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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전쟁과 과학은 어떻게 공생해왔는가
E. 볼크먼 『전쟁과 과학, 그 야합의 역사』, 이마고 2003
송성수 宋成守
과학기술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 triple@stepi.re.kr
2003년의 이라크전쟁과 북핵사태로 인해 우리나라에서도 전쟁이 중요한 화두로 등장했다. 오늘날의 전쟁을 논할 때 과학은 단골메뉴로 등장한다. 이라크전쟁의 빌미가 되었던 생화학무기나 미국이 사용한 첨단무기는 과학연구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북핵사태의 핵심적 관건 중의 하나인 핵무기는 인류 역사상 최악의 과학적 산물로 간주된다.
군사전문가이자 저널리스트인 어니스트 볼크먼(Ernest Volkman)은 이 책(원제 Science Goes to War, 석기용 옮김)에서 전쟁과 과학의 공생은 오늘날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인류의 역사 전체를 관통하는 현상이라고 진단한다. 그는 고대에서 오늘날에 이르는 전쟁사와 과학사를 재구성하여 전쟁과 과학이 공생하는 패턴을 밝혀낸다.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결정적인 무기’가 필요하다. 과학을 잘 발전시켜 결정적인 무기를 개발한 집단은 강자로 군림한다. 그러나 맞수가 등장하게 되면 더욱 강력한 무기가 필요하고 그것은 과학의 발전을 가속화한다.
17세기까지의 결정적인 무기로는 고대 전차, 캐터펄트(catapult), 철갑 기병부대, 장궁(longbow), 대포, 전함 등이 언급된다. 이러한 무기를 개발하고 활용하는 과정에서는 재료의 강도, 발사의 각도, 화약의 성분, 항로의 확인 등과 같은 문제가 해결되어야 했으며 이를 위해 야금학·수학·화학·천문학 등이 발전했다. 동시에 그것은 선구적인 통치자가 유능한 과학자들을 동원하는 과정이었다. 이 책은 알렉산드로스 대왕, 에드워드 1세, 샤를르 7세, 엔리케 왕자, 헨리 8세 등과 같은 통치자들이 군사연구를 조직하는 데 엄청난 자원을 투자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또한 아르키메데스, 갈릴레오, 레오나르도 다 빈치 등과 같은 과학자들의 활동이 군사연구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다는 점도 강조된다.
볼크먼은 18세기 이후에 과학이 정치에 종속되기 시작하고 전쟁이 총력전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고 분석한다. 무기를 대량으로 생산하는 체제가 확립되었고 군비경쟁은 더욱 가속화되었으며 급기야 20세기에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기관총·독가스·원자폭탄 등과 같은 가공할 만한 무기들이 잇따라 등장했고 과학은 군사적 목적을 위해 훨씬 체계적으로 조직되었다. 동시에 전쟁은 통조림과 모기약에서 비행기와 컴퓨터에 이르는 수많은 과학문명을 창출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현대산업은 1·2차 대전에 헌신한 과학의 산물이다”는 저자의 주장(307~48면)은 경청할 필요가 있다.
특히 볼크먼은 하버, 하이젠베르크, 오펜하이머, 텔러 등과 같은 과학자들의 생애를 언급하면서 과학이 전쟁에 봉사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과학이 전쟁을 이용하기도 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과학자들은 전쟁을 매개로 자신의 존재를 통치자에게 각인시키고 중요성을 인정받아왔으며 자신의 연구를 실험해보고 과시할 수 있는 무대로 전쟁을 활용해왔다는 것이다. 원자폭탄의 제조와 관련하여 저자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그 지식을 국가의 각종 군사제도와 시설에 결합시켜야겠다고 결정한 사람들도 바로 과학자들이었다. 그 누구도 그들에게 그렇게 할 것을 강요하지 않았다.”(357면)
인간을 대상으로 한 실험은 전쟁과 과학의 공생이 가진 추악한 변모를 여실히 보여준다. 2차대전 중에 독일의 항공실험연구소와 일본의 731부대는 사람을 실험도구로 사용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열등한 종족’이나 ‘적국의 시민’이라는 죄목으로 민간인을 대량으로 학살하는 ‘정치적 편의주의’가 판을 치게 된 것이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미국의 ‘페이퍼클립 작전’(Operation Paperclip)이다. 미국이 2차대전의 전범(戰犯)을 교묘하게 빼돌려 자국의 군사과학을 발전시키는 데 활용했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항공실험연구소장이나 731부대장을 역임했던 엘리뜨 과학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볼크먼은 1991년의 걸프전을 언급하면서 전쟁과 과학의 공생관계를 다음과 같이 진단한다. “그것은 인간 종(種)만이 가지고 있는 두 가지 특성, 즉 같은 종의 동료들을 지배하려는 본능과 자연세계를 이해하고 정복하려는 강박관념이 결합하여 빚어낸 과정이었다. 정복하고자 하는 충동은 전쟁이 되었고, 자연세계를 이해하여 그것을 인간의 목적에 맞도록 손질해보려는 충동은 과학이 되었다. 그 이후로 그 두 가지 본능적 충동은 인간의 삶속에서 함께 보조를 맞추어왔으며, 그 결과 지금 지구의 미래는 위협받고 있는 것이다.”(427면)
이상과 같은 논의를 통해 볼크먼은 상반된 이미지를 가진 것처럼 보이는 전쟁과 과학이 공생관계에 있음을 보여주는 데 성공했다. ‘전쟁은 악이고 과학은 선’이라는 일반적인 이미지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전쟁과 과학의 동반자적 관계를 다각도로 조명한 것이다. 아울러 이 책은 그동안 별개로 간주되어온 전쟁사와 과학사를 결합시킨 의미있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광범위한 저작과 자료를 소화하면서 조그마한 실마리를 찾아 전쟁과 과학을 연결시키는 저자의 솜씨는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그러나 볼크먼의 분석에도 과도한 일반화의 오류가 엿보인다. 그것은 특정한 시각을 바탕으로 역사를 재구성하는 시도에서 종종 발견되는 현상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전통사회에 대한 저자의 서술에는 그러한 경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당시에는 통치나 학문이 지금과 같이 분화되지 않았지만, 저자는 통치를 군사로, 학문을 과학으로 환원한 후 둘 사이의 밀접한 상호관계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설립한 무세이온(Museion)은 군사연구기관으로 전락하고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군사기술자로 치부된다.
남은 문제는 전쟁과 과학의 어두운 관계를 어떻게 극복하느냐 하는 데 있다. 정말 어려운 문제이다. 볼크먼은 과학기술이 사회적으로 통제되어야 하며 과학자가 군사연구를 거부해야 한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리고 아인슈타인의 유명한 화두를 던진다. “제3차 세계대전에서 사람들이 어떤 무기로 싸우게 될지는 예측할 수 없어도 제4차 세계대전에서 사용될 무기는 확실히 알고 있다. (…) 바로 돌멩이와 몽둥이이다.”(429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