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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한국소설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는다
공선옥 문학은 어느만큼 와 있는가
장편소설 『수수밭으로 오세요』
임규찬 林奎燦
문학평론가, 성공회대 교수. 평론집으로 『왔던 길, 가는 길 사이에서』 『작품과 시간』 등이 있음. kclim@mail.skh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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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우리 시대의 바람직한 문학을 이야기하라면 여전히 ‘리얼리즘’이나 ‘민족문학’을 내밀며 ‘법고창신(法古創新)’의 내파를 되뇌일 수밖에 없는 것이 솔직한 마음이지만 요즘 들어서는 그것도 자꾸 속내로만 안다짐하는 식이다. 그 증상은 비교적 젊은 작가들을 만날 때면 더 심해진다. 그래서인지 한 사람의 평론가로서 뭔가 아귀가 맞는 듯한 작가를 만나면 왠지 힘이 솟는다. 내게 있어 공선옥(孔善玉)은 그렇게 ‘귀한’ 작가이다. 무엇보다 80년대와 90년대의 문학적 간극을 상기할 때 90년대에 들어서자마자 펼쳐보인 그녀의 활약은 자못 놀라웠다.80년대 민중문학에서 보여지는 자연주의적 도식성이나 과도한 관념성의 이런저런 폐단을 시원스레 돌파했을 뿐더러 90년대 이후의 진부한 후일담이나 민중의 생활현실과 담을 쌓는 유행적 경향과도 명백히 궤를 달리했다.
‘예외적일 만큼 귀한 존재’이기에 특별하게 감싸안으려는 우호적인 평가 또한 많았다. 가령 “세련의 포즈와 인위적인 기교의 문학이 우세한 현시점에서 공선옥의 문학은 진짜배기문학의 당당함을 증거하고 있다. 그 당당함은 오로지 삶과 맞장뜨는 문학만이 보여줄 수 있는 당당함이며 솔직과 정직의 태도로 작품을 쓰려는 작가가 보여줄 수 있는 당당함이다. 공선옥 문학의 거친 활력과 활기는 참으로 아름다운 매력이다”1와 같은 파악이나,“7,80년대 민중문학의 가장 높은 성취인 ‘날것 그대로의’ 생생함, 그것을 90년대 문학에서는 오직 공선옥의 문학에서밖에 맛볼 수 없다”2는 인식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거기에 깔려 있기 쉬운 지나친 단순화의 위험성은 마땅히 경계해야 한다. 사실 현대로 올수록 작가의 직접적 체험보다는 체험에 대한 사변적 성찰이나 내면화 또는 추상화의 경향이 전반적으로 강해지고 실제로 주도적인 것이 되는 터라 직접체험이 가져다주는 선명성은 생각하기에 따라 굉장히 큰 몫을 차지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럴수록 ‘문학과 현실의 창조적 긴장관계’에 주목하여 작품 됨됨이를 차분히 따지는 일이야말로 평범하지만 가장 날카로운 비평임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그것이 작가에 대한 제대로 된 대접일 것이다. 결국 공선옥이 산출해낸 작품들, 그 작품들의 진전과 변화, 그 성공과 실패에 대한 동시적 탐색을 통해 우리 문학 속에 숨쉬는 ‘리얼리즘의 한 현장’을 실감해보고 싶고, 그렇게 공선옥과 새로이 만나보고 싶은 것이다.
공선옥도 등단한 지 어느덧 십수년이 흐른지라 그 세월만큼 그녀가 산출해놓은 작품량도 만만찮다. 첫 소설집 『피어라 수선화』(창작과비평사 1994)와 이후 『내 생의 알리바이』(창작과비평사 1998) 『멋진 한세상』(창작과비평사 2002)에 쌓여진 중·단편만도 30편이 넘고, 또 장편으로 『오지리에 두고 온 서른살』(삼신각 1993) 『시절들』(문예마당 1996) 『수수밭으로 오세요』(여성신문사 2001) 『붉은 포대기』(삼신각 2003)가, 산문집으로 『자운영 꽃밭에서 나는 울었네』(창작과비평사 2000) 『마흔에 길을 나서다』(월간말 2003) 등이 있어 공선옥의 문학도 이제 하나의 숲을 이룬 듯 자못 울창하다.
그런데 이렇게 펼쳐놓은 공선옥의 작품들에서 우리는 몇가지 주목할 사항을 발견할 수 있다. 이번에도 재차 체험한 바이지만 등단 초에 발표한 「목마른 계절」(『피어라 수선화』)은 지금의 어떤 작품과 견줘도 여전히 손색없으며, 그 이후의 좋은 단편들, 예컨대 「술 먹고 담배 피우는 엄마」 「타관 사람」(『내 생의 알리바이』) 「홀로어멈」 「한데서 울다」(『멋진 한세상』)까지 함께 묶어놓고 보면 공선옥의 문학적 역량에 깊은 신뢰감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동시에 “긴장이 덜한 작품들을 계속 내는”3 우려스러운 일이 지속되고 있음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또한 지금까지 공선옥 문학의 성과는 단편에서 나왔지 아직 장편에까지 이른 것은 아니다. 아울러 공선옥 문학의 한 특색이라 할 수 있는 자전(自傳)의 문학적 변용이 실제 그 성취도에서는 편차가 있다는 사실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소재나 주제 등을 고려하여 문학적 진전과 변화를 중심에 놓고 보았을 때, 우선 첫 작품집 『피어라 수선화』 이후 광주 이야기에서 서서히 벗어났다는 점이 눈에 띈다. 대신 첫 작품집에서 『내 생의 알리바이』 『멋진 한세상』으로 이어지는 시기의 주된 경향은 한마디로 ‘억척어멈’ ‘홀로어멈’ 씨리즈라 할 수 있다. 이들 소설집에서는 광주 이야기를 서서히 접고 모성에 관한 이야기로 집중되면서, 새로이 생태주의적 사유가 깊어지고 있음이 포착된다. 가장 근래의 모습은 『멋진 한세상』에서 일부(「그것은 인생」 「정처 없는 이 발길」) 등장하여 장편 『붉은 포대기』를 거쳐 연작소설 『유랑가족』4에서 전면화되는 뿌리뽑힌 극빈층 삶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와 관련해 최근의 공선옥 문학이 어디에 자리해 있고 또 무엇을 겨냥하고 있느냐는 두 산문집이 잘 말해주고 있는 듯하다. 『자운영 꽃밭에서 나는 울었네』가 모성 이야기와 생태주의적 사유를 짙게 드러내고 있는 반면, 『마흔에 길을 나서다』는 빈곤층의 삶과 세상살이에 대한 훌륭한 취재보고서다.
이러한 점들을 감안하면 하나의 분기점을 이루고 있는 장편 『수수밭으로 오세요』에 자연 눈길이 머문다. 그것은 이 작품이 “광주 이야기에서 거둔 성취를 바탕으로 생태주의적 사유와 실천, 계급간의 입장 차이, 남성/여성 그리고 여성/모성의 미묘한 차이와 갈등 등의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결합”5한 작품이라 공선옥 문학의 성취를 작품 자체로 가늠해볼 수 있고, 또다른 작품과 관련해서도 이모저모 따져볼 수 있는 좋은 비교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그동안의 장편에 대한 아쉬움까지 생각하면 단편의 성취와 맞먹을 만한 수준을 이 장편이 과연 보여준 것인가도 흥밋거리다. 아울러 가장 최근에 작가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빈곤층과 관련해서도 이 작품은 유의미한 시사점을 제공해주고 있어서 공선옥의 현단계를 진단할 수 있는 적절한 시금석이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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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수밭으로 오세요』는 아이 하나 딸린 이혼녀 강필순이 이혼남 심이섭과 재혼해 또 아이를 낳고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갈등, 그리고 끝내 그와 갈라서고 다시금 아이들과 함께 삶을 추스르는 과정을 담고 있다. 그런데 봉제 일을 하는 밑바닥 출신의 강필순과 인간미 넘치는 의사 심이섭이란 두 중심인물의 계급적 차이가 워낙 큰 탓에 읽는이의 일차적 관심은 아무래도 이섭과 필순의 사랑에 모아진다. 그래서 “형식적으로 따져보면 소설로서의 극적 골간은 뭐니뭐니해도 사랑 이야기에 놓여진다. 이 소설은 심이섭과 강필순의 사랑 이야기인 것이다. 그런데 묘한 것은 소설을 곰곰이 생각할수록 사랑 이야기는 껍데기처럼 느껴지고 ‘어미’ 강필순을 중심으로 하는 모계적 가족구성의 이야기가 알맹이처럼 느껴진다는 점이다”6라는 진단도 가능해진다.
그런데 작품 자체를 곰곰이 뜯어보면 사랑 이야기가 모계적 가족구성 이야기에 견줄 정도로 견고한 서사적 골격을 과연 가지고 있는가는 역시 의심스럽다. 대등한 서사적 골격을 가졌다면 당연히 ‘모성이 거짓된 사랑을 물리치는’ 것으로 간단하게 정리될 것이다. 작품 말미에 필순이 전병순에게 속사포처럼 쏟아붓는 말들을 떠올리면 더더욱 그렇다.
“지가 나 먹여 살려주는 게 지겹겠죠. 내가 그럴 만한 가치도 없는 사람인데, 거기다 줄줄이 남의 새끼들까지 책임져야 하고. 그거는 다 사랑이 없어서 그런 거랍니다, 바우 엄마, 아니 전병순씨. 지가 사랑 안 하니까, 그러니까…… 구체적인 거, 너무 좋아하지 마세요. 사랑말고 또 뭐가 필요해. 사랑하면 불쌍하고 그러면 내 몸 던져 먹여살리고 싶고, 다아 세상이 그런 거랍니다. 사랑, 그 잘나빠진 거 하나 없으면 끝장이야.”
“왜 이섭씨가 필순씨 사랑 안한다고 생각해요?”
“사랑해서 불쌍한 게 아니고 불쌍해서 사랑하려고 했는데 그게 잘 안된 거야. 누굴 병신으로 아나? 인간들이?”(249면)
그러나 이것은 엄밀히 말해 사후 처방의 성격이 강하다. 왜냐하면 ‘사랑’이라는 의제로 묶일 만한 서사적 형상이 너무 앙상하기 때문이다. 사랑 이야기는 서사의 한 축이 아니라 ‘뭔가 충분치 않은 관계 속에서 시작된 결혼관계’가 지속되고 있음을 환기시켜주는 일종의 장치라 할 수 있다. 두 사람의 관계가 결혼으로까지 발전하게 된 것은 ‘선물’이란 말이 단적으로 환기하듯 전적으로 이섭의 ‘시혜적 연민’이 가져다준 거의 일방적인 것이다. 이를테면 성애의 욕구에 대한 표현이 거의 없다는 점을 한기욱은 ‘심히 유감’이라고 했는데, 그런 결격사항이야말로 뒤집어놓고 보면 작가의 숨은 의도로 볼 수 있는 것이다.7
실제로 작가의 그러한 서사전략은 작품의 내적 분위기를 일관되게 유지하는 데도 효과적일뿐더러, 다양한 형태의 거리감을 계속 들추어내 후반부에 본격적으로 전개될 모계적 가족구성 이야기에 개연성을 확보해준다. 가령 소설 첫장에서 보이는 의붓아비 이섭과 아들 한수 사이의 거리감에서부터 다양한 형태의 거리감이 제시되고 있다. 그러한 분위기 탓에 이섭과의 사이에서 낳은 산이의 돌잔치 때 극명하게 드러난 시댁측의 멸시도 자연스럽게 계급적 거리감으로 치환되는 것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더욱 선명하게 부각되는 것은 계급적 허위의식이다. 이섭이 결혼 전에 보여주던 아름다운 ‘연민’의 행동들이 결혼 후에, 그것도 고작 1년이 지난 후에 냉혹함·잔인함·냉담함·무관심·퉁명스러움·무감각 등 사실상 연민의 정반대편 몸짓으로 그려지는 것 역시 위계적 관계의 표정들이다.‘시혜적 연민’과 ‘얕봄’은 동전의 양면인 것이다. 이섭이 필순에게 무슨 말을 하다가 꼭 뒤에 붙이는,“니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모르겠지만 말야”(17면)란 말에 대해서 “이섭을 만나기 전 강필순의 생활 전체를 부정하는 것 같은 뉘앙스”(18면)라고 필순이 느끼는 것도 그런 예이다.
실상 이런 계급적 거리감을 유념할 때 이 작품에서 명칭만으로도 풍자의 대상이 될 듯한 ‘가난을 선택한 사람들의 모임’일 것이다. 하지만 이름 자체가 이섭이 필순을 택하게 된 하나의 계기처럼 보여지고, 필순의 생태주의적 사유에 대한 기대감도 드는지라 이 모임을 둘러싼 무언가가 소설의 서사적 흐름에 새로운 전기를 부여해줄 것이라는 예감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결과는 풍자로만 시종하고 만다.
“무슨 모임?”
“당신이 이해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가난을 선택한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있어.”
(…)
“정말 웃긴다. 세상 사람들 모두 부자로 못 살아서 안달인데 뭐하러 가난하게 살려고 애를 써?”
“우리가 지향하는 거는 그러니까 절대적인 가난이 아니라 선택적인 가난이야. 간단히 말하면 세상에 좀 죄를 덜 짓고 살자 그거지.”
“그 사람들 그러면 언제 한번 가난하게 살아나봤대? 가난이 뭔지 알고나 가난하라고 해.”
“내가 말을 말지.”
“번데기 앞에서 주름이나 잡지 말라고 해. 가난? 그 징글징글한 가난을 선택하신다고?”
“그만 하자.”
“가난? 정말 웃긴다. 당신 그럼 어떻게 하면 가난해질 수 있을까, 그것 연구하느라고 맨날 집에 늦게 오고 어제는 아예 안 들어온 거야? 그것 연구하느라고?”
“그만 하자 그랬지?”
“그래애, 그만 하고 싶은데 자꾸 내 배알이 뒤틀리잖아.”
“그래, 배알 뒤틀리게 해서 미안하다.”(112~13면)
공선옥 소설의 한 특장이라 할 수 있는 도발적인 문체로 허위의식을 통쾌하게 까발리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 대목은 생각만큼 통렬하지 않다는 데 문제가 있다. 이섭에게 시종 다소곳하던 필순이 이섭의 행동을 비꼬면서 내뱉는 하나의 독설로 다가올 따름이다. 사태가 이쯤 되다보니 이섭과 필순의 관계가 조만간 파탄에 도달하리라는 예감을 슬슬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아슬아슬한 심리적 기대감도 그 지점부터 흐트러지기 시작한다. 어떤 예정된 수순을 서서히 밟아가고 있다는 느낌. 공선옥의 이전 소설, 특히 생태주의적 사유가 가슴을 흠씬 적시는 「한데서 울다」나, 산문집 『자운영 꽃밭에서 나는 울었네』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자연 기대하게 되는 어떤 가능성의 세계가 막혀버렸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이렇게 창조성의 여지가 봉쇄됨으로써 이는 고스란히 작품의 사상적 한계로 역류해온다.
무엇보다 이섭과 이섭을 둘러싼 모든 세계가 비판대상이 되다보니, 필순이 작가 자신으로 쉬 치환되면서 절대적 무게를 갖는다. 앞의 예문은 사실 비아냥거리는 어투가 필요한 곳이 아니라 의미 차원에서 이섭과 연결될 수 있게끔 적극적으로 서사의 끈을 만들었어야 할 곳이다. 그러나 필순 스스로가 그 싹을 잘라버린다. 소설 서두에 필순이 전병순의 집에서 대략 이 모임과 연관된 이야기를 꽤나 길게 엿들은 바 있고(28~30면), 또 그녀 자신이 이섭뿐만 아니라 그 주변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싶다는 심정을 여러차례 피력한 바 있다. 그런데 뒤이어 계속된 대화에서 필순이 보람이네가 과수원에 딸린 밭을 지어먹으라고 했다며 이야기를 건네고 이섭이 반갑다는 듯이 ‘생태주의’를 거론하지만, 여기서도 필순은 또 맥없이 이섭의 말을 잘라버린다. 대신 독백조의 ‘삐딱한’ 속내를 얕게 토로할 뿐이다.
농사야 지을 수 있었다. 태생이 농사꾼 자식이 아닌가. 그렇지만 필순이 농사를 지으려고 하는 건 이섭이 말하듯 생태주의 때문이 아니었다. 생태주의니 뭐니 알지도 못하거니와 농사를 이녁 손으로 직접 짓게 되면 그만큼 가계에도 보탬이 될 것 같은 생각에서였다. 시장에서 사먹는 게 몇푼 들지 않는다 해도 필순은 촌에 살면서도 채소를 사먹는 게 어색했다. 그 돈이라도 아껴서 부지런히 모아 집을 짓고 싶었다. 꿈에도 그리던 빨간 벽돌집을 짓고 싶었다.(116면)
필순의 이러한 인식은 중산층의 허위의식을 부분적으로 환기하는 계기가 되겠지만 어떤 깊이를 가지지는 않는다. 사실 ‘가난을 선택한 사람들의 모임’이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하는지에 대한 정보도 별반 제공하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공격만 하는 꼴이다. 필순이 이 모임과 관련해 관심을 기울인 이유 중 하나는 이섭의 숨겨진 여자를 찾는 것이었다. 이혼 후 이섭이 그 여자와 함께 있는 것으로 설정된 것은 필순이 사적인 부부관계의 맥락에서 이 모임을 주시했음을 말해준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에서는 산문집 『자운영 꽃밭에서 나는 울었네』에 실린 「시골살이의 참맛」이나 「푸른 것들에의 꿈」 등에서 음미되는 ‘깊은 맛’을 찾아보기 힘들다. 물론 의미있는 발언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하이고, 바우 엄마 좀 봐. 어디 옆에 뽀짝거리기나 허겄습디여. 사람이 그러먼 못써.”
“배웠다고, 배운 티 낼라고 그러제.”
“모냐는 그 집 앞에 가봤더니 먼 서울서 온 사람들이 주루루 허니 그 집 마당에 앉아갖고는 뭔 노래를 부름시로, 즈그끼리는 재미지게 살기는 허드라고.”
“아, 시골 왔으먼 시골 사람들허고 어울려야제 왜 만날 그 집은 서울 사람들허고만 어울리는 것이여. 그럴라먼 여가 왜 살어?”(276면)
“그러니까 동네 사람들하고도 어울리고 하세요. 나 봐요. 이혼하고도 척하니 나가니까 동네 사람들도 아무 말 안하잖아.”
“사실은 그래야 한다는 걸 알지만 그게 쉽지가 않네요. 우리가 그 사람들처럼 농사를 짓는 것도 아니고 같이 공유할 화젯거리도 없고 어색해서 잘 나가지지가 않더라구요.”(281면)
말인즉슨 다 맞는 말이고 또 새겨들어야 할 말이지만 이미 막바지에 접어든 소설 속의 이야기라 그것은 한마디로 뒷북치기다. 오히려 소설의 끝에다 뒤늦게 의미있는 진술들을 모아둔 것은 작가의 의도와 생성된 서사의 불화(不和)를 고백하는 형세이다.
결과적으로 사랑 이야기는 껍데기고 ‘어미’ 강필순을 중심으로 하는 모계적 가족구성의 이야기야말로 이 소설의 실제 알맹이였던 셈이다. 말하자면 두 가지 것이 다 진짜 알맹이여야 했는데 그렇게 되지 못함으로써 뒷이야기의 힘 역시 약해진다. 공선옥 서사의 생동감을 낳는 원천인 ‘분투’의 결과로서 알맹이끼리 부딪쳐 생성된 알맹이라는 생각이 아무래도 들지 않는 것이다. 물론 필순이 아이들과 친구와 일구어내는 훈훈한 아름다움까지 무시하자는 것은 아니다.8 다만 소설 자체에서 발원하는 물줄기를 따라 여기까지 이르다보면 작가가 필순을 통해 혼신으로 끌어모은 ‘모계가족’ 대식구 이야기가 기대한 것만큼이나 큰 감동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이섭과 이섭을 둘러싼 세계에 대한 비판 일변도의 과도함이 역으로 필순과 필순이 그러안은 세계의 단순 일변도의 과도함을 불러왔다. 가령 “어미는 그런 것이다. 어미는 자고로 모질어야 하는 것이다. 모질지 않으면 그나마 자기 자식에게 내어줄 따스운 품 한뼘 남아나지 않을 것이기에. 그런 어미 마음을 조금이라도 가진 아비가 있다면 그를 지아비 삼아 살아갈 수 있으련만”(210면)과 같은 발언 앞에 서면 이는 남성 비판을 위해 모성을 타고난 본성으로 바라보는 극단적 본질주의다라는 생각을 지워버릴 수가 없다. 물론 발언내용만으로 섣부르게 극단적 본질주의로 규정하는 일은 경계해야 할 것이다.그러나 이섭과 제대로 된 관계를 모색하고, 나아가 갈등을 갈등답게 만드는 일을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극단적 본질주의의 과도한 속성을 어쩔 수 없이 읽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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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작품 속에서 논란이 되는 어떤 생각 자체를 곧바로 문제삼아 비판하기보다는 작가가 행한 선택의 자유를 최대한 신뢰하되 과연 그 선택이 제대로 된 소설적 육체와 함께 온전한 정신적 힘을 구비하고 있는지를 차분히 따져보는 게 필요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공선옥이 지금까지 확보해온 ‘억척어미’상을 생각할 때 필순의 형상에 아쉬움은 더 커진다. 공선옥의 정공법이 돋보였던 「술 먹고 담배 피우는 엄마」의 ‘나’를 꼭 떠올려서만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섭을 「술 먹고 담배 피우는 엄마」의 ‘털북숭이’ 정도로는 만들었어야 했다. 그런데 작가는 이섭을 『노동해방문학』을 들고 있는 ‘검은테 안경’으로 만들어버렸다. 사실 그 단편에서 잠시 잠깐 등장하는 ‘검은테 안경’과 ‘나’의 수작 부분은 그 인물의 의외성에 버금가는 뜻밖의 효과를 낳고 있다.“무슨 부조리극의 대사 같은 그 언어들은 상황의 아이러니를 절묘하게 드러”9냄으로써 중요한 보조적 역할을 한 것이다. 그러나 그 단편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나’와 털북숭이와 주고받는 어떤 질펀함, 그 가운데 아무렇지 않게 넘나들며 허위의식을 꿰뚫어내는 무심한 육박력 등은 장편 『수수밭으로 오세요』에도 필요하지 않았는가 생각된다. 사실 여느 단편에서 볼 수 있는 ‘억척어미’의 성격을 필순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런 가능성이 ‘이 결혼은 잘못되었다’라는 전제에 너무 일찍 죽임을 당했다. 또한 이 소설은 ‘필순’의 눈을 통해 정면에서 들여다보는 방식이기에 ‘이론적인 것’ 자체를 무조건 배제, 비판해버리는 방식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술 먹고 담배 피우는 엄마」의 ‘나’가 아닌 「목마른 계절」의 ‘현순’을 떠올려보면 어떨까. 「목마른 계절」에서 ‘아랫도리가 뭉턱 잘려나가고 없는 사람’의 외침처럼 작품 세부의 여러 ‘분투’들에 힘입어 인간이 고정된 생산품이 아니라 변화하는 존재라는 깨달음 같은 것이 『수수밭으로 오세요』에는 없다는 점이 가장 큰 아쉬움이 아닐까. 이 지점에서 우리는 사실상 『수수밭으로 오세요』의 원형이라고도 할 수 있는 「어린 부처」(『내 생의 알리바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어린 부처」는 여러 점에서 『수수밭으로 오세요』와 유사하다. 「어린 부처」의 두 부부 왕문희와 정세환 사이에는 『수수밭으로 오세요』와 같은 계급적 갈등은 없다. 그들은 한때 노동자 소설가와 노조 문화부장, 말하자면 작가와 팬의 관계였다. 그런데 그들은 삼십대 후반의 노총각 포클레인 기사와 아이가 둘 딸린 이혼녀이자 보험외판원으로 우연히 다시 만나 결혼하게 된다. 소설의 중심 이야기는 의붓아비 정세환이 아이들에게 보이는 어색함, 부자유스러움을 견디지 못한 ‘어미’ 왕문희가 이혼을 요구하여 법정에 갔다가 서류 미비로 다시 시간을 보내는 사이 아이들이 보여주는 행동과 말, 예컨대 “엄마느은, 자꾸 나한테 미워하는 마음을 심어주려고 하지 말란 말이에요!”(84면)로 인해 다시금 남편과 화해하는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것이다. 사실 세환과의 갈등에는 아이들 문제와 시댁 문제가 자리잡고 있어 『수수밭으로 오세요』와 큰 차이는 없다. 『수수밭으로 오세요』도 아이들 이야기가 성취라면 성취인데, 「어린 부처」에서는 제목 그대로 전도된 결론을 이끌어낼 정도로 아이가 도덕적 힘을 발휘하게 하는 ‘삶의 한 활력’으로 포착된다.
그외에 사소한 것이지만 「어린 부처」에서 문희와 세환이 이혼서류 작성을 둘러싸고 옥신각신하는 장면이나 그런 대목이 빚어내는 복잡한 심리는 서로간의 반말투와 절묘하게 결합되면서 매우 생생하다. 그러나 『수수밭으로 오세요』에서 필순과 이섭이 함께 펼쳐내는 반말투는 솔직히 어색하다. 신분적 차이가 두 부부를 규정하는 주요한 동력이다보니 결혼 후 ‘반말투’로 급변하는 상황 자체가 어색하게 다가오는 것이다.(물론 말투 자체를 그들만의 자연스런 화법이라 생각하고 보면 반말투에서 경어체로 뒤바뀌며 미묘하게 신경전이 일어나는 부부의 심리극은 나름대로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다.)
『수수밭으로 오세요』와 「어린 부처」의 결론은 다르다. 두 결론 중 어느 하나만이 정당성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각각의 결론들을 소설 내적으로 어느만큼 감당하느냐는 실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비슷한 소재를 되풀이하여 작품화하는 공선옥의 경우에 이러한 특성은 매우 중요하다. 어떤 것이 절대적 진실인가를 곧바로 묻기 전에 그것이 어떤 종류의 진실인가를 주목해야 한다. 뭔가에 모르게 “휩쓸리듯 덜컥 어미가 되어 혼자 몸으로 아이들의 목숨을 감당해가야 하는”10‘홀로어멈’의 세계야말로 공선옥 소설의 대지인데, ‘여성성/모성성’ 문제도 이 점에서 고려할 필요가 있다. 모성을 타고난 본성으로 보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곧바로 문제삼기 전에 제시된 상황이 요청하는 모성과 여성성의 다양성과 상호연관성을 먼저 생각하고, 그 바탕의 차이는 차이대로 밝히되 공통성도 함께 읽어내는 일이 필요하다. 더구나 인간뿐만 아니라 동식물도 형제/자매애로서 포괄하는 ‘생태적 관점’이 이미 공선옥에게 들어서 있음을 주목한다면, 우리들 자신이 그런 ‘어미 마음’으로 공선옥의 문학세계를 들여다보는 노력이 필요한 듯하다. 가령 산문 「집에 대한 단상」(『자운영 꽃밭에서 나는 울었네』)에서 드러나는 작가의 생각을 보라.
그러나 꽃과 나무 같은 식물과는 달리 스스로 움직이고 소리내는 동물을 키우는 일은 간단치가 않았다. 어린시절의 기억만 쫓아 시장에서 닭과 강아지를 사다 키웠는데 강아지가 크면서 닭들을 물어죽이는 일이 발생한 거였다. 인심도 변하는데 견심인들 안 변했겠는가, 싶지만 눈앞에 벌어진 일은 내 기억 속에서는 절대로 없었던 일이었다. 누대에 걸쳐 한 집안에서 나고 자란 강아지와 닭 들은 한 둥우리 안에서 서로 몸을 비벼대며 잘도 살았던 것 같은데, 그리하여 그 닭과 그 강아지와 그 집에 살았던 아이인 바로 나와 내 동생이 그 동물들과 친구가 되어 놀았던 기억이 생생한데 이 시대 동물들은 서로가 서로를 원수 보듯 하고 툭하면 싸우고 급기야 힘센 한쪽이 약한 쪽을 물어뜯어 죽이는 끔찍한 사건을 한 두어 번 겪고 나서는 동물 키우기를 그만두었다. 꽃과 나무 들은 내 바람대로 원없이 심고 가꾸게 되었지만 동물들 키우기에서 실패를 하고 나니 씁쓸한 기분을 떨쳐버릴 수 없는 것은 이즈음의 인간 세태를 동물들을 통해서 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닭 따로 강아지 따로 키우면 될 것 아니냐고 하겠지만 나는 절대로 그러고 싶지는 않다. 꽃과 나무들이 서로서로 잘 어울리듯이, 내가 우리집에 함께 사는 쥐, 담비, 뱀 들과 잘 어울리듯이 닭과 강아지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모두모두 한 집에 사는 한 식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집이 바로 내 유년의 집이자 내가 꿈꾸는 집이다.(106~107면)
그러나 작가 자신의 체험을 통해 드러나는 이런 사유의 깊이를 생각해보면 확실히 작품에 대한 아쉬움은 더 커진다. 아무래도 ‘말하려는 것과 그리려는 것’의 분열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산문집 『자운영 꽃밭에서 나는 울었네』와 장편 『수수밭으로 오세요』의 거리, 나아가 가장 최근의 산문집 『마흔에 길을 나서다』와 연재소설 『유랑가족』의 거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작가 자신이 생각하는 사상, 정신, 이념적인 것을 완전히 육화해낼 수 있는 분투를 더 기대할 따름이다.
물론 공선옥 소설의 방법론적 특징은 현실을 시련의 장소로 생각하고 그 속에서 스스로 삶의 힘과 활력을 찾아내는 데 있다. 그것은 미리 주어진 관념과 이론에 구애받지 않고 현실을 탐구하여 현실의 구조로 작품을 구조(構造)하고, 주체적 시련의 정열로 이를 작품의 정신으로 삼는 리얼리즘적 방법이다. 그래서 공선옥의 소설들은 ‘전통문법’에 매우 충실한 편이다. 결국 현실과의 절실한 싸움만이 개별 작품의 성취를 가늠하는 결정적인 잣대가 되며, 그 싸움이 제대로 성공했을 때 문학적 성취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뒤따라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공선옥의 성공적인 작품들에서 맛볼 수 있는 어떤 활력이나 생명력, 즉 ‘삶에 대한 일종의 달관과 오기’ ‘무심한 육박력’ ‘무심의 경지’ 등으로 지적되는 것들이다.
그런 점에서 그녀가 최근 관심을 쏟고 있는 빈곤층에 대한 소설화 작업과 관련하여 ‘가난’과 ‘빈곤’의 문제를 마지막으로 언급해보자. 사실 『수수밭으로 오세요』의 밑바탕에는 ‘가난’과 ‘빈곤’에 대한 인식상의 혼동이 자리하고 있다.‘빈곤’과 ‘가난’을 동일시한 데서 문제가 시작된 것이다.11 이 사이에는 분명한 경계가 존재한다. 또 가난한 사람과 빈곤한 사람은 현상적인 차이가 아니라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돈만 있으면 만사가 다 형통할 줄 알았다. 돈만 있으면 웃음꽃이 피는 줄로 알았다. 돈만 있으면 가족끼리도 얼마든지 화목할 수 있을 것 같았다”(12면)에서 출발한 필순의 인식은 ‘빈곤’에 지나치게 결박당함으로써 생태주의 문제와 관련해서도 소설의 혈로를 찾기 힘들게 되었다. 『마흔에 길을 나서다』에서 작가가 실제 인물들을 만나 그들의 삶에서 길어낸 보석 같은 삶의 지혜들은 비록 가난하더라도 그들 삶의 자유로움이 만들어낸 당당함 같은 것이 아니던가. 이를테면 약장수 지복덕 할머니가 보여주는 “자식의 죽음이 야속한 어미는 모질게도 말한다. 배 아파 낳아노니 그 공도 모르고 처죽어버렸다고. 그러다가 슬그머니, ‘팔자지 뭐’ 결론처럼 한마디 툭 내뱉는다. 체념인가. 체념은 할매에게 거의 본능에 가깝다. 떠난 서방과 자식들을 체념했듯이 물건 안 팔아주는 사람 앞에서 애달캐달하지 않는 것. 그것은 철칙이다”(22면)와 같은 달관.
그러나 절대적 빈곤의 자리에 서버리면 모든 것이 꽉 막히면서 단순논리를 택할 수밖에 없게 된다. 발전의 논리 뒤에 버려진 극빈층의 삶에 대한 작가의 관심은 참으로 소중하고 민중 자체를 체험하고 그들의 아픔을 고발하고자 하는 의지는 참으로 값지나, 냉정하게 작품 『유랑가족』의 자리로 돌아왔을 때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자연주의적 직접성만이고, 그것이 가져다주는 고발성의 감동만이다. 사실 『마흔에 길을 나서다』에서 맛볼 수 있는 성취를 우리는 단편 「타관 사람」 등에서 이미 확인한 바 있다. 정홍수의 표현대로 ‘아, 공선옥이 남의 이야기도 이렇게 잘하는구나’를 실감했던 것이다.
지금까지의 문학적 성취를 생각할 때, 무엇보다 사유의 폭도 넓어지고 문학적 대상도 확대되는 중요한 싯점인 터라 확실히 하나의 분기점에 공선옥이 서 있음은 분명한 듯하다. 장편 『수수밭으로 오세요』는 그런 분기점의 실상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한마디로 반쯤의 성공과 반쯤의 실패라고나 할까. 이 고비를 과연 공선옥이 씩씩하게 헤쳐나가 작지만 크고, 천하고 낮은 곳이지만 귀하고 높은 세상을 멋지게 창조해줄 것을 다시금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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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진오 「억척어미의 여성성, 가난과 마주하는 문학」, 공선옥 소설집 『멋진 한세상』, 창작과비평사 2002,297면.↩
- 신승엽 「벗어날 수 없는 일탈, 머무를 수 없는 定住」, 『창작과비평』 1999년 여름호 65면.↩
- 김영희 「근대체험과 여성」, 『창작과비평』 1995년 가을호 91면.↩
- 『실천문학』 2002년 봄호부터 2003년 봄호까지 연재.↩
- 한기욱 「우리 시대의 사랑·성·환경 이야기」, 『창작과비평』 2003년 봄호 92면. 나아가 한기욱은 이 작품이 ‘공선옥 문학의 한 획을 긋는 역작’이며, ‘우리 시대 소설 가운데서 최상급의 성취를 이뤄낸’작품으로 고평했는데, 과연 그에 걸맞은 작품인가도 이 글에서 주목하고자 한다.↩
- 같은 글 93면.↩
- 실제로 이 소설은 재혼 후 아이까지 낳고서 1년 가까이 지난 뒤에서 시작하는데, 기본적으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야기가 편성되었다. 다만 두번째 장에서 이섭을 만나 결혼하게 되는 과정을 담고 있고, 세번째 장에서 결혼 후 현재 살고 있는 곳으로 내려온 과정을 일부 담고 있다. 이런 구성 자체가 ‘사랑’ 자체에 촛점을 맞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한 단서가 되기도 한다.↩
- 이에 대해서는 작품 세부들의 소설적 성취에 대한 자상한 설명이 돋보이는 한기욱의 앞의 글 참조.↩
- 정홍수 「신산에서 따숨까지」, 공선옥 소설집 『내 생의 알리바이』, 창작과비평사 1998,273면.↩
- 정홍수, 앞의 글 268면.↩
- 이에 대한 좋은 안내서로 E.F. 슈마허 외 『자발적 가난』(그물코 2003)을 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