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촌평

 

신정완 외 『우리 안의 보편성』, 한울아카데미 2006

‘오만한 자임’과 ‘겸허한 성찰’의 거리

 

 

박명규 朴明圭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parkmk@snu.ac.kr

 

 

우리안의-보편성

IMF금융위기를 거치면서 한국사회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얻게 된 개념의 하나가 ‘글로벌 스탠더드’다. 전세계적으로(좀더 엄밀하게 말한다면 선진서구사회와) 통용가능한 보편성과 투명성을 제기하는 이 개념이 강조되면서 한국사회가 그러한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는 자기비판이 확산되었고, 서구적 보편에 맞도록 제도개혁을 서둘러야 한다는 실천논리도 힘을 얻었다. 세계화의 파고가 높아지고 그에 따라 개방의 압력이 거세지면서 이러한 시각은 한층 강력한 영향력을 우리 사회에 미치고 있다.

신정완(辛貞玩) 이세영(李世永) 조희연(曺喜昖) 등이 지은 『우리 안의 보편성—학문주체화의 새로운 모색』은 ‘학문주체화’라는 화두를 앞세워 이러한 견해에 도전한다. 저자들은 기존 글로벌 스탠더드에 대한 강조는 결국 서구중심주의와 지적 대외종속을 심화시킬 따름이라고 본다. 이 책의 문제의식을 총괄했다고 보이는 서장에서 조희연은 서구 지식체계의 우월함을 인정하고 배우려는 겸허한 자세보다는 오히려 우리식 경험을 일반화하려는 ‘오만한 자임’이 더 필요하다고까지 주장한다.

한국학계의 서구중심주의나 대외종속성을 지적하는 논의들은 드물지 않다. 지금까지 한국과 관련하여 제기되었던 오리엔탈리즘이나 탈식민주의 논의에 비해 이 책이 지닌 장점은 학문주체화에 ‘관한’현학적 논의가 아닌, 탈식민적 사유를 시도했던 학문적 실천들을 구체적으로 검토한다는 것이다. 또 서구적 헤게모니에 대항하기 위해 비서구적 ‘특수’를 내세우지 않고 오히려 비서구 내에서 발견되는 ‘보편’에 주목한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우리 안의 보편성’이라는 제목에는 이런 문제의식이 잘 반영되어 있으며, 지적 헤게모니 문제를 단순한 권력현상으로 환원하지 않으면서 주체적 사유의 가능성을 탐색하려는 고심이 엿보인다.

이 책은 독일 일본 중국 남아프리카 등지의 사례를 검토한 1부와 한국에서의 ‘학문주체화 실천의 궤적’및 ‘창조적 개념개발 사례’를 다룬 2, 3부로 구성되어 있다. 본론이라고도 할 수 있는 2, 3부의 논의는 한국식 경제발전, 사회운동과 민주화, 분단과 통일문제라는 세 가지 현상을 다룬 글들로 짜여 있다. 이 세 주제는 현대한국사회를 특징짓는 역사적 실천경험이자 동시에 세계적으로도 관심이 집중되는 학술쟁점들이다. 조석곤은 한국경제성장을 서구적 이론체계와 구별하여 분석하려 했던 시도로 내재적 발전론과 박현채의 민족경제론을 꼽고 이 둘을 검토함으로써 ‘학문주체화’쟁점을 분석하고자 했다. 이병천은 ‘개발자본주의론’이라는 새로운 개념화를 통해 한국적 경험을 일반화·이론화하고자 했다. 민중개념의 계보학을 다룬 이세영의 논의는 한국적 운동주체의 형성과정을 체계화하려는 시도이고, 각종 장외 정치현상들을 새로운 차원에서 개념화하려 한 조희연의 글은 정치의 경계확장을 한국적 현상의 바탕 위에 일반화하려는 시도라 하겠다. 노동자들의 연대성을 만들어낸 문화동학을 가족주의와 연관하여 설명한 김동춘의 글도 연대성의 문화적 기반을 주체적으로 해명하려는 노력이고, 민주노동운동에서의 지식체계가 젠더 변수와 어떻게 관련되었는지를 주목한 김경일의 글도 민주화과정에서의 한국적 특성을 해명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분단현실에 대한 해명과 통일을 지향하는 논리들을 분석한 김정인의 글은 분단국가로서 한국이 겪는 특수한 상황을 이론화하려는 인문학적 시도에 촛점을 맞추고 있다.

하지만 야심찬 문제의식만큼 따져보아야 할 문제들도 적지 않아 보인다. 먼저 ‘우리 안의 보편성’이라는 명제가 생각만큼 간단하지 않다. ‘우리’가 누구인가, 국민국가 단위의 분석이 과연 ‘우리’를 대변할 수 있는가, 분단상황을 고려할 때 민족범주와 국가범주의 간격은 어떻게 극복될 수 있는가, 그 ‘우리’에서 배제된 자들의 주체성은 어떻게 확보될 수 있는가? 뿐만 아니라 ‘우리 안’의 보편성이 ‘우리만’의 보편성이 될 가능성은 없는가, 그렇게 될 때 그것이 특수성이 아니라 보편성이라고 불릴 근거가 어디에 있는가도 따져보아야 한다. 책의 전반을 관통하는 ‘우리’는 민족—민중적 범주로 간주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국민국가 범주와 어떻게 다른지가 불분명하며 ‘우리’의 다차원적 복수성·복합성을 드러내는 데에도 한계가 있어 보인다.

학문주체화 기획과 정치적 진보성의 관계에 대해서도 좀더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 책은 한국사회의 진보적 지식인이 정치적 실천과 더불어 발전시켰던 지적 탐구들을 ‘학문주체화’의 대표적 사례로 검토하고 있다. 하지만 엄밀하게 볼 때 학문주체화 전략과 정치적 진보론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이 아니다. 근대 일본의 사례가 보여주듯 학문주체화는 종종 국가권력이나 지배층에 의해서 더욱 잘 추진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박정희시대의 민족주의 담론과 ‘한국식’개발전략, 반공주의의 한국적 변형, 한국적 민주주의론 등을 학문주체화 관점에서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 궁금하다.

나아가 학문주체화 시도를 과연 그 자체로서 조건 없이 옹호할 수 있는가도 따져볼 일이다. 정치영역에서든 학문영역에서든 ‘주체화’담론은 언제나 이중적 함의를 지니는데, 일본이나 독일의 경험처럼 주체화 논의가 파시즘적 형태와 결합할 가능성은 언제나 있는 것이다. 이 책은 리스트(G.F. List)의 국민경제론의 문제의식은 적극적으로 평가하면서 근대 일본 만들기에서 나타났던 주체화 전략에 대해서는 평가를 유보하고 있다. 왕 후이(汪暉)의 주체화 전략에 대해서 역시 이론적 성취 못지않게 지적된 한계를 어떻게 받아들일지가 애매한 상태로 남아 있다. 각각의 주체화 기획들이 지닌 한계들이 ‘학문주체화’전략 자체의 한계와 맞닿는 것인지, 개별 국가사회의 환경과 결부된 것인지, 아니면 연구자 개인의 문제로 설명해도 좋을지 좀더 깊은 검토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머리말과 서장에서 필자들은 이 책을 학문주체화를 향한 ‘항해길’또는 ‘창’이라고 표현하였다. 아마도 학문주체화가 지속적으로 진행되는 과정이고 한국사회는 그 초기단계에 머물러 있다는 판단의 반영인 듯하다. 이 책은 학문주체화의 필요성과 함께 그 어려움을 잘 보여줌으로써 앞으로의 숙제를 던져놓았다. ‘우리 안의 보편성’찾기 노력이 자민족중심의 이익추구 논리나 특수성 옹호론으로 귀결되지 않고 창의적이고 주체적인 이론화, 지식창출의 계기로 작동할 수 있을 조건에 대한 탐색이 이어지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