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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평 │ 시
말·놀이·진실
엄경희 嚴景熙
문학평론가. 저서로 『빙벽의 언어』 『未堂과 木月의 시적 상상력』 『질주와 산책』 『현대시의 발견과 성찰』 『저녁과 아침 사이 詩가 있었다』 등이 있음. namwoo@hanmail.net
1. 놀이적 상상력의 주변성
모든 예술적 산물이 자발성과 무상성(無償性)이라는 놀이의 본성을 기반으로 생성된다는 원론적 사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일상의 실용적 가치로 환산할 수 없는 또다른 가치를 창안해내는 것이 예술이라는 점에서 모든 예술적 행위는 현실원칙의 억압과 존재론적 구속에 대항하는 놀이정신의 소산이다. 이같은 예술의 놀이적 본성을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시문학에서 ‘놀이’라는 말은 여전히 ‘진지하지 못함’과 연관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놀이’라는 말이 사용될 때 엉뚱한 짓, 우스꽝스러운 것, 일시적 기분전환, 가벼운 재미 등의 고정관념이 동반되는 이유는 우리의 민족적 기질이 놀이에 대해 배타적이라기보다 근대적 삶의 구조가 척박했기 때문이다. 불안하고 위태로운 일상의 구조가 치명적으로 사람들을 위협할 때 놀이에 대한 인식은 가치절하된다. 놀이는 일상의 강제성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심리적 여분을 지닐 때 가능하기 때문이다.
불안과 위기감으로 점철되었던 근대사의 파장 속에서 ‘놀이하는 인간’의 가치가 부상하기 어려웠던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시의 영역도 예외는 아니다. 우리 시의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이 되었던 것은, 막연한 얘기일지 모르지만 ‘진정성’의 유무였다고 할 수 있다. 얼마나 삶을 진정성있게 담아냈는가 하는 문제가 시의 내용과 형식을 밝히는 마지막 귀결점이되었던 것이다. 진정성 유무를 밝히는 것이 시의 가치평가에 매우 중요한 사항이라는 점을 부인하긴 어렵다. 문제는 시적 진정성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진지하게 고뇌하는 심각한 예술가의 형상만을 발견하고자 한다는 데 있다. 시의 의미나 주제를 찾는 데 치중하는 독서방식이 유독 일반화된 까닭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독서 현상학에 입각해서 말한다면 우리 시의 독자는 시의 놀이적 본성에 둔감한 편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유쾌하게 놀이하는 정신적 활동에 대한 가치폄하나 망각을 의미한다. 80년대 중반 이후 발생한 해체시가 가볍다는 질타를 받게 된 것도 이와 관련한다.
근대사의 파장이라는 거시적 관점을 벗어나 2000년대 시를 돌아보면 우리 시의 놀이정신은 여전히 결핍되거나 억압된 양상으로 드러난다. 그것은 특히 환상풍의 실험시에서 압도적으로 드러나는 ‘강박증세’와 관련된다. 강박은 자유정신이 소거된 상태를 의미한다. 구체적으로 말해, 도발적이고 기괴한 소재나 이미지를 발굴해야 한다는 강박이 젊은 시인들의 자유정신을 무의식적으로 억압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다. 대동소이한 시각적 이미지가 시 텍스트에 만연하는 현상이나 난폭하고 비속한 언어가 무분별하게 반복되는 현상은 독자성의 상실과 연관되며 이는 곧 자유정신의 부재를 뜻한다. 자유정신을 잃어버린 실험시는 이미 언어적 모험을 감행할 동력을 상실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모든 새로운 시적 형식의 탐구와 실험은, 비록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겁고 심각한 것일지라도, 놀이하는 인간의 활달한 의식 속에서 발생한다. 우리의 시사(詩史)에서 이러한 의식을 ‘말놀이’를 통해 부각시킨 예를 들어본다면, 이상의 「烏瞰圖」 연작에 나타나는 말의 현기증 놀이, 서정주의 「분지러버린 불칼」에 등장하는 흥타령 같은 신명나는 욕설, 「북녘 곰, 남녘 곰」 「내가 돌이 되면」에서 보이는 변신은유의 연쇄, 김수영의 「絶望」 「눈」 같은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재담(equivoque)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이상(李箱)의 「烏瞰圖」 연작 중 하나를 보자.
싸움하는사람은즉싸움하지아니하던사람이고또싸움하는사람은싸움하지아니하는사람이었기도하니까싸움하는사람이싸움하는구경을하고싶거든싸움하지아니하던사람이싸움하는것을구경하든지싸움하지아니하는사람이싸움하는구경을하든지싸움하지아니하던사람이나싸움하지아니하는사람이싸움하지아니하는것을구경하든지하였으면그만이다.
—이상 「詩第三號」(『이상문학전집』, 문학사상사 1991) 전문
이 시는 말의 놀이적 상상력에 집중하면서 읽을 때 시인의 의도를 선명하게 간파할 수 있다. 이 시를 처음 경험했을 때 나는 쌔뮤얼 베케트(Samuel Beckett)의 부조리극 「고도를 기다리며」의 인물을 떠올렸다. 미친 듯이 빠른 속도로 말이 안되는 말을 지껄이는 그 인물과 이 시의 화자는 닮아 있다. 말이 안되는 말들이 마치 재봉틀을 박듯이 드르륵 지나갈 때 오는 충격은 압도적이다. 싸움하는 사람과 싸움하던 사람, 싸움하지 아니하는 사람과 싸움하지 아니하던 사람의 뒤엉킴은 의미 도출을 포기하게 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오로지 ‘ㅆ’의 강한 된소리로 이루어진 효과음만이 뇌리에 꽂히게 된다. 이것이 이 시의 의미이다. 등장하는 인물들은 그가 싸움을 하든 그렇지 않든 모두가 ‘ㅆ’의 된소리 속에 있다. 완전히 불화로만 이루어진 세계를 시인은 말의 현기증 놀이를 통해 구현해내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불화의 세계에 강렬하게 저항하는 시인의 의식만이 아니라 그것을 말의 현기증으로 조감하며 유희하는 한 존재의 의식이 공존한다. 이때 유희정신은 불화의 세계에 함몰되지 않고 세계를 대상화하는 힘이 된다.
시의 놀이적 측면에 대한 사유는 독서과정의 즐거움과 연관된다. 그것은 시의 예술적 본성을 향유하는 중요한 방식 가운데 하나다. 그간 표현의 정확성이나 깊이의 성취에 대한 전폭적인 옹호는 많았지만 말의 놀이적 측면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다. 말놀이를 말장난, 신소리, 말재롱 따위로 폄하하기 전에 시를 대하는 시각과 미의식의 확대를 위해 말놀이에 담긴 활기찬 정신의 운동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넓은 의미에서 모든 시는 언어규약을 의도적으로 일탈한다는 점에서 놀이적이다. 이 글에서는 이처럼 포괄적 개념으로서의 놀이가 아니라 말 자체를 놀이의 대상으로 의식하고 의도적으로 형상화한 작품에 관심을 기울이고자 한다. 최승호의 「뿔쥐」, 박찬일의 「모자나무」, 박상순의 「내 소원은 죽은 토끼」 등은 말 자체를 놀이로서 의식함과 동시에 그것이 어떻게 진실에 도달하는가를 잘 드러내는 예라 할 수 있다.
2. 난쎈스의 존재론
처음엔
쥐뿔도 없었다
아무것도 아무개도 없었고
없다는 말이 없었다
있다, 있었다,
그런 말은 언제부터 있게 된 걸까?
뿔쥐는
내가 만든 말,
뿔쥐를 그릴 수는 있지만
뿔난 쥐는 어디에도 없다
뿔쥐는 無
누가 수염 난 뿔고양이를 두려워하랴
뿔고양이도 無
뿔고양이가 뿔쥐를 씹어 먹다 쥐뿔을 남겼다 해도
그게 과연 남은 것일까?
쥐뿔도 없고 개뿔도 없는 밤이다
흙비가 온다
황사를 비가 반죽해 두루 떨어뜨리니
내일 아침엔 눈을 씻고
세상의 얼룩덜룩한 것들을 보리라
—최승호 「뿔쥐」(『세계의 문학』 2006년 여름호) 전문
이 시는 ‘쥐뿔’이라는 단어를 ‘뿔쥐’로 뒤집어놓는 말놀이를 기저로 시의 문맥을 형성한다. 더불어 ‘뿔고양이’ ‘개뿔’같은 단어에서 보이는 ‘뿔’의 반복이 이러한 놀이적 상황을 증폭시킨다. 어원상 쥐의 불, 즉 음낭을 의미하는 쥐뿔이라는 낱말은 주로 ‘~도 없다/아니다/모른다’와 더불어 사용된다는 점에서 부정의 어구를 생성하는 말이라 할 수 있다. 최승호(崔勝鎬)는 이같은 ‘쥐뿔’의 부정성으로부터 ‘뿔쥐’를 파생시킨다. “뿔쥐는/내가 만든 말,/뿔쥐를 그릴 수는 있지만/뿔난 쥐는 어디에도 없다”에서 알 수 있듯이 ‘뿔쥐’는 ‘없음’을 뜻하는 조어다. 시인은 한 단어의 음절 앞뒤를 자리바꿈함으로써 이음(異音)으로 이루어진 비슷한 부정어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런데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사물을 명명한다는 것이 가능한가? 이치에 어긋난 난쎈스로서의 명명행위는 위기를 동반하는 모험이다. 어디에도 없는 뿔쥐를 누가 받아들이겠는가? 즉 리얼리티를 반감시킬 우려가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 시는 진지한 시적 의미를 성취하는 데 실패하지 않는다.
시인은 ‘쥐뿔’과 ‘뿔쥐’를 이용한 말놀이를 통해 ‘있음’과 ‘없음’이라는 존재론적 문제의 구체화를 시도한다. 이 시의 논리를 보면 ‘없다’는 말은 ‘있다’는 말이 생기면서 태어났다. 그런데 처음에 아무것도 아무개도 없었다면 ‘있음’은 ‘없음’의 자궁에서 나온 것이다. 이 시의 화자가 어디에도 없는 뿔쥐, 즉 무(無)에 대해 생각하는 이유는 ‘있음’의 근원이 ‘없음’이기 때문이다. ‘있음’으로서의 존재가 자기의 근원인 ‘없음’으로 환원한다는 사유가 여기에 담겨 있다. 그것은 곧 죽음이라는 존재론적 사태에 대한 의식이다. ‘뿔쥐’는 시인의 다른 시에서도 몇차례에 걸쳐 나타나는 상징물이다.
쥐뿔,
그곳이 바로 사전의 구멍이었다
나는 뿔쥐들이
그 구멍으로 쏟아져나왔다고 생각한다
(…)
움푹해진 또다른 마이너스의 내가
虛구렁 저쪽에 존재한다는 이 희미한 느낌
—최승호 「뿔쥐」(『세속도시의 즐거움』, 세계사 1991) 전문
뿔쥐가 고양이들을 놀라게 한다
밤 유리창에
희끄무레하게
헛것인 내 모습이 비친다
—최승호 「뿔쥐」(『눈사람』, 세계사 1996) 전문
최승호에게 뿔쥐는 ‘있음’만을 명명하는 “사전의 구멍”에서 생성된 말이다. 이 사전의 구멍이 곧 존재의 “虛구렁”에 해당한다. 즉 뿔쥐가 사전의 구멍에서 나왔듯이 ‘나’는 허구렁에서 생성된, 없는 존재인 것이다. ‘헛것인 나’의 존재성을 드러내기 위해 시인은 ‘없음’에 형상과 이름을 부여하는 난쎈스의 미학을 창안하고 있다.
3. 아포리아의 반격
박찬일(朴贊一) 시의 언어는 쓰고 떫다. 죽음과 불행에 강박된 그의 언어는 건조하고 냉소적이다. 잘 젖어들지 않는다. 그의 사변적 음성은 시가 정서적 언어로 이루어진다는 보편적 사실을 배반한다. 예를 들어 “살아 있다고 다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모자나무」) “살아 있다는 것은/졌다는 것이다”(「죽은 나무가 나무다」) “불행 중 불행은/불행하게 사는 것”(「 ‘불행 중 불행’의 목록을 작성해보시길」) 같은 단정적 문구로써 시에 대한 감상적 진입을 가차없이 제거한다. 이같은 언어로 이루어진 시집 『모자나무』는 무겁고 진지한 불행의 텍스트라 할 수 있다.
모자가 걸려 있다
중절모 바스크모 빵떡모 베레모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할머니 증조할머니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어머니 외삼촌
모자가 걸려 있다
사만 명의 유보트 대원 중 삼만 명이
돌아오지 못했다
삼만 개의 하얀 모자도 걸려 있다
나의 중학교 교모도 걸려 있다
죽은 사람의 모자를 거는
모자나무
죽은 사람의 눈에만 보이는
모자나무
살아 있다고 다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박찬일 「모자나무」(『모자나무』, 민음사 2006) 전문
공포감은 어디에서 오는가? 아주 고요한 흑백사진의 분위기를 띤 이 시는 공포감의 근원에 닿아 있다. 사실 이런 시와 마주치는 일이 나는 두렵다. 하드고어(hardgore) 영화에 나오는 처참하게 난자당한 시체를 보는 일보다 더 무섭다. 고요함이 두렵고 그 고요함 속에서 말해지는 진실이 두렵다. 과장이 없기 때문이다. 회의주의자의 시선이 날카롭게 포착하고 있는 한그루의 나무, 거기에 풍성한 생명의 열매 따위는 없다. 한사람의 외적 자아를 표상하는 모자. 그 모자를 열매 대신 달고 있는 나무는 죽음의 징표다. 중요한 것은 화자가 자신의 ‘중학교 교모’를 이 모자나무에서 발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살아 있으면서 동시에 자신이 벌써 죽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시인이 죽음을 물리적 신체현상으로만 보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시에는 두 가지 진실이 내포되어 있는데, 하나는 물리적 죽음의 자명성이며, 다른 하나는 살아 있다는 것의 의미를 강렬하게 회의하는 실존적 자아의 고뇌이다. 실존적 고뇌가 없다면 죽음이 아무리 자명한 것일지라도 망각 속으로 녹아 사라질 것이다. 죽음을 부추기는 세계의 폭력도 망각될 것이다. 달콤한 망각을 일시에 걷어내고 시인은 조용하게 묻는다. “당신도 여기에 모자를 걸게 되겠지만, 혹시 당신의 모자가 이미 걸려 있는 것은 아닙니까?”라고.
이같은 시 의미의 무거움에도 불구하고 박찬일의 불행의 텍스트를 주도하는 것은 진리에 도달하고자 하는 자의 고통스러운 말놀이라고 할 수 있다. 박찬일의 시는 대부분 아포리아(aporia)로 구성된다. 아포리아는 ‘막다른’혹은 ‘막힌 길’이라는 뜻을 지닌 그리스어이다. 풀어 말하면 아포리아는 해결할 수 없는 난관 혹은 모순이나 역설을 의미한다. 죽음과 불행에 의해 의식의 통로를 봉쇄당한 한 존재가 그 난관을 돌파하기 위해 역설적이게도 ‘막힌 길’즉 아포리아를 선택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에게 아포리아는 진리에 도달하기 위한 사변적 놀이라 할 수 있다. 「사과나무의 불안」은 대표적 예 가운데 하나이다.
사과나무가 불안한 것은 사과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꼭 떨어지기 때문이다. 불안에는 요행이 없다. 불안은 이루어진다. 불안이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는 불안을 꿈꿀 때이다. 불안을 꿈꾸면 불안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과나무의 사과는 떨어지지 않는다. 아직 남아 있는 사과나무의 사과알들을 보라. 불안을 꿈꾸는 사과알들이다. 떨어지지 않는 사과알들이다. 떨어지지 않으려고 불안을 꿈꾸는 사과들은 아니다. 떨어지지 않으려고 불안을 꿈꾸는 사과들은 더 빨리 떨어진다. 떨어지지 않으려는 것이지 불안을 꿈꾸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직 남아 있는 사과나무의 사과알들은 오로지 불안을 꿈꾼 사과알들이다. 떨어져주려고, 기꺼이 떨어져주려고 마음먹은 사과알들이다. 불안에 쾌히 시달리자는 사과알들이다. 불안을 꿈꾸는 사과나무의 꿈은 이루어지지 않는 꿈이다.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박찬일 「사과나무의 불안」(같은 책) 전문
이 시는 일견 동어반복처럼 보이는 문장을 통해 전혀 상반되는 의미의 모순을 만들어냄으로써 의미의 깊이를 성취해낸다. ⓐ “불안이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는 불안을 꿈꿀 때이다. 불안을 꿈꾸면 불안은 이루어지지 않는다”와 ⓑ “떨어지지 않으려고 불안을 꿈꾸는 사과들은 더 빨리 떨어진다. 떨어지지 않으려는 것이지 불안을 꿈꾸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를 비교해보면, ⓐ와 ⓑ에서 나타난 ‘꿈꾸는 행위’가 서로 상반된 의미맥락을 형성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의 꿈은 목적으로서의 의미를, ⓑ의 꿈은 수단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꿈이 목적이 될 때는 존재가 불안을 싸안는 경우이며, 꿈이 불안을 씻기 위한 수단이 될 때는 불안이 존재를 싸안는 경우가 된다. 이때 ⓐ와 ⓑ의 상반성만이 아니라 ⓐ와 ⓑ 각각의 내부에도 모순된 맥락이 있음을 보게 된다. 즉 ⓐ는 꿈꾸면 이루어지지 않는다, ⓑ는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면 떨어진다는 모순된 맥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처럼 몇겹의 모순을 통해 시인은 ‘기꺼이’불안에 시달려주는 자는 불안에 함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여기에는 ‘떨어짐’이 존재의 불가피한 한계상황이라면 그 실존적 기분인 ‘불안’을 전폭적으로 받아들이겠다는 박찬일의 인생태도가 담겨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몰락까지 동경하는 자였다. 기꺼이 몰락하려고 한 자였다. 죽음에의 두려움을 모르는 자, 피안으로부터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자, 지상에서의 충실을 추구하는 자였다”(「아포리즘·기타 20」)라는 구절도 이와 동일한 시인의 지향을 말해준다. ‘기꺼이’로 표현된 이같은 태도에 대해 시인은 “사실대로 말하면 그러면 덜 무섭기 때문”(「아포리즘·기타 5」)이라고 고백한다. 이 고백을 통해 그가 얼마나 오래 실존적 불안과 싸워왔는지를 짐작해볼 수 있다. ‘이다(있다)/아니다’를 근간으로 한 박찬일의 아포리아로서의 어법은 존재망각을 반격하는 실존인의 놀이이다. 이 놀이는 시인이 불행한 존재성을 명료하게 인식해가는 과정 혹은 방법을 드러낸다.
4. 숨겨진 도돌이표의 영원한 사랑과 고독
내 소원은 죽은 토끼, 죽은 토끼는 녹슨 총, 녹슨 총은 편지지, 편지지는 꽃무늬, 꽃무늬는 손톱, 손톱은 두번째 죽은 토끼, 두번째 죽은 토끼는 두번째 녹슨 탱크, 녹슨 탱크는 나비, 누군가의 가슴에 앉은 두 마리 나비. 나비는 가로등, 가로등은 눈 덮인 산, 산은 술잔 속에 빠진 별, 별은 주유소, 주유소는 나의 고독, 고독은 네가 준 보석, 보석은 수없이 부서지는 나, 나는 끝없이 불어나는 너, 너는 내 소원. 내 소원은 죽은 토끼.
—박상순 「내 소원은 죽은 토끼」(『신생』 2006년 여름호) 전문
은유는 시어의 유희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언어운용의 원리다. A를 B로 전이(轉移)하는 과정에는 하나의 세계(사물)가 지닌 본래의 의미를 혼란시키며 놀이하는 인간이 개입되어 있다. 그는 이것에 저것을 결합함으로써 이것만이 아니라 저것의 의미까지도 용도변경한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은유적 담론의 발생과정에는 카오스적 심연이 놓여 있다. 박상순(朴賞淳)은 이 시에서 이같은 은유의 유희성을 과감하게 증폭시킨다. A에서 B로 C로 D로 계속 이어지는 은유의 연쇄는 독자를 당혹하게 한다. 치환되는 사물과 사물의 이질성이 너무 커서 유사성의 유추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 시의 긴장과 재미는 일차적으로 여기에 있다. 이 시에 흥미를 가진 독자라면 은유의 연쇄를 좇으며 언어의 간극을 채워가는 상상의 활동을 멈출 수 없을 것이다.
일단 “죽은 토끼”는 떠나버린 연인쯤으로 해석 가능하다. 총·녹슨 탱크·편지지에서 이별을, 꽃무늬·손톱·나비에서 그녀의 관능적 아름다움을, 가로등·눈·별·보석에서는 휘발하는 빛의 차가움과 화자의 고독을 연상해볼 수 있다. 이같은 연상에 의해 각각의 은유들이 ‘사랑’과 인접한 사물로 전위된다는 점에서 이 시의 문맥은 환유적 맥락으로 나아가게 된다. 이때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이같은 은유의 연쇄를 통해 연인과 ‘나’의 이별이 “나는 끝없이 불어나는 너”로 치환됨으로써 의미의 역전을 이루어낸다는 데 있다. 그리고 그 모두는 이 시의 첫 구절인 “내 소원은 죽은 토끼”로 되돌아가 다시 시작된다. 뒷말의 꼬리를 잡고 이어지는 이 시의 구조는 도돌이표에 의한 주창(奏唱)방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이별과 사랑의 갈구가 영원히 끝나지 않을 노래처럼 계속 순환된다. 이때 화자의 고독은 슬픔으로 전달될지언정 독자의 의식을 짓누르지 않는다. 뒷말의 꼬리를 잡고 이어지는 시의 리듬이 무거움을 상쇄하기 때문이다. 이같은 도돌이표에 의한 주창방식은 「달빛」에서도 동일하게 발견된다.
내가 사랑하는 그녀는 달에서 온 스파이
나는 어둠의 강물
내가 사랑하는 그녀는 달에서 온 코끼리
나는 어둠의 도시
(…)
내가 사랑하는 그녀는 달에서 온 스파이
나는?
—박상순 「달빛」(같은 책) 부분
이 시는 ‘그녀’와 ‘나’의 의미맥락을 병렬구조로 드러냄으로써 빛(그녀)과 어둠(나)이라는 차이의 대응을 보여준다. 그러나 반복되는 병렬구조는 처음과 끝이 순환하는 전체구조, 즉 도돌이표에 의한 주창방식에 포함됨으로써 ‘나’와 ‘그녀’의 연속적 관계에 대한 영원한 갈망을 드러내는 데 기여하게 된다. 박상순은 시집 『Love Adagio』(민음사 2004)에서 반복과 병렬을 통해 독특한 언어형식과 리듬을 구사한 바 있다. 이들 시에서 보이는 도돌이표에 의한 주창방식 또한 반복과 병렬이 확대 변형된 경우로 판단된다.
5. 새로운 형식의 발굴을 꿈꾸는 자유정신
새로움은 예술의 창조성을 가늠하는 중요한 잣대이다. 한편의 시는 이전에 있었던 다른 시와 변별되는 독자성을 지닐 때 비로소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 그러나 새로움을 창조하는 일은 얼마나 어려운가. 요즘처럼 기술공학과 여타의 예술이 손쉽게 접목되곤 하는 시대에 오로지 언어만으로 새로움을 창조한다는 것은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다. 미디어를 통해 현란한 기술적 상상력과 수시로 접촉하는 현대인의 감각은 그 어느 때보다 자극적이고 신기한 것을 욕망한다. 2000년대 실험시에서 자주 발견되는 새로움에 대한 강박증과 획일적 성향은 이같은 시대적 특성과 무관하지 않다. 방법론에 대한 강박이 자유정신의 억압으로 이어진다면 진정한 의미에서 새로운 창조는 불가능할 것이다.
시 형상화의 방법은 그것이 아무리 획기적일지라도 언어라는 질료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즉 시는 언어를 통해서 독자의 감수성을 자극하고 사로잡아야 하는 것이다. 현대의 다른 문화예술이 드러내는 화려하고 현란한 면모에 짓눌리지 않고 시의 고귀함을 되살려내는 일은 결국 언어를 좀더 의식적으로 운용하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말을 놀이의 차원으로 의식한다는 것은 새로운 시 형식을 발굴하려는 적극적 노력과 긴밀한 연관을 갖는다. 단순하게 자신의 아픔과 상처, 기억을 고백하는 차원을 벗어나 의식적으로 언어와의 진지한 놀이를 감행할 때 시의 새로운 영토가 발견될 수 있는 것이다.
시의 놀이정신은 이미 만들어진 언어의 규약을 깨는 자유정신의 활발한 활동성으로부터 얻어진다. 시적 대상이나 주제에 압도되지 않은 채 그것과의 미적 거리를 형성할 수 있는 방법은 창작의 매순간에 놀이하는 정신을 깨우는 것이다. 이는 시를 읽는 독자의 의식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시를 시답게 읽는 방법 즉 미의식의 확장은 언어의 결을 구성하는 시인의 놀이정신을 간파하는 데 있다. “성스러운 놀이의 영역에서 어린이와 시인은 미개인과 함께 산다”고 하위징아(호이징가, J. Huizinga)는 말한다. 사전이라는 언어의 감옥으로부터 벗어나 무규칙의 세계에서 다시 출발하고자 하는 미개인의 놀이충동이야말로 시의 생명성을 지속시키는 가장 중요한 동력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거듭 기억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