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촌평

 

고형진 『백석 시 바로 읽기』, 현대문학 2006

백석 시 다시 읽기

 

 

이시영 李時英

시인 roadwalker1@hanmail.net

 

 

고형진(高亨鎭)의 『백석 시 바로 읽기』는 전공자에 의해 씌어진, 아마도 지금까지 나온 백석(白石) 시에 관한 해설서 중 가장 충실한 책일 것이다. 백석 시 97편 중 “작품성이 뛰어난”(6면) 60편을 다섯 묶음으로 엮어 편편마다 뛰어난 ‘작품해설’을 가하고 있는 이 책은 까다롭기 그지없는 백석 시의 평북방언을 풀이하기 위해 김영배의 『평안방언연구』(태학사 1997)를 비롯하여 심지어는 대한안경인협회의 『한국안경사대관』(1986)에 이르기까지 무려 57권에 달하는 방대한 선행연구 및 자료들을 망라할 정도로 깊이있는 ‘분석’에 도달하려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그러나 모든 저서가 완벽할 수 없듯이 이 책 또한 백석 시의 탁월성을 연구자들은 물론 일반독자들에까지 널리 알리려는 그 선의로 말미암아 ‘과잉해석’내지 사실관계에서의 몇몇 오류들을 드러내고 있다.

모든 시 해석에서 ‘선의’가 마냥 좋은 결과만을 낳는 것은 아니다. “비연속의 텍스트인 시 또는 시집을 마치 연속적인 서사로 취급하”(최원식 「자력갱생의 시학」, 『창작과비평』 2005년 여름호)여 매 행과 행간을 산문으로 해석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어떤 해석강박증 같은 것에 매달려 있을 때 과잉해석 내지 시 읽기의 오류가 발생한다. 시란 그 창작과정에서 (무)의도적인 생략 혹은 (얌전한 독자들을 혼란에 빠뜨려) 어떤 비약 내지 작품 바깥으로의 과감한 도약을 감행하려는 시인의 창조적이고 저돌적인 무모성이 작용하기 마련이다(특히 고은 시인의 경우! 「향수」라는 최근작에서 그는 “어서 돌아가고 싶다/두 다리에서/네 다리로/두 발에서/네 발로”라고 절규하며, 「無師僧」이란 시에서는 “요컨대 시의 본체는 불효막심 불충의 대역부도일 터”라고 단언한다). 그런데 전문적인 독자에 해당하는 연구자나 비평가는 종종 이 세계를 건너뛰려는 시인의 의식을 알아채지 못하고 그야말로 음전한 독서행위를 감행하여 시 읽기의 창조성을 산문의 경지로 끌어내리고 마는 의도하지 않은 오류를 범하고 만다. 이 시를 보자.

 

호박잎에 싸오는 붕어곰은 언제나 맛있었다

 

부엌에는 빨갛게 질들은 팔(八)모알상이 그 상 우엔 새파란 싸리를 그린 눈알만한 잔(盞)이 뵈였다

 

아들아이는 범이라고 장고기를 잘 잡는 앞니가 뻐드러진 나와 동갑이었다.

 

울파주 밖에는 장꾼들을 따러와서 엄지의 젖을 빠는 망아지도 있었다.

—「주막」 전문

 

고형진은 “흑백사진처럼 아련하게 인화”(111면)된 시골주막의 정경을 어린아이의 눈으로 생생히 묘사한 이 명편(名篇)의 3연을 “여기에 뻐드렁니를 지닌 나의 촌스럽고 친근한 용모가 겹치면서”(112면)로 해석한다. 그런데 이 시에서 “앞니가 뻐드러진 나”를 글자 그대로 ‘나’의 용모로 보아서는 안되고, “아들아이는 범이라고, 장고기를 잘 잡는, 앞니가 뻐드러진, 나와 동갑이었다”로 읽어야 한다. 즉 백석은 이 긴 1행 1연의 시에서 쉼표 줄임을 통해 그의 그 늘어진 ‘겹침 수사’를 구사하여 ‘범이’라는 “나와 동갑”인 잔고기를 잘 잡는 아이 묘사를 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범이의 인상적인 특징은 바로 이 “앞니가 뻐드러진”에 집약되어 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이렇게 쉼표를 생략한 시인의 의도를 간파하는 데에서 시 읽기의 또다른 즐거움을 맛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조금만 더 유의해보면 백석의 이 ‘겹침 수사’는 그의 시 전편에서 애용되는 아주 익숙한 수사법의 하나임을 알 수 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2연을 이렇게 쉼표를 부여하여 “부엌에는, 빨갛게 질들은 팔모알상이, 그 상 우엔, 새파란 싸리를 그린, 눈알만한 잔이 뵈였다”로 읽을 때 리듬감도 살아나고 백석의 그 “눈알만한 잔”에 집중되는 겹침 수사의 맛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것이다. 이 겹침 수사의 맛이 여실하게 살아나는 싯구는 「여우난골족(族)」에 특히 많은데, 2연의 “얼굴에 별자국이 솜솜 난, 말수와 같이 눈도 껌벅거리는, 하로에 베 한 필을 짠다는, 벌 하나 건너 집엔 복숭아나무가 많은, 신리(新里) 고무, 고무의 딸 이녀(李女), 작은 이녀(李女)”(쉼표는 물론 평자가 부여한 것임)가 그 예이다. 이 싯구에서도 수사의 촛점은 물론 “신리 고무”이며 신리 고모의 온갖 특징적인 면모가 이 겹침 수사에서 약여하게 드러날 뿐 아니라 느린 7음보(4음보+3음보)라고도 할 수 있는 백석 시 특유의 운율에 실려 작품의 실감이 한층 강화되고 있다.

『백석 시 바로 읽기』에는 이밖에도 농촌생활의 세부에 대한 저자의 몰이해가 작품해석에 그대로 반영되어 ‘혼란’을 연출하는 장면이 몇군데 보이는데, “게구멍을 쑤시다 물쿤하고 배암을 잡은 눞의 피 같은 물이끼에 햇볕이 따그웠다”(「하답(夏沓)」 2연)에 대한 다음 해석이 그러하다. “논두렁에서 개구리의 뒷다리를 구워먹은 아이들은 이제 2연에서 무논 안으로 들어가 장난치며 논다. 무논 안에서 게를 잡으려고 게구멍을 쑤시는데, 게 대신에 물컹물컹한 뱀이 잡혔을 때의 감촉이 선명하게 그려진다.”(134면) 농촌에서의 생활경험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에게 이런 해석은 그야말로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데, 아무리 아이들이라 해도 소중한 벼가 자라고 있는 무논 안에 들어가 장난치며 놀 수 없을 뿐 아니라 무논 안에 게구멍은 없으며 게는 주로 논둑이나 이웃한 개울에 구멍을 파고 숨어 산다.

바로 다음 연 “돌다리에 앉어 날버들치를 먹고 몸을 말리는 아이들은 물총새가 되었다”도 “이때의 ‘돌다리’는 무논의 어느 자리에 듬성듬성 놓여 있는 징검다리일 것이다”(134~35면)라고 추정하고 있는데, 무논의 어느 자리에 징검다리는 놓여질 수 없으며 개울을 가로지르는 곳에 징검다리 내지 돌다리가 놓여지는 것이다. “날버들치를 잡아먹는 아이들의 모습이 물고기를 낚아채는 ‘물총새’에 비유”되는 “아름다운 자연 속의 풍경화”(135면)인 이 시에 대한 해석이 이렇게 오류 내지 과잉에 흐르고 있는 근본적인 이유는 저자가 시에 너무 친절하려고 하는 데서 오는 것이기도 하거니와, 무엇보다도 풍경을 그냥 시적 풍경으로 바라보지 않고 제목에 집착하여 1연, 2연, 3연을 하나의 연속된 서사로 보고 이를 ‘해설’하고야 말겠다는 과잉의욕에서 나온다고 본다.

“짝새가 발뿌리에서 닐은 논드렁에서 아이들은 개구리의 뒷다리를 구어먹었다”로 시작되는 이 3연 각 1행의 시는 그야말로 각 연이 독립된 비연속의 (연속적) 서사이지 친절하게 풀어쓴 ‘산문’이 아닌 것이다. 백석 시의 탁월성을 증명하기 위하여 이제까지의 모든 선행연구들을 집약하여 쉽게 풀어쓴 이 책의 미덕에도 불구하고 이 지나치게 친절한 해석이 혹여라도 백석 시의 살아 있음을 ‘죽이는’일에 기여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140면의 「외가집」 4연을 해설한 한 대목에선 “새벽녘엔 그릇을 닦고 아침밥을 준비하기 위해 고방에 쌓아놓았던 식기들을 전부 땅바닥에 늘어놓게 되는데”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 역시 결정적인 오류의 하나이다. 고방에 식기를 쌓아두는 것이 아니라 부엌의 ‘살강’위에 식기들을 깨끗이 씻어 엎어두었다가 식사때가 되면 그것을 내려다 쓴다. 그러므로 “새벽녘이면 고방 시렁에 채국채국 얹어둔 모랭이 목판 시루며 함지가 땅 바닥에 넘너른히”운운의 구절은 식사와는 관계없는, 밤새 무슨 일이 일어난 것만 같은 외갓집에 대한 어린아이의 무서운 상상일 뿐이다. 그리고 모랭이, 목판 시루 등속의 나무그릇은 식사 그릇이 아니다. 이 책에서 가장 정성을 들인 듯한 시어 해석에서도 몇개의 오류가 눈에 띄는데, 「개」에서의 “아래웃방성 마을 돌아다니는 사람”은 ‘낱말풀이’와는 상관없이 겨울밤 딱딱이 같은 것을 치고 다니는 마을의 야경꾼이며, 「未明界」에서의 “선장 대여가는 장꾼들”의 ‘선장’은 ‘선 장터’가 아니라 ‘이른 장’이고, “자즌닭”은 그냥 ‘새벽닭’이다.

이 책은 전문연구자에 의해 씌어진 아주 훌륭한 해설서이다. 그러므로 더욱 엄정한 비판이 가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의 해설은 좀더 자제되거나 좀더 치밀히 고증되었어야 했다. 가령 다음과 같은 시의 경우.

 

아카시아들이 언제 흰 두레방석을 깔었나

어데서 물쿤 개비린내가 온다

—「비」 전문

 

지은이는 2연의 “개비린내”를 ‘갯비린내’가 아니라 “비 맞은 개”에서 나는 “특유의 비릿한 냄새”(175면)로 보고 있는데 이는 명백한 오독이다. 시골마을의 정취 속에 “비오는 날의 황토흙 냄새와 섞여 더욱 짙어”(176면)지는 개의 비린내가 없을 순 없겠으나 이 시의 “개비린내”를 그런 식으로 해석해서는 시의 맛도 죽고 상상력도 죽는다. 이 시에서의 “개비린내”는 그야말로 ‘갯비린내’여야 하며, 그래야 시도 살고 우리의 상상력도 살고 무엇보다도 이 세계가 새롭게 살아나 이 연약한 시 한편이 김수영의 말처럼 “낙수물로 바위를 뚫을 수 있듯이” “삼팔선을 뚫는”(「시여, 침을 뱉어라」) 기적을 실현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시 한번 얘기하거니와 이 책은 백석 시에 대한 정밀한 해설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