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이기철 李起哲

경남 거창 출생. 1972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청산행』 『유리의 나날』 『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 아름다웠다』 등이 있음. poetone@chollian.net

 

 

 

사랑에 대한 반가사유

 

 

우리가 이 세상에 와서 일용할 양식 얻고

제게 알맞은 여자 얻어 집을 이루었다

하루 세끼 숟가락질로 몸 건사하고

풀씨 같은 말품 팔아 볕드는 木家 얻었다

세상의 저녁으로 걸어가는 사람의 뒷모습 아름다워

세상 가운데로 편지 쓰고

노을의 마음으로 노래 띄운다

누가 너더러 고관대작 못되었다고 탓하더냐

사람과 사람 사이를 세간이라 부르며

잠시 빌린 집 한채로 주소를 얹었다

이 세상 처음인 듯

지나는 마을마다 채송화 같은 이름 부르고

풀씨 같은 아이 하나 얻어 본적에 실었다

우리 사는 마을 뒤뜰에 달빛이 깔린다

나는 눈매 고운 너랑

한생을 살고 싶었다

발이 쬐끄매 더 이쁜 너랑 소꿉살림 차려놓고

이 땅이 내 무덤이 될 때까지

너랑만 살고 싶었다

 

 

 

저녁이 다녀갔다

 

 

내 다 안다, 사람들이 돌아오는 동네마다 저녁이 다녀갔음을, 나이 백살 되는 논길에 천살의 저녁이 다녀갔음을, 오소리 너구리 털을 만지며 발자국 소리도 없는 저녁이 다녀갔음을

 

찔레꽃 필 때 다녀가고 도라지꽃 필 때 다녀간 저녁이 싸리꽃 필 때도 다녀가고 오동꽃 필 때도 다녀갔음을, 옛날에는 첫 치마 팔락이던 소녀 저녁이 이제는 할마시가 되어 다녀갔음을

 

내 다 안다, 뻐꾸기 자주 울어 맘 없는 저도 울며 상춧잎에 보리밥 싸 먹고 맨드라미 밟고 온 저녁이 대빗자루로 쓴 마당에 손님처럼 過客처럼 다녀갔음을, 풀꽃의 신발마다 이슬 한잔 부어놓고 다녀갔음을, 내일 다시 태어날 사람을 위해 들판 가득 달빛을 뿌려놓고 다녀갔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