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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미국이라는 우리의 난제

 

한국의 이십대, 탈미를 상상하다

 

 

이병한 李炳翰

1978년 출생. 연세대 인문학부 졸업. 현재 샹하이 쟈오퉁(交通)대학 국제학대학원 재학중. Ibh7826@hanmail.net

 

 

하늘 높이 솟는 불, 우리의 가슴 고동치게 하네. 이제 모두 다 일어나, 영원히 함께 살아가야 할 길 나서자. 손에 손잡고 벽을 넘어서, 우리 사는 세상 더욱 살기 좋도록. 손에 손잡고 벽을 넘어서, 서로서로 사랑하는 한마음 되자, 손잡고.

 

1988년 무던히도 많이 듣고, 또 많이 불렀던 노래다. 목놓아 노래 부른 우리들의 기운이 전해진 것일까. 이듬해 베를린 장벽이 정말로 무너졌다. 서독과 동독의 사람들이 손에 손을 잡고 벽을 넘어선 것이다. 이어 동유럽이 붕괴되었다고 했고, 마침내 소련도 해체되었다. 그 일련의 사태들을 지켜보면서 나는 올림픽 당시 느꼈던 당혹감을 다소나마 누그러뜨릴 수 있었다.

당시 열살짜리 ‘반공소년’이었던 내게 올림픽은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이 필드와 링에서 실력을 겨루는 또 하나의 전장이었다. 그 다툼에서 소련이 1위, 동독이 2위를 차지했고 미국은 3위에 그쳤다. 충격이었고 납득하기 어려운 결과였다. 내 머릿속에서 서열화되어 있던 세계지도가 순식간에 동요했다. 견고히 구축된 그 지도 안에서 존재하며 세계를 인식하던 나의 실존마저도 흔들리는 불쾌한 체험이었다.

그러나 89년 이후의 역사적 격변은 올림픽이 끝나고도 쉬이 가시지 않던 찝찝함과 미심쩍음을 단숨에 해소해주었다. 다소의 시행착오를 거쳤지만 미국과 ‘자유세계’는 끝내 승리했다. 진즉 그래야 하는 필연의 산물이었고 역사의 순리이기도 했다. 때로는 지체되고 후퇴하지만 그래도 역사는 전진한다. 그렇게 나는 ‘진보’를 굳게 믿고 있었다. 바야흐로 미국이 단일패권을 쥔, 그래서 온세상이 미국화되는 그런 ‘멋진 신세계’가 도래하고 있었다. 이 멋진 신세계에 도취한 미국의 한 지식인은 ‘역사의 종언’을 선포하기도 했다. 그 역사의 종착지에서 우리들의 십대는 막 시작되었다.

그런 내가 어느덧 이십대의 끝자락에 있다. 2006년, 현실은 그저 앙상하다. 지리멸렬한 한국의 오늘과 위태위태한 한반도와 세계의 현재를 보노라면 87년 민주화운동의 함성과 89년 자유진영의 승리에 대한 환호가 무색해질 지경이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그래서 나는 미국이 곧 세계였던 지난 20년을 복기해보고 싶다. 내 삶에 녹아 있던 미국을 추출해내 심문해보려 한다. 나의 경험이 우리 세대를 대표할 수는 없겠지만 그들과 함께 미국의 강력한 자장 속에서 20년을 살았다는 점에서 일정한 전형성은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미국의 주술에서 벗어나기까지 내가 겪은 짧은 성장기다.

 

 

1990년대 1—서태지와 체 게바라

 

문화의 시대, 욕망으로 들끓던 사춘기의 우리에게 소비자본주의가 꽃핀 90년대는 그야말로 황금시절이었다. 내 방의 벽은 뉴키즈온더블럭, 마이클 볼튼, 머라이어 캐리 등 당대를 주름잡던 미국 팝가수들의 브로마이드로 도배되어 있었다. ‘아메리칸 탑 포티’라는 라디오 방송을 꼬박꼬박 챙겨 듣고 빌보드차트를 줄줄 외우고 다니며, ‘가요톱텐’에 머물러 있던 또래들 사이에서 야릇한 우월감을 느끼기도 했다. 거대한 지진해일 같은 농구붐이 밀려오기도 했다. 『슬램덩크』는 우리 세대의 바이블이었고 연세대와 고려대의 농구부는 여학생들의 우상이었다. 나는 잰 척 한걸음 더 나아가 미국 프로농구 NBA에 탐닉했다. 홍콩의 위성방송을 통해 NBA선수들이 펼치는 신기에 가까운 경기를 넋놓아 지켜보았고, 내 방의 벽지는 어느새 혀를 쑥 내민 얼굴로 허공에 떠 있는 마이클 조던으로 바뀌어 있었다. 운동화는 언제나 ‘Air Jordan’이 새겨진 나이키였고, 그것을 신는 것만으로 나는 충분히 멋지고 당당했다.

우리는 말 그대로 ‘소비하는 주체’였고 소비를 통해 자아를 구성해갔다. 빌보드, NBA, 나이키, 할리우드를 소비하면서 특별히 ‘미국’을 의식하지는 않았다. 그것들은 나의 욕망을 표현하고 실현하는 훌륭한 도구이자 기호였을 따름이다. 미국은 우리의 일상에 자연스레 녹아들어 있었고 우리의 삶과 정체성을 구성하는 내부화된 코드였다.

그런 우리의 자유분방함은 ‘개인’의 탄생으로 예찬되고, 그 일상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낯설지만 근사한 어휘로 포착됐다. 돌아보면 우리를 수식하던 그 언어의 인플레는 사회주의가 몰락한 90년대를 살아가기 위해 제1세계에서 빌려온 탈혁명의 처세술이었다. ‘거칠었던 과거’를 반성한 뭇 혁명가들은 퇴폐한 양키문화라 손가락질했던 대중문화에 새 둥지를 틀어 밥을 벌었고, 때마침(소련 해체 이듬해) 등장한 서태지는 그들의 구세주가 되었다. 공장노동자들의 록에 슬럼가 흑인들의 랩비트를 섞고 태평소 가락 한구절도 삽입한 「하여가」에,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논하고 판소리와 탈춤에 몰두했던 그들이 더 흥분했다. 서태지의 반항기는 한없이 부풀려졌고 세계를 바꾸는 것 대신 비꼬는 것이 ‘문화혁명’이 되었다. 덕분에 그의 CD를 사고 미국의 좌파 밴드 레이지어게인스트더머신의 노래를 듣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우쭐댈 수 있었다. 진보는 소비되었고 체 게바라는 액세서리가 되었다. 너무 다른 우리와 그들은 그 기묘한 담합 속에서 미국이 승리한 90년대를 공유했다. 그러다 1997년 IMF가 터졌다.

 

 

1990년대 2—IMF에서 씨애틀까지

 

90년대의 아이콘 서태지는 96년 은퇴했다. 그가 홀연 미국으로 떠나자 돌연 IMF가 찾아왔다. 주가는 바닥을 모르고 폭락했고 환율은 천장을 모르고 치솟았다. 도대체 실체를 알 길 없는 저 거대한 씨스템에 의해 우리 삶의 기반은 한순간에 무너졌다. 그 아수라장 속에서 정권이 교체되었고 나는 대학생이 되었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봄이 되고 꽃은 피는데 구조조정과 정리해고의 한파가 몰아닥쳤다. 벚꽃이 만발하던 4월의 포근했던 어느날, 우리는 87년 TV에서 보았던 격동의 한복판에 서 있음을 깨달았다. 그날 서울대에서는 서울지하철과 공공부문 노조, 대학생들이 집결해 민주화 이후 10년 만에 ‘노학연대’가 부활했다. 혼란스럽게도 10년 전의 민주화 주역들이 우리와 대치하고 있었다. 역사는 기묘하게 굴절했다. 우리에겐 낯설기 그지없던 박정희의 유령이 한반도를 떠돌기 시작했고 ‘그때 그 시절’에 대한 향수가 독버섯처럼 퍼져나갔다. 전경에게 질질 끌려가는 친구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또다른 90년대를 예감했다.

돌이켜보면 우리가 구가했던 그 고삐 풀린 상업주의와 소비주의는 냉전체제의 와해와 더불어 ‘세계화’라는 미국의 새로운 패권전략이 지구 전역에 일으킨 거대한 파장의 일부였다. 그후 세계를 향해 무방비로 개방된 시장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강박적인 경쟁·경제논리가 냉전논리만큼이나 가혹하게 삶을 옥죄어왔다. 논술고사를 준비하며 열심히 읽던 신문사설에 그리 자주 등장하던 문구인 ‘무한경쟁의 시대’가 얼마나 무서운 말이었는지 뒤늦게 실감한 것이다. 개혁정부가 휘두르는 신자유주의의 칼날은 한층 더 가멸차졌고, 미국의 손바닥에서 놀아나는 IMF는 더욱 고삐를 죄고 채찍질을 해댔다.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불안과 공포, 낙오하면 끝이라는 막연한 두려움, 앞으로도 더 나아지지 않으리라는 체념과 냉소 등 각종 포스트—IMF증후군이 우리들의 젊음을 짓눌렀다. 미국이 주도하는 그 장밋빛 세계에서 우리들의 삶은 잿빛으로 물들어갔다. 하지만 암울하고 황량했던 90년대의 끝자락에도 개인들의 희망은 여전히 미국에 있는 듯 보였다. 치열해진 학점 경쟁을 뚫고 교환학생에 뽑혀 미국 대학에서 공부하는 것이 작은 승리의 상징이었다. 모두들 사설학원과 어학당을 오가며 영어공부에 여념이 없었고, 방학은 농활 대신 어학연수로 채워졌다. 이상(理想) 대신 이해(利害)를 공유하는 토플스터디 멤버들이 대학생활의 주요 인맥이 되었고, 도태되어서는 안된다는 절박함으로 끈끈한 ‘동지애’가 움텄다. 우리는 『해방전후사의 인식』이나 『전환시대의 논리』 대신 『박정토익』과 『해커스토플』을 ‘학습’하고 ‘토론’했으며, 공장으로 하방하는 대신 외국계 기업의 인턴으로 경력을 쌓았다. 산업전사도 민주화투사도 될 수 없었던 우리들의 목표는 오로지 이 살벌한 경쟁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글로벌 인재’가 되는 것이었다. 나 역시 미래의 돌파구를 찾으러 씨애틀로 향했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게 될 것이다.”워쇼스키 형제의 99년작 「매트릭스」의 광고문구다. 정말로 그러했다. 그 꿈의 나라에 첫발을 내디딘 내가 맞닥뜨린 것은 미국을 향한 전세계의 거대한 분노와 원성의 함성이었다. 99년 씨애틀은 미국 주도의 세계화가 야기한 괴멸적인 결과에 신음하던 이들이 총집결해 WTO각료회의를 무산시킨 반세계화 운동의 성지였다. 시위대의 기세에 눌려 전지구적 귀족계급들의 비밀스러운 회담은 연기되고 현대판 부재지주들은 황망히 자리를 떠났다.

나와는 전혀 다른 꿈을 품고 그곳에 온 수많은 세계시민들과 만나면서 나는 한국의 상황이 지극히 보편적이며 ‘정상적’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남아공에서 온 누군가는 인종차별에 저항한 만델라가 집권했지만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민중들의 삶은 파탄났다고 호소했다. 인도의 좌파 정당 관계자는 주정부 선거에서 이기고도 ‘자본 이탈’을 경고하며 윽박지르는 금융자본에 속수무책이던 경험을 토로했다. 이는 브라질 노동자의 희망이었던 룰라가 대통령이 되고도 자본의 파업에 굴복하고 만 사례에서 반복, 변주될 만큼 흔한 얘기가 되었다. 그들은 미국발 신자유주의가 가진자들이 더 많이 갖지 못한 불만에서 비롯된 반혁명의 논리이고, 역계급혁명의 이념이라 성토했다. 내가 사다리를 타고 더 높이 올라가려고 버둥거리던 그 ‘매트릭스’를 전복시키고자 똘똘 뭉친 ‘네오’들을 지켜보며 나는 부러웠고 또 부끄러웠다.

WTO반대투쟁 승리의 일시적인 환희 속에서 밀레니엄이 찾아왔다. 10년과 100년, 그리고 1000년이 겹쳐 흐르는 특별한 순간이었다. 그 찰나에 미국이 냉전에서 승리한 1990년대가 끝나고 있었고, 미국이 패권을 쥔 1900년대가 저물고 있었으며, 전세계를 ‘밀레니엄’이라는 단일서사 속에 포섭시킨 근대 500년의 역사가 지나가고 있었다. 바로 그 시간, 1492년 콜럼버스가 ‘발견’했다는 그 신대륙에서 ‘또다른 세계는 가능하다’(AnotherWorldIsPossible, 세계사회포럼의 슬로건)는 외침이 울려퍼지고 있었다. 최초의 공화국이었던 미국은 이미 ‘앙씨앵 레짐’의 일부가 된 듯 보였다. 씨애틀의 잠 못 이루던 밤, 새천년을 여는 폭죽소리에 내 안의 미국이 흔들, 거렸다.

 

 

1990년대 3—지도 다시 그리기

 

동구권의 붕괴로 세계지도에서 철의 장막이 걷혔다. 세계는 ‘지구촌’이 되었고, 세계화된 자본주의는 지구촌의 단일문법이 되었다. 그 지도 위에 90년대의 이야기들, 대체로는 비극들이 다양한 언어로 기록되고 있었다.

우리는 그 지도 속을 헤집고 들어갔다. 배낭여행이 대학생활의 필수 코스가 되면서, 지구촌을 눈으로 보고 몸으로 체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동경과 친근함, 욕망의 대상이었던 유년시절의 미국이든, IMF사태를 거치며 물음표를 달고 회의어린 눈으로 지켜보게 된 미국이든, 미국이 모든 것의 표준이고 모델이며 사고와 판단의 준거점이 되어 상상의 한계를 규정짓던 시대는 저물고 있었다. ‘반미’가 쉽사리 내셔널리즘으로 기울고, ‘친미’가 곧잘 식민지적 무의식에서 기인하는 것은 양자가 공히 미국만을 중심으로 세계와 한국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 국면의 변화에 따라 거듭되는 반미—친미의 진자운동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한국—미국’이라는 이항대립의 틀을 깨는 복안이 필요했다.

배낭여행은 내 두 발로 새로운 지도를 그리는 작업이었다. 내 눈으로 세계를 보고 내 몸으로 세계와 부딪치는 사이, 관념 속의 세계지도는 파열음을 내며 수정에 수정을 거듭했다. 미국을 정점으로 구축되어 있던 그 견고한 세계가 조금씩 무너져내리고, ‘근대’라는 도열 안에서 서열화되고 평면화되어 있던 세계도 점차 입체감을 갖게 되었다. ‘서양’은 미국과 유럽으로 분기되었고, 그 유럽도 다양성으로 내파되어갔다. 보편을 말하던 서양문명은 인류의 위대한 문명유산 가운데 하나로 제자리를 찾아갔다. ‘외국인’도 더이상 백인의 미국인을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아니었다. 이처럼 언어가 본래의 의미를 회복하면서 세계를 응시하는 눈도 한층 투명해질 수 있었다.

‘자유민주주의’가 승리한 90년대 말의 풍경은 불평등하기 짝이 없는 비참한 세계였다. 선진국과 제3세계, 그리고 선진국 내부의 빈부격차는 격심했다. 양자는 긴밀하게 연계된 동시대의 서로 다른 모습이었고, 세계화된 자본주의는 그 공간적 불평등을 구조적으로 생산하며 지구촌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동과 서가 교차하고 이슬람과 기독교가 융합되어 있는 터키의 이스탄불은 세계체제가 중심부와 주변부로 분열하는 경계지이기도 했다. 그곳에서 입체적인 세계지도는 비로소 역사성도 획득했다. 자본주의 세계체제라는 500년의 긴 역사가 지리적 공간 속으로 스며든 것이다.

그러자 유라시아의 끝자락에 자리한 한반도의 ‘역사적 위치’도 좀더 정확하게 그려졌다. 미국과 더불어 ‘자유세계’의 일원으로 살아온 냉전기의 자아상은 교묘히 뒤틀린 것이었다. 한반도의 근대 체험은 미국의 그것과는 질적으로 너무도 달랐다. 식민과 전쟁, 분단과 독재로 점철된 한반도의 20세기는 그동안 상상 속의 지도에서 텅 빈 여백으로 남아 있던 ‘제3세계’의 역사와 가까웠다. 인도차이나반도에 흉물처럼 새겨진 근현대사의 질곡어린 흔적들은 한반도의 그것과 너무나도 흡사한 무늬와 결을 가지고 있었다.

냉전의 종식으로 하나가 된 지구는 역설적으로 미국의 상대화를 낳았다. 이념으로 분열되었던 공간이 개방되고 접합되면서, 잠복하고 있던 지역성이 발현되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은 여전히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이지만, 더이상 세계 그 자체는 아니었다. ‘가깝고도 먼’이웃나라의 언어들이 독일어와 프랑스어를 제치고 제2외국어로서의 입지를 굳혀갔다. 특히 중국붐은 놀라운 것이었는데, 내가 어릴 때만 해도 중국의 이미지는 인해전술로 압록강을 밀고 내려오는 무지막지함일 따름이었다. 그로부터 불과 10년이 지나 한국의 젊은이들이 죽의 장막을 넘어 중국을 향해 물밀듯이 몰려가고 있었고, 중문과의 위상이 영문과를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기호체계에 있어서 전후 한국을 점령했던 영어의 위상에 비견될 만한 커다란 구조변동이었다. 기호와 표상이 바뀌면 현실세계도 꿈적, 하지 않을 수 없다.

 

 

21세기—America under Attack

 

99년 씨애틀을 가득 메웠던, 반인간적 씨스템에 대한 저주와 증오와 불만이 기어이 그 체제의 중심부에서 폭발했다. 10년 전 걸프전에서 바그다드를 초토화시킨 미군의 압도적 군사력을 생중계했던 CNN이 이번에는 ‘America under Attack’이라는 생경한 자막 아래 저 치명적인 세계무역쎈터 테러 장면을 반복하고 있었다. 냉전의 와해는 철의 장막과 죽의 장막만 거둬들인 게 아니었다. 그동안 꼭꼭 억눌려왔던 제3세계의 불만이 여기저기서 터져나오는 기폭제가 된 것이다. 동두천의 미군부대 막사에서 일직을 서고 있던 나는 그 느닷없는 초현실적 스펙터클에 압도되어 하얗게 밤을 지새웠다.

미국인들에게 자신들을 향한 저 뿌리깊은 분노와 증오를 성찰할 수 있는 능력이 조금이나마 있었더라면 9·11의 비극은 더 나은 세계로 가는 성장통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난생처음 체험한 그 가공할 폭력이란 실은 지난 세기 수많은 사람들, 특히 ‘제3세계’라 불리는 체제의 주변부에서 살아가던 이들의 일상이었기 때문이다. 9·11은 역설적으로 짧게는 지난 10년, 길게는 지난 500년의 역사 속에서 지리적으로 균열되어 있던 근대의 경험을 공유하는 ‘절호의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에겐 절망의 외침에 귀기울이고 공감할 수 있는 감수성도 상상력도 의지도 부족했다. 그 결여의 공간을 메운 것은“미국식 생활방식은 타협 대상이 아니다”라는 부시정권의 선동이었다.

재빠르게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기약없는 보복전이 개시되었고, 세계에서 가장 빈곤하고 피폐한 나라에 무차별적인 공습이 가해졌다. 황량한 산악지대에 우박처럼 폭탄이 쏟아지고 순항미사일이 연일 허공을 갈랐다. 전쟁의 명분이던 빈 라덴은 잡히지 않았지만 미국은 승리를 자축했다. 그건 정말로 ‘승리’라 부름직한 것이었다. 테러로 인해 가족과 친구를 잃은 사람들의 슬픔을 교묘히 조작하고 상품화해서 정치적 목적에 활용한 미국 지배계급의 완벽한 승리였다. 인간의 가장 사적이고 내밀한 감정까지도 약탈해서 이윤을 창출하는 체제화된 야만의 대승리였다. 국가가 국민에게 가하는 무시무시한 국가 테러이기도 했다.

2002년 한국에서도 젊은 반미가 폭발했다. 미군의 과실로 꽃다운 두 여중생이 사망했음에도 미군이 사후처리에서 보여준 안이함과 무성의함, 분별없음은 월드컵 4강으로 고조된 붉은 내셔널리즘에 기름을 끼얹은 꼴이었다. 한류붐에 익숙해진 우리는 문화적 자긍심에 차 있었고, 남북정상회담이라는 역사적 사건으로 북한의 이미지도 극적으로 변해 있었다. 우리에게 6월은 6·25가 아니라 6·15로 기억된다. 그만큼 분단체제 속에서 미국이 누려왔던 헤게모니는 고전하는 할리우드 영화만큼이나 시들해진 것이다. ‘신성한 한미동맹’은 유행이 한참 지난 썰렁한 농담에 지나지 않았고 우리들은 주저없이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섰다. 화염병과 돌멩이로 맞섰던 절박한 투쟁이 평화로운 촛불시위로 변한 것이다. 이는 십대부터 우리가 누려온 민주주의와 문화적 활력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터이다.

주중에는 미군에서 복무하고 주말에는 촛불시위에 참여하는 이중생활의 연속이었다. 그 와중에도 막사 안 내 책상의 한켠에는 두툼한 GRE책이 꽂혀 있었고, 시위를 마치고 돌아온 날에도 영어공부를 게을리하진 않았다. 들끓어오르는 반미감정도 미국 유학의 열망마저 잠재우진 못했던 것이다. 혹은 그 둘은 나의 내면에서 갈등하며 어색하게 공존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애당초 ‘미국의 개’냐는 비아냥에 자괴감을 느끼면서도 카투사에 지원한 것부터가 그러했다. 카투사 최종 추첨에 합격한 날, 나는 대학 합격소식을 접했을 때보다도 더 기뻤다. 어찌나 좋았던지 친구들의 질책이 질투로 들릴 정도였다. 한국군에서 내 인간성의 바닥을 시험하며 2년을 헛되이 보내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과, 미군에서의 복무로 언어 습득은 물론이요 비자 취득이나 유학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은근한 기대도 있었다. 한반도와 동북아에서 주한미군이 맡고 있는 역할에는 꽤나 비판적이었지만 그럼에도 미군, 나아가 미국이 제공하는 혜택은 쉽사리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자 유혹이었다.

2003년 미국은 대규모의 반전시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라크를 침공했다. 미국 강경파들 앞에서 무기력하기 짝이 없는 코피 아난(Kofi Annan) UN사무총장이 아비뇽 유수의 교황처럼 안쓰러워 보였다. 이라크전쟁으로 벌거벗은 제국의 실체가 노골적으로 드러났고 미국의 지적·도덕적 헤게모니도 결정적으로 붕괴되었다. 반미를 넘어 혐미(嫌美)의 기운마저 넘실거렸고, 세계화를 주도했던 미국을 향해 반미의 세계화가 부메랑이 되어 돌아갔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반미와 혐미의 물결을 무릅쓰고도 전쟁을 감행하는 네오콘의 논리야말로 미국이 처한 구조적 위기를 냉철하게 인식한 것인지 모른다. 지구적 규모로 확산된 2차대전의 참화는 자본주의 체제의 구조적 위기의 산물이었고, 미국은 전쟁을 통해서만 대공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로부터 미국은 ‘냉전’이라는 항상적인 전시상황이 필요했고 냉전의 종식과 함께 새로운 영구전쟁이 요구된 것이다. 지속적인 경제력 잠식 속에서도 군사화를 멈출 수 없는 미국의 내부 모순은 이미 걷잡을 수 없는 지경으로 치닫고 있었다. 이제 자본주의 체제의 가장 위협적인 세력은 사회주의나 테러리즘이 아니라 근대의 외투마저 벗어던지고 나선 미국 자신이 아닐까. 어떠한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영원히 패권을 유지하겠다는 그들의 절박한 몸부림은 한때 히틀러가 꿈꾸었던 탈자본주의적 천년왕국마저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미국의 지배층이 필사적으로 도전하고 있는 것은 자연계와 역사를 아우르는 단 하나의 불변의 법칙, 즉 ‘변화’에 대한 거부이며, 이 게임의 승부는 이미 정해져 있다.

 

 

탈미(脫美)의 상상력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15여년, 미국이 멕시코와의 국경에 장벽을 쌓는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자유의 등불이었던 그 나라는 갈수록 자폐적인 요새가 되어간다. 소련에 이어 또 하나의 파라다이스가 사라져가는 것이다. 그럼에도 새로운 무엇인가는 보이지 않는세기말적 상황은 지금도 진행형이다. 그러고 보면 열살 소년이 이십대 후반의 청년이 되기까지, 우리는 여전히 89년 이후의 전환기를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단 하나 절실히 체득한 것은 미국식 자본주의가 답이 아니라는 점이다. 아메리칸드림의 전지구적 실현은 그와 다른 모든 꿈을 짓밟고 억압하는 악몽에 지나지 않았다. 이제 89년과 91년의 충격 속에서 청산과 전향의 바람이 휘몰아쳤던 것처럼, 또 한번의 결산과 방향 전환이 요구된다. 그러나 그것은 ‘전향’이 아니라 ‘회심’이어야 한다. 우리들의 영혼을 의탁할 또다른 유토피아는 이미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동안 또 한명의 친구가 미국으로 떠났다. 이미 적잖은 지인들이 미국에서 학구열을 불태우고 있다. ‘하바드’는 ‘아메리카’가 상실한 그 아우라를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그들의 건승을 비는 마음 한구석에 부러움이 비집고 나온다. 블로그를 통해 그들의 유학생활을 엿보면서 나의 선택은 옳았던가 불안해지기도 한다. 제대와 함께 흉물 같던 미군복을 벗어던지며 나는 오랜 꿈이었던 미국 유학도 함께 접었기 때문이다. 다른 길로 가보자고 생각한 것이다.

9·11에서 시작해 이라크전쟁으로 마감한 군복무 기간에 두드러지게 눈에 띄었던 우리 사회의 변화는 ‘반미의 대중화’와 ‘친미의 엘리뜨화’였다. 굳이 지난 시절처럼 ‘학습’을 통해 미제국주의를 공부하지 않아도 미국의 민주주의는 형편없이 후퇴했으며, 애초의 그 미국식 민주주의라는 것도 실은 자국의 이익, 그중에서도 군산복합체를 중심으로 하는 보수 우파의 이익에 봉사한다는 것은 ‘상식’이 되었다. 이제 미국에 남은 것은 그 어떤 숭고한 가치나 이상이 아니라 그 나라가 축적하고 있는 ‘힘’뿐이다.

문제는 부와 학벌을 바탕으로 재생산되는 이 땅의 젊은 엘리뜨들이 미국과의 강한 유착 욕망에 빠져 그 힘의 논리를 쉬이 추종한다는 점이다. 미국이 제공하는 질 높은 고등교육을 십분 인정한다 하더라도 지나칠 정도로 미국에 편중되어 있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그건 우리 세대가 이십대에 경험한 세계화에 대한 서로 다른 반응이기도 했다. 대다수가 나날이 고단하고 황폐해져가는 이 땅의 현실을 ‘대~한민국’의 일시적 열광으로 위안하는 사이, 코즈모폴리턴을 자처하며 이곳을 떠날 수 있는 유목민들은 민족주의를 냉소하며 미국이라는 오아시스에 안착한다. 그래서 그토록 유행했던 탈식민주의조차도 그 이론적 근거는 온통 제1세계에서 구해오는 것이다. 으레 줄줄이 달려 있기 마련인 긴 인용문헌 목록을 보노라면 ‘탈식민주의’라는 어휘가 농담처럼 들려 서글퍼질 정도이다. 과연 미국의 황혼기에 날갯짓을 시작한 그들에게 미네르바 부엉이의 지혜를 기대할 수 있을까?

지금은 우리들의 사고를 규정짓고 욕망을 통제했던 ‘미국성’을 해체하고 억압된 상상력과 창조력을 해방시켜 아메리칸드림 속에 파묻혔던 우리들의 꿈을 실현해야 할 때다. 민주주의와 세계화를 경험한 우리 세대의 활력과 에너지가 퇴행적인 내셔널리즘이나 미국으로 상징되는 낡은 지배적 가치에 포섭되지 않고 그 가치를 타파하고 변혁하는 방향으로 흐를 수 있도록 새 길을 터주어야 한다. 이는 ‘반미’라는 선언적 구호나 일면적인 미국 비판에 그치지 말고 오히려 우리 안에 들러붙어 있는 ‘미국성’을 치열하게 문제화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즉 미국과의 조우와 교섭, 저항과 타협으로 산출된 우리들의 지난 삶과 역사로 끊임없이 되돌아가 그 내재적 모순을 통렬히 자각하고 ‘역사화’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친미든 반미든 도그마가 된 ‘미국’을 그 자족성으로부터 해방시키고 그것의 거울상으로 구성된 우리의 배타성으로부터도 자유로워져야 한다. 탈미의 상상력은 부단히 자기를 부정하고 갱신함으로써 기존의 질서를 해체하고 재건하는 쉼없는 영구혁명이다.

깊숙이 연계되어 있는 그 자족성과 배타성에서 벗어나기 위해 참고체계를 다각화하는 일도 필수적이다. 미국이라는 비대칭적 거울 속의 왜곡된 모습에 식민지 콤플렉스를 느낄 것이 아니라 좀더 다면적이고 입체적으로 자신을 비춰볼 수 있는 새로운 거울들이 필요한 것이다. 나에게는 그것이 동아시아였다.

 

 

역사의 재생

 

저공비행을 시작한 여객기의 창가에 눈부시게 투명한 바다와 아름다운 산호초가 들어왔다. 내리쬐는 6월의 태양은 뜨거웠으며 그보다 더 뜨거운 열기가 섬 전체를 휘감고 있었다. 오끼나와(沖繩), 그 슬픈 낙원에서는 미군기지 확대에 반대하는 해상시위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진행중이었다. 배운 지 일년이 되지 않은 나의 어눌한 일본어가 그들의 억센 오끼나와 억양이 묻어나는 일본어와 공명했다. 뒤늦게 배우기 시작한 이웃나라의 언어는 낮은 목소리에 감응할 수 있는 귀를 달아주었다. 동아시아의 전후(戰後)를 지배했던 제국의 목소리, 그 고주파에 의해 지워졌던 변방의 잡음들이 또렷이 언어화되어 내게로 왔다.

올해 월드컵을 샹하이에서 보기도 했다. 한국 경기 날에는 소주와 삼겹살을 먹으며, 일본 경기 때는 사시미에 니혼슈(日本酒)를 곁들여 한중일 연합으로 응원하는 재미는 꽤나 쏠쏠했다. 그러나 동아시아의 젊은이들이 마주앉아 술잔을 기울이다보면 좋은 얘기만이 오가지는 않았다. 종종 불협화음이 생기고 언성이 높아지기도 했다. 지워지지 않는 역사의 상흔들이 취기를 빌려 독설로 돌출되어 서로를 할퀴고 비수를 꽂았다. 역사의 중력으로부터 한없이 가벼워 보이던 우리 세대도 그 과거와 얼마나 깊이 연루되어 있는지 자각하게 됐다. 그러나 그렇게 부딪치고 싸우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닐까. 충돌과 언쟁은 청산되지 않은 채 온존하던 과거가 우리들의 혀를 빌려 말을 걸어오는 것이다. 우리들의 눈과 귀는 거의 언제나 태평양 건너 저편을 향해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동아시아의 낮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분열된 기억들을 정리할 때다.

그럼 동아시아에서 무엇이 가능할까? 미래로 내딛는 우리들의 발걸음은 과거를 비판적으로 직시하는 회고적 인식에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지나간 역사 속에서 부서지고 잊혀져간 희망의 조각들을 발굴하여 망각의 때를 벗겨내고 촘촘히 엮어내야 한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여전히 빛나고 있다. 야만적인 군사적 폭압에 맞서 민중의 손으로 쟁취한 것이기에 나는 그런 역사를 일구어낸 선배세대가 한없이 자랑스럽다. 일본에도 평화주의의 값진 흐름이 있다. 시민사회의 쉼없는 투쟁은 하늘에서 떨어진 평화헌법을 일본사회에 뿌리내려 60년이나 지켜왔다. 또한 비록 지금은 사그라졌지만 중국혁명의 불씨는 어떠한가? 그들의 역사는 자본주의 너머를 꿈꾸었던 가장 장대한 제3세계의 혁명서사였다. 그 혁명의 열정 속에 담긴 숭고한 가치와 원대한 이상은 여전히 감동적이다. 반둥회의(1955년 인도네시아의 반둥에서 열린 아시아아프리카회의)의 정신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제국들의 패권주의에 저항하는 지역연합의 지혜는 지구적 내전상황으로 치닫는 오늘날 더욱더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민주주의, 평화주의, 제3세계 사회주의, 탈중심적 국제연대. 이 모든 것이 지난 세기 동아시아가 미국이라는 근대의 이물을 품안에 끌어안는 악전고투 속에서 획득한 역사적 보석들이다. 우리는 ‘역사의 종언’과 함께 잊혀진 그 보물창고로 되돌아가 새로운 영감과 자원을 길어올려야 한다. 이 되돌아감과 되돌아옴의 이중운동은 미국화된 불모의 세계를 갱신하고 재창조하는 일이며, 동시에 역사의 막다른 곳에서 허덕대는 그 나라에 새 숨결을 불어넣어주는 일이기도 하다.

쉽지는 않으리라. 휘청거리는 미국의 폭주는 소련의 그것보다 훨씬 더 큰 혼돈과 파국의 폐허를 우리 앞에 던져줄 것이기 때문이다. 슬프지만 그것이 진실에 가깝다. 하지만 그 절망과 정직하게 대면하는 것에서 희망이 싹트지 않을까. 그 희망의 프런티어를 나는 ‘탈미의 공간’이라 부르고 싶다. 그 미답의 공간에서, 역사에도 새순이 돋아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