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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신기섭 申基燮
1979년 경북 문경 출생. 200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xodd1234@naver.com
현기증
칼을 쥐고 변소에 간다 변소에 매달린 끈을
끊으러 간다 끈을 잡고 반쯤 서서 일 보던
당신의 몸속에는 숭숭 구멍이 뚫려 있었고
구멍들 중에 오래전 내가 살다 나온 구멍 하나;
나를 내뱉던 그날의 그 구멍처럼 변소가
뜨겁다 탯줄 같은 끈을 끊는데 우글우글 핏빛 똥통 속
구더기들 끓는 냄새 잉잉 파리떼 소리
덩달아 내 온몸에 맺힌 땀방울이 끓는다
툭, 끈은 끊어지고. 그러나 나는 왜 아직도 갇혀 있나?
자궁 속 태아 자세로 웅크리고 있는데
점점 밀려오는 환한 빛; 고개를 숙이고
빛을 향해 나는 머리부터 먼저 내밀고 나가는데
누군가 내 머리를 쭈욱 잡아빼고 있다
바짝 곤두서는 머리칼! 나의 몸이 솟구친다
빛이 입속으로 들어와 빛을 먹여준다
빛을 입에 물고 빛에 안겨 숨막히는 이 순간
나를 꼭 안았다가 다시 놓아주는 빛, 한없이
나는 떨어져내리고 빛은 사라져서 그늘진
마당에 주저앉아 나 이제 숨 쉰다 희뜩희뜩
엄마를 죽이고 세상에 나온 신생아처럼
할아버지가 그린 벽화 속의 풍경들 2
겨울밤 할머니는 다라 가득한 도라지들을 과도로 찬찬히 깎고 있다
뜨거운 물에 한참 불린 도라지들 껍질을 벗겨내자 하얗게 씻긴 낙태아들의 손가락 같은,
도라지들이 스케치북 속 우리 엄마 젖가슴을 따스하게 적시며 쌓이고 있다
엄마아, 엄마아아
내 곁에 누워 있는 기저귀 찬 할아버지, 먼 나라로 입양을 와 첫날밤 맞은 아기처럼 울고 불며 엄마를 찾느라 자꾸만 허공을 헛잡으며 징징대고 있다
팩베지밀에 빨대를 꽂아 몇 모금 먹여주고 나는 다시 돌아누웠다 이내 잠잠해졌다
봄이 오면 엄마가 온대요, 봄이 오면 엄마가 온대요,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달래며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눈은 푹푹 쏟아지고, 어디선가 대빗자루에 눈 쓸리는 소리 서서히 밀려오는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