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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정철훈 鄭喆熏
1959년 전남 광주 출생. 1997년 『창작과비평』으로 등단. 시집 『살고 싶은 아침』 『내 졸음에도 사랑은 떠도느냐』 등이 있음. chjung@kmib.co.kr
아버지의 등
만취한 아버지가 자정 넘어
휘적휘적 들어서던 소리
마루바닥에 쿵, 하고
고목 쓰러지던 소리
숨을 죽이다
한참 만에 나가보았다
거기 세상을 등지듯 모로 눕힌
아버지의 검은 등짝
아버지는 왜 모든 꿈을 꺼버렸을까
사람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검은 등짝은 말이 없고
삼십년이나 지난 어느날
아버지처럼 휘적휘적 귀가한 나 또한
다 큰 자식들에게
내 서러운 등짝을 들키고 말았다
슬며시 홑청이불을 덮어주고 가는
딸년 땜에 일부러 코를 고는데
바로 그 손길로 내가 아버지를 묻고
나 또한 그렇게 묻힐 것이니
아버지가 내게 물려준 서러운 등짝
사람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검은 등짝은 말이 없다
빈집
영하 이십도
산장에 주인장은 없고
씩씩 하얀 김을 뿜어대며
기름보일러만 요란하게 돌아간다
주인은 일주일에 한번 내려온다니
나머지 엿새는 집이 집의 주인이요
집 속에 집이 산다
지붕이 들썩였던가
고드름이 퍼석 떨어지고
문고리를 잡은 손이 쩍 달라붙는다
문고리는 길손의 손을 바싹 잡아당기며 말한다
네 안에 사람을 들여라
돌아서서 내려오는 길에
소나무는 가지를 흔들어
마른눈을 뿌린다
외로운 것은 나만이 아니었다
정오에서 슬며시 비낀
시간인데도 앞이 캄캄했다
캄캄하면 됐다
그 먹먹함을 길동무 삼아
산을 내려왔다
세월의 쓸개
어젯밤 숙취가 뱃속을 쥐어짜
쓸개즙이 흥건한 새벽
화장실에 앉아 신문을 보다가
오늘은 뉴스가 북에서 남으로 흘렀다
북의 변절자가 남의 영웅이 되는 세월의 쓸개
한반도가 지진대에 속한다는 사실을
짜릿한 쓸개의 반란으로 실감하였다
주체의 탈북은 또하나의 사상이 될 것인가
변절은 무엇으로부터의 해방인가
아랫배에 힘을 주다가
곡물의 윤회를 사상한다
설사를 하며 대륙이동설을 믿기로 결심한다
지금은 통일이다 민족이다 분단 따위를
생각할 때가 아니다 무엇보다
꾸르륵대는 쓸개의 반란을 잠재워야 한다
내 뱃속의 해방보다 시급한 것은 없다
속이 지진으로 뒤집어지고 있는데
이깟 세상의 변절 같은 것은 일도 아니다
손으로 아랫배를 쓰다듬으며
어젯밤 끊어진 필름을 복기해본다
나는 누구를 변절했던가
누가 나를 변절했던가
끊어진 기억은 영영 복원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