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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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동규 黃東奎

1938년 서울 출생. 1958년 『현대문학』 추천으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 『비가』 『어떤 개인 날』 『풍장』 『삼남에 내리는 눈』 『외계인』 『우연에 기댈 때도 있었다』 등이 있음.

 

 

 

절하고 싶었다

 

 

십오년 전인가 꿈 채 어슬어슬해지기 전

바다에서 업혀온 돌

속에 숨어 산 두 사람의 긴 긴 껴안음

얼마 전 거실에서 컴퓨터 책상으로 옮길 때 비로소 들킨

서로 만나는 살들이 엉겨붙은

껴안음보다 더 화끈한 껴안음,

그만 절하고 싶었다.

색연필 찾아들고 그 모습 뜨려다

그 화끈함 어떻게 되돌려주지, 생각해본다.

그게 완도 어느 바다였지?

돌 속 화끈함 알아보고

업어가라 속삭인 그 물결

지금은 어느 바다에서 철썩이고 있는지?

넘실대던 는개 환한 실비로 바뀔 때

혹 격렬비도(格列飛島)쯤에 흘러와

남몰래 오체투지를?

 

 

서귀(西歸)를 뜨며

 

 

실비 속 쉬지 않고 두루마리 풀듯 밀려오는 저 물결

벼랑 넘어와 일렁대는 저 소리.

벼랑끝에 한 줄로 매달려 턱걸이하고 있는 섬쥐똥나무들

말 목 곡선으로 멋지게 휜 해안도로에 뛰어들진 못하고

얼굴만 내밀고 있다.

채 정돈 안된 도시, 그래 더 정다운 서귀포 떠나

태평양 끼고 남원 가는 길,

물결소리 마음대로 들락거리게 창 열고 천천히 달리며

길 금세 끝나지 않기를 빌며

후둑이는 빗방울 목덜미에 맞는 마음 어둡지 않다.

다시 올 때는 차도 유리창도 목덜미도 없이

물결로 오리.

태평양 벗어나 지귀도에서

속 쓰린 물새들과 한뎃잠 한번 자고

말 목 곡선으로 멋지게 휜 해안도로에 오르기 전

평생 턱거리로 매달려 있는 나무 엉덩이들을

한번씩 힘껏 떠밀어주리.

고개 끄덕이며 내려다보는 나무들,

머리를 타고 넘어가라!

타고 넘긴?

머리들 사이에 머리 하나 더 끼운다.

해안도로엔 젖은 사람 하나 가고 있다.

서귀에 왔다 간다.

 

 

슈베르트를 깨트리다

 

 

책꽂이 옥상에서 책들 앞에 촘촘히 서서 살다가

책 뒤질 때 와르르 방바닥에 내려꽂힌 CD들

아 슈베르트 얼굴이나 이름이 적힌 판들.

이 한세상 살며 그래도 마음에 새길 것은

슈베르트, 고흐와 함께 보낸 시간의 무늬들이라 생각하며

여태 견뎌왔는데.

껍질만 깨지지 않고 혹 속까지 상한 놈은 없는가

며칠 동안 깨진 슬픔을 하나씩 들어본다.

아니 슬픔이 아니라

슬픔마저 깨진 맑음이다.

이틀 만에 듣는 폴리니가 두드리는 마지막 소나타는

맑음이 소리의 물결을 군데군데 지워

몇번이나 건너뛰며 간신히 흘러간다.

뛸 때마다 마음이 금가려다 간신히 멈춘다.

슈베르트여, 몸 뒤척이지 말라.

가만히 둘러보면 인간은 기실

간신히 깨지지 않고 존재하는 어떤 것이다.

시방 같은 봄 저녁

황혼이 어둠에 막 몸 들이밀기 전 어느 일순(一瞬)

홀린 듯 흐려진 눈 아니고는 제대로 쳐다볼 수 없는

어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