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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김태권 만화 『십자군 이야기 1』, 길찾기 2003

전쟁의 뿌리를 드러내는 소신있는 교양

 

 

이명석 李明錫

만화평론가 manamana@korea.com

 

 

십자군이야기

2001년 9월 11일, 뉴욕의 국제무역쎈터에 비행기 두 대가 꽂혔다. 이후 눈앞에 펼쳐진 대재앙을 바라보면서 미국의 만화가들은 누구 못지않은 무기력감에 빠졌을 것이다.『슈퍼맨』 『배트맨』 『헐크』 『스파이더맨』 『엑스맨』…… 만화 속의 영웅들은 모두 어디에 가 있었나? 마블코믹스의 조 퀘싸다(Joe Quesada) 편집장은 “이런 일들이 실제로 일어나는 세상에서 색동옷을 입은 신비로운 존재들이 무슨 소용이 있나?”고 한탄했다. 출판사들은 『9·11 긴급구조』 같은 특별판 만화를 통해 대참사 속에서 인명을 구해낸 소방관과 경찰관 들이야말로 진짜 영웅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반성도 잠시.DC코믹스는 애국적인 『슈퍼맨』 포스터를 배포하고, 『캡틴 아메리카』와 『G.I. 조』가 부활하면서 만화는 다시 미국주의를 선전하는 도구로 맹위를 떨치게 되었다. 새로운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미국의 반대편에서, 적어도 그들과는 다른 방향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만화가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마법의 양탄자를 탄 알리바바가 캡틴 아메리카의 알록달록한 옷을 찢어버리도록 해야 하나? 그것도 하나의 방법일지 모른다. 세계 곳곳의 반전시위에서 부시와 블레어를 각기 원숭이와 푸들로 만들어 조롱하는 만화를 볼 때만큼 우리의 가슴이 통쾌해지는 순간도 없다. 그러나 이러한 즉각적이고 공격적인 임무만이 만화의 몫이라고 보면 오산이다. 만화가들은 지금 세계를 신음하게 하는 전쟁과 대립의 깊은 뿌리를 밝혀내는 작업을 어떤 기자나 학자 들보다 진지하게 벌이기도 한다. 미국의 젊은 만화가 조 쌔코(Joe Sacco)는 『팔레스타인』과 『고라즈드』라는 르뽀르따주 만화를 통해 세계를 멍들게 하는 가혹한 전쟁의 현장을 생생히 보여준다. 그리고 이 작품, 스스로 역사 만담꾼이라고 말하는 김태권(金兌權)의 『십자군 이야기』 역시 만화가가 전쟁의 시대에 할 수 있는 분명한 역할을 보여준다.

『십자군 이야기』는 오늘날 기독교 세계와 이슬람 세계 사이의 반목을 만들어낸 결정적 계기인 십자군 원정의 역사를 보여주는 교양만화다.1095년 교황 우르바누스 2세의 원정 계획 발표로부터 1291년 아크레가 수복됨으로써 200년간의 서방 식민통치가 종식되기까지의 과정을 3부작으로 그려나갈 계획이다. 그중 고대 로마에서부터 십자군에 이르는 ‘피로 씻는 전쟁의 역사’를 그린 프롤로그와 1부 군중 십자군을 다룬 첫번째 권이 우리 앞에 당도했다.

김태권이 멀고 먼 나라의 오랜 역사를 지금에 와서 우리 앞에 펼쳐 보이는 이유는 분명하다.‘지금 벌어지고 있으며, 결코 남의 것이 아닌 전쟁’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위함이다. 나귀로 변한 부시 대통령을 빈번히 등장시키고, 그 시대 기사의 말을 사담 후쎄인의 언행과 연결하며 십자군 전쟁이라는 그릇된 과거가 오늘에 재현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만화가는 반전(反戰)의 관점을 절대 숨기지 않고 있으며, 전쟁의 참화 속으로 사람들을 몰아넣는 악의 실체를 분명히 인지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역사와 문명을 소재로 하되 허구를 가능한 배제한 교양해설서로 그려진 만화를 만나기는 어렵지 않다. 지금도 『만화 성경』 『만화 서양철학사』 등의 책들이 서점의 학습만화 코너를 가득 채우고 있고, 이원복의 『먼나라 이웃나라』 씨리즈와 같은 베스트쎌러들이 무시 못할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일반 교양서와 마찬가지로 만화교양서 역시 작가가 지닌 특정한 사상적·정치적 태도를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캐릭터라는 주술적인 힘으로 독자를 자기편으로 만든 후, 도해(圖解)라는 쉽고도 명료한 도구로 독자를 설득하는 만화에서 이 ‘관점의 힘’이란 더욱 무시할 수 없는 것이 된다. 이원복이 『현대문명 진단』에서 ‘극우적’이라고 여겨질 정도의 시선으로 세계의 문제를 해설하는 내용에 대해 수많은 반론의 여지가 있듯이, 『십자군 이야기』 역시 다른 관점에서 보았을 때 ‘따지고 들’ 부분은 적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만화가 지닌 스스로의 힘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힘을 통해 보여주는 진실의 실체에 있지 않을까?

진실 하나, ‘팍스 로마나’(Pax Romana), 즉 ‘로마의 평화’라는 말은 절반만 사실이다.‘로마만 평화’였을 뿐이다. 진실 둘, 이슬람은 ‘한 손에는 꾸란, 다른 손에는 칼’이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꾸란에는 ‘신앙의 문제에 강요란 있을 수 없다’고 적혀 있다. 아랍 정복자들은 세금 우대를 위해 이슬람으로 개종하려는 사람들을 정부 차원에서 막기까지 했다. 진실 셋, 군중 십자군은 가는 곳마다 기독교인들을 약탈했고, 유대인 학살도 그때 시작되었다.

만화가는 ‘은자 피에르’라는 우둔한 전쟁광을 만화적 캐릭터를 등장시키고, 군중 십자군을 ‘좀비 군대’로 묘사하고, 십자군의 기사를 프로레슬러나 판타지의 캐릭터처럼 소개한다. 만화적 과장이고 부분적인 허구화다. 그러나 그것이 진실 자체를 훼손한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김태권은 많은 자료를 통해 그 주장을 뒷받침하고, 여러 해설자를 등장시켜 특정 주인공이 일방적인 주장을 펼치는 일을 방지하고 있다.

풍부한 자료를 간결한 구조로 축약하는 만화가 김태권의 내용적 성실함은 이 만화의 큰 장점이다. 그러나 그것을 만화로 표현하는 형식의 완성도에 있어서는 많은 흠들이 드러난다. 현대에 유행하는 대중만화의 캐릭터가 아니라, 중세의 벽화나 태피스트리(tapestry)에서 튀어나온 듯한 인물들로 만화를 이끌어간 점은 훌륭하다. 그러나 인물의 외곽을 싸인펜 같은 도구로 굵게 그린 부분의 엉성함이나 등장인물의 동일성이 흔들리는 묘사의 부정확은 자칫 이 만화를 ‘대학교 교지 만화’ 수준에 머무르게 할 위험성도 보여준다. 필자, 선생과 똘마니, 검은 얼굴의 익명인간, 그리고 문자로만 된 지문 등 여러 해설자들이 등장하는데 그 역할이 불분명하고 산만하게 느껴지기도 한다.2권,3권에서 형식적으로도 더욱 완성도 있는 모습을 볼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