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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김광선 金光善
1961년 전남 고흥 출생. ‘젊은 시’ 동인. 현재 대전에서 곱창집을 운영하고 있음.
제3회 창비신인시인상 당선작
조리사 일기 1 외 4편
겨울나무
소 한 마리분의 내장을
부위별로 정리해놓고 가을도 끝난
나무 아래 섰다
아직도 그 선명한 빛이 가시지 않은
고기를 담근 통
한껏 흘려보낸 물빛처럼 노을이 피었다
물컹거리는 비린내보다도 허리의 통증
씻어내려 삼킨 막소주 한잔으로 모자라
담배연기 폐 깊숙이 밀어넣는다
풀풀 날린다 흩날릴 것도 없는
시푸르딩딩 겨울 초입 저녁나절
민망한 듯 잎새 몇개 겨울나무 뜨악하다
몸짓만이 남았구나
바람 앞에서 초연할 수 없었던 의지
맨가지로 빈 하늘 받치고 섰구나
찬물에 퉁퉁 불은 손을 쓰다듬는다
이 손끝에서
많은 사람들 포만하여 행복했을까
내 아직 푸른 수액은
어떤 혈관으로든 타고 흐를 수 있을까
찬밥덩이처럼 굳은 가슴 언저리
떨림도 없이 또 몇잎
떨구는 까칠한 줄기 쓰다듬으며
다독이듯 내내 쓰다듬으며
조리사 일기 4
겨울달
뽀얗게 우러난 국물이
겨울달처럼 말갛다
염통처럼 벌름거리며 끓어오르던
깊은 관절과 힘줄과 뼈마디
녹아 흐물거릴 때까지 우려낸 국물
산동네 가슴 시리던 겨울달 같다
끓이고 또 끓이고 토막난 사골과 반골
동동거리고, 엎어지고 넘어지고 부딪치고
먼저 떠오르는 두터운 기름층
대국자로 걷어내고 또 걷어내고
어느덧 비릿한 냄새도 가시고
구수한 냄새가 난다
구수한 냄새가 난다 애꿎게도
골분이 다 빠져버린 뼈다귀는
스펀지처럼 천공(千孔)이 뚫리고
손으로 만지면 가루가 되어버리는
주방 뚝배기 같은 사내 가슴속
묵묵히 겨울달 하나 또 진다
조리사 일기 5
자목련
내가 쓰고 난 면장갑이
꽃물 들인 것 같다
참꽃 내내 만지작거렸거나
봉숭아 꽃잎 참 예뻐서
몰래 만지작거리다 으깨어버렸을까
고기를 다듬다가
흰 장갑에 물드는 꽃물
내장이라서 더욱 비린 하아,
많이도 길들여지고 마음 다독인 창밖
벚꽃 한움큼 바람 흩날린다
염장이처럼 만지작거리는
한 생명의 소화기관
눅눅하게, 어깨까지 젖어도
세 끼니 밥은 무심히
껍질을 벗기고 기름을 떼고
면장갑 아름드리 자목련 꽃잎처럼
가슴 가득 삶이 비리다
조리사 일기 7
수련처럼
날마다 수인의 옷을 입으며
나를 걸어잠그지
많이 얼룩지고 때묻을 자리
하얀 위생복 단추를 채우며
서툰 솜씨로 다가가지 않겠다고
서툰 양념 하지 않겠다고
있는 듯 없는 듯
언제라도 지워질 수 있는 조연이라고
스스로를 낮추지
한때는 그 어느, 그들만의 자리에서
건강했을 생명들
내 손에서 잘라지고 저며지고 갈려지고
삶아내고 볶고 튀겨내고
흰 위생복이 땀에 절여지고
한 몸뚱이가 되고
구정물통 비누거품처럼 머릿속 뿌옇다
절대 잊지 말자고
또다른 삶으로 혼을 불어넣는 작업
오늘 비록 고달프고
진흙탕에 뿌리내려도, 수련처럼
맑은 꽃을 피워보고픈 내 직업은
조리사
조리사 일기 12
푸른 도구
날이 무디어졌다 수만번
너의 손목을 잡아 서툰 목숨 연명했던
내 신체의 일부처럼
질감도 느껴지지 않는 나의 푸른 도구
본디 날이란
무디어졌을 때 손을 베이는 법
세상 무엇 하나 서투른 것 없는데
예리한 직선이 오죽하랴
오래 쓰지 않으면 금세 녹이 슬고
함부로 대하거나 업신여기면
금세 상처로 일깨우는, 감추지 않으리
깎아내고 잘라내고 고르고 골라야
하나의 진실
욕되지 않는 빛깔 앞에서
선명해지리
날을 세운다 고운 숫돌에 마음을 얹어
더 맑은 눈빛으로 다가가기 위하여
훌쩍 건너버린 강
하찮아도 소중하게 다루기 위하여
정갈하게 마음 여민다
새까만 녹물 닦아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