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시
박판식 朴判植
1973년 경남 함양 출생. 2001년 『동서문학』으로 등단. lifediver@hanmail.net
윤회
고대 범어에서 윤회는 수레바퀴를 뜻했다
선선에서 윤회란 목숨을 빚진 사람은 반드시 다음 생애라도
목숨을 구해준 이에게 목숨을 바친다라는 뜻이었다
중국의 연나라에서는 연꽃 속에서 영원히 몸 섞는 연인이라는 뜻이었다
남자들로만 구성된 한 거란의 떠돌이 부족에게는
그녀는 죽었다 그러나 나는 그녀를 찾으러 나선다라는 뜻이었다
유마경에 나오는 향기의 나라에서는 태어나기도 전에
죽는다라는 뜻이기도 했다 어쨌든,
기원전 그리스의 한 상인이 서역을 지나간 적이 있다
그의 목적지는 윤회였다
불꽃과 얼음의 거대한 산을 넘어 먼지의 집들을 지나, 그는
서역의 한 작은 오아시스에 만들어진 나라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적어도 그가 다섯 번은 태어나기도 전의 사람들이
그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여태껏 아무런 빚도 지지 않고 살아왔다 자부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다섯 번을 태어나는 동안 네 번의 죽음에 빚을 지고 있었군요”
침착해라 변하지 않는 형상이란 없지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그렇게 조급하게 굴 필요는 없어
어디로 가든 결국 네가 만나는 것은 바로 너 자신이니까
하관
사람을 떠나보내고 잃는 것은 그 영혼의 무게다
우물에 두레박을 내려보내고,
첨벙거리는 물소리에 정신을 빼앗기던 날이 있었다
나는 아무도 없는 한낮에
번쩍이는 둥근 돌멩이 하나를 공동우물 속에 던져넣고는
되돌아오지 않는 울림에 매혹되곤 했었다
그 깊이 모를 메아리가 오늘 내게로 되돌아오는 것을 느끼며
나는 흙 한줌을 관 위로 던진다
미끄러져 관 속으로 자꾸만 빠져버릴 것만 같은 두 다리를 뽑아내며
죽기 직전 치매를 앓던 할머니의 눈을 떠올린다
어떤 질문에는 확실히 답이 없다
인생의 바닥을 잴 수 있는 추도 없다
바위를 파낸 산역꾼들이 다시 파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이라며
연신 막걸리를 들이켜며 뒷짐지고 서 있었다
야간 합숙소
성당의 종소리가 천장에 거미줄을 친다
야근 마치고 돌아온 여자의 손톱 깎는 소리가 날아가다 걸리고
독신자의 체념이 거꾸로 낚인 채 발버둥친다
우리는 각자의 피로와 고독의 최면술에 사로잡혀
동서로 남북으로 다리를 뻗고 기념비적으로 누워 있다
근사한 전망과 식사를 알리는 벨이 모두에게 주어져 있고
어디로든 연락할 수 있는 전화번호부와
받침대가 딸려 있는 주전자와 컵이 하나씩,
수세식 화장실과 욕조와 샤워기가 갖춰진 목욕실마저 있으니
지혜와 장수마저 바라는 것은 사치
우리는 모두 시골에 두고 온 처자식과 노모를 걱정하고 있으나
돌아갈 작정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격리된 사각의 방에 누워 각자의 보잘것없는 운명을 점치며
야윈 이두박근과 저린 발바닥을 주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