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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존슨 얀 『DNA와 주역』, 몸과마음 2002
수(數), 그 신묘함과 과학성
소광섭 蘇光燮
서울대 물리학부 교수 kssoh@phya.snu.ac.kr
『주역(周易)』은 수천년 동안 동아시아 지역에서 최고 지혜의 경전으로 지성인의 필독서였고, 일반인에게는 점술의 원전으로 널리 알려져 문자 그대로 장기 스테디쎌러였다. 한편 DNA는 생명과 유전의 신비를 풀어주는 최첨단 현대 생명과학의 핵심어로 등장하였다. 두 단어가 모두 사람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면서 또한 대척적 결합이란 점에서 흥미로운 주제라 아니할 수 없다. 오래된 옛것과 가장 앞서가는 현대적인 것, 신비에 싸인 심리적 예지와 정량적인 분자생물학의 계측, 심오한 철학과 예리한 분석과학과 같이 가장 인문학적인 주역과 가장 자연과학적인 DNA가 서로 통할 수 있다면 무엇 때문일까? 극과 극은 통하기 때문인가, 아니면 단순히 둘 다 인간 지성의 소산이기 때문인가?
이 책의 저자인 타이완 출신의 분자생물학자 존슨 얀(Johnson F. Yan, 嚴尊憲)은 직접 이 질문을 던지고 있진 않지만 『DNA와 주역』(DNA and the I Ching:The Tao of Life, 인창식 옮김) 전체 흐름으로 보아 이 둘이 통하는 공통분모는 ‘수(數)’이다. 이 책의 맨 끝은 다음과 같이 이 책의 핵심내용과 수(數)에 대한 근본적 질문으로 되어 있다.
“사실 주역의 사진법적 함수는 생명의 부호인 유전부호와 매우 유사하다. 이 두 부호체계를 서로 대비시키면서 번역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진화론적 의문을 떠올리게 된다. 숫자, 생명, 의식 중 가장 먼저 존재했던 것은 무엇일까?”(301~302면)
시간과 공간 그리고 수는 우리의 삶에서 가장 익숙한 것이며 삶의 가장 강력한 지배적 요소이다. 우리의 인식과 행동은 시간과 공간을 벗어날 수 없고, 우리의 지성적 사고는 수를 벗어날 수 없다. 시와 음악 같은 예술영역은 수와 무관한 듯하지만 운율과 리듬은 수의 시간적 표현이라 할 수 있고, 음악이론과 수학의 밀접성은 피타고라스 때부터 알려진 사실이다. 시간·공간·수, 이것들은 의식과 지성의 핵심적 기반이 된다고 볼 수 있다.
주역은 수(數)의 시간적 나툼에 관한 신비한 그리고 심오한 진리를 갖고 있을지 모른다. 시간을 따라서 생명과 인간의 의식과 사회현상이 벌어지고 있으며, 이것들의 ‘이해’ 또는 ‘예측’이 가능케 된 것은 ‘수’가 은밀하게 이들 시간적 현상에 ‘질서’를 부여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이 어쩌면 주역이 오랫동안 동양권의 지성인에게 신봉되어온 이유이고, 점술적 예측이 가능한 근거일 수 있겠다. 주역의 이러한 시간-수학적 신비사상은 오운육기(五運六氣,명리학이나 사주 등 점술도 이에 근거하며, 연·월·일·시에 따라 하늘의 오운과 땅의 육기가 순환한다는 이론)나 상수학(象數學, 송나라 소강절邵康節의 주장에 의하면 우주는 원회운세元會運世의 12만9600년의 주기를 갖고 있다. 김일부金一夫, 최제우, 강증산 등은 이에 근거한 선후천先後天의 교역을 주장했다) 등으로 한의학이나 천문학, 사회학 등에 구체적으로 적용되었다.
한편 DNA는 수의 공간적 나툼일 것이라는 것이 이 책의 저자 얀, 이전에 『황금시대의 도래』(The coming of the golden age)의 저자 군터 스텐트(Gunther Siegmund Stent)나 『주역과 유전부호』(The I Ching and the genetic code)의 저자 마틴 숀버거(Martin Schonberger) 등이 바탕에 깔고 있는 견해이다. DNA를 구성하는 염기들의 공간적 배열순서가 정보로 되고 이 정보를 통해 생명조직의 질서가 부여된다는 생각이다. 수의 신비한 마력에 관한 생각은 서양에서도 역시 뿌리가 깊다. 피타고라스는 대표적 수(數) 사상가라 할 수 있겠고, 어떤 의미에서 모든 수학자는 “수가 만물을 지배한다”는 생각을 어느정도 잠재의식 속에 갖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하겠다.
시간적 수의 주역과 공간적 수의 DNA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일치 또는 대응되는가? 이 책의 핵심은 이것을 밝혀보려는 시도를 했다는 점이며 그 내용이 12장과 13장에 제시되어 있다. 그 일치의 요점은 다음 두 가지로 요약된다.
① 주역의 사상(四象)과 DNA의 4가지 염기(base)의 수적 일치와 대응 가능성:
태음() ↔ A (Adenine), 소양() ↔ C(Cytosine)
태양() ↔ G(Guanine), 소음() ↔ T(Thymine)
② 주역의 64패와 DNA의 64개 아미노산 코드: 여기서 숫자 64는 4가 3번 반복된 것으로 4×4×4=64이며, 주역에서는 사상(四象)이 천(天) 지(地) 인(人)으로 배열된 상황이고,DNA에서는 아미노산을 지정하는 코드로서 AAA는 리신(아미노산의 일종) 등으로 64개의 코드가 대응된다.
저자는 4종의 DNA(A,C,G,T)가 어떻게 주역의 4상에 대응하는가를 분자생물학적 특성에 따라 지정하려고 시도했다. 그리고 이들의 3개의 조합이 어떤 아미노산이 되며 주역의 어느 패에 해당하는가를 ‘주역-유전체 육면체 모형’을 써서 가시적 모형으로 보여주었다. 이 점이 이 책이 전하는 새롭고 창의적인 내용이다.4상과 DNA의 4종을 대응시키는 것은 누구나 곧 해볼 수 있는 일이고 어느 것이 어느 것과 대응되느냐는 원칙이나 이론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누가 더 그럴듯한 이유를 더 많이 더 정교하게 대느냐의 차이일 뿐 정답은 없다. 따라서 여기서 제시된 대응을 ‘과학적 사실’로 받아들이면 안된다는 주의만 갖고 본다면 매우 흥미있고 어쩌면 ‘정답’을 찾는 데 좋은 안내가 되는 내용으로 볼 수 있겠다. 그런데 64개의 아미노산 코드 중 많은 것은 동일한 내용의 코드로 실제 아미노산의 종류는 20개밖에 없다는 점이 문제인데, 이 책은 이 중복되는 코드의 이해를 위하여 주역적 해석을 시도하는 데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흥미있긴 하나 이러한 해석들이 어디까지나 ‘이야기’ 수준이며 이론이나 증명이 아니란 점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다시 수(數)의 얘기로 돌아가서,2진법에 바탕한 주역과 컴퓨터 정보처리와의 관계, 확률론적 계산과 점사(占辭)의 관계, 수의 신비를 한층 더해주는 소수(素數,prime number)와 아미노산 중복코드 수의 관계 등 이 책을 읽으면 수가 주역과 DNA의 공통일 뿐만 아니라 그 전개가 대수·기하·확률·정수론 등으로 얼마나 다양해질 수 있는가를 엿볼 수 있다. 이 책의 서론과 전반부 8장까지는 ‘동양의 지혜’를 접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주역에 관한 기초교양을 제공해주고, 후반부에서는 유전학의 기초인 DNA에 관한 소개가 되어 있으므로 생명과학을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길안내 역할도 한다.“서로 다른 분야 사이의 지식 교류를 통해 양쪽 모두의 통찰력이 한걸음 더 나아갈 수 있기를 희망한다”(10면)는 저자의 서문 구절에 적합한 책이라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