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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평 │ 소설

 

세계의 실패를 앓는 소설의 고통

 

 

정홍수 鄭弘樹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진정성의 깊이가 찾아낸 결핍의 형식」 「불가능의 역설을 사는 소설의 운명」 등이 있음. myosu02@hanmail.net

 

 

1. ‘뚜부’의 위엄

 

평생 형형한 호랑이 눈을 부릅뜬 채 한시도 몸과 머리를 쉬지 않고 살아온 여든 어름의 늙은 아버지가 있다. 일찍 아비를 여의고 눈앞이 캄캄한 세월을 죽을 각오로 살아냈다. 사범학교를 나와 교직에 있으면서도 농사만 짓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야무지게 스무 마지기 논농사와 3천평 밭농사를 일궜다. 새벽 3시면 어김없이 깜깜한 논으로 달려갔다. 그렇게, 가혹한 운명을 무릎 꿇리며 한세상을 살아왔다. 자식이 기대에 못 미치자 선을 긋고 단호하게 눈을 거두어버리고는 그만이었다. 그리고 그이 옆에서는 지아비와 자식밖에 모르는 한없이 순종적인 어머니가 그림자처럼 평생을 함께했다. 어느날 서울에 사는 아들은 노모로부터 아버지가 자꾸 정신을 놓는 것 같아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고 왔다는 전화를 받는다. 소설 화자인 아들은 검사결과가 나오는 날을 하루 앞두고 직장생활 20년 만에 처음으로 월차를 낸 뒤 시골집으로 향한다. 정지아(鄭智我)의 단편 「봄빛」(『문예중앙』 2006년 여름호) 이야기다.

간략히 소설의 밑그림을 옮겨본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너무도 익숙한 소설 유형 아닌가. 감동의 발생 지점도 어느정도는 예상해볼 수 있다. 이런 소박한 곡조에 어떤 새로움이 담길 수 있을까. 그런데 아니다. 이 소설이 주는 투명하고 묵직한 감동은 그런 쉬운 짐작을 무색케 하면서 인간 진실의 처연한 봄빛 속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딱히 언어론적 전회(轉回)를 비롯한 다양한 담론의 영향이 아니더라도 소설에서 언어의 재현적 역할은 사회역사적 상상력의 궁핍화와 함께 본래의 중심적 지위를 잃어버리고 부분적인 소설적 기술로 그 위상이 축소된 측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다른 차원의 논의는 내려놓더라도 눈앞의 현실을 충실하게 재현해 보여주는 일이 좋은 소설의 양보할 수 없는 미덕이라는 점을 정지아의 「봄빛」은 새삼스럽게 웅변한다. 모처럼 서울에서 내려온 아들을 맞아 노모가 차려낸 저녁밥상의 풍경이 단연 그러하다. “그가 온다고 아침부터 종종걸음치며 준비했을 밥상은 ‘한가꾸’를 넣은 된장국과 취나물과 머위대와 두릅, 그리고 묵은 김장김치가 전부였다.”아들은 지난가을에 비해 눈에 띄게 줄어든 반찬 가짓수에서 불과 두 철 사이에 또다시 세월이 앗아가버린 노모의 쇠약해진 기력을 본 것이다. 그러나 이 짠한 밥상이 들려주는 정말 비감한 이야기는 늙은 아버지의 몫이다. 그리고 다시 어머니의 몫이다. 조금 길더라도 인용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대화 사이 소설 화자인 아들의 반응은 생략한다).

 

“내동 일렀는디 또 뚜부가 없그마이!”

“아이고, 점심에 뚜부를 그렇게 묵고 또 먼 뚜부를 찾소? 저녁은 그냥 잡수씨요. (…)”

“나가 원제 점심에 뚜부를 묵어!”

“환장하겄네. 노망이 들어도 단단히 들었그마이. 인자 점심에 멀 묵었능가도 모리겄소?”

“그걸 왜 몰라! 점심에 청국장 묵었제. 나가 그것도 모르깨미 이 사램이 꺼떡하먼 노망 들었다고 엄한 사램을 잡고 야단이여, 야단이!”

“청국장에 뚜부가 들었습디여? 안 들었습디여?”

“그까짓 것이 월매나 된다고!” (…)

“미치고 환장하겄네. 그 징헌 놈의 뚜부, 된장찌개에 넣고 청국장에 넣고, 동태찌개에 넣고, 끼니마동 빠진 적이 없그마는 먼 놈의 뚜부를 또 지지라요?” (…)

“아 긍게 누가 이것저것 하랬냐고! 그냥 뚜부 듬성듬성 썰어넣고 멜치나 멫마리 너먼 될 것을 그거시 멋이 어렵다고 한끼를 안해줘! 한끼를!”

 

전에 없던 아버지의 반찬 타령도 그러하지만 한마디도 지지 않고 맞서는 어머니의 변화 또한 아들에게는 충격이 아닐 수 없다. 늙는다는 것은 이런 것인가. 그런데 『미메시스』의 저자가 펼친 논의에 기댄다면 스타일 분리를 엄격히 고수하던 고전주의 문학의 세계에서는 희극 장르에나 어울릴 법한 이 범속하고 격조없는 대화의 언어가 인간 이해의 장에 던져주는, 착잡하지만 풍요로운 실감은 정말 놀랍지 않은가. 남도 억양에 실린 이 ‘뚜부’를 대체할 수 있는 다른 문학적 표현을 우리는 상상하기 어렵다. 아비는 ‘종’일 수도 있고, ‘남로당’일 수도 있고, ‘개흘레꾼’일 수도 있을 것이다. 피임약을 사러 죽어라 뛰고, 이베리아반도의 과다라마산맥을 넘어 계속 달리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아비든 생로병사의 시간을 피할 수는 없다. ‘뚜부’는 그 불가항력의 시간 앞에 도착한 모든 아비들의 그럼에도 놓을 수 없는 생의 의지이며 사위어가는 마지막 위엄일 것이다. 마침내 근대 리얼리즘이 일상의 범속한 현실을 심각하고 진지하게 다루기 시작했을 때, 현실의 묘사 혹은 재현의 중심에 섰던 소설은 그 자신이 비추어낸 역사나 인간이 생각 이상으로 초라하고 옹졸한 모습을 하고 있는 데 짐짓 놀라지는 않았을까. 그러나 장식적인 세련을 거부하고 장삼이사의 사람들이 실제로 쓰는 말로 그들의 감각적 진실을 묘사하고 드러내면서 소설은 인간의 자기이해에 새로운 국면을 열어젖혔던 것이다. 「봄꽃」의 ‘뚜부’는 그같은 근대소설의 근본적 책무를 새삼 돌아보게 하면서 현실의 충실한 재현이 단순한 모사의 기술이 아니라 인간 진실을 상상하는 절실하고 비범한 열정의 소산임을 다시 확인케 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 밥상을 둘러싼 언어들이 ‘고리대금업자 같은 세월의 수금’앞에 선 늙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강퍅한 일생을 요약하는 강렬한 문학적 위엄에 어찌 닿을 수 있었으랴. 이것은 닥치는 대로의 현실에서 수집한 소박한 언어가 아니다. 소설의 마지막, 치매선고를 받고 돌아가는 차 안에서 새벽부터의 긴 실랑이 끝에 지쳐 잠든 늙은 부모를 후면경으로 바라보는 아들의 시선과 눈물에 독자가 기꺼이 동참할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제는 그가 그들을 품어, 그들이 세월에 빚진 생명을 온전히 놓고 죽음으로 떠나는 것을 지켜보아야 하는 것이다. (…) 눈앞이 캄캄했다. 근디 이상하지야. 눈앞이 캄캄헝게 무선 것이 없드라. 아홉살의 아버지가 그랬듯 이상하게 그 역시 무섭지 않았다.”이것은 소설의 결말로는 혹 싱거운 사족은 아닐 것인가. 그러나 정지아의 명편 「행복」의 여로를 여기에 겹쳐 떠올리는 독자라면, 이 담담한 수락이 온몸으로 막아내고 있는 어떤 느꺼움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으리라.

 

 

2. 늑대의 시선

 

몽골 초원을 무대로 펼쳐지는 늑대사냥 이야기가 설화적 우의(寓意)의 자장을 견뎌내면서 21세기 지금, 이곳의 비판적 타자로서 소설적 긴장을 얻어낼 수 있을까. 전성태(全成太)의 「늑대」(『문학사상』 2006년 5월호)는 쉽지 않은 소설적 과제에 도전하고 있는 듯 보인다. 그렇긴 하나 최근 자신의 소설적 출발점이기도 한 공동체적 기억의 세계에 대한 다양한 층위의 탐문과 반성을 통해 동시대 삶의 간단치 않은 비애와 복합적 진실에 좀더 농익은 시선을 열어가고 있는 전성태인만큼, 그 도전은 그리 낯설어 보이지 않는다. 문제는 ‘남 얘기가 내 얘기가 되는 절실한’(「존재의 숲」) 차원에 도달하는 것일 텐데, 그럴 수만 있다면 헛것조차도 강력한 소설적 진실이 된다는 걸 작가 자신 화전민 숲의 ‘캄캄한 삶’을 딛고 선 ‘낡은 이야기’의 힘으로 입증해 보이지 않았던가.

「늑대」는 현실사회주의 붕괴 이후 동시대의 몽골 초원에 동서(同棲)하는 이질적인 시간의 차원으로 독자를 데려간다. ‘비동시적인 것의 동시성’이라 할 만한 이러한 양상은 가령, 지금은 관광지로 변한 게르(몽골 전통가옥) 캠프촌의 촌장으로 생계를 꾸려가는 하산 노인의 경우처럼 유목민의 전통적 일상을 잃고 자본주의의 ‘검은 혓바닥’앞에 무방비로 노출된 무력한 개인의 흔들리는 정체성 속에 뚜렷이 담겨 있다. 하산 노인의 대척점에 서 있는 듯한 늙은 한국인 사업가의 존재 역시 이 점에서 보면 흥미로운 측면을 드러낸다. 젊은날 카지노사업으로 큰돈을 벌기도 했던 그는 정작 사업의 성공 이후 한국사회가 더이상 자신의 질주하는 욕망에 길을 내주지 않자 삶의 열정을 잃어버린다. 그가 식어버린 열정을 되찾은 곳이 몽골이다. 사회주의의 몰락과 함께 망해버린 몽골의 써커스단을 인수해서 전세계를 유랑하며 새로운 활력을 찾은 그가 몽골의 초원에서 자신의 꺼지지 않는 욕정을 던지는 대상은 두 가지. 하나는 초원을 떠도는 검은 수컷 늑대. 또 하나는 곡예사 출신의 몽골 벙어리 처녀 허와. 촌장 하산 노인이 보기에 ‘성스런 하늘과 대지와 신들을 거스르는 파괴적이고 불온한 정념’의 화신이면서 동시에 그 ‘망가진 영혼’이 뿜어내는 빛으로 인해 거스를 수 없는 ‘자본의 매혹’그 자체이기도 한 이 노인 역시 끊어진 욕망의 단애들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좌초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쯤에서 보면 이 소설에서 몽골 초원이라는 공간이 한국사회의 어떤 측면을 활성화하고 극화하는 무대장치이자 거울상으로 도입되었음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방현석의 베트남, 김인숙의 중국, 김남일의 티벳, 공지영의 베를린, 정도상의 연변, 오수연의 팔레스타인이 그러한 것처럼 전성태의 몽골 또한 한국사회의 외부가 아니라 내부의 연장일 뿐이다. 지나간 시간의 오래된 입상(立像)과 아직 도착하지 않은 시간의 미망이 교차하는 그곳에서 그들은 지금—이곳의 정지되고 타락한 시간을 충격하고자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전성태의 「늑대」는 그중 조금 더 본질적이고 원형적인 좌표를 겨냥하고 있는 듯한데, 작가는 자본주의 혹은 근대적 욕망의 얼굴을 몽골 초원의 그믐달 아래로 불러오려는 야심을 숨기지 않는다. 이른바 ‘초원에 차원 하나를 더하는 존재’인 늑대의 형상이 그것이다. 검은 늑대 사냥꾼으로 나선 한국인 사업가는 말한다. “나는 늑대 앞에 숙명적인 라이벌처럼 마주서기를 원합니다. 약육강식의 자연법칙이니 죄의식이니 연민이니 하는 것들이 없는 절대공간에서 독대하기를 원합니다. 스스로 자신을 사냥하듯이 이루어졌으면 싶습니다. 어쩌면 나는 가장 사냥다운 사냥을 원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하룻밤에도 수백마리 양들의 숨통을 끊어놓는, 살아 숨쉬는 일만으로도 죄업을 늘리는 짐승. “인연의 모순이며 혼돈 그 자체”인 이 큰 입 가진 짐승으로부터 무한증식의 욕망에 스스로 전율하는 자본의 그림자를 보는 것은 그리 지나친 비약은 아닐 것이다. 개발자와 파괴자가 한몸이며 자아의 파괴조차 발전과 성장의 동력으로 삼는 파우스트적 비극과 환희의 세계가 거기에는 어려 있는 듯하다. 그런만큼, 시간이 멈춘 듯한 몽골 초원의 겨울 눈밤에 그 검은 늑대의 형상으로부터 뿜어져나오는 시선과 목소리는 설화적 우의의 힘을 빌리고 있음에도 깊은 울림을 자아낸다. “나는 한 사냥꾼 노인을 쫓고 있습니다. 그의 목덜미를 물어 숨통을 끊어놓을 생각입니다. 그가 나를 열망하듯이 나 역시 그를 열망합니다. 자작나무 아래, 나는 뜨거운 눈을 깔고 엎드렸습니다. 참으로 길고 고단한 여행이었습니다. (…) 이제 나는 어두운 공간을 자유로이 여행할 생각입니다. 난롯가에서 잠든 인간들의 영혼이 느껴집니다. 나도 가련하지만 저들도 가련합니다. 저들도 나처럼 늘 배고픈 겁니다. 우리는 그렇게 태어난 존재들입니다. 이제 나는 내 관자놀이를 저들의 총구에 내놓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고백체와 다중시점의 묘미를 최대한 살리고 있는 이 소설에서 이렇게밖에 드러날 수 없는 늑대의 시선은 혹 우리의 응시가 결코 가닿을 수 없는 세계의 얼룩은 아닌가. 서늘하다.

그런데 검은 늑대와 늙은 사냥꾼 사이의 이 필사적인 갈망과 욕망의 대결에 비한다면, 뒤늦게 자신의 성 정체성에 눈뜬 허와와 촌장의 딸 치무게가 눈 위를 뒹굴며 나누는 격정의 사랑은 조금 소박하게 느껴질 정도다. 그러나 작가는 알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검은 늑대의 저 시선과 음성은 우리가 바라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불가능한 실재라는 것을. 그것은 자본의 질주하는 무한욕망 같지만 그렇게 붙잡는 순간, 검은 늑대는 초원의 다른 차원으로 달아난다는 것을. 하고 보면 절대공간에서 독대할 수 있는 검은 늑대 따위란 없지 않겠는가. 질투에 불타는 늙은 사냥꾼의 눈먼 총질만이 초원의 그믐밤을 울리고 젊은 욕망들의 오열과 죽음만이 다시 초원의 시간을 채워갈 뿐. 얼핏 설화의 공간으로 퇴행한 듯한 전성태의 「늑대」에는 포착되지 않고 형용되지 않는 세계의 실재와 싸우는 처절함, 캄캄한 삶을 딛고 서려는 또다른 절실함이 있다. 몽골 초원을 질주하는 ‘미친 개’검은 늑대의 형상이 보이지 않는 세계를 계시하는 벤야민적 알레고리의 세계로 열리고 있다면 아마도 그 때문일 것이다.

 

 

3. 사육장의 악몽

 

편혜영(片惠英)의 「사육장 쪽으로」(『창작과비평』 2006년 여름호)에 나오는 도시 근교의 전원마을은 온통 개 짖는 소리로 둘러싸여 있다. 소설이 진행되면서 마침내 저편 도시의 어둠속으로도 서서히 스며들게 될 그 짐승의 소리에는 겨울밤 몽골 초원을 달리는 「늑대」의 ‘미친 개’가 뿜어내는 모종의 성스러운 광휘 따위는 아예 없다. 전성태가 상상해낸 검은 늑대의 이미지가 공포가 뒤섞인 숭고의 느낌을 불러일으킨다면, 「사육장 쪽으로」의 개들이 낮게 혹은 광포하게 내지르는 소리는 더럽고 이물스러운 불길함 그 자체다. 모더니티의 악몽을 포획하는 편혜영의 가차없고 비정한 알레고리는 전성태의 「늑대」가 암암리에 전제하고 있는 세계의 치유 가능성을 배제한 자리에서 시작한다. 종말론적 상상의 세계가 지금—이곳에 이미 도착해 있음을 극단적인 이미지에 뒤덮인 괴담과 악몽의 서사로 보고하는 『아오이가든』(문학과지성사 2005)을 읽은 독자라면 낯설지 않은 이야기다. 말할 것도 없이 거기에는 인간 주체의 모든 가능성이 봉쇄되어 있다. 아니, 이성의 담지자로서 인간 주체라는 것은 애당초 실패한 폭력적 기획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인간—동물은 악취를 풍기며 썩어가는 사지 절단된 시체의 시선을 통해서만 겨우 세계에 말을 건다. 자칫 앙상한 관념극이나 엽기적인 이미지의 전시에 그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러나 가령 편혜영의 뛰어난 소설 가운데 하나인 「시체들」이 그런 것처럼, 이 극단적이고 고압적인 참혹서사가 수려하고 밀도높은 언어의 힘으로 돌파해내는 미학적 차원이 문명비판이나 전복적 상상력의 끌리셰를 이겨낸 지점에서 인간현실을 새로이 발견하고 상상하는 소설의 낯선 영토를 겨냥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여기서 다소 과장된 논법에 기대어 세계의 실패와 결여를 편혜영 소설이 그 자체 자신의 증상으로 앓고 있다는 이야기로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전통적인 소설독법으로 보아도 그 미학적 충실성이 관념적 포즈 이상임을 감득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긴 해도 시체들도 자주 보다 보면 살아 있는 인간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은 편혜영 소설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바 아닌가. 이 충격효과의 체감(遞減)을 편혜영 소설은 어떻게 이겨낼 것인가. 그러니까 『아오이가든』 이후.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이런 난경이 비단 편혜영만의 것이겠는가. 다시 ‘습지’로 돌아가고(「밤의 공사」), 동물원을 탈출한 코끼리를 쫓아가볼밖에(「퍼레이드」). 문제는 반복이되, 차이를 만들어내는 반복이 아니겠는가. 이번에 작가는 ‘사육장 쪽’에서 무언가를 보거나 들은 모양이다.

그렇다면 ‘사육장 쪽’에는 무엇이 있는가. 편혜영의 독자라면 쉽게 짐작하겠지만 주인공 가족이 살고 있는 전원주택 단지 인근의 개 사육장은 현실의 공간이라기보다는 카프카적 공간이다. 하루종일 수백마리는 될 법한 개들의 참을 수 없는 울부짖음이 전원마을 사람들을 괴롭히고, 사육장을 둘러싼 많은 소문들이 떠돌지만 정작 거기에 가보았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들리는 소리만으로는 사육장이 먼 곳에 있는 듯도 하고 바로 지척인 것도 같다. 방향을 어림하기도 쉽지 않다. 그곳은 조만간 카프카의 성(城)처럼 불가능한 도달점으로 드러나게 될 것이다. 파산한 주인공 가족이 언제 도착할지 모르는 집행인을 불안 속에 기다리고 있는 상황에서 다시 비슷한 유비를 이끌어내는 것도 가능하다. 주말 저녁이면 비슷한 파라솔 아래에서 비슷한 부위의 고기를 구워먹으며 비슷한 몸짓으로 상추쌈을 입에 넣는 모습처럼 전원주택 단지의 익명성이나 규격화된 일상이 도시의 그것들을 그대로 재생산하고 있는 모습도 낯익은 풍경이라 할 만하다. 물론 휴일날 마을 신작로를 따라 올라오는 트럭 행렬을 향해 파산한 주인공 가족뿐만 아니라 마을의 다른 가족들도 마찬가지로 일제히 불안한 눈길을 던지는 대목이 암시하고 있는 것처럼 그 풍경들은 편혜영 특유의 지극히 암담한 디스토피아적 세계에 적절히 봉사한다. 그런데 개들이 아이를 물어뜯는 장면처럼 잔혹 묘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전체적으로 예의 별다른 충격적인 이미지의 제시 없이 진행되던 소설이 서서히 출구 없는 지금 이 세계의 악몽으로 얼굴을 바꾸어가는 과정은 놀랍도록 섬뜩하다.

그 과정의 중심에 있는 것은 물론 ‘사육장’이며 그곳에서 들려오는 개 짖는 소리다. 소설의 전반부에서 미심쩍긴 해도 어느정도 리얼리티에 견인되고 있던 사육장과 개 짖는 소리는 전원주택 단지의 휴일을 찢고 들어온 개들의 느닷없는 침입으로부터 돌연 환각의 층위로 이동한다. 처참하게 물어뜯긴 아이와 넋나간 가족을 태우고 주인공 남자는 개 짖는 소리를 좇아 야산 너머 사육장 쪽에 있다는 병원을 향해 차를 달리지만, 야산 너머에는 그가 살고 있는 마을과 똑같은 주택단지가 있을 뿐이다. 사육장은 어디에 있는가. 사방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도무지 방향을 종잡을 수 없게 한다. 엉겁결에 들어선 고속도로에서도 사정은 전혀 나아지지 않는다. 앞서가는 트럭의 짐칸에서는 철장 속에 갇힌 개들이 가족의 차를 내려다보며 짖어대고 톨게이트 너머 도시는 시커먼 어둠속에 잠겨 있다. 트럭이 사라진 뒤에도 여전히 개 짖는 소리는 그를 인도하고 있다. 사정은 분명하다. 사육장은 그가 사는 마을이고 도시이며 세계 전체다. 혹은 라깡식 어법으로 한다면 세계의 실패를 증거하는 외상적 지점 그 자체다. 개 짖는 소리는 담지자 없는 목소리로서 그 외상적 지점의 이물스런 공포를 드러낸다. 따라서 사육장에 닿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철장 속의 개들이, 혹은 그를 포함한 주택단지의 모든 사람들이 사육장을 벗어날 수 없는 것도 같은 이치다. 사육장 바깥은 없는 것이다. 이렇게 편혜영은 다시 한번 출구 없는 세계의 참혹한 악몽을 완성한다. 그런데 여기서 ‘악몽’은 단지 비유적인 어사에만 그치는 것은 아니다. 신작로를 따라 올라오는 트럭의 행렬이 보이기 시작하는 지점부터 아이가 개들에게 물어뜯기면서 남자의 가족이 병원을 찾아 헤매는 소설의 마지막 지점까지는 정확히 주인공 남자가 꾸는 문자 그대로의 ‘악몽’이자 불안한 의식(무의식)에 틈입한 환상극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소설 전체를 악몽이자 환상극으로 읽는 독법도 가능하겠지만, 그것은 현실의 한가운데 이음매 없이 들어선 악몽의 배치가 주는 미학적 전율을 지레 차단해버리는 일이기 쉽다. 그리고 이 태연한 악몽의 외삽이 ‘사육장’의 리얼리티와 개 짖는 소리로 환유되는 이물스런 공포를 동시에 상승시키는 지점에 이번 편혜영 소설의 미학적 성취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긴 해도 이 미학적 성취가 편혜영 소설이 안고 있는 모종의 과제까지 해결하고 있는 것은 아닌 듯하다. 간단히 말해, 시체의 이야기든 인간—동물의 잔혹서사든 현대도시의 악몽이든 편혜영 소설은 세계의 실패와 불구에 너무 일찍 도달한 것은 아닌가. 그 실패와 불구가 움직이기 힘든 현실이고 그것의 냉혹한 드러냄이 편혜영 소설의 야심찬 미학적 기획이라 하더라도, 소설은 동시에 그 실패와 불구조차도 현실을 가리는 이데올로기는 아닌지 의심하는 자리에서 씌어져야 한다. 정말 모르는 일 아닌가. 세계는 살 만한 곳인지. ‘사육장 쪽으로’가보아야 할 이유는 여기에도 있다.

 

 

4. 물 한모금의 기갈

 

이혜경(李惠敬)의 소설집 『틈새』(창비 2006)에는 뜻밖에 화해의 공간이 잘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소설들은 사이를 짓고 경계를 긋고 균열을 응시한다. 조만간 단단한 지반을 무너뜨릴 미진의 진동에 몸을 맡기고 쩍 벌어진 크레바스의 심연 앞에 자신을 세운다. 피아간엔 건널 수 없는 강이 있고, 사람들은 문밖에 있거나 섬에 유폐되어 있다. 나쁜 기억은 아무리 눌러도 틈을 비집고 나온다. 삶의 거짓 평온을 증거하는 바퀴벌레와 망태할아버지는 사라지지 않는다. 물 한모금은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다. 여기에 인물들은“뾰족하게 튀어나오려는 말을 혀끝을 동그랗게 말고 가두”거나“자근자근 씹어 한숨을 내쉬며”상황을 조용히 견디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혜경 소설의 고밀도 문장이 주는 아득한 진동에 귀기울이고 있다보면 바로 이 좁혀지지 않는 간극이 피아간의 온당한 좌표라는 생각을 어쩔 수 없다. ‘타자’는 겨우 이렇게밖에 만날 수 없는 것 아닌가. 해소될 수 없는 차이 그 자체로, 해명되지 않는 불쾌와 불편과 함께 봉합을 거부하는 자상의 흔적처럼 나를 괴롭히는 게 아니라면 그게 무슨 타자일 것인가. 아니 어쩌면 ‘나’라는 완강한 의식조차, 불편하기 그지없는 타자의 예기치 못한 침입으로부터 비로소 생성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바로 그렇기 때문에 모두들 『틈새』의 인물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이 괴롭고 불편한 타자로부터 도망쳐 핏줄이나 가족, 자기들만의 패거리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리라. 타자를 지우고 밀어내면서. 해서, 다시 울타리는 높아지고 문앞엔 덩치 큰 검정개가 미동도 하지 않고 앞을 노려보고 있다. 그 개의 맹목적 충직함은 가령 「그림자」에 다음과 같이 잘 요약되어 있다. “우리에게는 얼마든지 너그럽지만 그 테두리를 넘어선 대상에겐 언제든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고 살점이 떨어질 때까지 물어뜯을 수 있는 충직함.”혹은 어린 시절의 열등감을 적의로 바꾼 「틈새」의 한 인물이 친구의 전락을 염려하는 척 이기죽거리는 모습에서도 송곳니는 어김없다. “고기 기름에 번질거리는 인호의 두툼한 입술을 보며, 그는 사냥한 동물의 뱃구레에 이를 박고 내장을 뽑아내는 맹수를 떠올렸다.”피아간에 지켜야 할 마땅한 거리나 경계를 무시로 침범하고 허물어뜨리는 뒤틀린 선의나 패거리 내부의 값싼 우정의 폭력도 타자의 공간을 지우기는 마찬가지다. “기억나니? 우리가 H에게 선물한 보랏빛 씨스루 블라우스. 그 옷을 H가 한번이라도 입었을까. H가 자기의 연애를 알리고 싶어했을까. (…) H가 말해줄 때까지 기다릴 순 없었던 걸까.”(「문밖에서」) 이곳에 타자를 견디고 고독과 윤리의 짐을 감당하며 살아가는 참된 의미의 개인은 없다. 그러니 우리는 부모의 갑작스런 죽음 이후 집안의 가장이 된 작은아버지의 탐욕과 표변으로 참을 수 없는 치욕을 겪어야 했던 「섬」의 여성화자가“무슨 두려움이 그렇게 사람을 벌레처럼 밀쳐내게 했는지 그걸 알아내야 다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며“고향역에 서서 눈물을 훔치던 그 시절 이후로, 나는 누구도 마음에 품지 않았다. 삶이 일으키는 멀미에 마냥 흔들렸을 뿐이다”라고 단호하게 말할 때, 그녀의 유폐와 고독이 쉽게 끝나지 않으리라는 걸 안타까움 속에 수긍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물 한모금의“목줄띠 타는 갈증을 제 침샘에서 짜낸 침으로 달래며”소쩍새나 도마뱀 또께의 소리가 가져다줄 막연한 행운을 기다려야 한다면 말이다.

그런데 이혜경은 바로 이 지점에서 물 한모금의 기갈을 자신의 소설 깊숙이 지워지지 않는 흔적으로 새겨넣는다. 아니, 소설들은 기갈 그 자체가 된다. 한국소설이 도달한 언어의 한 정점에서 『틈새』의 소설들은 그 더없이 상세하고 생생한 목마름으로 피아간의 윤리와 사랑이 아직 이곳에는 도착하지 않았음을 보고한다. 동남아시아의 섬나라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 아밀이 일하는 공장에는 흉관더미가 쌓여 있다. “가난하고 척박한 땅에 물을 이끌어다줄 수도 있는 관이었다. 그는 흉관 안으로 들어가 몸을 오그리고 누웠다.”(「물 한모금」) 물 한모금은 어디에 있는가. 「틈새」의 ‘날아오르는 새’와 ‘언 땅을 뚫고 나오는 새순’의 틈새기는 모종의 희망의 암시인가. 더 깊은 심연인가. 아프다.