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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타께우찌 요시미 『루 쉰』, 문학과지성사 2003

루 쉰, 혹은 문학과 혁명

 

 

이욱연 李旭淵

서강대 중국문화전공 교수 gomexico@sogang.ac.kr

 

 

루쉰

루 쉰(魯迅)을 두고 문학가이자 혁명가이고 사상가라고 흔히 말한다. 루 쉰을 이야기할 때마다 거의 습관적이다 싶게 붙이는 수식으로, 루 쉰이 다른 중국 근대작가들, 나아가 다른 동아시아 근대작가들과 구분되는 특징을 여기서 찾기도 한다. 중국에서도 그렇고 일본과 한국에서도 그렇다.

하지만 루 쉰에 대한 이러한 규정은 여러가지 복잡하고도 근본적인 문제들을 안고 있다. 사상가로서 그의 독자적인 사상은 무엇인지, 그를 혁명가라고 할 때 그 혁명은 어떤 혁명인지, 혁명가와 문학가 사이의 관계는 어떠한지 등등의 만만치 않은 쟁점들을 내포하고 있고, 이로 인해 루 쉰 연구사에서 하나의 고전적인 연구쟁점이 되어왔다.

타께우찌 요시미(竹內好,1910~77)의 『루 쉰』(서광덕 옮김)은 이러한 고전적 쟁점을 최초로 본격적으로 제기한 루 쉰 연구사의 세계적 고전이다. 우리나라에는 이제야 지각 소개되었지만 타께우찌 요시미의 이 책은 1944년에 출간된 이후 지금까지 루 쉰에 관한 논의에서 늘 중심에 있어왔고, 그의 루쉰관은 ‘타께우찌 루 쉰’이라고 불리면서 루 쉰 해석에서 하나의 독자적 계보를 형성하였다.

이 책은 차라리 루 쉰에 관한 아포리즘이라고 해야 할 정도로 암시적이고, 때로는 현란하기까지 한 타께우찌 특유의 변증법적 수사학이 도처에 널려 있어서 루 쉰에 대해 어지간한 기초적인 이해 없이는 그 핵심을 포착해내기가 다소 버거울 수도 있다. 하지만 타께우찌의 핵심적 메씨지는 매우 간단하고도 분명하다.‘타께우찌 루 쉰’의 핵심을 한마디로 뭉뚱그리면 ‘문학가 루 쉰’이다. 타께우찌는 이 책을 쓴 목표가 “사상가로서의 루 쉰이 아니라, 문학가로서의 루 쉰”(11면)을 해명하는 것이라면서,“루 쉰은 무엇보다도 문학가였다”(101면,132면)는 점을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고 타께우찌가 ‘위대한 계몽가로서의 루 쉰’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오히려 ‘위대한 계몽가로서의 루 쉰에게 깊은 존경을 느낀다’(176~77면)고 말한다. 타께우찌에 따르면 루 쉰의 내부에는 계몽가와 문학가라는 두 가지 이율배반적인 요소가 하나의 모순으로서, 부조화스럽지만 서로 상처입히지 않고 존재했다고 본다. 그럴 때 문제는 루 쉰 내부에 존재하던 문학가로서의 루 쉰과 계몽가나 혁명가로서의 루 쉰의 상관관계다. 이에 대해 타께우찌는 루 쉰이 계몽가나 혁명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루 쉰이 바로 문학가였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본다. 루 쉰이 무엇보다 문학가였고 또 진정한 문학가였기에 진정한 계몽가와 진정한 혁명가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문학가 루 쉰이 계몽가 루 쉰을 무한히 생성”(175면)시켰다는 것이다.

타께우찌의 이러한 언급을 잘못 읽으면 ‘타께우찌 루 쉰’이라는 것은 혁명가 루 쉰, 계몽가 루 쉰을 내세우는 것에 맞서 문학가 루 쉰으로 혁명가 루 쉰의 관점을 해체하는 차원에 불과하다는, 루 쉰 연구에서 해묵고, 어찌 보면 상투적인 쟁점의 원조일 뿐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런 피상적인 이해가 실제로 루 쉰 연구자들 사이에 꽤 널리 퍼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타께우찌가 루 쉰을 매개로 삼아 궁극적으로 이야기하려는 것은 문학의 본질, 특히 정치와 문학이 긴박하게 맞물린 동아시아 근대세계 속에서 문학이 지닌 궁극적 의미이며, 타께우찌는 이에 대한 성찰을 바탕으로 문학과 정치, 문학과 혁명의 관계에 대한 발본적인 검토를 시도한다.

타께우찌는 “문학은 무용(無用)하다. 이것이 루 쉰 문학의 근간이다”(18면)라고 했다. 요컨대 루 쉰의 문학은 문학의 공용성(功用性)을 의심함으로써 성립한 문학, 정치나 혁명 같은 현실세계의 논리와 비교할 때 문학은 쓸모없다는 것, 문학은 무력하다는 것에 대한 자각을 바탕으로 한 문학이다. 이것이 문학의 정치성을 백안시하는 문학주의 차원의 언급으로 오해되어서는 곤란하다. 타께우찌는 “문학이 탄생하는 근원적인 장소는 항상 정치에 둘러싸여 있지 않으면 안된다”(165면)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학은 늘 정치와 함께해야 하지만, 루 쉰에 따르면 문학은 정치에 대해서 무용하고 무력하다. 그런데 그 무용의 문학은 무용 자체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문학은 그 무용함으로 정치를 소외시키고 정치와 대결한다. 이 무용성이 정치를 비판하고 정치에 저항하는 근거가 되는 것이고, 이 과정에서 애초의 문학의 무용은 유용으로 변한다. 이것이 바로 루 쉰이 말한 문학의 ‘무용지용(無用之用)’이다. 타께우찌는 루 쉰 문학의 이 ‘무용지용’에서 문학이 정치에 영합하지도 않고 정치를 백안시하지도 않으면서 ‘정치와 문학의 관계가 모순적 자기동일성’을 확보하고, 진정한 문학가와 진정한 문학의 길이 열릴 가능성을 발견한다. 요컨대 혁명의 보급에서 혁명의 성공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혁명의 타락으로 보고 파괴하는, 그리하여 영구혁명을 믿는 영원한 혁명가의 모습을 루 쉰에게서 보고(174면), 루 쉰이 그처럼 영원한 혁명가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무엇보다 문학가, 진정한 문학가이기 때문이라고 본다. 타께우찌가 “루 쉰의 문학은 문학의 근원을 묻는 문학”(179면)이라고 한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다. 결국 그는 루 쉰을 통해 문학의 근본에 대해, 치열한 정치적 환경 속에서 문학과 작가는 무엇으로 어떻게 진정한 문학과 진정한 작가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해 성찰하고 있는 셈이다.

타께우찌는 태평양전쟁에 징집되기 전 흡사 유서를 쓰는 심정으로 이 책을 썼고 그가 징집된 이듬해 책이 출간되었다. 그를 그토록 절박하게 루 쉰에 매달리게 한 것은 다름아닌 일본의 현실, 특히 ‘정치에 의해 자기를 유지하고’ ‘정치를 좇아다니는’ 일본의 문단의 현실, 너무도 쉽게 전향해버린 일본의 진보적 작가들에 대한 분노였다. 이렇게 보면 타께우찌의 중국 연구가 원래 그러하지만, 그의 루쉰학 역시 철저히 일본 현실에 뿌리박은 일본학이다. 기실, 그가 이른바 ‘타께우찌 루 쉰’이라고 불릴 정도로 루 쉰을 읽는 혜안을 지닐 수 있었던 것은 심오한 이론의 힘이나 천재적 감수성 덕택만이 아니라 그가 자신의 존재를 걸고 당시의 일본 현실과 치열하게 박투(搏鬪)를 벌인 때문이었다. 타께우찌의 이 책을 읽는 일이 루 쉰을 매개로 하여 근대세계, 특히 동아시아 근대에서 문학의 근본을 성찰하는 일이자, 외국문학을 제대로 하는 법을 학습하는 일이기도 한 것은 이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