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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조명

 

무라까미 하루끼와 동아시아의 역사적 기억

 

 

백지운 白池雲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연구교수, 중국 현대문학. 주요 논문으로 「포스트모더니즘시대 중국지식계의 ‘문화’담론」 「현대 중국의 계몽주의 문학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 등이 있다. jiwoon-b@hanmail.net

 

 

1. 감수성이 단절된 틈

 

1987년 『노르웨이의 숲』(ノルウェイの森, 한국어판 『상실의 시대』)이 발간된 후 최근에 이르기까지, 무라까미 하루끼(村上春樹) 소설은 전무후무한 판매부수를 기록하며 동아시아 전역으로 확산되고 있다. 『노르웨이의 숲』은 일본에서만 천만부 넘게 팔렸고, 한국에서는 출판계의 불황 속에서도 톱쎌러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하루끼는 2000년대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가장 영향력있는 작가로 자리잡았고 중국에서도 90년대 후반부터 출현한 ‘중산계층’의 문화적 욕망을 가장 잘 충족시켜주는 작가가 되었다. 『노르웨이의 숲』은 2001년 샹하이 이원(譯文)출판사에서 재출간된 이래 지금까지 22쇄를 찍었고 총 인쇄부수가 백만부를 넘어섬으로써, 문학서적의 평균 인쇄부수가 만부를 넘지 못하는 중국 출판계에 하나의 신화적 현상이 되고 있다.1

그런데 이런 수치적 성과보다 하루끼의 작품이 일국적 범위를 넘어 동아시아 전역에 걸쳐 거대한 문화적 ‘현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것도 일시적인 유행이 아니라 80년대 말부터 10여년이 넘도록 동아시아 각지역에서 중단없는 연쇄바람을 일으키고 있다는 점이 그렇다. 하루끼 소설을 읽은 동아시아의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소설 속 인물의 의식은 물론이거니와 말투와 행동, 심지어는 복장까지 모방하는 이른바 ‘하루끼족’이 늘어나고 있다. 비교적 늦게 하루끼 열풍을 겪고 있는 중국의 어느 인터넷 기사에 따르면,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는 “너 하루끼 읽었니?”가 아니라 “너 하루끼 하니?”라는 대화가 유행한다고 한다. 인터넷이 생활의 일부가 된 시대에 우리 귀에 익은 광고문구 “Do You Yahoo?”처럼 하루끼는 이제 단순한 독서물이 아니라 신세대 도시남녀들의 일상적 욕망이 되어 있는 것이다. 그들은 하루끼(의 인물)가 먹는 비프스튜와 스빠게띠를 먹고 캔맥주를 마시며 비틀즈와 재즈를 듣고 쿨하게 연애하고 싶어한다.

일본의 저명한 중문학자 후지이 쇼오조오(藤井省三)는 ‘노르웨이의 숲’현상이 일본을 기점으로 하여 한국–타이완–홍콩–샹하이–뻬이징으로 확산되는 것을, ‘시계방향으로 전개되는 현대 동아시아 공통문화’의 형성이라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노르웨이의 숲’ 현상은 각 도시별로 고도경제성장의 단계를 지나 과잉도시화와 인간관계의 격변이 일어나기 시작한 때에 맞추어 순차적으로 일어났다.2 그러나 이처럼 경제적·물질적 풍요로 인한 도시문화 성숙의 지표라는 다소 경제결정론적 방식은 이른바 ‘범동아시아 공통의 대중문화’ 현상을 설명하기에 충분치 못해 보인다. ‘하루끼현상’이 범동아시아적으로 확산되는 시간적 순서는, 대중의 문화감수성이 국경을 넘어 범지역적으로 동질화·보편화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아르준 아파두라이(Arjun Appadurai)는 전지구화가 진행됨에 따라 국가를 기준으로 문화의 경계선을 명확히 구분할 수 있다는 기존의 생각은 설득력을 잃고 있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문화에 대한 관념은 국경 내부의 종족적·민족적 정체성과 관련시켜 사고하는 데에서 현상의 한 국면 즉 이질적 영역과 접촉하는 상황이나 체화되는 정도에 따라 차이를 갖는 하나의 국면으로 이동하고 있다.3 그러나 ‘하루끼현상’을 동아시아에서 대중감수성의 동질화가 낳은 막연한 결과로만 볼 수는 없다. 그보다는 대중적 감수성이 내셔널하지 않은 보편적인 무엇을 상상하고자 하는 욕망의 근저를 하루끼가 건드림으로써 이른바 ‘하루끼현상’이 생겨난 데 주목해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감수성이 단절되어 꺾이는 계기이다. 즉 대중적 감수성이 어떤 싯점을 계기로 보편적이고 무국적적인 것을 향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그 꺾임의 지점을 하루끼가 공략했다는 것, 그것에서부터 이른바 ‘하루끼현상’이 범동아시아적 대중 사이에 파급된 심층적 원인으로 접근할 수 있다.

하루끼의 독자들은 대부분 국적을 막론하고 자신이 하루끼 소설을 좋아하는 이유로, ‘그 분위기 자체에 공감’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 ‘분위기’란 『노르웨이의 숲』이 첫 출간된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까지는 허무한 것에 가까웠고, 2000년대에 그것은 다시 ‘쿨’한 신세대의 감각을 대표한다. 그렇다면 지난 10여년간 동아시아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대중들이 허무하고 쿨한 것에 자신의 감수성을 내맡기게 된 것일까. 생각건대, 그것은 동아시아 각국의 문단에서 한번쯤은 토론을 거쳤던 본격문학·엄숙문학의 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각국의 역사와 현실을 무겁게 다루는 문학이 대중에게 외면당하면서 본격문학과 통속문학의 경계가 무너지고 그 틈새로 허무하고 쿨한 것이 침입해들어와, 이른바 범지역적으로 균질한 감수성이 형성된 것이다.

말하자면 동아시아의 트랜스내셔널한 감수성의 동질화는 내셔널한 영역 안의 감수성의 단절을 거쳐서 형성된 것이다. 그리고 감수성의 단절 속에는 일국적 역사와 기억을 대중적·문화적인 차원에서 처리하지 못한 상황이 내포되어 있다. 일례로 중국의 어느 일간지는 최근 중국에서 하루끼 소설이 유행하는 원인으로 90년대에 새롭게 형성된 ‘독자대중’에 주목한다.80년대까지 중국에서 독서란 맑스주의 이념을 신봉하는 작가지망생의 문학수업을 의미했다. 그런데 90년대에 이르러 문학수업이 아닌 여가선용으로 책을 읽는 신흥 중산계층이 생겨났는데, 문제는 이들이 찾는 ‘소비하기 위한 상품’으로서의 소설을 만들어낼 국내 작가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 공백을 메운 것이 바로 하루끼다.4 이러한 상황은 한국에서도 비슷하다.80년대 문학의 중심을 이루었던 민족·민중 이념이 지나간 자리를 치고 들어온 것이 하루끼였다. 말하자면 감수성의 단절은 각국의 인문학을 지탱하던 중심이념이 해체되는 순간에 일어났다.그리고 그 아노미의 공간을 차례차례 메워나간 것이 무국적성·무취성(無臭性)을 띤 하루끼의 소설이다.

따라서 감수성의 단절 및 감수성의 동질화는 내셔널한 것과 트랜스내셔널한 것의 관계 속에서 읽어내야 한다. 다시 말해 동아시아의 대중이 하루끼의 무국적성·무시간성의 아우라에서 자신의 감수성을 발견한 것은 역설적으로 그들이 처리하지 못하고 건너온 심연 저편의 내셔널한 시간과 역사에 대한 기억과 관련되어 있지 않을까. 그리고 동아시아에서 시계방향으로 전파되어온 ‘하루끼현상’의 확산은, 그 기억을 건너뜀으로써 대중적 감수성의 단절이 일어나는 각 지역간의 시간적 낙차를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하루끼의 소설은 시간과 기억에 대한 서사이다. 비록 그의 작품이 의미없는 말과 가지 않는 시간, 뿌리없는 개인과 이름없는 장소들로 가득하지만, 그 속에는 일관된, 기억에 대한 암시가 들어 있다. 하루끼의 허무하고 쿨한 분위기는 역설적으로 심연 저편에 놓인 단절된 시간을 기억하는 행위에서 생겨난다. 허무란 한차례 열정의 소용돌이가 지나간 자리에 찾아오는 정조이다. 그리고 쿨한 것은 그 허무한 기억의 자리가 냉각되었을 때 나타난다. 양자는 모두 기억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모두 심연 저편에 두고 온 기억을 가지고 있다. 우리에게 80년대가 그렇듯이, 하루끼 같은 일본의 ‘씩스티키즈’에겐 60년대가, 그리고 중국인에겐 어쩌면 문화대혁명의 10년이 그러할 것이다. 이런 시간들은 자본주의의 전지구화가 동아시아인의 일상에 뿌리내리기 이전, 일국적 영역 고유의 감수성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아우라를 지닌다. 소비문화의 범람 속에서 감수성의 경계가 사라져가면서 그것은 각자의 현재에서 기억 저편으로 뚫린 시간의 블랙홀이 된다. 그리고 우리 각자의 기억의 블랙홀은 “우물 밑바닥이 서로 통하는 것처럼”(「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심연 저 끝에서 서로 통하는지도 모른다. 하루끼 소설의 일관된 암시는 바로 이 시간의 블랙홀이다. 그리고 그가 장악한 것은 감수성 자체가 아니라 감수성이 단절된 틈이다.

 

 

2. 세상에서 가장 터프한 ‘화해’

 

60년대와의 화해

하루끼는 1979년 잡지 『군조오(群像)』를 통해 중편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로 데뷔했다. 대학시절부터 ‘피터 캣’(Peter Cat)이라는 재즈바를 운영하던 그의 작품에는 재즈와 로큰롤, 팝송 등 60년대 미국과 유럽의 대중음악에 대한 깊은 애착이 드러나 있다. 비틀즈의 노래 제목에서 따온 그의 대표작 『노르웨이의 숲』 후기에서 그는 매일같이 타베루라는 술집에 가서 비틀즈의 앨범 ‘써전트 페퍼즈 론리 하츠 클럽 밴드’를 120회 반복해 들으면서 이 소설을 썼으며,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에게 도움을 받았다고 고백한다.

무국적자가 아닌 일본인으로서의 하루끼에게 60년대는 특별하다. 그는 1949년에 태어났고 밥 딜런, 비틀즈, 롤링스톤즈가 데뷔한 1960년대 초반에 중학교를 다녔으며, 비틀즈가 일본을 방문한 이듬해인 1967년에 와세다대학 문학부 연극학과에 입학했다. 당시는 세계적으로 미국의 학생운동과 반전운동, 프랑스 68혁명의 기운이 흘러넘치던 때였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하루끼의 첫소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는 밥 딜런의 「바람만이 알고 있어」(Blowing in the Wind)를 연상시킨다. 「바람만이 알고 있어」가 세상에 알려진 1962년은 미국에서 흑인인권운동이 고조되고 꾸바 위기로 3차대전의 공포가 휩쓸던 시기였다. 이듬해에 케네디가 암살되고 1965년에 베트남전쟁이 발발했다. 그사이 비틀즈의 음반은 미국에서 2억장이 팔렸다. 스물한살의 청년 밥 딜런이 쓴 노래 「바람만이 알고 있어」는 이같은 열정의 폭풍이 몰아치던 60년대에 그야말로 바람처럼 전세계 젊은이들의 영혼 속으로 퍼져나갔다.

하루끼는 그런 60년대가 끝나가던 무렵에 대학을 다녔고 스무살을 맞았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1979)에서 『해변의 카프카』(2002)에 이르기까지, 그의 소설에는 60년대에 대한 기억이 원서사처럼 깔려 있다.

 

그후 대다수의 사람들처럼 나는 세월의 소용돌이를 거치면서 스무살을 맞았다. 내 글에도 보이듯이 나는 60년대의 아이이다. 그것은 인생 중 가장 쉽게 상처받고 가장 잘 변하지만, 또한 가장 중요한 때이기도 하다. 이 가장 중요한 60년대에 나는 시대의 조야하고 거친 공기를 맘껏 들이켰고 그 결과 운명은 나를 그 시대의 깊숙한 곳으로 안내했다. 비틀즈에서 밥 딜런에 이르기까지 내 작품의 배경음악들은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다했다.60년대라는 때에 분명 어떤 특별한 것이 있었을까? 지금 생각해도 그런 것 같지만, 그때는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60년대에 도대체 어떤 특별한 게 있었는가? (「我らの時代のフォ一クロア―高度資本主義前史」, 『Switch』 1989년 10월호)

 

그런데 1970년의 일본은 이미 미국만큼 풍요로워져 있었다.‘9백만명이 스키장에 가다’라는 제목의 기사와 일본인이 마시는 홍차의 60퍼센트가 세계 최고 품질인 실론산이라는 기사가 『마이니찌신문』 1970년 2월 7일자와 9일자에 각각 실렸고, 그해 『타임』지는 21세기가 일본의 세기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70년대를 맞아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로 던져진 ‘씩스티키즈’는 일본이 빈곤한 전후(戰後)에서 풍요로워지는 과정을 기억하는 세대다. 그들은 아시아에서, 머리와 수염을 기르고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고 미국의 팝음악을 듣는 풍요를 누리는 선택받은 젊은이들이었다. 말하자면 1970년대는 일본에서 미국의 소비문화에 완전히 길들여진 새로운 대중이 뿌리를 내린 시대였다.5 하루끼에게 60년대는 바람에 실려온 자유와 저항의 공기를 70년대라는 풍요의 물결 속에 상실하고 만 기억 속의 블랙홀 같은 시간이다. 그것은 구체적인 시간으로의 60년대이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즉 60년대는 50년대와 70년대의 사이, 시간의 연속선상에 놓인 구체적인 어느 때가 아니라, 시간의 흐름 중 어느 순간 깊은 우물처럼, 블랙홀처럼 빠져버린 어떤 공간이다.60년대는 기억의 늪인 것이다.“가지도 않는 무거운 금시계”를 목에 달고 다니는 산양처럼(「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하루끼의 인물들은 시간의 블랙홀을 원죄처럼 몸에 지니고 다닌다. 하루끼가 『노르웨이의 숲』을 두고 “비틀즈와의 화해”라고 한 것은 바로 이러한 60년대에 대한 원죄의식에서 나온 것이다.

 

기억이 소거된 ‘숲’

작품 속에서 하루끼는 기억 속의 60년대에 죽음의 아우라를 드리움으로써 그 시간을 영원히 정지시킨다. 그의 작중인물은 모두 젊어서 죽는다. 『노르웨이의 숲』에서 키즈끼는 열일곱살에, 나오꼬는 스물한살에 죽는다. 소설 속에서 ‘나’는 1969년에 열아홉살이다. 그리고 나오꼬는 나보다 7개월이 빨라 1969년 4월에 스무살이 되었다.‘나’는 나도 나오꼬도 스무살이 되지 말고 열여덟에서 열아홉 사이를 반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스무살이 된다는 것은 60년대를 떠나보내는 것을 의미한다.60년대는 “죽었기에 영원히 젊다”(「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그러나 기억이란 시간이 흐를수록 멀어지고 현재에 살아 있는 ‘나’는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잊어버렸다. 『노르웨이의 숲』을 쓰는 서른일곱살의 하루끼는 죽은 나오꼬로 상징되는 60년대가 마치 “몸속의 기억의 외딴 곳” 같은 “어두운 부분” 속에서 “부드러운 진창”으로 변해버린 것 같은 불안에 휩싸인다. 몸속 기억의 외딴 곳, 그곳은 들판에 파인 지독하게 깊은 우물 같은 곳이다. 어림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깊은 그 구멍에는 “이 세상의 온갖 종류의 암흑을 응축해놓은 것 같은 암흑”이 가득 차 있다(『노르웨이의 숲』). 그리고 그 암흑과 현재 사이에는 건널 수 없을 만큼 먼,“시간의 일그러짐”이 있다.

 

“갑자기가 아니지. 당신이 우물을 빠져나오는 사이에 약 15억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어. 당신들의 속담에도 있듯이 세월은 화살과 같다구. 당신이 빠져나온 우물은 시간의 일그러짐에 따라 파진 거라구. 그러니까 우리는 시간 사이를 방황하고 있는 셈이지. 우주의 탄생부터 죽음까지 말이야.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삶도 없고 죽음도 없어. 바람이지.”(『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문학사상사 1996, 99면)

 

‘노르웨이의 숲’은 죽은 시간인 60년대의 은유이다. 밥 딜런의 「바람만이 알고 있어」는 60년대에 젊음과 열정을 바친 망자들에 대한 애도의 메씨지를 담고 있다(“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어야/무고한 사람들이 죽었음을 깨닫게 될까/친구여, 그건 바람만이 알고 있어/바람만이 그 답을 알고 있어”). 그러나 하루끼 인물의 죽음에는 밥 딜런의 노래가 가졌던 저항의 힘이나 활력은 없다. 그에게 60년대는 시간의 선상에서 섬광처럼 눈부시게 빛나다가 금세 암흑 속으로 사라진 구멍과 같다.60년대는 정지한 시간이며, 현재로부터 “15억년”이나 떨어진 차원에 존재하는, 그래서 해석되지 않는 시간이다.

『노르웨이의 숲』에서 ‘나’는 나오꼬가 요양원 ‘아미료’에서 나오면 함께 살 것을 꿈꾸지만, 나오꼬는 1970년에 그곳에서 죽는다. 그리고 요양원 동료 레이꼬와 ‘나’는 비틀즈의 「노르웨이의 숲」과 「예스터데이」 「미셸」 「썸싱」 등 마흔아홉 곡을 연주하고 쉰번째에 「노르웨이의 숲」을 다시 한번 연주함으로써, 쓸쓸했던 나오꼬의 장례식을 새로 치른다. 『노르웨이의 숲』은 제대로 장사지내지 못한 60년대를 위해 뒤늦게 올리는 진혼곡이다. 그렇기 때문에 『노르웨이의 숲』은 60년대를 기억하고 애도하는 것일 뿐,60년대와 화해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한다. 그 화해를 위한 본격적인 여행을 그린 것이 하루끼 소설의 결정판이라 불리는 『해변의 카프카』(海邊のカフカ,2002)이다.

『해변의 카프카』에 등장하는 15세의 카프카와 51세의 나까따는 모두 하루끼의 분신이다. 하루끼는 두 명의 분신을 기억 속에 묻어둔 암흑 같은 블랙홀 속으로 떠나보냄으로써, 살아남은 자의 사명을 완수하고 싶어한다. 그의 사명은 현재 안에 정지해 있는 시간 속으로 들어가 그것과의 관계를 회복함으로써 자신과 60년대를 얽어맨 ‘저주’를 완성하는 것이다. 여기서, 소설 속 인물들의 나이가 갖는 의미는 크다. 그들의 스무살에서 쉰살 사이의 시간은 모두 비어 있다. 열다섯살에 다 성장해버린 카프카와 소년시절에 기억을 잃고 성장이 멎어버린 나까따 사이의 시간이 그렇고, 스무살에 연인을 전공투(全共鬪)의 소용돌이에 떠나보내고 삶의 시간을 정지시킨 쉰살의 사에끼가 그렇다. 말하자면, 스무살과 쉰살 사이에는 시간의 ‘누락’이 있다. 이 누락에 대해서 하루끼는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기억의 ‘상실’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누락’에 가까운 것입니다. 이것은 전문적인 용어가 아니고 지금 편의상 사용하고 있을 뿐이지만, ‘상실’과 ‘누락’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간단히 설명하자면요 글쎄요, 철로 위를 달리고 있는 여러 차량이 연결된 화물열차를 상상해주시기 바랍니다. 그중 한칸에서 짐이 없어집니다. 이처럼 알맹이가 없는 텅 빈 화물칸이 ‘상실’입니다. 그리고 짐뿐만 아니라 화물차까지 몽땅 없어져버리는 것이 ‘누락’입니다.(『해변의 카프카』 상, 문학사상사 2003, 124~25면)

 

이 누락된 시간은 모든 것이 그 안에서 완결된 “완전한 원”과 같은 곳이다. 그곳에서 모든 시간과 기억이 정지하고 말은 문자를 잃는다. 이러한 시간은 작품 속에서 다시 ‘숲’이라는 공간으로 나타난다. 마치 의미의 내재성이 너무나 강한 나머지 그것에 의해 지양되는 그리스 서사시에서의 시간처럼, ‘숲’ 안은 문자와 수치로 된 현실의 시간을 초월해 있다.‘숲’은 블랙홀 같은 60년대에 대한 은유이다. 그곳은 “일단 길을 잃으면 한없이 깊어지는 숲”이고 비틀즈와 롤링스톤즈, 비치보이즈 등 60년대의 흔적이 고스란히 살아 있는 그런 곳이다.

이곳에서 카프카는 15세의 소녀 사에끼와 50세의 사에끼를 모두 만나, 현재와 과거를 얽어매고 있는 기억을 ‘해소’한다.“나에게는 기억이 없어. 시간이 중요하지 않은 곳에서는 기억도 역시 중요하지 않거든(『해변의 카프카』 하, 400면)”이라는 소녀 사에끼의 말에서 보이듯이, 하루끼는 시간을 무의미하게 만들고 기억의 끈을 끊어버림으로써 60년대와 ‘나’의 관계를 해소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소설 말미에서, 자신의 삶과 함께 “기억을 태워버린”50세의 사에끼의 영혼과 카프카를 조우하게 함으로써, 두 사람 사이를 얽고 있는 오이디푸스의 저주를 (푸는 것이 아니라) 완성한다. 주체의 행위로서의 ‘기억’이 사라진 자리에 들어서는 것은 ‘운명’이다. 결국, 카프카의 몸 속에 부적처럼 붙어 있는 시간과의 화해는, ‘세계는 인간의 의지가 아닌 운명에 의해 운행한다’는 그리스 비극의 세계관 속에서 실현된다. 하루끼의 오랜 숙원인 ‘화해’가 ‘해소’되고 마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의 화해는 서로 다른 두 세계 사이의 갈등의 근원을 찾아 해결하는 것이 아니다. 매개로서의 기억이 소거됨으로 인해,60년대는 현재성을 상실한 영원한 과거, 판타지의 공간으로 향한다.

 

단절의 장치로서의 판타지

‘완전한 원’의 시간을 찾아 떠나는 카프카의 여정은 루카치가 『소설의 이론』에서 말한, 잃어버린 선험적 고향을 찾아나서는 근대소설의 문제적 개인과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하루끼는 카프카가 찾아나서는 시간에 판타지적 장치를 설정함으로써 그의 여정에서 리얼리티를 제거한다.‘숲’의 세계는 마치 SF영화에 나오는 삼차원의 세계처럼, 문을 열고 들어가면 그 입구가 감쪽같이 사라지는 그런 곳이다. 카프카는 ‘입구의 돌’을 열고 ‘숲’으로 들어가 기억의 심연에 두고 온 60년대와 만나지만, 그가 그곳에서 나온 다음 ‘입구의 돌’은 영원히 닫히고 만다. 숲을 빠져나가 본래의 생활로 돌아가라는 사에끼의 당부에, 카프카는 이렇게 말한다.“내가 돌아갈 세계 같은 건 어디에도 없어요.”“‘원래의 생활’ 같은 건 나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는 거예요.”

이러한 판타지적 장치는 하루끼의 ‘화해’를 아이러니하게 만든다. 그가 60년대와 화해한다는 것은 숙명의 저주를 완성하는 것이고, 그로 인해 역설적으로 양자의 관계는 회복이 아닌 영원한 단절을 이루기 때문이다. 화해는 곧 단절이다. 따라서 과거의 시간과 화해하는 것은 주인공이 현실세계와의 관계를 (재)구축하는 데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 하루끼가 『해변의 카프카』를 교양소설과 다르게 읽어달라고 당부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네가 말하고 싶은 것은, 「고후(坑夫)」라는 소설은 『산시로(三四郞)』 같은, 이른바 근대 교양소설과는 구성이 많이 다르다는 것인가?” 나는 고개를 끄떡인다.“(…) 산시로는 이야기 속에서 성장해갑니다. 벽에 부딪히고 거기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고 어떻게든 극복해가려고 합니다. 그렇지요? 하지만 「고후」의 주인공은 전혀 다릅니다. 그는 눈앞에 나타나는 것을 그저 멍하니 바라보고 그대로 받아들일 뿐입니다.(…) 그리고 적어도 겉에서 보기에는 광산에 들어갔을 때와 거의 같은 상태로 밖으로 나옵니다.”(『해변의 카프카』 상,206면)

 

독일 교양소설에서 고독한 문제적 개인이 갈등을 겪으면서 구체적인 사회현실과 화해하는 것이 테마인 것과 달리, 카프카의 여정은 현실과 무관하게 원초적 세계에서 주어진 운명을 순응적으로 완성하는 것이다. 그리고 양자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는, 그가 숲에 “들어갔을 때와 거의 같은 상태로 밖으로 나온다”는 데 있다. 교양소설에서 문제적 개인이 결과적으로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적응하고 화해하는 과정을 보여준다면, 카프카가 화해한 것은 현실 속의 공동체가 아니라 기억 속의 세계이며, 그 세계는 현실로 통하지 않는 ‘환상’공간이다. 카프카의 여정은, 삶과는 동떨어져 있고 삶과 낯선 본질의 존엄을 해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오히려 그리스 비극에 나오는 주인공의 그것과 비슷하다. 화해란 운명 속의 저주의 실현이며, 이후 그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의 돌’을 닫음으로써 하루끼는 현실세계와 그것과의 거리를 영원히 벌려놓는다. 카프카의 여정은 기억의 세계와 현실세계 사이의 단절을 완성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로 인해 현실은 기억을 버린 현재, 역사 없는 현재가 된다.

그리고 하루끼는 ‘입구의 돌’ 주위에 두 명의 판타지적 성격의 인물을 배치함으로써 단절의 효과를 배가시킨다. 기억상실 후 한번도 자신의 거주지 나까노구(中野區)를 떠나지 않았던 나까따가 무언가에 홀린 듯 여행을 시작한 계기는 그가 고양이 킬러 ‘조니워커’씨를 살해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정의 막바지에 ‘입구의 돌’까지 그를 안내한 인물은 KFC의 프랜차이저 ‘쌘더스 대령’이다. 위스키와 KFC라는 서구 소비문화의 상징적 아이콘인 두 인물은, 기억의 세계를 찾아 떠나는 주인공의 여정에 다소 기괴한 색조를 더할뿐더러 그것을 어딘가 우스꽝스럽게 만든다. 조니워커가 나까따에게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는 잔혹한 전쟁논리에 기반한 자발적 살인을 유도하여 그로테스크한 역사감을 부여했다면, 매춘중개자 쌘더스는 ‘입구의 돌’을 찾기 전에 철학적이고 환상적인 쎅스상품을 알선함으로써 기억의 세계 주변을 가볍고 혼탁하게 만든다. 돌 안의 세계는 살인과 매춘, 소비문화에 둘러싸여 있다.

말하자면 하루끼에게는 미국에 대한 두 개의 상징이 있다. 비틀즈의 「노르웨이의 숲」으로 상징되는, 시간 위에 섬광처럼 나타났다가 몸속에 부재의 구멍으로 파인 60년대의 그것과, 쌘더스와 조니워커로 상징된, 고도자본주의 국가로 성장한 일본에서 소비문화로 뿌리내린 미국문화가 그것이다. 하루끼의 소설에서 유일하게 나타나는 적극적인 행위는 바로 나까따가 조니워커, 즉 카프카의 현실세계의 아버지를 살해하는 장면이다. 『해변의 카프카』에서 하루끼는 그간 소설 속에 일관되게 생략해온 아버지를 판타지적 장치 속에 등장시키고 그에게 복수함으로써 기억의 시간 60년대와 화해하지만, 역설적으로 카프카를 아비 없이 성장한 “세상에서 가장 터프한 소년”으로 그려냄으로써 ‘과거 없는 터프한 현재’를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3. 국적 없는 노스탤지어

 

시간과 기억을 다루는 작품치고 하루끼의 소설은 가볍다. 그는 현실 속 부재의 구멍인 과거를 은유와 판타지로 처리함으로써 그것을 읽는 독자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지 않는다. 하루끼의 소설에서 과거는 현재와 매개되지 않은 환상공간이며, 따라서 과거를 기억한다는 것은 그것을 현재로부터 영원히 격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루끼의 독자들은 적당히 과거를 기억하고 적당히 슬퍼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삶이 무거워지지는 않는다. 즉, 하루끼의 소설에서 과거의 시간은 역사가 되지 않는다. 그것은 현재라는 시간과 전혀 다른 질의 시간이다. 그리고 이같은 현재와의 ‘무매개성’으로 인해 그의 ‘60년대’는 누구나 기억할 수 있는 보편적인 과거가 된다. 오늘날 동아시아에서 확산되는 ‘하루끼현상’의 본질은, 일본의 ‘60년대’라는 내셔널한 과거가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그리운 옛날’이 되어, 트랜스내셔널한 차원에서 누구나 기억/소비할 수 있는 노스탤지어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국적을 상실한 노스탤지어의 바람은 각국의 기억, 즉 역사의 자리를 대체한다.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은유와 판타지의 시간이 하루끼의 60년대뿐 아니라, 우리의 80년대 그리고 중국의 문화대혁명 10년간 같은 내셔널한 기억의 시간 속으로 잠입한다. 90년대 이후 동아시아에서 이러한 기억의 대체는, 과거의 내셔널한 기억과 자본주의의 전지구화시대인 현재 사이의 단절이 제대로 처리되지 못한 아노미의 공백 속에서 소리없이 재빠르게 진행되었다. 중국의 하루끼 번역자 린 샤오화는 문혁(文革)의 역사를 기억 속에서 청산하고 방축(放逐)해버린 오늘날의 중국을 “의미는 간 데 없고 분위기만 남은 시대”라고 말한다.6 혁명이 의미를 상실한 공허한 기표가 된 후, 도달할 수 없는 역사적 과거 대신 하루끼의 과거가 세련된 문화적 이미지와 브랜드가 되어 어느새 ‘그들의’ 기억으로 소비되기 시작한 것이다.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은 노스탤지어라는 문화적 현상을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예술형식인 패스티시(pastiche)로 설명한 바 있다. 모더니즘의 형식인 패러디가 원본을 조롱하는 모방이라면, 패스티시는 원본을 상실하고 껍데기만 남은 공허한 모방이다. 노스탤지어는 시간의 질서가 무너져 현재의 경험이 압도적으로 ‘물질적’으로 다가오는 정신분열자의 증상처럼,“시간과 역사를 제대로 다룰 수 없게 된 걱정스러운 병리적 현상”이다.7 그런 의미에서 국경을 초월하여 범동아시아적으로 공통의 기억을 소비하게 된 오늘날의 ‘하루끼현상’은 기억할 원본을 상실한 노스탤지어라 할 수 있다. 이 공통의 과거는 현재와의 관련성을 잃은, 말하자면 역사를 초월한 영원한 과거이다. 이처럼 현대 동아시아의 대중이 함께 하루끼를 소비하게 된 것에는, 글로벌한 현재의 시대를 살아가는 그들의 몸 속에 패어 있는 내셔널한 기억의 시간을 처리하는 것에 관한 무의식적 욕망이 자리하고 있다. 그들은 무거운 과거의 자리에 하루끼의 ‘60년대’를 채워넣음으로써, 현재를 과거로부터 영원히 격리시키고 과거의 무게를 참을 수 있을 만큼 가볍게 만든다. 하루끼의 소설이 쿨하게 다가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현재로 건너오면서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역사의 기억을 멀리 떠나보내고, 영원한 현재 속에서 가벼워진 과거를 손쉽게 기억하고 소비하면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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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林少華 「『挪威的森林』,永遠的靑春讀本」, 『中華讀書報』 2005년 7월 13일.
  2. 藤井省三 「中國·香港·台灣と村上春樹―都市現代化のメルクマ一ルとしての文學」, 『記憶する台灣―帝國との相剋』, 東京大學出版會2005, 178~85면.
  3. 아르준 아파두라이 『고삐 풀린 현대성』(차원현 외 옮김), 현실문화연구 2004, 28면.
  4. 何小竹 「村上春樹和大衆閱讀」, 『深쐴晩報』 2003년 3월 11일.
  5. 이이즈까 쯔네오 『하루끼 소설 속에 흐르는 음악』(김진욱 옮김), 문학사상사 2002, 40~41면.
  6. 林少華 「村上春樹的文學世界與中國都市靑年的精神世界」,『視界』 제10집, 160면.
  7. 프레드릭 제임슨 「포스트모더니즘과 소비사회」,할 포스터 편 『반미학』(윤호병 외 옮김), 현대미학사 1993, 178~96면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