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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또 한번의 잘못

미국의 대북정책

 

 

브루스 커밍스 Bruce Cumings

미국 시카고대학 역사학과 교수. 한국전쟁의 기원에 관한 방대한 연구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I·II, North Korea: Another Country 등 다수의 저서가 있으며, Koreas Place in the Sun: A Modern History가 본사에서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로 번역·간행됨. 본지에 「한국전쟁과 애치슨 발언」(64호) 「70년간의 위기와 오늘의 세계정치」(87호) 「비교론적 시각에서 본 시민사회와 민주주의」(92호) 「냉전구조들과 한반도의 지역적·전지구적 안보」(112호)를 기고한 바 있음. 원제는 “Wrong Again”(London Review of Books 2003. 10. 31)이며 필자가 한국의 독자를 위해 쓴 ‘후기’를 붙임. rufus88@uchicago.edu

ⓒ Bruce Cumings 2003/한국어판 ⓒ 2004 (주)창비

 

 

1994년 6월, 빌 클린턴은 평양에서 북쪽으로 60마일 가량 떨어진 영변의 북한 원자로에 ‘선제공격’을 개시할 뻔했다. 당시 지미 카터가 마지막 순간에 북한으로 하여금 영변 핵시설의 작동을 완전히 동결하도록 설득했고,1994년 10월에는 기본합의서에 서명이 이루어졌다. 그후 6년 동안 우파 공화당원들은 이를 맹렬히 비난했고, 마침내 조지 W. 부시가 기본합의에 대한 일군의 반대파들을 행정부로 데리고 들어와 합의를 허물기 시작했으며, 그럼으로써 스스로의 예언을 실행하여 평양과의 위험한 대결을 다시 시작했다. 이라크를 침공하고 사담 후쎄인이 가진 무기에 대한 각종 과대경고를 했던 바로 그 사람들이 그와 비슷한 방식으로 북한의 위협을 과장해왔다. 실상 두번째 북핵 위기는, ‘한껏 자극적으로 꾸며진’ 정보를 이용해 평양을 벽으로 몰아붙이고 쌍방의 협상을 불가능하게 만든 2002년 10월에 시작되었다.

침공을 정당화하는 데 이용된 놀랄 만한 정보기관의 실책에 대해 훨씬 더 논쟁적인 영국 대중들이 (말하자면) 즉각 싸울 태세를 갖추었음에도 불구하도, 자기만족에 빠진 미국의 대중들은 지금껏 부시가 단 한개의 대량살상무기(WMD)도 발견하지 못한 사실에도 개의치 않는 듯하다. 이런 현상의 전모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미국내 최고 신문들과 최고 추적보도 기자들(둘 모두)의 글을 끈기있게 읽어보아야 한다. 『뉴욕 타임즈』 12면에 묻혀 있는 주디스 밀러(Judith Miller)의 길고 세세한 기사를 보자. 총 34문단 중 30번째 문단에 가서야 우리는 이라크의 무기 소재지에 대한 미국의 전쟁 전의 정보가 종종 ‘어처구니없을 만큼 잘못된’ 것이었음을 알게 된다. 어느 미군 고위간부의 말은 이러했다.

 

팀들은 사진과 추정위치 (…) 등이 들어 있는 묶음을 받게 됩니다. 이런 식의 지시를 받지요.“이 장소로 가라. 거기에는 맥도널드 가게가 있을 것이다. 냉장고를 들여다봐라. 프렌치 프라이와 치즈버거, 그리고 코카콜라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그리로 가보면, 냉장고도 없고 맥도널드도 없을 뿐 아니라 맥도널드를 거기에 들여와야겠다는 생각조차 없었던 겁니다. 매일 매일이 그런 식이에요.

 

이 군간부가 속한 ‘MET 알파’ 그룹은 미정보기관 내 이라크 조사단이 “대단히 의심스럽다”고 간주한 시설을 조사하러 바스라에 파견되었다. 조사단은 핵무기에 사용되는 부품들을 찾아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 팀이 실제로 발견한 것은 ‘커다란 공장용 야채찜통 몇개’였는데 수송상자에 러시아어로 선명하고 정확하게 그렇게 표기되어 있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능력에 관한 정보기관의 주장은 이보다 훨씬 공개적인 검증을 덜 받았다. 십년이 넘는 기간 동안 CIA는 북한이 1989년에 원자로에서 얻을 수 있는 최대치의 플루토늄 11 내지 12kg 이상을 재처리하지는 못했을 것이므로 한두 개의 핵폭탄을 갖고 있을지 모르나 그 이상은 아니라고 주장해왔다. 이런 결론은, 정부의 북한전문가들을 모두 소집해서 북한이 핵폭탄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손을 들라고 한 회의 후,1993년 11월의 국가정보평가(National Intelligence Estimate)에서 처음 등장했다. 절반을 갓 넘긴 수가 그때 손을 들었다. 다수를 겨우 차지한 이 사람들은 북한이 1989년에 추출한 연료의 마지막 1g까지 전부 재처리했으며,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이 플루토늄을 폭발시킬 내파장치를 만들어냈다고 가정했다. 여기까지 맞다 쳐도 CIA가 지칭한 것은 ‘장치’였지 폭탄은 아니었다.

그 이래로 해마다 CIA 국장은 북한이 한두 개의 (장치가 아니라) 폭탄을 갖고 있을 “확률이 절반 이상이다”고 의회에 말했고, 신문들은 판에 박은 듯 이 가정을 사실로 보도해왔다. 그러나 1996년 리버모어(Livermore)와 핸포드(Hanford) 연구소의 핵전문가들은 북한이 가진 연료량에 대한 추정치를 단 하나의 핵폭탄에 드는 양보다도 적을 것으로 보았다. 그들은 결론짓기를, 북한이 고작해야 7 내지 8kg의 연료를 가진 반면,“폭탄 한 개를 처음 제조하는 데는 무기급 플루토늄 10kg이 들고” 그 다음부터는 개당 8 내지 9kg이 든다는 것이다. 가장 뛰어나며 또 가장 믿을 만한 독자적 전문가 중 한사람인 데이비드 올브라이트(David Albright)에 따르면,“최악의 경우에 대한 가장 신빙성 있는 추정치”는 북한이 6.3에서 8.5kg 사이의 재처리 플루토늄을 가졌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달리 말해, 언론에서 끝없이 복창되는 CIA의 숙지된 추측은 틀린 것으로 보인다. 눈에 잘 안 띄는 이 오류의 결과는 그것이 미국과의 협상에서 북한의 입지를 강화하는 역할을 해왔다는 점이다.

『뉴욕 타임즈』 백악관 담당기자 데이비드 쌩어(David Sanger)는 미 정보기관으로부터 나온 ‘특종들’을 너무 자주 기사화하는 바람에 몇몇 동료들은 그를 그냥 ‘특종’이라 부른다. 불행히도 그중 상당수는 잘못된 것이었다. 쌩어는 북한이 보유할 수도 혹은 아닐 수도 있는 한두 개의 핵장치들에 관해 CIA가 덧붙인 모든 단서조항들을 생략하는 일에 특히 능숙하다.1998년 8월, 『뉴욕 타임즈』 1면에는 북한이 은밀히 핵무기를 만들고 있는 거대한 지하시설 위치를 정보기관이 파악했다는 내용의 그의 기사가 실렸고 이는 당연히 언론에 일대 소동을 야기했다. 그러나 북한의 (이례적인) 허가로 미군이 그곳을 사찰했지만 아무것도 없고 방사능 물질의 흔적조차 없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 소식은 주요기사 대접을 거의 받지 못했다.

2003년 7월 20일, 『뉴욕 타임즈』는 미 정보기관이 “무기급 플루토늄 생산을 위한 두번째 비밀공장”을 찾아냈다고 또다시 주장한 쌩어의 기사(톰 섕커Thom Shanker와 공동작성)로 앞서 나갔다. 정부의 한 고위관리는 『뉴욕 타임즈』의 이 정보와 관련해 “매우 우려할 만하나 아직 확실한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증거가 된 것은 북한이 유일한 재처리 시설이라 밝힌 영변 핵단지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플루토늄 생산 때 배출되는 가스인 “크립톤85(kryton-85)의 수치가 높다”는 점이었다. 크립톤85의 수치 상승이 숨겨진 두번째 핵시설을 나타낸다는 이야기였다. 남한의 전문가들은 즉각 이 기사를 부인했고, 데이비드 올브라이트는 크립톤85의 수치 상승을 탐지함으로써 숨겨진 혹은 비밀스런 장소의 위치를 집어내는 일이란 사실상 가능하지 않다고 단언했다. 게다가 북한은 (플루토늄과 달리) 여러 시설에서 크립톤85의 배출이 정상수치를 넘어서지 않을 정도의 소량 단위로 우라늄을 농축할 능력이 있다. 요컨대 두번째 시설이란 없는 걸로 보인다.

밀러의 기사가 그랬듯이 쌩어-섕커 기사에서도 진짜 결정적인 사실은 마지막 단락에 등장하는데, 거기에는 근래 북한의 핵설비가 “정확한 숫자를 알 수 없는 여러 다른 장소”로 분산된 점을 감안할 때 그에 대한 선제공격이 어떤 난점을 갖는지 서술되어 있다. 매일같이 읽어온 경험에 비추어보건대 『뉴욕 타임즈』는 이때 처음으로 북한에 1만5천개나 되는 “지하 군사·산업 기지”가 있으며,“이중시설을 건설해온” 과거 사례들로 보아 북한이 “국가안보를 위한 기간설비의 핵심 면면을 모두 갖춘 복합시설들”을 당연히 갖추었을 것이라 주장했다. 전문가들은 이 사실을 꽤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리고 선제공격을 개시하기가 꽤 까다로운 일이 되었으므로 부시행정부는 그것 대신에 핵무기를 사용한 일련의 대규모 공격을 계획해왔다.

부시행정부에서 나온 정보평가에 가장 일관되게 이의를 제기해온 저널리스트는 『뉴요커』(New Yorker)의 씨모 허시(Seymour Hersh)이다. 2003년 10월 27일자에서 그는 ‘연기빼기’(stovepiping)로 알려진 과정, 즉 CIA와 다른 정보기관에 의해 거치는 정확도 및 신뢰도 심사과정 이전의 원(原)정보를 보게 해달라고 고위관리들이 요구한 일에 관해 썼다. 이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딕 체니(Dick Cheney), 도널드 럼즈펠드(Donald Rumsfeld), 그리고 폴 월포위츠(Paul Wolfowitz)가 해당 정보들에 대해 먼저 거쳐야 할 ‘엄밀한 검증’은 생략한 채 현장에서 온 보고의 진실성을 그들 단독으로 (혹은 부원들과 함께) 판단한 다음, 이라크전쟁을 뒷받침하도록 의도된 정보들이 그랬듯이 그중 유죄 증명에 가장 용이한 보고들을 서둘러 발표한다는 것이다. 특히 체니는 CIA를 방문해 분석가들을 을러대서 원정보에 대한 접근을 요구하는 등 적극적으로 행동했다.2002년 10월에 그는 사담 후쎄인이 “핵무기 개발을 계속 추진하고 있다”고 공개적으로 주장했다.

북한의 핵무기 제조기술에 관한 1990년대 CIA의 평가는 제아무리 미심쩍고 결함이 있다 해도 부시행정부나 이 정부의 평양특사였던 제임스 켈리(James kelly)의 과장스러운 말에 비하면, 조심스럽고 신중한 것으로 보인다.CIA가 “한두 개의 장치”라는 평가를 내린 지 대략 십년이 된 무렵, 정권을 잡은 부시는 이 위협 자체를 과대 선전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이 실제로 어떤 규모인지가 중요하다는 의견을 무시해왔는데, 북한이 두 개나 여섯 개 혹은 여덟 개의 핵폭탄을 갖고 있을지 모르나 그렇다고 위기인 것은 아니다라는 식이었다. 그보다는―수년간의 유엔 무기사찰로 무장해제되었음이 분명해진―사담 후쎄인 쪽이 예방전쟁을 정당화할 정도로 훨씬 더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그 결과 미국의 정책에 혼란이 빚어졌고 북한의 강경론자들에게는 핵무기 제조를 밀어붙일 운신의 자유가 생겼다.

클린턴행정부가 북한의 중·장거리 미사일 전부를 돈으로 사들여 폐기하는 협정서 초안을 협상테이블에 남겨놓았는데도 부시는 집권한 지 1년이 넘도록 평양과의 고위급 회담을 열려고 들지 않았다.2002년 10월 마침내 부시가 켈리를 평양에 파견했을 때, 켈리는 북한이 우라늄을 농축해 더 많은 폭탄을 제조하려는 제2의 핵프로그램을 갖고 있다고 비난했다. 켈리에 따르면, 그의 협상상대가 처음에는 그런 프로그램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더니 나중에 가서는 농축우라늄 폭탄만이 아니라 더 강력한 무기도 개발중임을 시인했다고 한다. 이 소식은 언론에 폭발적으로 보도될 텐데도 부시는 이라크전쟁 수행결정이 의회를 통과할 때까지 발표를 미루었다. 이 이상한 사건을 이해하는 데 있어 우리가 가진 것이라고는 켈리가 언론에 던져준 이야기밖에 없다.

켈리가 돌아온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정부관리들은 『뉴욕 타임즈』에 1994년의 기본합의서가 끝장났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이 기본합의서에 의거한 잠정 보상책으로 워싱턴이 제공해오던 난방용 중유 공급을 중단했다. 평양은 즉각 기본합의서가 붕괴되었음을 선언하고 핵확산금지조약(NPT)서 탈퇴했으며 유엔 사찰단을 쫓아내고 영변 핵단지에서 봉인과 감시카메라를 제거하는 한편,8년 동안 용기에 넣어 보관하던 8천개의 연료봉에 대한 통제권을 회수하고 원자로를 재가동시켰다.(이 모든 일이 강경하게 진행되었다뿐이지 기본적으로 그들이 1993~94년에 클린턴의 주의를 끌기 위해 했던 일의 반복이다.) 북한은 험악한 태도로 부시행정부의 적대정책이 그들에게 ‘강력한 물리적 억제력’의 개발 외에는 선택의 여지를 남겨놓지 않았다는 뜻을 전했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미행정부는 이라크침공으로 치닫고 있었으므로 북한이 이제 하나가 아닌 두 개의 핵폭탄 프로그램을 갖고 있다는 자신들의 정보를 의도적으로 계속 평가절하했고 이 상황을 ‘위기’라 부르길 거부했다. 이는 명백히 북한을 혼란에 빠뜨렸는데, 어느 북한 장성은 러시아 방문객에게 “미국은 우리가 핵무기가 없다고 발표할 때는 핵무기가 있다고 하더니 이제 우리가 핵무기를 만들었다고 하니 그냥 허풍이라고 한다”고 말했다.

『네이벌 워 컬리지 리뷰』(Naval War Colledge Review)에 기고하는 박식한 전문가 조너선 폴랙(Jonathan Pollack)에 따르면,2002년 10월에 일어난 사태의 진상은 양 정부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정보를 이용할 작정을 했고” 그리하여 “한반도에서 본격적인 핵무기 개발을 막고자 10년 가까이 공들여 만들어낸 외교적 합의들”을 무너뜨리는 쪽을 택했다는 것이다. 폴랙은 부시의 정보평가가 이전의 보고들보다 북한의 핵개발 능력에 대해 “더 확정적인 주장들을 내놓았으나”CIA가 북한이 농축우라늄 기술을 수입했다는 증거를 발견한 날짜는 얼버무리는 듯한 사실을 발견했는데, 증거 발견은 1997년 아니면 1998년에 일어난 일로서 클린턴행정부는 부시와 그 동료들에게 이 문제를 충분히 알려주었다. 그런데도 켈리와 그밖의 다른 사람들은 18개월 동안 이 증거를 뭉개고 있었고 그런 다음에는 언론이 이 프로그램을 이제 막 밝혀진 것으로 여기도록 조장했다. 켈리는 평양에 있을 때나 귀국해서 언론에 이야기할 때 자신의 주장을 “확증할 특정한 혹은 세부적 증거”를 제시한 적이 없으며, 북측 회담자에게 자신이 가진 증거를 내밀며 설명이나 해명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미국 언론은 북한이 자기네가 한 서약을 지키지 않았다는 켈리의 판단을 즉각 받아들였으며 그리하여 미국 언론매체에서 농축우라늄 프로그램은 제멋대로 살아움직이게 되었다.2002년 11월 CIA는 북한의 우라늄 농축용 기체원심분리기가 “가동되려면 적어도 3년이 걸리”지만 일단 돌아가기 시작하면 “매년 두 개 이상의 무기”를 만들 핵분열 물질을 제공할 수 있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2003년 3월에 켈리는 의회에서 (미 정보기관이 찾지는 못했지만 있다고 가정하면서) 이 시설이 무기급 우라늄을 생산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십중팔구 “몇개월의 문제”라고 말했다. 내가 본 어떤 언론기사도 일절 언급하지 않은 점은,1994년 기존의 흑연 원자로를 동결하는 보상책으로 북한에 건설되던 경수로에 농축우라늄 프로그램이 쓰일 수 있다는 사실이다. 미국의 입장에서 경수로가 갖는 잇점은 연료를 북한 외부에서 들여와야 하고 그렇게 의존구조를 만들어놓으면 쉽게 감시할 수 있을 것이란 점이지만, 자주성을 중시하는 북한이 보기에 그 점이야말로 경수로가 지닌 문제였다. 폴랙의 표현대로,“천 메가와트 단위 [경수] 원자로 두 기에 들어가는 연료의 양은 많기도 하려니와 계속 공급해야 할 것”이므로 “평양이 자생적 농축능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는 것도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다. 더구나 경수로 연료로 사용할 단계만큼 우라늄을 농축하기란 그것을 더 정제해서 핵분열 연료를 만드는 일보다는 훨씬 쉽다. 하지만 부시행정부는 제2의 핵폭탄 프로그램이 있다는 주장을 떠들썩하게 내세워 이 문제에 관한 논의를 모두 덮어버렸다.

전 클린턴행정부의 관리들을 포함하여 다수의 전문가들은 북한이 이 기술을 수입함으로써 분명 속임수를 썼다고 믿는다. 그들은 북한이 경수로 때문에 우라늄 농축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북한이 수입한 기술로 실험을 한 것뿐인지 아니면 ‘핵농축 프로그램’에 혈안이 되어 있는지 (그리고 지금도 그런지), 다시 말해 북한이 우라늄 폭탄을 만들려고 하는지에 대한 의견이 갈린다. 만일 북한이 파키스탄에서 수입을 시작한 싯점이 1997년 혹은 1998년이고 이것이 폭탄에 사용할 의도로 이루어졌다면, 그 이유는 아마 워싱턴측이 1994년 기본합의서에서 자기들이 했던 약속(즉 북한과의 관계를 정상화하며 북한을 핵무기로 위협하는 일을 그만두겠다는 약속)의 이행을 질질 끄는 바람에 평양의 강경론자들이 불만을 품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면 김정일이 기본합의서를 계속 존중하되 동시에 은밀히 핵무기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양동작전을 쓰기로 했을 수도 있다. 김정일은 1998년 9월 정권 수립 50주년 기념일에 최고권력자의 자리에 올랐는데 새로운 무기 프로그램은 군부 내에서 그의 지지도를 강화해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클린턴행정부 관리들은 북한이 무슨 계획을 세웠든간에 미사일 협상이 완료되고 북미관계가 정상화되었더라면 북한의 농축기술은 봉쇄되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들이 후임 부시행정부에 말한 것도 본질적으로 그 점이었다. 부시 측근들은 정보를 갖고도 18개월이나 어물어물하다가 고작 2002년 10월 북한과 대결하는 데 그 정보를 사용함으로써 해결 가능한 문제를 양편 다 물러설 길 없는 중대 위기로 바꾸어놓았다. 지금쯤 북한은 ‘하나 내지 두 개의 장치’라는 CIA의 판단을 훌쩍 뛰어넘는 핵무기 프로그램에 착수했을지 모르는데, 이는 미국 외교의 엄청난 실패사례가 될 것이다. 부시가 자신의 한반도 정책에서 무엇을 얻겠다는 건지 실제로 알고 있는 사람은 워싱턴, 평양, 뻬이징, 혹은 모스끄바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평양에서 켈리가 보인 태도에 대한 하나의 해석은 그가 어떠한 외교적 진전도 있을 수 없게 하려고 (언론에 전면공개된 적이 한번도 없는) 한 다발의 정보 보고서를 선제적으로 사용했다는 것인데, 실제로 그의 방문은 2002년 9월 선언된 부시의 새로운 선제공격 독트린의 일환이었다. 이제 전형적이고 예측 가능한 북한의 속임수와 도발, 새로운 한국전쟁의 초기단계에 핵무기를 사용하려는 미국의 오래된 계획, 그리고 부시 독트린 이 세 가지가 모두 결합된 데서 위험은 비롯된다. 부시 독트린은 북한이 위기를 일으킬 경우 핵 선제공격을 한다는, 수십년간 미군의 표준 작전절차였던 기존의 계획에다가, 지금도 수천개씩 쟁여놓은 핵무기를 보유했거나 혹은 보유하길 꾀한다는 이유만으로 미국이 북한과 같은 나라들을 공격하겠다는 분명한 의지를 합친 것이다. 이 점을 분명히 해둘 작정이었던 듯,2002년 9월 백악관의 누군가가 대통령 행정지침 17호를 흘렸는데, 여기에는 북한이 선제공격의 주요 표적으로 올라가 있었다.

도널드 럼즈펠드는 2003년 봄에 한반도용 기본 전쟁계획(‘작전계획 5030’)의 수정을 요구함으로써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이 계획을 읽은 내부 소식통에 따르면 수정 계획은 ‘군부를 동요시켜’ 그들이 김정일을 권력에서 끌어내리고 ‘정권교체’를 이루게 하는 방식으로 김정일정권을 무너뜨린다는 것이다. 『유에스 뉴스 앤 월드 리포트』(US News and World Report)의 기사에 따르면, 이 계획을 추진한 사람들은 “바로 이라크의 정권교체를 주장한 정부 내 강경파 중 다수”였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고위 관리들은 이 새로운 안에 “전쟁을 도발할 정도로 공격적”인 요소가 있다고 여겼다. 공격을 감행하거나 군사쿠데타를 도발하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않았지만, 럼즈펠드 일파는 미군이 “몇주에 걸친 기습훈련을 실시”하기를 원했다. 그 “목적은 북한주민들을 벙커로 몰아넣은 다음 비축해둔 식량과 물 등 귀중한 비상물자들을 소진해버리게 만들려는 것”이었다. 묘하게도 이것은 1950년을 연상시키는데, 당시 북한은 38선을 따라 약 4만명의 군인을 동원하는 장기간의 군사훈련을 한다고 발표했었다. 훈련 중 몇개 사단이 남쪽으로 진로를 바꾸었고 3일 만에 서울을 접수했다. 이 여름 훈련이 침략의 전주곡임을 안 것은 극히 일부의 최고위 관리들뿐이었다. 반세기가 지난 후 럼즈펠드가, 두 명의 목격자에 따르면 처음 국방부에 들어올 당시만 해도 한반도에 아직도 4만에 가까운 미군이 주둔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워했다는 그 인물이, 자신의 도발적인 계획을 들고 등장한 것이다.

1958년 미국은 수백기의 핵탄두, 핵지뢰, 포탄, 공중투하 핵무기 들을 남한에 배치하기 시작했다. 이것들은 1991년 부시 1세가 전세계에서 전술핵무기를 철수할 때까지 이곳에 있었다. 미 핵잠수함이 언제라도 북한 해안으로 몰래 침투할 수 있으므로 이 철수조치로 북에 대한 핵 위협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1950년대 후반에 이루어진 미국의 초기 핵배치에 대한 김일성의 반응은 최대한 넓고 깊이 지하시설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그 자신이 거의 드러내서 인정한 대로 전쟁이 나면 지상에 보이는 것은 완전히 파괴될 것이라고 가정했기 때문이다. 평양의 한 지하철역의 가파른 에스컬레이터 바닥에서 핵 방공호를 본 일이 있는데 거기에는 각각 2피트 두께의 거대한 폭발 대비용 문이 우묵하게 벽 속에 들어 있었다. 한스 블릭스(Hans Blix)는 1992년 영변 핵단지에 대한 첫 유엔 사찰을 수행하다가 입구까지 닿는 데만 “에스컬레이터로 몇분씩 내려가야” 하는 “동굴 모양의 지하 방공호 두 개”를 보고 깜짝 놀랐다. 블릭스는 이 시설들이 핵단지에 대한 핵무기 공격 가능성에 대비하여 지어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남한의 미 사령관들은 현재 이 요새국가의 군사기구 거의 전부가 지하에 감추어져 있다고 믿는다. 앞서 말한 대로 이 점으로 인해 군시설에 대한 선제공격이 매우 어려워졌으며, 그래서 럼즈펠드는 그 대신 영변에 선제공격을 하고 이어서 다수의 표적에 일련의 강력한 핵공격을 한다는 계획을 세운 것이다.

이 공격의 수단은 지하 깊숙이 뚫고 들어가 ‘소형’ 핵폭약을 터뜨린다는 새로운 미사일이다. 올해 초 럼즈펠드는 십년째 발효중인 소형핵무기 제조금지령을 의회가 폐지하도록 나섰다. 『뉴욕 타임즈』에 따르면, 공화당원이 주를 이룬 의회내 지지자들은 ‘저강도’ 핵탄두를 사용하여 “치명적인 물질을 대기 중에 퍼뜨리지 않으면서 화학무기나 생물학무기를 소각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부시행정부는 ‘저강도’핵무기가 “북한과 이란 같은 핵보유국의 등장”을 저지하는 데 더 큰 효과를 발휘할 것이라 믿는다. 이 새로운 지면 관통 무기는 “두꺼운 암벽과 콘크리트를 부수고 침투할” 수 있도록 (십중팔구 열화우라늄으로 만들어진) 강화 외피를 장착하게 될 것이었다. 상원의 반대자들은 이 법안의 폐지가 비핵확산 노력의 종말을 뜻할 것이라 주장했으며, 미시건 상원의원 칼 레빈(Carl Levin)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걸어가지도 말라고 해놓고, 바로 그 길을 우리가 무모하게 내달리고 있다”고 말했다.

럼즈펠드 전쟁계획의 유일한 문제점은 지금까지 개발되거나 상상된 어떤 기술도 지표를 50피트 이상은 뚫고 내려갈 수 없다는 점이다. 이라크침공이 시작된 그날 밤 크루즈미사일로 사담 후쎄인을 제거할 수 없었던 (다시 말해 설사 그가 표적이 된 건물에 있었다 하더라도)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후에 조사한 결과 방들이 발견되었는데, 한 독일회사가 설계한 이 방들은 핵무기를 직통으로 맞아도 견딜 만큼 든든한 보강재를 갖추었고 땅속 깊은 곳에 만들어져 있었다. 유일한 해결책이란 점점 더 큰 탄두를 쓰는 것뿐이어서, 결국 김정일을 겨냥하는 것은 동시에 시내의 인근지역 일대를, 아니 어쩌면 시 하나를 전부 날려버리게 되는 것이다.

이라크 점령으로 그들의 천리안이 흐려지기 전 럼즈펠드와 월포위츠 일파는 김정일이 프라이팬 속의 개미처럼 겁에 질려 이리저리 도망다니는 것을 상상했다. 김정일은 2003년 2월 중순부터 50일 동안 공개적인 자리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가 다시 등장했을 때 (럼즈펠드나 월포위츠일 가능성이 농후한)‘한 국방부 고위관리’는 『뉴욕 타임즈』에 “정말로 내가 김정일이라면, 내일 아침 깨어나서는 ‘이라크전쟁이 끝났으니 미국인들이 이라크에서 포진했던 방식처럼 지금쯤 한반도에 포진해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떠올릴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 관리는 또 미국이 주한미군을 북한 포대의 사정권 밖으로 옮긴 다음 정찰을 늘리고 “정밀 표적공격을 훨씬 더 공격적이고 훨씬 더 신속하게 수행할 수 있도록” 재배치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이 정책에 따라 미국방부는 이라크침공 직전 24대의 장거리 B-1,B-52 폭격기를 미국내 기지에서 괌으로 옮겼고 F-117 스텔스 전투폭격기 몇대를 남한 기지에 배치했는데 이 폭격기들은 “엄중한 방공시설로 에워싸인 표적에 신속한 공격을 감행하게끔 고안된”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월포위츠는 서울에 가서 미 전투부대가 위험지대에서 벗어나 한강 이남으로 재배치된다고 발표하고 내친김에 세계 언론에 “북한이 붕괴 일보직전에 있다”고 말했다.

불과 얼마 전 이라크에서 일어난 일을 생각할 때 이런 도발적 조치들은 또 한번의 한국전쟁을 불러일으킬 만했다. 거기까지는 못 갔지만 이 조치들은 오만과 무지가 결합된 본보기로서 미국을 수치스럽게 만들었다. 이 관료들은 유엔과 관련해서는 미국의 주권을 요란하게 떠들어대지만, 다른 모든 나라의 주권도 존중해주어야 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게다가 이들은 자기네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김정일의 생일은 국경일로 지정된 2월 16일이며,(특히 혹한의 겨울 동안) 오래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은 트레이드마크가 된 그의 통치방식이다. 그는 한 별장에서 파자마 바람에 머리말이(curler)를 한 채 흐트러진 머리카락이나 느긋하게 다듬으며, 이 ‘양질의 시간’을 아껴쓰는 것이다. 북측의 태도를 더 잘 보여주는 예는 “이라크전은 전쟁을 방지하고 나라의 안전과 국가의 주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강력한 물리적 억지력의 보유가 필요하다는 교훈을 가르쳐주었다”는 4월 18일자의 성명이다.(여기서 ‘강력한 물리적 억지력’이란 켈리 방문 이후 북한이 사용해온, 핵무기를 보유할 수 있음을 암시하는 완곡어법이다.) 분명 북한사람들은 전쟁을 원치 않으며, 같은 성명에서 “미국이 대북정책을 대담하게 전환할 용의가 있다면 우리는 특정한 하나의 대화형식만을 고수하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함으로써 처음으로 다자회담을 통해 미국과 만날 의향이 있음을 비쳤다. 그러나 전쟁이 날 경우 그들이 싸워보지도 않고 굴복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오산이다.

켈리 방북 이후 부시의 전략은, 북한이 핵프로그램의 해체작업에 착수하는 것 외의 어떤 문제에 대해서도 북한과 대화하지 않으며, 심지어 이 문제에 관해서도 2자회담은 않겠다는 것이었다. 부시는 북한의 조치에 상응할 보상책도 제시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떤 회담도 다자간 형식이어야 한다는 조건은, 부시가 미국의 영향에서 벗어나고 있다고 파악한 동아시아 동맹국들을 주로 겨냥한 것이었다. 공화당 출신의 미대통령들은 남한을 통치한 독재자들을 30년간 일관되게 지지했다.1972년 박정희가 계엄령을 선포하고 스스로 종신 대통령이 되었을 때 닉슨은 못 본 척했다. 레이건이 백악관 집무실에 초대한 최초의 국가원수는 1980년 쿠데타 과정에서 수천명은 아닐지라도 수백명의 광주 시민을 학살한 전두환이었다. 많은 전문가들은 전두환의 피후원자인 노태우를 권좌에 앉힌 1987년 대선에서 미국 공화당 팀이 득표집계용 컴퓨터를 조작했다고 지금도 확신하고 있다.

2002년, 부시행정부는 다가오는 대선에서 구 여당의 후보인 이회창에게 확실한 승산이 있다고 본 듯, 그가 가을에 워싱턴을 방문하자 최고권력자로 대우했다. 하지만 한국인들은 전두환·노태우 정권에 반대한 많은 반체제 인사들의 변론을 맡았던 용기있는 변호사 노무현을 선출했다. 선거운동 과정에서 노무현은 더 독립적이고 평등한 대미관계를 정착시키고 전임자 김대중의 대북 화해정책을 이어가겠다고 약속했다.

노무현의 당선 이후 미 언론에서는 남한의 ‘반미주의’에 대한 과장과, 미군을 쫓아내고 싶어하는 배은망덕한 한국인들에 관한 위협적인 이야기들이 무성했다. 한 기자는 노무현의 취임식 직전 “부시행정부 내에는 이미 노대통령에 대한 깊은 불신의 징후가 보인다”고 썼다. 어떤 고위 군사전문가는 “김정일이 DMZ의 우리 군대를 공격하고는, 노에게 전화해서 (…)‘뭔가 조치를 취해 미국을 막아라’라고 말할 수도 있다”고 했다. 일본 난잔(南山)대학의 ‘지역안보 전문가’인 로빈 림(Robyn Lim)은 “한미동맹은 끝났다”고 선언했다. 이즈음 노무현의 보좌관들은 미국이 남한의 동의 없이 북한을 공격한다면 남한과의 동맹관계는 깨질 것이라고 미 관리들에게 말했다. 이 또한 반미 발언인가? 그렇다면 한번 상상해보라. 캐나다에 미국을 향해 조준된 1만대의 대포가 있는데, 멀리 떨어진 어느 강대국이 워싱턴과 상의하지 않고 캐나다와 전쟁을 벌이겠다고 한다면 미국인들이 어떻게 느낄지.

두 명의 주요 후보가 나선 민주적 선거에서 과반수에 가까운 표를 얻고 승리하기는, 박정희가 온갖 조작에도 불구하고 가까스로 김대중을 누른 1971년 이래(그때 박정희는 더이상 선거란 없다고 결심했다) 노무현이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의 성공은 한국에 대한 오래전의 경험이 있는 미국인들에게조차(혹은 특히 이들에게) 두드러진 불쾌감을 자아냈다. 공화당의 한국관련 대표주자 리차드 앨런(Richard Allen)은 『뉴욕 타임즈』에 노무현의 당선으로 미국과 한국의 관계에 “우려할 만한 변화”가 조장되었다고 썼다. 그는 한국의 지도자들이 이제 “중립지대로 들어섰다”고 말하며, 이 지도자들은 실제로 핵을 둘러싼 현재의 교착상태에서 워싱턴과 평양 양쪽이 모두 양보해야 한다는 뜻을 비추는 단계까지 나갔는데 “이런 식의 냉소적 행동은 심각한 신뢰 위반에 해당한다”고 덧붙였다. 앨런은 “이제 북한 그리고 남한의 과격시위대, 양방향에서 위해가 가해질 수 있으므로” 아마도 미군은 철수해야 할 것임을 시사했다. 그의 견해로는 “현재 서울이 누리는 안전과 번영의 상당부분을 가능케 해준 것은” 바로 미국이라는 것인데, 여기에는 한국인이 자신에게 은혜를 베푸는 손을 물어뜯어서는 곤란하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북한이 “핵이라는 칼을 뽑으려 드는” 이때 어떻게 한국인들이 감히 미국을 비판할 수 있는지 의아해하는 미국인도 있었다. 한 국방부 관리는 “아이에게 자전거 타는 법을 가르칠 때와 비슷하다.50년 동안 우리는 한국 옆에서 핸들을 잡아주며 함께 달려왔다. 하지만 어느 싯점에선가는 손을 놓아야 한다”고 설명했다. 노무현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을 때 서울에 근무하는 또다른 군관리는 “이곳(그의 기지)은 정말이지 초상집 분위기다”고 말했다. 한편 미국의 사업체들은 미군이 철수한다면 투자자들이 “여기서의 계획을 (…) 심각하게 재고하게” 될 것이라 경고했다. 이런 논평을 한 당사자나 (종종) 그들의 말을 인용하는 기자들이, 이런 말에 담겨 있는 과민반응과 짐짓 베푸는 우월감의 결합에 대해서는 도무지 아무 의식도 없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최근 남한의 한 여론조사를 보면 미국을 ‘싫어하는’ 사람의 수가 1994년의 15%에서 2003년에는 53%로 늘어났다. 미국을 ‘좋아하는가’라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한 사람은 37%인데 1994년에는 64%였다.

그러는 동안 일본의 코이즈미(小泉) 수상은 대북관계의 돌파구를 계획하고 있었다. 김정일과의 정상회담을 위한 협상이 수개월에 걸쳐 “극비리에 진행”되었다. 코이즈미의 한 보좌관은 2002년 8월 은밀히 평양을 방문하고 와서, 과거 북한이 일본 시민을 납치했다는 주장까지 포함하여 코이즈미가 논의하고 싶은 어떤 문제든 북한측이 수용할 의사가 있었다고 말했다. 코이즈미는 미 국무부 부장관 리차드 아미티지(Richard Armitage)가 토오꾜오를 방문한 2002년 8월 27일 드디어 부시행정부에 자신의 계획을 말하기로 결정했다. 나중에 조너선 폴랙은 “수상의 임박한 방문에 대해 일본과 미국 간에 사전 의사소통이 없었다는 것부터가 놀라운 일이었다. 정보기관이 최근 북한의 [핵]농축 활동에 관해 밝혀낸 사실들과 관련지어본다면, 수상의 마지막 순간의 발표는 (…) 미 관리들에겐 더욱이 경악을 금치 못할 일이었다”라고 썼다.

곧 제임스 켈리는 토오꾜오로 가서 사흘 동안 체류하며 북한의 핵농축 계획에 관한 자신의 정보를 꺼내놓고 김정일을 만나러 평양에 가지 말도록 코이즈미를 설득했다. 그는 실패했다. 코이즈미는 9월 중순에 출발했고, 김정일은 자신의 정권이 첩보활동을 목적으로 많은 일본인을 납치했다고 인정하는 전례없는 조치를 취했다. 이는 일본인의 격분을 불러왔고, 코이즈미는 외교적 돌파구를 여는 대신 여론의 심각한 악화라는 부담을 안게 되었다. 몇주가 지난 뒤 켈리는 평양에 나타나 바로 이 ‘증거’를 북한에 들이댔는데, 이는 평양과 토오꾜오 간 화해가 더이상 진전되지 못하게 만들고, 노무현을 둥지로 돌아오게 압박하는 효과를 발휘했다.

코이즈미의 정상회담이 발표될 당시 나는 서울에 있었는데, 하루 이틀 전에는 존 볼턴(John Bolton,군축을 망가뜨린 행정부의 소위 ‘군축 담당 차관’)이 도착하더니 김정일 개인 및 그의 정권 일반을 악이자 평화에 대한 위협이요, 이 지역 안전의 최대 적이라는 등등의 비난을 퍼부었다. 볼턴은 2003년 여름 북한문제에 대한 6자회담이 막 뻬이징에서 열리려는 싯점에 다시 한번 이런 행동을 했다. 그는 잔인한 폭군이 북한을 ‘끔찍한 악몽’의 손아귀로 틀어쥐고 있다고 말했으며, 이 때문에 아미티지는 볼턴의 과장된 말이 자신의 입장과는 다르다고 공개적으로 밝혀야 했다. 『뉴욕 타임즈』의 한 기자가 볼턴에게 부시의 대북정책이 무엇이냐고 묻자 “그는 책장 쪽으로 성큼 걸어가더니 책 한권을 뽑아 탁자 위에 쾅 내려놓았다.‘북한의 종말’이라는 제목의 ‘미국기업연구소’(American Enterprise Institute) 인사가 쓴 책이었다. 그는 ‘이것이 우리의 정책이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것은 대통령의 정책이기도 하다. 임기 초반부터 부시는 김정일을 신뢰할 수 없는 미치광이, ‘피그미’ ‘악인’으로 비난해왔다. 최근 밥 우드워드(Bob Woodward)와의 토론에서 그는 불쑥 큰소리로 “나는 김정일을 혐오합니다”라고 말하며 “허공에 손가락을 내저”었다. 그는 또 북한정권을 “붕괴시키는 것”을 선호한다고 공언했다.(아마도 부시의 혐오감은 두 지도자가 모두 아버지 덕에 자리를 차지했다는 널리 퍼진 인식과 관련있을 것이다.)

1953년 한국전쟁 종결의 50주기를 얼마 앞두고 전 국방장관 윌리엄 페리(William Perry)는 『워싱턴 포스트』(Washington Post)와 심각한 대담을 했다. 그는 막 부시행정부의 고위관리들, 남한 대통령, 그리고 중국의 고위관리들과 광범위한 협의를 끝낸 참이었다. 그는 우리가 상황에 대한 “통제력을 잃어가는 것 같다”고, 다시 말해 우리가 “전쟁으로 이르는 길”에 들어섰다고 했다. 북한이 폭발실험을 하거나 테러리스트들에게 수출할 정도의 핵탄두를 곧 갖게 될지 모른다는 것이었다.“북한에서 현재 진행중인 핵프로그램은 미국 도시들에서 핵무기가 터질 수 있다는 임박한 위험을 야기한다”고 그는 말했는데, 그건 터무니없는 말이었다. 그럴 경우 미국의 보복은 북한을 ‘숯 연탄’(콜린 파월의 표현)으로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다음에 페리는 본론으로 들어가서, 부시가 평양과 진지한 대화를 시작할 의향이 없음을 지적했다. 그는 “우리가 이에 관한 정책을 세우지 않고 협상을 하지 않는 이유는 대통령 때문이다. 나는 그가 김정일은 사악하고 역겨운 존재이며 그와 협상하는 일은 부도덕하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생각한다”고 넌지시 말했다.그러므로 불안정하고 은둔을 즐기는 독재자와, 역시 불안정하고 충동적이며 외교문제에 무지한 자의 손에 세계평화가 맡겨진 것이다. 한반도의 안전에 관해 누구 못지않게 정통한 학자 서재정은 이보다는 더 차분하고, 운이 따라준다면 더 정확할 수도 있는 의견을 내놓았는데, 그에 따르면 “거의 성공할 뻔했던 클린턴과, 교착상태에 빠진 부시의 근본적인 차이는 (…) 부시가 두 나라의 적대관계를 끝내기 거부한다는 데 있다”는 것이다.

이라크전쟁 중에 콜린 파월은, 아마 일시적이긴 하겠지만 한반도 정책의 통제권을 잡았고 (부시가 임명한 문관 출신의 국방부 관리들로 이루어진 벌컨그룹Vulcan Group은 자기네가 신경쓸 곳이 너무 많아 파월이 하는 일을 막을 수가 없다고 불평했다) 부시를 설득하여 켈리로 하여금 4월에 뻬이징에서 북한사람을 다시 만나고 8월 말에는 중국이 마련한 6자회담에 참여하도록 했다. 데이비드 쌩어는 이 회담을 부시행정부가 북한에 대한 접근법을 근본적으로 수정했다는 신호로 보도했다. 또다른 기자는 이라크의 혼란상이 파월의 입지를 높였고 부시가 마침내 유엔 내 동맹국과 우방들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썼다. 부시가 갑자기 북한과의 회담을 원하고 다른 나라들의 지원을 바라는 것이 진정으로 변화를 뜻하는지는 시간이 판가름해줄 것이나,2002년 9월 파월이 이라크 문제를 유엔에 상정했을 때도 낙관적인 분석가들은 비슷한 이야기를 한 바 있다. 만일 사실이 그렇다 해도, 또 부시가 합의를 얻어낸다 해도, 이는 그가 집권할 당시 클린턴행정부가 있던 바로 그 자리로 돌아가는 것일 뿐이다.

1993년 11월에 자신들이 처음 제시한 ‘일괄타결안’에 토대를 둔다면 핵프로그램에 관한 진정으로 대등한 협상이 성공할 수 있다는 점을 북한측은 미 관리들에게 납득시키고자 10년 이상 노력해왔다. 북한은 한국전쟁의 공식적 종전선언, 상호 적대관계의 해소, 각종 경제 및 기술 제재의 해제, 외교적 인정, 그리고 매우 값비싼 프로그램을 포기한 데 따른 직·간접적 보상이 주어진다면 그 댓가로 핵과 미사일을 포기할 것이라고 일관되게 이야기해왔다. 그들이 이를 실행할 의지가 있는지는 1994년에 검증된바, 당시 그들은 핵시설을 동결했고 유엔 사찰단의 감시 아래 이후 8년간 동결상태를 유지했다.

최근에 마이클 오핸런(Michael O’Hanlon)과 마이크 모치즈키(Mike Mochizuki)는 『한반도의 위기: 핵무장한 북한과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가』(Crisis on the Korean Peninsula: How to Deal with a Nuclear North Korea)에서 자신들이 ‘총괄적 외교협상안’이라 불렀던 방안을 다시금 제기하고 나섰다. 이는 북한 핵프로그램의 검증 가능한 종결, 미사일 판매 및 실험 금지, 재래식 전력(戰力)의 대폭적인 감축, 개방형 경제개혁, 그리고 북한의 인권(혹은 인권의 결핍) 문제에 관한 대화 개시에 상응하여, 워싱턴이 불가침선언, 한국전쟁을 최종적으로 끝낼 평화협정, 정상적인 외교관계,“아마 십년간 연 20억 달러에 달할” 원조계획(미 동맹국들과 분담하게 될 비용)으로 응답할 태세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내용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전략을 뒷받침할 세심하고 독창적이며 설득력있는 주장들을 다수 동원했으며 “김정일이 이 과정 내내 권력을 쥐고 있다 해도, 점진적이고 부드러운, ‘벨벳’형 정권교체”를 궁극적인 목표로 삼았다.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러지 않으면 미국의 정책은 더 위험하게 표류하고, 혹은 끔찍한 전쟁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불행히도 선택은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 변덕스러운 미국 행정부와 평양의 흥분 잘하는 집단의 손에 쥐여져 있다.

많은 이들은 북한정권이 지상에서 가장 야비한 정권이며 (나는 전직 주일 미국대사가 노무현 대통령의 취임식 다음날 청와대 모임에서 이 점에 관해 노대통령에게 설교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김정일 같은 폭군이 핵무기를 손에 넣는다는 것은 큰 재앙으로 어떤 댓가를 치르더라도 막아야 한다고 믿고 있다. 나는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북한에는 2300만의 사람들이 살고 있고 이 나라가 수십년 전부터 엄청난 수의 화학무기, 그리고 어쩌면 생물학무기까지 보유하고 있음을 기억하라고 촉구하고 싶다. 우리는 우리의 핵무기를 가지고 그들이 이런 무기들을 사용하지 못하게 반세기 동안 제지해왔는데, 만일 북한이 똑같은 무기를 가지고 벌컨그룹의 주전론자(主戰論者)들을 제지한다면, 그것이 우리가 바랄 수 있는 최선일지도 모른다.

‘북한문제’는 대공황기의 국제체제 붕괴와 뒤이은 세계대전까지 거슬러올라가는 가혹한 역사의 산물이며, 그 역사 속에서 한국인들은 헤아릴 수 없는, 미국인이 상상할 수도 없는 고통을 겪어왔다. 우리는 여러해 전에 이미 북한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었지만 우리의 지도자들은 해결하지 않는 편을 택했고(클린턴은 예외이다), 그 덕에 우리는 이 새로운 세기에 더욱 악화된 상황에 놓여 있다. (2003년 10월 31일)

 

후기

내 글이 창비에 실리게 되어 매우 기쁘며, 독자들이 부시행정부의 대북정책이 안고 있는 문제와 위험을 이해하는 데 이 글이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미국의 정책이 지닌 문제는 제임스 켈리가 북한의 우라늄 농축기술과 관련해 어떤 종류의 ‘정보’를 가졌는지가 모호하다는 데서 비롯되며, 위험은 2003년 봄 도널드 럼즈펠드의 지휘하에 개발된 수정된 전쟁계획과 더불어 시작된다. 하지만 수많은 난관과 위험에도 불구하고 나는 워싱턴과 평양이 외교적 해결을 향해 새롭게 매진한다면 양자간의 주된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다고 여전히 확신한다.

론 루이스(Lohn Lewis)가 이끄는 방북대표단은 북한사람들에게 그들의 ‘물리적 핵억제력’을 전형적이고 예측 가능한 방식으로 과시할 기회를 제공했던 것 같다. 다시 말해 대표단은 자기들이 보고 있는 것이 재처리된 플루토늄인지 아니면 북한이 재처리된 플루토늄이라 주장하는 것인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북한이 ‘폭탄’을 보여준 것은 아니라는 점만큼은 분명하며, 나는 지금도 사실상 북한이 사용 가능한 혹은 목표에 도달 가능한 핵무기를 보유하지 않았다고 믿고 있다. 어쨌든, 북한은 그들 나름대로 비장의 무기, 즉 ‘핵억제력’ 보유 여부의 애매함이라는 자산을 지켜냈다. 좀더 일반적으로 말하면, 다가오는 11월 선거 이후 누가 미국의 대통령이 되어 있을지 알게 되기 전까지는 워싱턴과 평양 사이에 큰 변화가 없을 것이다. 북한으로서는 분명 부시의 패배를 열렬히 간구하고 있을 터인데, 그들의 많은 다른 소망과는 달리 이 소망에서만큼은 전세계의 많은 이들이 함께할 것이다.

黃靜雅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