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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이장욱 李章旭
1968년 서울 출생. 1994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내 잠 속의 모래산』이 있음. oblako@hanmail.net
기하학적 구도
그는 한없이 환원된다, 단 하나의 점으로,
필사적으로 수평선을 넘어가는 로빈슨 크루소의 뗏목으로,
국가대표 양궁 선수가 꼬나보는 최후의 표적으로,
물밑을 투시하며 집요하게 활강하는
물새의 시선으로,
하지만 케이블 티브이를 주시하는 그의 시선과 무관하게
새벽의 그는
또 수많은 표적을 향해 분할된다,
그의 위장은 마구 뒤섞인 음식물들에 대해,
그의 혈액은 불규칙한 순환궤도에 대해,
안 보이지만
미친 듯이 다른 방향을 찾아 증식하는 머리칼과,
또 발톱의 기하학,
그의 온몸을 이리저리 수렴해가는
허공의 소실점들은
어느덧 15층에서 추락하는 사내에게 작용하는
중력의 핵심으로.
그를 가두는 단 하나의 점.
그 순간 그가
그의 몸 안에 임재한다는 것,
위장과, 발톱과, 피와,
미친 듯이 증식하는 머리칼과 사랑과,
다시 소실점들,
시선을 돌려 창밖을 바라보면
길 잃은 개 한마리가 온힘을 다해
새벽 네거리의 공허에 사선을 긋고 있다,
그의 귓전을 스치는
시속 일백 킬로의 기계들,
수없이 그어지는 강철 선분을 끊고 새벽 여섯시의 태양은
수직의 이미지로 정지해 있다,
결정
아침에 깨어나면 모든 것이 멈출 것이다.
사소한 돌멩이들이 차갑게 침묵할 것이다.
사물들은 후퇴할 것이다.
나는 약속을 취소한다.
세면과 식사준비와 출근을 취소한다.
창문이 얼어붙는다.
바깥과 안의 대기가 격렬하게
단단한 물방울을 만들고 있다. 서서히
모든 것이 정지한다.
이제 유리는 어느 먼 곳의 금속,
어지러운 지평선에서 이상한 마음이 불어온다.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고 싶다.
하지만 너무 많은 것을 반성해서는 안된다.
나에게는 신비로운 과거가 없으며,
나에게는 늙으신 아버지가 있으며,
나는 오로지 지금 이곳에 있다.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시작된다.
단 하나의 생각이
나를 결박한다.
나는 얼어붙는다.
오분 전과 머나먼 미래가 한꺼번에 다가온다.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모조품
그러므로 나는 낡고 오래되었다.
지금 이 표정은 오랫동안 흘러간 다른 표정들에 의해 제조된다.
문득 내 그림자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날아오르는 비둘기,
다행히 나는 추억 따위에 민감한 종족이 아니다.
그러므로 단 하나가 아닌 것, 나는
머나먼 어제에서 종로3가에 이르기까지, 널리 유포되었다.
나는 한없이 복제되어 내일은 또 잠에서 깨어날 것이다.
모든 아침은 단단하며
나는 결코 부정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가령 제일은행 현금자동인출기가 쎄팅하는 나에 대해
순순한 표정을 지을 때도,
구립도서관의 대기번호를 받아들고 멍하니,
창밖의 미루나무가 이루는 직립의 본능을 주시하는 순간에도,
나는 단 하나의 사랑 따위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의 낡고 오래된 귀가는 머나먼 어제에서
종로3가에 이르기까지
하염없이 제조된 것,
다행히 나는 단 하나의 표정을,
단 하나의 흐느낌을,
단 하나의 비둘기를,
한번도 상상해보지 않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