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촌평
양헌석 장편 『오랑캐꽃』, 실천문학사 2003
지워버린 기억의 흔적
임홍배 林洪培
서울대 독문과 교수 limhb059@snu.ac.kr
『오랑캐꽃』은 양헌석(梁憲錫)이 오랜 침묵 끝에 내놓은 첫 장편소설이다.87년 민주화투쟁의 극적 단면을 감동적으로 묘사한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타오르고」(1988) 등의 수작을 발표하며 주목을 받았던 양헌석이 10년 넘게 소설을 쓰지 못한 까닭은 무엇일까. 작가의 말을 빌리면 ‘이번엔 남의 이야기나 만든 이야기가 아니라 순수하게 내 이야기를 써야겠다’는 의욕에 발목이 잡혔다고 한다. 액면 그대로 이해하면 『오랑캐꽃』은 순수한 자전소설이고 그의 80년대 작품들은 지어낸 이야기인 셈이다. 소설의 통념에 비추어보면 그처럼 소설적 허구와 체험적 진실의 구분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태도는 작가의 상상력을 제약하고 이야기의 활력을 떨어뜨리게 마련이다. 그럼에도 소설쓰기를 불가능하게 할 만큼 작가 스스로 그러한 구분에 사로잡혀 있었다면 필경 ‘내 이야기’의 원체험이 작가의 삶에서 어떤 형태로든 극복되어야 할 고통스러운 기억의 진앙으로 남아 있다는 뜻일 것이다.
이번 소설에서 밝혀지는 가족사에 따르면 작가의 부친은 일제 때부터 사회주의운동을 했고 6·25 전란 중에는 남로당 간부를 지냈으며 유신정권 치하 때 검거되어 비전향 장기수로 꼬박 19년을 감옥에서 보냈다. 평생 혁명적 신념을 견지한 아버지 때문에 가족들이 겪은 말 못할 수난과, 성장기 내내 아버지라는 존재를 부정해야만 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 거라는 강박증은 지울 수 없는 정신적 외상으로 남아 있었다. 그러한 가족사의 비극을 있는 그대로 서술하겠다는 작가의 구상이 난관에 부딪힌 것은 무엇보다 80년대와 90년대의 낙차 때문일 것이다.80년대의 이념지향성과 90년대의 감상주의를 떠올릴 수도 있지만, 양헌석의 경우에는 그런 도식이 들어맞지 않는다. 여기서 양헌석의 80년대 소설에도 가족사의 문제가 비중있게 등장했다는 사실을 잠시 상기할 필요가 있다. 가령 「포구의 죽음」(1985) 같은 작품을 보면 주인공의 할아버지는 6·25 당시 좌익활동을 한 업보 때문에 평생 고향땅을 밟지 못하며, 할아버지의 죽음 이후에야 할머니를 통해 할아버지의 과거 행적을 알게 되는 주인공은 나중에 다시 할머니의 유골을 고향 바다에 묻어주는 상징적 귀향의 제의를 통해 자신의 삶 바깥에 있다고 여겨온 역사의 지평을 어렴풋이 예감하게 된다. 소설에서 아버지의 자리가 할아버지로 바뀐 것은 아직 감옥에 있는 아버지의 중압이 그만큼 크다는 뜻도 되지만, 다른 한편 굳이 아버지 이야기를 직접 하지 않더라도 80년대 현실에서 평범한 소시민들까지 민주화의 대열에 동참하게 만든 의미있는 변화를 체험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타오르고」에서 윤석일이 수배중인 여대생 해린에게서 ‘자유가 박탈당함으로써 열리는 자유로움’을 애틋한 사랑의 감정으로 믿고 또 확인하거니와, 그런 믿음이 곧 아버지와의 해후와 화해를 기약하는 희망의 단서가 됨은 물론이다.
『오랑캐꽃』은 그런 믿음과 희망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세기말의 현실에서 지난 연대(年代)를 돌아보며 이제 세상을 하직한 아버지의 존재가 자신의 삶에서 과연 어떤 의미를 지녔는가를 되묻고 있다. 소설이 시작되는 현재의 싯점에서 중년의 아들 윤기립은 ‘반’사회적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비’사회적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무위도식하는 일탈자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런 반면에 감옥에서 출소한 이후의 짧은 여생까지도 자신의 신념에 충실하게 살았던 아버지의 숭고함을 상기하면 아버지와 아들의 삶은 영원히 서로 접점을 찾지 못한 채 어긋날 것으로 보인다. 달리 출구가 없어 보이는 이 막다른 골목의 끝에서 지나온 삶을 돌이켜본다 한들 결국 아버지의 이름으로 자신의 삶에 가해진 국가의 폭력과 사막처럼 황폐해진 삶의 환멸을 곱씹는 회한 이상의 결과를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런데 “누군가가 나를 알고 나를 이해한다는 것이 너무 싫다”(38면)는 기립의 자폐적 기억에 미세한 균열을 일으키는 것은 누이동생 지원이다. 이 소설은 가족사의 어두운 기억의 단층들을 두 남매가 번갈아 회상하는 형식으로 진행되는데, 서로 공유하는 기억의 장면들을 각자의 입장에서 회상하는 방식의 역할분담을 통해 모종의 대화적 관계가 형성된다. 중국 작가 따이 허우잉(戴厚英)이 『사람아, 아 사람아』에서 인상적으로 구사한 이러한 역할 바꾸기의 기법이 『오랑캐꽃』에서는 아버지에 대한 상이한 태도가 남매의 삶을 어떻게 바꾸어놓았는가를 추적하는 장치로 활용되고 있다. 아버지에 대한 태도가 단호한 쪽은 뜻밖에도 여동생 지원이다. 그녀는 아버지의 존재로 인해 가족에 가해지는 위협과 공포심을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위한 도약대로 삼아 마침내 ‘주홍글씨’를 지우고 당당한 ‘시민권’의 회복에 성공한 인물이다. 신문기자에다 소설가로서도 이름을 얻은 그녀가 보기에 오빠 기립은 아버지의 굴레를 핑계로 아버지의 그늘에 숨어서 삶을 방기한 ‘저능아’이자 ‘못난이’이며, 그런 오빠에 대한 그녀의 경멸은 언제나 ‘오빠 너는’이라고 윽박지르는 호칭으로 반복된다. 혈연을 부정하는 이 위악적 호칭의 반복이 결국 자신을 ‘정지된 시간의 늪’에서 건져올린 맹목적 생존욕구의 공허한 메아리였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는 대목에 이르러 소설의 시작과 끝이 아슬아슬하게 이어진다.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던 무한질주의 삶이 결국 아버지를 감옥에 가두었던 억압적 질서의 덫에 걸리면서 억누르고 배제했던 기억의 맹점들이 비로소 복원되지만, 그녀가 지워버린 기억의 흔적을 되살리는 일은 이제 ‘모두를 떠나보내고 혼자 남은’ 오빠 ‘너’의 몫으로 남는다. 여기서 기립이 여동생 지원을 이성의 여성으로 짝사랑한 ‘황홀한 악몽’의 사연이 짐작된다. 일찍이 장용학(張龍鶴)의 『원형의 전설』에서 근친사랑의 모티프가 폭력의 역사에 가위눌려 자기부정으로 뒷걸음질한 악몽의 현실화로 나타났다면, 『오랑캐꽃』에서 누이 지원은 기립의 분열된 자아의 절반이라 할 수 있다. 그가 소설 말미에서 실토하듯 누이는 다름아닌 그의 ‘다른 분신’이며, 정확히 말하면 아버지의 이름으로 내면화된 자기검열의 사슬에서 벗어나려는 욕망의 투사물이다. 양헌석의 첫 작품 「경계선」(1982)에 등장하는 누이가 이복동생으로 설정되었던 상황과 비교하면 가족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지 않아도 좋을 만큼의 여유가 생긴 것도 같다. 어떻든 그런 지원 역시 자신과 동일한 마음의 병을 앓아왔다는 마지막 고백을 통해 기립은 아버지의 그늘 뒤로 숨던 자기연민에서 벗어나며, 이를 통해 아버지의 삶과 화해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된다. 이처럼 깊은 망각에 파묻힌 시간의 흔적을 되짚으며 힘겹게 도달한 화해의 여운이 “내 몸에 있는 살들이 순식간에 빠져나가고 뼈만 허옇게 남아 있는 것 같다”(360면)는 고백으로 끝나는 것은 지금의 ‘나’를 둘러싸고 있는 현실이 그만큼 삭막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바로 현실의 요지경 속에서 소설이 태어난다. 「경계선」에 나오는 한 구절을 다시 작가에게 들려주고 싶다.“시간의 컴컴한 터널 속을 지나가는 나그네. 두려워 말고 출구를 바라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