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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무라까미 류 장편소설 『반도에서 나가라』 스튜디오본프리 2006

녀석들은 적이란 말이다!

 

 

황호덕 黃鎬德

문학평론가, 죠오사이(城西)국제대학 교수 mulzil@hotmail.com

 

 

반도에서-나가라

살과 체액이 폭발하는 장소들, 폭력과 점막의 취미공동체를 그려내던 무라까미 류(村上龍)를 떠올리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난데없이 등장한 SF영화대본 혹은 시시한 정치소설처럼 비칠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는 안과 밖이 애매모호한 물렁한 점액질 주체들을 횡단해온 탐식가였던 것이다.

한편 계몽가·경세가로서의 그의 기질이나, ‘르뽀르따주’작가적 행보를 따라온 독자들에게라면, 이 소설은 필시 무라까미 류식의 ‘일본 몰락’서사를 집대성한 경세종(警世鐘)혹은 소년소녀 취미대백과의 혈전(血戰) 버전 정도로 이해되리라. 그러나 조심할지니, 화려한 빛깔로 끈적이는 짐승들의 서사를 통해 국가론의 심급, 국가 너머의 공동체를 넘봐왔던 무라까미 류의 소설에는 늘 그 어떤 독(毒)이 있었다. ‘일본’국가의 갱신을 목적으로 삼아왔던 한 내부고발자의 비판 위에 덧씌어진 다국적적 포스트모던의 기호들, 소년소녀들을 통해 성인남자의 국가를 질타하면서도 게토화된 삶을 살고 있는 어린 그/그녀들의 모드와 에너지를 종종 빨아들여왔던 그의 무의식까지. 이 묘하게 어긋나는 정치성과 취미, 의도와 에크리뛰르(écriture)의 분열을 끝까지 밀고나간 장소에서 3200매에 이르는 『반도에서 나가라』(半島を出よ, 윤덕주 옮김)는 급작스레 출현한다. 나는 이 내부고발자의 시선이 나가는 방향들에 주목해보고 싶다.

2011년 4월 1일. 9인의 북한 특수부대원이 일본의 큐우슈우(九州)에 잠입해 단숨에 후꾸오까돔을 점령하고 스스로가 북한 김정일정권에 반대하는 반란군임을 선언한다. 경제적 파산상태의 일본은 그 군사적·정치적 취약성을 남김없이 드러내며 대혼란에 빠진다. 내각은 후꾸오까를 포함한 큐우슈우 전체를 봉쇄하고, ‘고려원정군’이라는 이름의 반란군은 새로 도착한 400여명의 부대원들과 함께 큐우슈우가 일본에서 독립하게 될 것임을 천명한다. 일주일 후면 12만의 반란군이 새로 도착해 큐우슈우 시민들과 함께 새로운 혼성국가를 구성할 것이다. 그런데 그 혼성 직전의 목소리가 문제다.

이 전쟁문학에서는 ‘아군’의 목소리, 즉 일본 국가의 목소리가 희미하다. 총 21개의 목소리—에크리뛰르가 경쟁하는 이 소설에서 점령의 의식과 무의식을 써나가는 내레이터의 3분의 1(총7장)이 북한군의 관점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작가는 예외상태에 놓인 사람들의 의식 속으로 들어가 국가가 갑작스레 증발해버린 장소의 인간군상—버림받은 시민과 이미 버림받았던 비국민, 그리고 ‘반란군’으로 하여금 일본에 대해 말하게 한다. 그런데 왜? “내부에 있으면 아무것도 모른다.”(상권 386면) 이것이 그 이유다.

“서부극은 인디안 측에서 씌어지지 않습니다. 텔레비전 영화의 전투에서 독일군 병사는 이름이 없어요. (…) 이름도 인격도 없는 독일병이 픽픽 죽어나가도 신경쓰는 사람이란 없는 거죠.”(『군조오(群像)』 2005년 5월호 저자인터뷰) 불가능한 걸 알지만, ‘공화국’병사의 입장에서 쓰지 않으면 안되었다는 것.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거나 상상해보려 하지 않는”(하권 334면)다면, 결국 적을 적으로 규정할 수조차 없으리라. 북한 특공대의 입장에서 써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어하는 작가의 의식이란 충분히 이해 가능하다. 타자를 타자로서 인정하는 것, 그리고 적을 정당한 적으로서 규정하는 것. 어쩌면 그는 ‘거기까지’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무능한 관료들과 달리 고려원정군을 적으로 선언하고 맞서 싸우는 이시하라와 19인의 문제소년 패거리들에게서 ‘적’을 규정하는 근거를 찾기란 불가능하다. “녀석들은 적이다. 이상한 일이지만, 아직 일본의 그 누구도 저 녀석들을 적이라고 선언한 적이 없지만, 여기서 내가 분명히 선언하마. 저 녀석들은 적이란 말이다.”(상권 288면)

결국 ‘논픽션’처럼 씌어진 이 SF극은 적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상한 말이지만 그것은 적이 누구인가에 관한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적을 규정하는 문제에 관한 이야기이다. 저 단언이 의미심장한 것은 거기에는 그 어떤 이유도 없다는 것이다(바로 여기서 우리는 이 소설을 ‘무장한 보통국가론’를 앙원(仰願)하는 우파적 주장과 손쉽게 겹쳐 읽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인지할 수도 있으리라). 살인, 악취미, 폭력만으로 살아온 이시하라 패의 소년들은 이미 일본사회로부터의 배제와 거기서 기인하는 욕동의 축적을 통해 어떤 마그마 상태에 도달해 있고, 오늘의 그들을 낳은 가공할 만한 ‘비행’이래 언제나 폭발을 향해 질주중이었다. 그들의 휴지기에 우연히, 마침 ‘저들’북조선 반란군이 도래했을 뿐인 것이다.

『반도에서 나가라』의 아이러니는 바로 저 ‘우연’에서 비롯한다. ‘우연’은 적과 아군, 객체와 주체, 외부와 내부의 내러티브를 공중폭파시킨다. 왜냐하면 적을 규정짓기 위해서는 이편이 존재해야 하며, 그 둘을 가르는 어떤 것, 경계가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지극히 현실적인 수사를 끌어당기는 SF는, SF로서 현실적 차원의 적과 아군, 그 경계를 넘어선다. 평론가 마쯔우라 히사끼(松浦壽輝)의 말처럼, 무라까미 류는 일본 미디어의 수상쩍은 북조선 담론에 맞선다. 그것은 그 언설의 표면을 옮겨오면서 동시에 그것들을 섞고, 그 잡다함 속에서 나름의 정보를 추출해냄으로써 가능해진다. 거기에는 극히 애매한 복수의 이념 사이에서, 말랑한 권력씨스템에 의존해 꾸려가는 오늘의 일본이 있다. 그러면서 동시에 적과 아군의 개념은 좀더(혹은 완전히) 본질적인 관계로 옮겨간다. 망가진 소년들의 ‘꼬뮌’과 ‘최적사회’의 극단으로서의 북조선이 그것이다. 여기서 그려지는 것은 지금—이곳의 일본이면서 동시에 일본의 적들이다. 이 소설 속에서 ‘단언’되는 적과 아군은 모두 일본의 완전한 타자인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반도에서 나가라』는 지금, 일본의 (우파) 정치적 언설을 ‘기묘하게’넘어선다. 아니 적어도 비껴간다.

결국 소설의 구도는 최적사회 대 꼬뮌의 싸움이지, 일본과 북한의 싸움도, 내부고발자와 환부의 격전도 아니다. 어쩌면 점령이라는 철저한 예외상태 아래 두 극단적인 공공체 모델이 격돌하는 우화로서 읽어나갈 때에야, 이 소설의 정치성과 에크리뛰르의 실험들은 허다한 해석의 독들을 넘어, 한줌의 정치성을 탈환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아무도 좋아하지 않지만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하권 350면)는 19인의 소년들이 대변하는 분절되지도 규율되지도 않는 주체들이나 퇴폐와 불안에 대해 번민하는 북조선 병사들 사이에서 도래할 새로운 정치성이란 어떤 것일까. 북한과 일본, 또 그러한 국가 밖에 존재하는 스물한명의 화자들, 뒤엉킨 몸에서 뿜어져나오는 혼돈조차 많은 경우 전쟁을 막는 묘약이 된다는 듯, 어쨌든 무라까미 류는 장황한 일본론을 통과해 일본과 북조선의 경계가 용해되는 아슬아슬한 장소에 선다.

한켠에서는 벌써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일 공동기획의 영화가 준비중이라고 한다. 어쩌면 내년 여름쯤, 어느 멀티플렉스 극장 구석에서 2시간 반 이상은 족히 될 영화와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는 가까운 미래, 아니 현재의 ‘북조선 병사’의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것에 대해서 말한다는 것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것보다 나을 게 없다. 그러나 무라까미 류가 에크리뛰르의 잡다함으로 아슬아슬하게 성취해낸 저 ‘한줌의 정치성’에 대해 근심해보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