼 희망이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여사의 동생일 거라며 연락해온 네 분 중에 직접 만나 확인할 분은 두 사람으로 최종 결정했고, 그중 한 분이 조평안 노인입니다. 그동안 접촉 결과 나머지 두 분은 핏줄이 아님이 판명되었습니다. 한국전쟁 전후의 가족 정황 정보가 서로 너무 정확했기에 쉽게 결론이 났고, 안나 리 여사가 만나보고 싶어하는 두 분은 불충분한 정보가 오히려 신뢰감을 준 듯합니다. 그 어떤 예감, 필링이 온다는 말 있잖습니까. 조평안 노인과 함께 만나게 될 다른 한 분 역시 전쟁 전 기억을 상실한 분입니다. 조노인과 같은 장소에서, 비슷한 나이에 미군 공습을 받았다니, 세상에 그런 우연의 일치가 어디 있겠어요? 충청남도 성환에서 포도농사 하는 자녀분과 함께 사는 그분은 조노인보다 더 철저히 과거를 잊어버렸습니다. 미군 비행기 폭격으로 많은 피란민이 사망했을 때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진 분입니다. 그곳 마을 사람들이 참혹하게 죽은 시신을 치우다 채 숨이 끊어지지 않은 소년을 발견했답니다. 참외농사 짓던 이가 집으로 데려와 살려내서, 그분이 장성하자 데릴사위로 삼았답니다. 이씨 노인은 훌륭한 자녀분을 두어 그 자녀분이 아버지의 망각된 전쟁 전 과거를 밝혀내려 헌신적으로 노력한 결과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이북5도 도청을 여러차례 방문한 끝에 당시 비행기 폭격에서 살아남은 분을 찾아내어 아버지 고향이 평안남도 안주군이란 사실을 알아냈고, 이씨 집안 자제임을 증언한 고향분을 만났던 겁니다. 이씨 노인 자녀분이 거제도까지 저를 찾아와 눈물 흘리며, 소설로 쓴다면 모를까 지구상에 이런 비극이 현실적으로 가능하겠냐고 말했습니다. 한국전쟁이 수많은 죽음과 가족 이별을 남겼지만 과거의 기억을 상실한 분이 50여년 만에 가족을 찾게 되는 경우도 있냐고 말입니다. 그 기막힌 사연을 두고 우리는 함께 울었습니다. 그러나 성환에 사는 이씨 노인도 과거기억 상실자라 안나 리 여사와 동기간이란 확정적인 증거는 대면하거나 유전자검사를 하지 않은 이상 아직은 밝힐 단계가 아니군요. 그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사 가족이 동양의 먼 나라로 여행을 오게 되었습니다. 자녀 두 분과 며느님이 54년 만에 이루어지는 안나 리 여사의 조국 방문에 동행한다고 합니다. 그 가족이 거제도를 방문하게 된다면 한국전쟁으로 인해 그동안의 어두웠던 한국에 대한 고정관념이 크게 수정될 것입니다. 호수는 많지만 바다가 없는 스위스라 배편에 한려수도를 관광하게 되면 그 아름다움에 탄성을 지를 게 분명합니다. 각자 개인사정이 있어서 스케줄을 조정중입니다. 제가 스위스에서 올 때처럼 제네바에서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나와 루프트한자나 한국 비행기를 탈 예정이니, 비행기편이 결정되는 대로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3

 

현선생이 운전대 잡은 꼬마승용차 편에 조씨와 황이장이 동승하여 서울 워커힐호텔 커피숍에 도착한 것은 오후 한시 오십분이었다. 오후 두시에 호텔 커피숍에서 줄리 선생과 만나기로 약속되어 있었던 것이다.

“조씨, 현선생 말처럼 곧 만나게 될 이여사가 설령 자네 누이가 아닐 수도 있으니 실망 말더라구. 마음을 침착하게 가져. 묻는 말에만 사실대로 대답하면 돼. 알았어?” 양복 차려입고 중절모를 제껴 쓴 황이장이 커피를 마시며 옆에 앉은 조씨에게 말했다.

“누가 뭐랬나.” 조씨가 시침 떼듯 덤덤하게 되받았다. “설마 누이가 되살아났을라구. 난 아직도 못 믿겠는걸.”

어제 현선생 차편에 조씨는 면에 나가 목욕과 이발을 했고, 새로 사 입은 뻣뻣한 점퍼를 걸치고 있었다. 삔 발목에 침을 맞으러 현선생 차편에 면으로 나다니다 선생 권유로 오랜만에 군청색 모직바지와 구두까지 샀는데 이번 기회에 갖추고 나서니 머리에서 발끝까지 새 치장을 한 셈이었다.

카메라를 목에 건 현선생은 줄리 선생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며 줄곧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니, 줄리 선생보다 안나 리 여사 가족과 먼저 접견이 이루어졌을지 모르는 성환에 산다는 이씨 가족이 커피숍에 있나 없나를 눈짐작으로 찾고 있었다. 성장한 선남선녀들만 자리를 채웠을 뿐 시골에서 올라온 사람으로 여겨지는 성환 가족은 눈에 띄지 않았다. 조씨가 안나 리 여사 동생이 맞을 가능성이 80퍼센트쯤 된다면 성환에 산다는 이씨 노인이 맞을 확률은 90퍼센트쯤이라고 현선생은 짐작하고 있었다. 줄리 선생 이메일 정보의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성환 이씨 노인이 동기간일 확률이 높았던 것이다. 그래서 상경하는 차 안에서도 안나 리 여사와의 만남이 섭섭하게 마무리된다면 조씨가 심적 타격을 받을까봐 그 점을 누누이 설명해두었다. 현선생의 그런 말에도 조씨는 추수가 끝난 차창 밖 황량한 늦가을 들녘만 내다볼 뿐 별 반응을 나타내지 않았기에 다행이었다. 조씨는 겨울이 코앞에 닥쳤으니 부지런히 건초를 장만해야 한다고 키우는 염소 걱정만 주절댔다.

감색 투피스에 핸드백을 든 줄리 선생이 손수건으로 눈자위를 훔치며 커피숍으로 들어섰다. 그네가 너른 커피숍을 살피더니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선 현선생과 눈을 맞추자 굵은 몸을 흔들며 이쪽으로 걸어왔다. 현선생은 쉰 초반의 줄리 선생을 초면임에도 금방 알아보았다.맞아요. 성환 사는 이씨 노인이 안나 리 여사 동생이 틀림없어요. 현선생은 줄리 선생의 그 말이 먼저 떨어질까보아 조마조마했다.

세 사람은 줄리 선생과 첫인사를 나누었다.

“오래 기다리셨죠?” 하곤 줄리 선생이 맞은편에 자리한 조씨를 보았다. “조평안 어르신 맞죠?”

“예, 예, 평안입니다.” 조씨가 건성으로 대답하며 눈동자가 파란 서양 아녀자가 우리말을 썩 잘하는 게 신기하다는 듯 멍청히 바라보았다.

“성환에서 오신 이씨 노인 가족은 만나보셨습니까?” 현선생이 줄리 선생에게 궁금한 점부터 물었다.

“오전에 접견했습니다.”

“그렇다면 결과는요?” 현선생은 그네가 쥔 손수건에 눈을 주었다.

“참, 점심은 드셨어요?” 줄리 선생이 말을 바꾸었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간단히 먹었다고 현선생이 대답하자, 우리 측에서 대접해야 하는데 결례가 되었다며 줄리 선생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들 기다리고 있으니 객실로 올라가십시다. 가족이 묵는 객실에서 접견하기로 했으니까요.”

테이블 사이를 빠져나오다 현선생과 황이장 눈길이 마주쳤다. 황이장이 이미 결판이 났다는 듯 눈을 찔끔했다. 현선생 직감도 그랬다. 줄리 선생이 묻는 말에는 대답 않고 딴전 피운 점이나, 동기간 상봉에 감격한 나머지 잠시 잊고 있던 조씨를 떠올리고 급히 커피숍으로 나왔음이 틀림없다고 판단했다. 만나봐야 헛수고겠지만 서울까지 힘든 걸음 했으니 접견하지 않을 수 없는, 마지못한 걸음임에 틀림없었다.

커피숍 계산대 앞에 현선생이 나서는 걸 줄리 선생이 앞질러 찻값을 냈다. 네 사람은 객실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황이장은 층수를 더해가는 깜박대는 숫자를 보다 더 못 참겠다는 듯 답답한 침묵을 깼다.

“성환 부근 도로에서 비행기 폭격 당했겠다, 평안도 안주군 출신에다, 성씨가 이씨라면, 그분이 틀림없겠군요. 기왕지사 그렇게 된 일, 우리는 모처럼 서울구경이나 하고 내려갈랍니다.” 황이장이 헛기침 끝에 볼멘소리로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당사자가 아니라 말을 조금 아끼고 있을 뿐입니다. 지금 곧 안나 리 여사 가족을 만나보세요.” 줄리 선생 목소리에 당황한 빛이 스며 있었다. 그네가 현선생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퀴즈의 숨은그림을 찾듯, 안나 리 여사 질문이 용의주도했습니다. DNA검사까지 가야 할 정도로는…… 이 세상 하늘 아래 그렇게 이별한 채 평생 동안 소식 모른 채 살고 있는 혈육이 그렇게 많다니. 한국은 지구상에서 이별을 가장 많이 체험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나라 같아요. 아직도 풀리지 않은 그 맺힌 한을 천상에서나 풀려는지……” 줄리 선생이 손수건으로 눈자위를 찍었다.

12층에서 일행은 엘리베이터를 빠져나왔다. 줄리 선생이 앞장섰다. 코너를 돌아 첫 객실 문 앞에서 그네가 손기척을 냈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사십대 초반의 금발머리 서양여자가 문을 열어주었다. 안나 리 여사 며느리였다. 줄리 선생이 비켜서며 길을 내주자 현선생이 주춤거리는 조씨 뒤허리를 가볍게 밀어 앞장세웠다.

침대방은 따로 있는 듯 넓은 거실에 아들딸을 양쪽에 거느린 몸매 여윈 안나 리 여사가 정중앙 자리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나이치고 별 주름살 없이 곱게 늙은 그네는 반백이 된 머리칼을 쪽머리로 단정히 빚어 묶었고 자주색 스웨터 차림이었다. 군살 없는 달걀형 얼굴에 뾰조록한 턱이 조씨와 닮았음을 현선생과 황이장이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러면 그렇지 이 늙은이 눈은 못 속여, 하고 황이장이 입속말을 중얼거리며 조금 전과 달리 어깨에 으쓱 힘을 주었다.

안나 리 여사의 자녀는 동서양 피가 섞여 혼혈티가 났다. 남매는 근엄한 표정의 안나 리 여사와 달리 미소 머금은 채 의자에서 일어나 조씨를 박수로 맞았다. 조씨가 어설픈 웃음을 입가에 물고 연방 머리를 조아렸다. 줄리 선생이 나서서 서로를 소개하자 그들은 한국말과 프랑스말로 인사를 교환했다. 안나 리 여사만이 휠체어에 꼿꼿이 앉아 정기 반짝이는 눈으로 조씨를 뜯어보고 있었다.

“모두 앉으시지요.” 줄리 선생이 준비된 의자에 조씨 일행을 권했다.

조씨를 가운데로 하여 현선생과 황이장이 자리를 정하자, 열심히 서로 면면을 살피는 가운데 먼저 입을 떼는 사람이 없었다. 안나 리 여사 며느리가 탁자로 차반에 올린 오렌지주스를 날랐으나 아무도 잔에 손을 대지 않았다. 현선생이 줄리 선생에게 조씨 노인이 귀가 어둡다는 점을 작은 소리로 환기시켰다.

탁자 건너 재판정에 나온 피고인처럼 꾸부정히 앉은 조씨를 찬찬히 보던 안나 리 여사가 직감으로 무엇을 잡았는지 프랑스어 입속말로, 아버지가 살아계셔 나이들었다면 저런 모습일까 하고 가볍게 탄식을 흘렸는데 그 말은 양 옆에 앉은 자식 귀에도 들릴락말락 했다.

―선생님은 자녀가 없습니까?

제네바대학에서 동양사를 가르치는 안나 리 여사 딸이 조씨를 보고 먼저 입을 떼었다. 검은 머리칼에 피부색은 동양인이었으나 동그란 이마에 깊은 갈색 눈이 아름다운 중년여인이었다.

“뭐랍니까?” 중절모를 벗어 무릎에 얹은 황이장이 윗몸을 앞으로 빼고 탁자 옆에 자리를 정한 줄리 선생에게 물었다.

줄리 선생이 조씨를 보며 통역을 했다.

“자식 말이요? 없습니다. 그게 말입니다……” 조씨가 뒤통수를 긁으며 수줍게 웃었다.

“내가 말하지요.” 큰기침 하며 황이장이 나섰다. “혈혈단신이라 마을에서 장가를 보내주었지요. 그런데 조씨 팔자가 그런지, 여편네가 한달을 못 넘겨 도망쳐버렸으니. 조씨가 밤마을 나왔을 때 염소까지 몰고 줄행랑을 놓았답니다. 자식 만들기에는 지장이 없는 것 같은데, 조씨가 사람이 좀 그렇다보니 마누라 간수를 잘못한 거지요. 그래서 제사상 차려줄 손이라도 봐야 하잖냐며 마을에서 새로 여자를 맞춰주려 했더니 본인이 싫대요. 또 전쟁 나면 어쩌냐며. 그후론 쭉 궁상맞은 홀아비로 살아왔지요.”

줄리 선생 통역에 안나 리 여사만 빼고 가족이 모두 웃었다. 코발트색 양복의 정장 차림인 아들이 가장 큰 소리로 웃자, 그게 뭐 그리 우습냐며 안나 리 여사가 아들에게 눈총을 주었다.

이제 어머님이 말씀하시라며 제 남편이 앉은 의자에 기대어 선 안나 리 여사 며느리가 프랑스말로 말했다. 손수건으로 입을 가리고 있던 안나 리 여사가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불쌍한 사람, 제 이름조차 잊었다니.

줄리 선생이 그 중얼거림을 옮길까말까 망설이다 그만두었다. 안나 리 여사가 손수건으로 눈자위를 찍었다. 그네 눈이 충혈되어 있었다.

“조씨 말이요, 전쟁 난 이듬해 마을로 처음 들어왔을 때 제 이름도 모른 채 오마니, 누이만 찾았다오. 평안도 말씨를 쓰기에 거기서 피란나온 아인줄 알고 마을에서 평안이라 이름지어주었지요.” 황이장이 말하며 조씨 옆구리를 집적였다. “이 사람아, 꾸어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앉았지 말고 뭐라구 운 좀 떼어봐.”

“내가 무슨 말 하게. 저분이 누이라구? 글쎄……” 조씨가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는 여전히 누이가 전쟁 때 죽었다는 고정관념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줄리 선생이 안나 리 여사 가족에게 황이장 말과 조씨 반응을 통역했다. 안나 리 여사 가족은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간다는 듯 머리를 끄덕였다. 현선생이 이쯤에서 자기가 나설 차례임을 알았다.

“조평안 영감님은 전쟁 전 기억을 상실한 채 어머니와 누이가 그 춥던 겨울에 비행기 폭격으로 사망했다는 사실만 어렴풋하게 기억할 뿐입니다. 이순옥 여사께서 전쟁 당시 상황을 말씀해준다면 조평안 영감님 잠재의식 속에 묻힌 기억의 실마리가 풀려나올지 모릅니다. 저는 그 점이야말로 두 분이 혈육임을 밝혀내는 가장 중요한 단서가 될 거라고 믿습니다.” 현선생이 준비해두었던 말이었다.

줄리 선생은 손짓해가며 현선생 말을 부지런히 옮겼다.

제네바 국제금융기관에서 일하는 안나 리 여사 아들이 나섰다.

―어머니는 한국전쟁으로 가족을 잃었기에 그 상처가 너무 커 한국말은 일절 입에 담지 않아 지금은 조국 말을 거의 잊어버렸습니다. 미국으로 건너가 십년을 사셨는데, 그런 의미에서 영어도 마찬가집니다. 미군 비행기 폭격으로 어머니와 동생을 잃게 되어, 미국에 사는 동안 어머니 기도 제목이 뭔지 아십니까? 미국이 아닌, 영어를 사용하지 않는, 전쟁이 없는 나라에서 여생을 보내게 해달라였답니다. 그 기도를 신이 허락했는지, 아버지를 만난 겁니다. 스위스는 프랑스어, 독일어, 이딸리아어를 공용하지만 영어를 쓰지 않으며 영세중립국으로 전쟁이 없는, 평화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국가입니다. 어머니가 영어를 사용한 경우가 꼭 두 번 있었는데, 미국에 있는 부모님을 스위스로 초청할 때였습니다. 어머니는 그분들 은혜를 잊을 수 없다고 어릴 때부터 우리에게 늘 말씀하셨습니다. 미국 한 가정이 어머니의 미래를 열어주었으나, 미국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만은 우리가 어릴 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습니다. 그 이유를 알기에 우리는 어머니 마음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줄리 선생이 잡책(雜冊)에 안나 리 여사 아들 말을 부지런히 메모했고, 프랑스말을 한국말로 옮기느라 애썼다. 그네가 통역에 얼마나 열심이었던지 콧등에 땀이 맺혔다. 줄리 선생 통역이 끝나자 이제 안나 리 여사 딸이 나섰다.

―어머니는 전쟁으로 굶주리는 아이들에 대한 애정에 각별한 분입니다. 내전을 겪는 아프리카의 결식아동돕기 시민단체에 평생을 헌신해오셨습니다. 아프리카 오지를 수십차례 다녀오셨고요. 최근에는 북한 경제사정이 나빠져 식량부족으로 어린이들이 몹시 어렵게 지낸다는 걸 알고 어머니가……

안나 리 여사가 손을 저으며 딸의 말을 막았다.

―네 말을 중간에 끊어 미안하다만 너희들의 그런 내 소개가 지금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느냐? 우리가 본질을 놓치고 있는 건 아니냐?

―어머니 죄송해요.

줄리 선생이 모녀의 그런 대화까지 통역하지는 않았다.

안나 리 여사가 조씨를 정면으로 주시했다. 갑자기 긴장된 분위기가 흘렀고 실내 공기가 침묵으로 팽팽해졌다. 안나 리 여사가 침착한 어조로 조씨에게 물었다.

―아버지가 전사했다는 통지서가 집으로 배달되던 그해 가을, 어머니가 우리를 안고 오랫동안 통곡하신 걸 기억합니까?

줄리 선생 통역에, 조씨가 안나 리 여사를 멀거니 보며 눈만 껌벅였다.

―그날 진종일 가을비가 내렸는데……

조씨는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저었다.

―어머니와 우리가 피란 내려올 때, 지프차 타고 후퇴하던 미군들이 차에서 내리더니 피란민 대열에서 장정들만 따로 골라내어 두 손을 들게 하여 한 자리에 모아놓고 불문곡절 총 쏘아죽인 걸 기억합니까? 그때 미군들이 겁먹은 장정들을 거칠게 다루며 외친 말을 나는 똑똑히 들었습니다. 미국에 가서야 그 말뜻을 알게 되었는데,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인간비하의 욕설이었습니다. 인민군이 민간복으로 바꾸어 입고 피란민 대열에 섞여 있다고, 그들은 인간으로서는 차마 할 수 없는 그런 짓을 저질렀지요. 그때 미군을 본 게 생각납니까?

안나 리 여사 말을 줄리 선생이 통역하자 황이장이 중절모 든 손을 내저으며 불끈 나섰다.

“그건 이여사가 잘못 알고 있는 겁니다. 피란민 대열 속에 인민군이 민간인 복장을 한 채 총을 피란보따리 속에 감추고 끼여 있다가 미군을 만나면 드르륵 갈겨댔대요. 미군들이 불시에 그런 봉변을 당하자 피란민 대열만 만나면 잔뜩 겁먹어 또 총질당할까봐……”

황이장 말을 귀 쫑긋해 듣던 조씨 얼굴에 황기가 번지더니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한 채 풍 맞은 듯 떨어댔다. 무릎에 얹힌 손까지 심한 경련을 일으키더니, 조씨가 갑자기 머리를 흔들며 소리쳤다.

“아니요. 피란 나오다…… 난 못 봤어요. 정말 아무것도 몰라요!”

실내 분위기가 갑자기 어수선해졌다. 안나 리 여사 자녀와 며느리가 눈을 크게 뜨고 잠시 제정신을 놓친 듯한 조씨를 주목했다. 줄리 선생은 분위기가 이렇게 돌아가서는 안되는데 하는 언짢은 표정이었고, 현선생은 남의 말을 가로채어 끼어드는 황이장이 그만 나서주었으면 하는 눈길로 이장을 보았다. 오직 침착한 태도와 냉정한 표정을 그대로 유지하는 이는 안나 리 여사였다. 그녀가 주위의 분위기에 아랑곳 않고 애써 설움을 억제하며 조씨에게 말했다.

―어린 동생 데리고 하염없이 걷고 걸었던 그해 겨울 추위와 배고픔을 나는 이날 이때까지 하루도 잊어본 적 없답니다. 그럼 내가 묻겠어요. 어머니가 숨을 거두었던 겨울밤은 생각납니까?

줄리 여사 통역을 듣던 황이장이 답답해 미칠 지경이란 듯 조씨 무릎을 흔들며 조씨 귀에 대고 큰 소리로 말했다.

“이 사람아, 그건 기억난다 했잖아. 꾸물대지 말구 어서 말해!”

“그래, 그래. 기억나.” 그제야 조씨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어머니가 숨 거둔 그날 밤, 하늘을 보고 내가 했던 말을 기억합니까?

안나 리 여사도 답답했던지 프랑스말에 이어 천장을 쳐다보며, “별, 별 말입니다!” 하고 분명한 한국 발음으로 강조했다. 그네는 터지려는 울음을 손수건으로 막았다. 한순간에 실내는 숙연해졌고 모두의 시선이 조씨 얼굴에 쏠렸다.

“별?” 조씨가 천정을 올려다보며 눈을 깜박이더니 추위를 타듯 어깨를 움츠리고 온몸을 떨어댔다. “하늘에 별?”

“별 보구 내 뭐라 말했어?”

봇물이 터진 듯 안나 리 여사 입에서 자연스럽게 한국말이 터졌고 낮춤말을 썼다. 그네가 팔걸이 쥔 손에 얼마나 힘을 주었던지 휠체어가 흔들렸다.

“오마니별, 거기 있어……” 허공을 보는 조씨 입에서 꿈결인 듯 그 말이 흘러나왔고 눈동자가 뿌옇게 풀어졌다.

손수건으로 입을 막아 격한 감정을 다스리던 안나 리 여사의 비탄이 터진 것이 그 순간이었다.

―오마니별을 알다니! 내 동생이 틀림없어!

엄마가 숨을 거둔 겨울밤이었다. 폭격으로 반쯤 허물어진 빈집의 무너진 천장 사이로 밤하늘이 보였고, 찬 별들이 하늘 가득 보석처럼 박혀 있었다. 헌 이불을 둘러쓰고 서로 껴안아 체온으로 밤을 새울 때, 밤하늘의 별을 보며 누이가 말했다. 중길아, 저 하늘에 반짝이는 별 두 개를 봐. 아바지별과 오마니별이야. 천지강산에 우리 둘만 남기구 아바지가 오마니 데빌구 하늘에 가서 별루 떴어. 저기, 저기 오마니별 보여?

“중길아! 네 이름은 이중길이야. 여기루 오라구!” 안나 리 여사가 일어서기라도 할 듯 떨리는 두 팔을 한껏 벌리고 외쳤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현선생이 앞으로 나서며 얼른 카메라를 들이댔다. 안나 리 여사 며느리는 뒤쪽에 따로 준비해둔 한아름 생화 꽃다발을 들고 활짝 웃으며 조씨 쪽으로 걸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