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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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지우 黃芝雨

1952년 해남 출생. 198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문학과사회』로 등단. 시집 『게눈 속의 연꽃』 『어느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 등이 있음. jwwhang@knua.ac.kr

 

 

 

두고 온 것들

 

 

반갑게 악수하고 마주앉은 자의 이름이 안 떠올라

건성으로 아는 체하며, 미안할까봐, 대충대충 화답하는 동안

나는 기실 그 빈말들한테 미안해,

창문을 좀 열어두려고 일어난다.

 

신이문역으로 전철이 들어오고, 그도 눈치챘으리라,

또다시 핸드폰이 울리고, 그가 돌아간 뒤

 

방금 들은 식당이름도 돌아서면 까먹는데

 

나에게서 지워진 사람들, 주소도 안 떠오르는 거리들, 약속 장소와 날짜들,

부끄러워해야 할 것들, 지켰어야만 했던 것들과 갚아야 할 것들;

이 얼마나 많은 것들을 세상에다가 그냥 두고 왔을꼬!

 

어느날 내가 살었는지 안 살었는지도 모를 삶이여

 

좀더 곁에 있어줬어야 할 사람,

이별을 깨끗하게 못해준 사람,

아니라고 하지만 뭔가 기대를 했을 사람을

그냥 두고 온

거기, 訃告도 닿을 수 없는 그곳에

제주 風蘭 한점 배달시키랴?

 

 

 

시에게

 

 

한때

시에 피가 돌고,

피가 끓던 시절이 있었지;

그땐 내가 시에 촌충처럼 빌붙고

피를 빨고 앙상해질 때까지 시를

학대하면서도, 딴에는 시가 나를 붙들고 놔주질 않아

세상 살기가 폭폭하다고만 투덜거렸던 거라.

 

이젠 시에게 돌려주고 싶어.

피를 갚고

환한 화색을 찾아주고

모시고 섬겨야 할 터인데

 

언젠가 목포의 없어진 섬 앞, 김현 선생 문학비

세워두고 오던 날이었던가?

영암 월출산 백운동 골짜기에

천연 동백숲이 한 壯觀을 보여주는디

이따아만한(나는 두 팔을 동그랗게 만들어 보인다) 고목이

허공에 정지시켜놓았던 꽃들을 고스란히

땅 우에, 제 슬하 둘레에 내려놓았드라고!

産달이 가까운 여자후배 하나가

뚱게뚱게 걸어서 만삭의 손으로

그 동백꽃 주우러 다가가는 순간의 시를

나는 아직까지 못 찾고 있어.

상하지 않고도 피가 도는 그 온전한 시를……

 

 

 

제주 바닷가를 걸어간 발자국

 

 

요즘엔 신문을 봐도 무슨 천문학자나 고고학자의

새로운 발견 같은, 그런 기사만 눈여겨보게 되대이.

 

南제주 대정 바닷가에서 5만년 전 舊石器人 발자국을

발견했다는 일면 톱기사를 식탁에서 읽다가

김치 썰던 주방용 가위로 스크랩 해두었어;

그때 한 인간이 빠르게 내 옆을 스쳐 지나가더라고,

어디 먹을 거 없나…… 하는 그런 필사적인 눈을 두리번거리면서

돌칼 들고 5만년 전의 바람 속으로 들어가는데

내가 맡은 바다냄새를 킁킁거리며 그 근처에서

풀을 뜯던 말들이 고개를 돌려 일제히 이쪽을 넘보는 거야.

5만년 후의, 유리 깔린 내 식탁으을……

5만년 뒤 헌 쓰리빠 같은 발자국 화석을 눌러놓은 몸이,

그 한 몸이 다음 몸을 무수히 복제하여 나에 이른

이 냄새, 수저를 들어올리는 손의 이 공기에 대한 느낌;

아, 그 많은 새들이 내 발자국 주위로 성가시게 내려앉고

아, 살아야 해, 살아야 해! 하면서

실은 나는 얼마나 많이 이미 살었등고!

 

게으르게 밥알 씹다가 뒤집어본 스크랩 뒷면,

전두환씨 아들의 괴자금 170억 사건;

나는 식어버린 된장국물을 후루룩 마셨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